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북원로 110-1 (영동리) 무릉산(해발 568m) 중턱에 위치. 왕이 직접 세워준 신라고찰 무릉산 장춘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
815년(신라 헌덕왕 7년)에 무염국사가 신라를 침략한 왜적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자, 왕이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세운 절이라고 전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문헌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장춘사는 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좁은 길을 1.5㎞정도 오르면 나타나는 아늑한 절집이다.
장춘사 일주문은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색다름을 준다. "武陵山長春寺(무릉산 장춘사)"란 현판이 걸린 작은 일주문은 낮고 비좁아서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낮고 비좁다. 이 문을 들어서면서 모든 중생들이 본인도 모르게 하심하고 자신을 낮출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하게끔 하였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경내가 시작되고 요사채와 대웅전 앞마당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8호 장춘사 5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무릉산 장춘사의 일주문과 금강문을 겸하고 있는 양쪽 판문에는 사악한 무리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금강역사가 그려져 있고, 바닥에는 7개의 활짝 핀 연꽃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대웅전 앞 계단까지 새겨져 있다. 고대 중인도 카필라국 정반왕과 마야 부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고타마 싯다르타이며 나중에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된 석가모니이다.
마야 부인이 만삭이 되어 해산할 때가 되자 그곳 풍습에 따라 친정으로 향하던 도중에 룸비니동산 무우수나무 아래에 서서 나뭇가지를 손으로 잡는 순간에 오른쪽 옆구리로 부터 아기가 태어났다. 갓 태어난 아기는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사방을 둘러보며 "天上天下 唯我獨尊(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 오직 진실한 내가 가장 존귀하다)"이라고 외쳤다. 4월 8일 첫 새벽에 여느 아기의 출생과 다르게 태어났던 아기 태자의 첫 일곱 걸음을 연꽃으로 승화시켜 대웅전으로 가는 길에 새겨 놓았지 않을까 여겨진다.
일주문에 걸려 있는 "武陵山長春寺" 편액이다. 편액의 관지(款識)에 "癸亥三月 童佛軒人 普行衲子(계해3월 동불헌인 보행납자)"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편액을 쓴 시기는 1923년(계해년) 3월인 듯 하고, 법명이 보현인 승려가 남긴 필적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8호 장춘사 오층석탑은 대웅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원래는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었으나 현재는 4층까지만 남아 있다. 탑신의 몸돌은 이 탑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으로, 평면이 모두 사다리꼴이 되도록 윗면의 폭을 좁혔다. 이는 층수가 올라감에 따른 시각적 안정감을 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1, 2층은 3단, 그 이상은 모두 2단을 두었고,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보다는 높고 날렵한 느낌을 주고 있다. 각 부분의 양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경남 문화재자료 제16호 장춘사 대웅전은 1979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내부 불단에는 조선 말기에 조성된 석조석가삼존불을 봉안하였는데 주존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고 좌우협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다.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삼존상(주존불은 석가모니불, 좌우협시는 문수와 보현보살) ,불단 좌측의 지장보살상과 지장탱, 그리고 그 옆으로는 독성탱이 봉안,불단 우측에 봉안된 칠성탱과 신중탱,좌측에 위치한 아주 작은 용왕각,용왕탱
무설전 - 요사로 사용되는 무설전(無說殿)은 정면 6칸 ·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0년대에 지었으며 처마 아래에 좌로부터 武陵山(무릉산), 武陵山桃源四時長春(무릉도원사시장춘), 無說殿(무설전), 微笑室(미소실)이라는 편액들이 함께 걸려 있다. 불교에서 "무설(無說)이란 관세음보살을 이르는 표현이다. 그래서 관음전을 무설전으로도 부른다. 관세음보살은 말씀함이 없이 설(說)하고, 남순동자는 들음이 없이 들었다는 경전에서 유래한다.
무설전(無說殿)에 걸려 있는석당(石堂)이 쓴 "武陵山桃源四時長春(무릉도원사시장춘)" 현판 . "武陵山(무릉산)" 현판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무릉산 지명은 천지개벽 때 물레만큼 남아 '물레산'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무릉산'으로 고쳐 불렀다고 하는데, 무릉산은 산 아래에 위치한 칠서면 무릉리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릉리' 지명은 주세붕이 이곳 마을 사람들이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의 마을임을 나타내기 위해 중국고사 무릉도원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무릉산은 그 마을을 감싸는 산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무설전 건물에 걸려 있는 또 다른 현판으로, '작은 미소가 있는 방'이란 뜻을 가진 "微笑室(미소실) 현판이다. 관지(款識)를 보면, "應化世尊二千九百四十年庚辰四月日(응화세존2940년경진사월일)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1913년(경진년) 4월에 쓴 현판임을 알 수 있다.
무설전 우측면에는 "六和堂(육화당)"이란 또 다른 현판이 걸려 있다.
