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2473
7월31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연중 제17주간 금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DDBnaSDJT4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꿈꾸던 왕의 장교에서 성모님의 기사(騎士)로 다시 태어난 이냐시오 로욜라!>
이냐시오 성인의 생애는 풍파 많고 우여곡절 투성이인 우리네 삶에 큰 위안과 위로를 건네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걸어갔던 그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기사(騎士)로서의 큰 성공을 꿈꾸었습니다.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왕에 대한 대단한 충성심을 드러내며 목숨까지 걸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한 하느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1521년 침략해온 프랑스군과 맞서 싸우던 그는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날아온 포탄에 맞아 한쪽 다리는 부러졌고, 다른 쪽 다리마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던지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병자성사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이냐시오는 그 시점에서 자신의 인생 여정 안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 하나를 마련합니다.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그는 회복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열전’이란 영성서적을 손에 듭니다.
처음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읽기 시작했던 그 책들이 그를 천천히 주님께로 안내했습니다. 그는 조금씩 세상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더 가치 있는 일, 더 의미 있는 일, 더 영양가 있는 인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세속적인 성공하기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에너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충직한 기사를 꿈꾸었던 그는 이제 하느님의 충성스런 군사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투병 중이던 이냐시오가 우연히 손에 쥔 영성서적에 자기도 모르게 심취해가던 어느 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계신 성모님의 환시(幻視)를 목격하게 됩니다. 이 환시를 통해 그는 크나큰 마음의 위안을 얻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지난 경솔했던 삶에 대한 강한 혐오감에 몸을 떨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결정적인 회개의 은총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이후 그는 삶을 마치는 날까지 다시는 죄에 빠져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의 길에 들어선 이냐시오는 본격적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묵상을 거듭했습니다. 중요하다고 여긴 내용들은 모두 자신의 노트에 기록했습니다.
새 삶을 향한 각오라도 하는 듯 경건한 마음으로 한자 한자 정성껏 적어나갔는데, 그 분량이 300여 페이지에 달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가 적은 내용 중에 예수님에 관한 말씀은 빨간 색 펜으로, 성모님에 관한 말씀은 파란색 펜으로 적었습니다.
간병인의 부축을 받지 않고 홀로 일어설 수 있게 된 그는 로욜라 성내에 있는 성모님 경당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1522년 3월 몸을 추스른 이냐시오는 고통의 성모님 상본과 성모소일과 기도서를 들고 로욜라 성을 떠납니다. 성지 순례와 동시에 새 인생을 길을 출발한 것입니다.
이냐시오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당시 중요한 성지 순례 장소 중에 하나였던 몬세라트의 베네딕토 수도원 성모님 성전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밤을 꼬박 지새우며 자신을 회개의 삶으로 이끌어준 성모님께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또한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새로운 인생 여정에도 늘 동반해주시기를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화려한 갑옷과 기사의 상징인 칼을 성모상 앞에 봉헌하였습니다.
그가 칼 대신 손에 쥔 것은 순례자임을 상징하는 허름한 지팡이였습니다. 자신이 걸치고 있던 화려한 옷들 역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벗어준 그는 거칠고 투박한 순례자의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꿈꾸던 왕의 장교에서 성모님의 기사(騎士)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언제부터 아버지는 자녀에게 망령이 되는가?>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CPzPR0gpWj8
-------------------------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을 여전히 요셉의 아들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지금 시대에도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왜 이런 오류에 빠지는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햄릿’의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tvn의 ‘책 읽어드립니다’에서 참조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인물 중 누가 나자렛 사람들과 비슷한지 맞추어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12세기 덴마크 왕국 엘시노어 성에 자정이면 나타나는 죽은 왕의 혼령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유령을 본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는 왕자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독일 유학중이었던 햄릿은 아버지의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정까지 기다렸다가 아버지를 만납니다. 유령이 된 아버지는 자신이 뱀에 물려 사고사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당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죄 중에 죽어서 회개할 기회가 없었기에 천국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햄릿이 왕이 되어야 하지만 현재는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 클로디어스가 자신 어머니와 결혼하여 왕이 되어 있었습니다. 범인은 삼촌일 것임이 틀림없었습니다.
햄릿은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미친 척을 하기 시작합니다. 햄릿은 나라의 광대들을 모으고 ‘쥐덫’이라는 연극을 기획합니다. 왕이 어떻게 살해되는가를 현재의 왕 앞에서 보여주며 현 왕의 표정을 살피려 한 것입니다. 왕은 연극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기도를 합니다. 햄릿은 그때 삼촌을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나, 아버지는 지옥에 갔는데 삼촌이 회개하여 천국 가면 안 된다고 여겨 잠시 복수를 미룹니다.
햄릿은 자신도 좋아하고 자신을 좋아하는 오필리아라는 여인에게 “우리는 모두 저주받은 사람들이오. 수녀원으로 들어가시오!”라고 모질게 말합니다. 화가 난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는 이를 따지기 위해 왔다가 햄릿이 어머니와 하는 이야기를 커튼 속에 숨어 듣게 되었습니다. 햄릿은 어떻게 아버지를 죽인 숙부와 결혼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커튼에서 부스럭하는 소리를 듣고는 칼로 찔러버립니다. 오필리아의 아버지는 그렇게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오필리아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플로니어스의 아들이자 오필리아의 오빠인 레어티스는 왕 클로디어스와 짜고 햄릿을 죽여 복수하려 합니다. 검술 시합에서 칼에 독을 발라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검술 시합에서 햄릿이 레어티스를 압도합니다. 이에 불안은 느낀 왕은 포도주에 독을 타서 햄릿에게 마시라고 건넵니다. 그러나 햄릿의 땀을 닦아주는 왕비가 마시고 쓰러집니다. 술에 독을 탄 사실을 안 햄릿은 왕을 찔러 죽입니다. 레어티스도 상처가 심해 죽습니다. 햄릿도 독이 든 칼에 상처를 입은 터라 서서히 죽어갑니다. 처음에 선왕의 유령을 보았다고 알려준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도 자책하며 죽으려 합니다. 햄릿은 죽어가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죽네, 호레이쇼. 아, 내가 진실을 말해줄 수 있으련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오. 이 모진 세상에서 고통의 숨결을 지속하며 내 이야기를 전해주게.”
자, 찾으셨나요? 나자렛 사람들은 이 등장인물 중 누구와 가장 가깝습니까? 바로 햄릿입니다. 햄릿은 성인이 되었음에도 아버지의 망령에 여전히 휘둘리는 인물입니다. 사람은 아버지만큼 자랍니다. 물고기가 어항의 크기에 자기 몸의 크기를 정하는 코이라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고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육신의 아버지를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하셨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지 못하는 현시대의 모든 이들을 대변합니다. 여전히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겨야 하는 연령대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아버지에게 지배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인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그의 삶에 간섭하고 영향을 주려고 한다면 자녀를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만들어버립니다. 유다인들처럼 빨리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에게 망령으로 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쩌면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기분이 나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 고흐는 엄격한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참으로 엄청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나라 속담에서는 자녀에게 아버지가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사라져 주는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이가 이제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겨 그 그릇에서 자신을 성장시켜야 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의 부모가 되기를 멈추지 않고 강요하게 된다면 그 부모는 자녀들에게 망령이 됩니다. 그리고 결과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나자렛 사람들처럼 인간적인 아버지라는 틀에 머물며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끄시려는 하느님 아버지의 길을 막아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54-58 :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예수님을 고향 사람들은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 고향은 나자렛이나 베들레헴보다도 그분을 거절한 유대아 전체를 의미한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57절)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1코린 1,23)로 박해를 받으셨지만, 계약과 무관했던(에페 2,12 참조) 다른 민족에게서는 존경을 받으신다.