한국에서 이름난 물 100곳 중 하나로 선정된 '약수'가 대웅전 우측 계곡에 있었지만, 지금은 용왕각 안을 지나서 무설전 앞마당의 돌확으로 뽑아 놓았다. 이 약수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 무염국사를 모시고 수행하던 20세의 덕원 스님이 불치의 등창과 위염으로 사경을 헤메고 있었다. 이를 본 무염국사가 병의 치료를 위해 기도하던 중 새 한마리가 유난히 지저귀는 곳이 있어 가보니, 땅에 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신기하게 여긴 무염국사가 그곳을 지팡이로 찔러보니 물이 솟아났는데, 그 물을 덕원 스님에게 먹였더니 병이 깨끗이 완치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그 효험을 좇아 많은 사람들이 이 약수를 찾고 있다.
조사전 정면 3칸 · 측면 2칸 규모의 조사전은 2000년에 복원한 것이다. 내부에는 창건자로 알려진 무염스님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다.
약사전 정면과 측면이 각 1칸 작은규모, 신라말`고려초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7호 장춘사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장춘사석조여래좌상(경남 유형문화재 제7호)은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는데, 무심코 보면 금동불상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1978년 왼쪽 어깨부분에 금이 나 있어 개금을 하게 되면서 불상과 광배의 조각수법을 전혀 알 길이 없다. 이 불상은 왼손에 약 항아리를 들고 오른손은 깨달음을 이루는 순간의 항마촉지인 수인을 취하고 있다.머리칼은 작은 소라 모양이고, 머리 위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뚜렷하다.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타원형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선명하여 박력있는 모습이다. 옷은 왼쪽 어깨와 팔을 감싸 흐르고 있는데,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처리되어 양감이 충분히 나타나지 않는다. 손, 무릎 등의 표현도 투박하여 양감이 떨어지는 모습이다.물방울 모양의 광배(光背)는 원형의 머리광배과 타원형의 몸광배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머리광배에는 도식화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가장자리는 불꽃무늬로 둘러싸여 있다.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보다 진전된 새로운 수법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 내지는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문화재청)
산신각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한 은 1930년대에 지어졌다고 한다. 산신각 내부에는 호랑이와 동자가 함께 그려진 산신탱이 모셔져 있다.
무염선사와 구정(九鼎)스님 이야기
‘敎(교)는 언어에 의한 한계적 가르침이라 하여 有舌土(유설토)라 하고 禪(선)은 無限(무한)한 眞如(진여)의 세계란 의미에서 無舌土(무설토)’라 하는 이론으로 禪風(선풍)을 일으킨 분이 무염선사이다. 신라 말 홀어머니를 모시고 비단 장사를 하던 한 청년이 강릉을 가기 위해 대관령을 넘어가다 한 스님을 만났다. 바로 무염선사이다. 그 스님은 풀 속에서 한참 동안이나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청년은 그 모습이 이상해서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이 곳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중생들에게 공양을 들이고 있지” 청년이 무슨 말인지 몰라 의아해 하자 스님은 다시 말했다. “ 옷 속의 이와 벼룩에게 피를 먹이고 있다네” 한갓 미물에 불과한 중생들을 보살피는 이러한 스님의 행동에 감동받은 청년은 노승을 따라 동해 관음암에 도착했다. 청년은 자신도 수행자가 되겠다고 하자 스님은 시키는대로 하면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다음 날 노스님께서는 새로 들어온 행자에게 忍辱(인욕)과 하심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방편을 보인다.
추운 겨울날이다. 노스님께서는 청년에게 말했다. “道(도) 공부도 밥을 먹어 가면서 해야 된다. 밥을 지어야겠는데 솥이 잘못 걸렸다 저 솥이나 우선 잘 걸어 보거라”청년은 하루 종일 걸려서 솥을 잘 걸었다. 무염선사는 솥 걸어놓은 것을 보더니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네 이놈 이 것을 솥이라고 걸었느냐 다시 똑 바로 걸어라” 다음 날 청년은 날이 새자 말자 솥을 다시 걸기 시작했다. 땀을 흘려 가면서 솥을 다시 걸었으나 노스님은 노발대발 하면서 꾸중만 하신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정성껏 걸었으나 야단만 맞았다. 아홉 번째 솥을 걸었을 때 겨우 꾸중을 면하게 되었다. 그 때 큰스님께서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흠 네 놈은 좀 쓸 만하구나”그리하여 九鼎(구정)이라는 法名(법명)을 내려 제자로 받이들인다. 무염선사는 통일신라 말기,나라에서 國師(국사)로 인정되어 많은 사찰을 짓는데 그 역할을 한다. 충남 금산에 있는 신안사, 창원의 성주사 함안의 장춘사가 그가 불사하여 세운 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