이 회당은 악의에 찬 믿지 않는 사람들,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가득 찬, 못되고 버릇없는 사람들이 모였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54절) 그러자 그들은 놀랐다. 그들이 놀랐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놀란 것이 아니라, 무시와 분노로 끓었기 때문이다. 그 놀람은 찬양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시샘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54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하여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고 그것을 받았다. 그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오만이 아니라, 덕으로, 교만이 아니라, 지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을 예수님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55절) 이 말은 예수님을 폄하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보다 더 거룩한 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분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보면서 그러한 능력이 나올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그분을 믿지 않고 못마땅해 하기만 하였다. 또한 그들의 불신은 진실을 보는 눈을 막아버렸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느님께서 사람 안에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기적에 그리 마음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은 기적만큼이나 놀라운 가르침을 주셨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은 그 말씀의 권능에 놀라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무시했다. “개천에서 용났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별 볼일 없다고 여기는 가정에서 훌륭한 자녀가 나온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나자렛에서도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흠을 잡지 못하고 그분의 가족들만 들먹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고향사람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주님을 배척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랍니다. 그런데 그들의 관심은 엉뚱한 곳으로 향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예수님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가르침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둘러싼 것들에 관심을 가집니다.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시자 평범한 동네 청년이신 예수님께서 ‘어디서’ 놀랄 만한 지혜와 힘을 얻었는지 그것만 궁금해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참인간이시자 참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인성과 신성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한 면만 생각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인간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때로는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이 우리를 방해합니다. 이것들은 편하고 좋을 수 있지만 새로운 것을 찾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안주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새로움이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알고 있는 대로만 듣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말씀을 들을 때 새겨듣지 않고 선입견을 가지고 듣는다면, 지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지루하고 진부하게 느껴진다면, 여전히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처럼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찾고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변하게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그 힘과 늘 새롭게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통하여, 나의 삶을 통하여 듣는 것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말과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라는 말은, 목수의 아들이며 목수인 예수님이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과 병자들을 고쳐 주는 등의 기적을 행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음을 나타냅니다.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왜 어울리지 않게 가르치는 일과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하는가?”라는 반응.)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에서 아모스 예언자의 경우가 연상됩니다.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말하였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아모 7,12-15) ‘아마츠야’ 라는 이름의 사제는 ‘아모스’가 밥벌이를 하려고 예언자 흉내를 내는 것으로, 즉 아모스를 사이비 예언자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모스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농사꾼일 뿐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아마츠야 같은 사람들이 “농사꾼 주제에 왜 예언자 행세를 하느냐?” 라고 비아냥거렸음을 나타냅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과 얼굴을 마주할 때에는 겸손하고 떨어져 있을 때에는 대담하다고들 하는 나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직접 권고합니다."(2코린 10,1) <아마도 바오로 사도를 이중인격자라고, 또는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하면 그는 몸이 약하고 말도 보잘것없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우리가 떨어져 있으면서 편지로 써 보내는 말과 곁에 있으면서 하는 행동이 똑같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2코린 10,10-11) <바오로 사도는 글은 잘 썼지만 말재주는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2코린 11,6) 그리고 외모가 볼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바오로 사도의 외모만 보고, 또 말이 서툰 것만 보고 편견을 가지고서 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편견 때문에 바오로 사도의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편견에 사로잡혀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고, 들어야 할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만일에 편견이 없었다면 받았을 은총을 편견 때문에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편견은 그들 자신들에게 큰 손해가 되는 일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며 목수라는 점만 보느라고 들어야 할 말씀을 듣지 않고 보아야 할 ‘하느님의 일’을 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이 지혜로운 말씀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기적이라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인정하는 것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그들은 한낱 목수일 뿐인 예수님이 지혜로운 말씀을 하신다는 것과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편견 때문에 예수님에게서 멀어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식으로 편견에 사로잡혀서,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출신, 학력, 학위, 외모 같은 것들에 대한 편견.) 더 나쁜 것은, 그런 편견 때문에 사이비 예언자들이나 가짜 예언자들에게 속는 경우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학력과 학위와 경력에 속아서,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데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속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 아닌데도 하느님의 일이라고 속고...... 그래서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인생을 낭비하고......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것이 서운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안 믿고 있던 이방인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너희는 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가?”라고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나자렛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체 유대인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은 “이방인들은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존중하고 잘 받아들이지만”이고,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아무런 편견 없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잘 받아들인 예가 요나서에 나오는 니네베입니다.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요나 3,4-5)
하느님을 안 믿던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자마자 하느님을 믿었고, 회개했습니다.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는 “예언자와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은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존중하지 않는다.”, 즉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는다.”이고,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사람들이 편견을 갖고서 당신을 무시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에 마음을 두시지는 않았고, 사람들이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서 복음 선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당신이 세속적으로 존경을 받거나 무시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으셨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만 집중하셨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연히 인간의 몸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인간은 약 50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50조의 생명이 함께 사는 공동체라고 합니다. 인간의 세포는 약 1.4 볼트의 전기를 가질 수 있는데 이를 합하면 700조 볼트의 전기라고 합니다. 700조 볼트의 에너지는 상상할 수 없는 힘입니다. 이 에너지를 동양에서는 기(氣)라고 합니다. 인간의 몸은 어마어마한 사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인간의 몸은 마음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50조의 생명이 나와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니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희망을 노래하면 50조개의 생명도 그렇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마음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절망에 빠지면 50조개의 생명도 그렇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이런 능력과 힘을 아셨던 것 같습니다. 믿으면 50조개의 생명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믿지 못하면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같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과 몸이 서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친교를 나누면서 이웃들과 한 잔 할 때가 있습니다. 한 잔은 좋은데 기분이 좋으면 더 마실 때도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 식사할 때면 알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맛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음식인데도 과음한 다음 날의 식사는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속에서 잘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플 때도 그렇습니다. 평소에 맛있게 먹던 음식도 손이 가지 않습니다. 음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음식을 받아들이는 제 몸이 문제가 있었습니다.
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이 있으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코로나19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마스크를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정당소속이나 이념과는 상관없습니다. 건강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모 정당에서 마스크를 쓰면 지지하지 않는 것이고,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우리 편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스크를 정치적인 신념의 문제로 받아들였고, 이는 코로나19의 확산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친구들끼리 만나서 조심해야 할 대화의 주제가 몇 가지 있다고 합니다. 정치이야기, 종교이야기, 군대이야기입니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정 반대로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에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습니다. 한쪽은 일본은 절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왜소한 체격이었고 약해 보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다른 한쪽은 일본은 곧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눈빛이 날카로웠고 강해 보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이는 50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에도 비슷하게 벌어지는 일입니다.
종교는 절대자의 이름으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다른 종교와는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은 개인의 이성적인 판단과 윤리적인 판단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한국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이지만 아직도 종교의 이름으로 다른 종교를 탄압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군대는 상명하복의 계급사회입니다. 전쟁은 국가의 이름으로 살인을 합법화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다른 문화와 전통을 없애는 것을 합리화하였습니다. 군대는 그것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잘 안다는 선입견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40일간 단식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시고, 기쁜 소식을 전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많은 표징과 새로운 가르침으로 감동을 주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그랬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축일로 기억하는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에 있으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깃발에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옆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7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사랑이 풍성하게 열매 맺으면 좋겠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 사람 아니?>
마태오 13,54-58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그 사람 아니?>
그 사람 아니?
그럼 잘 알지
그 사람의 이름을 알지
그 사람의 고향을 알지
그 사람의 가족을 알지
그 사람의 학벌을 알지
그 사람의 종교를 알지
그 사람의 직업을 알지
그 사람의 친구를 알지
그 사람의 취미를 알지
그 사람의 집을 알지
그 사람의 무엇도 알지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사람 아니?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예수님에 대한 단 하나의 명확한 사실은>
+찬미예수님
5년 전, 한 음료 회사에서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연령대 별로 세 사람을 방으로 초대한 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백인 남성과 레게머리를 한 흑인 할머니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들의 첫인상을 물어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수염을 기른 백인 남성의 사진을 보고 락그룹이나 펑크 음악을 할 것 같으며 폭력적인 성향이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고, 흑인 남성의 사진을 보고는 DJ를 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일 것 같으며 차를 훔치는 등 반사회적인 성향이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할머니의 사진을 보고는 연약하고 활동적이지 않으며 사고방식이 고리타분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잠시 후, 사진으로 봤던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편견은 산산이 깨지게 됩니다. 수염이 덥수룩한 백인 남성은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선생님이었고, 흑인 남성은 IT 분야의 유능한 프로그래머였으며 할머니는 젊은이들을 사랑하는, 누구보다 활동적인 클럽 DJ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갖고 있는 편견으로 인해 겉모습만으로 상대방을 판단하지만 진정으로 상대방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깊이 있는 소통이 필요합니다. 이 실험 영상은 편견을 가졌던 사람과 편견을 깨트린 두 사람이 악수를 하는 모습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리고, 편견을 없애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마음을 열 때 세상은 좀 더 행복해진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광고는 끝이 납니다.
우리는 종종,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곤 합니다. 그러한 판단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마치 어떤 사람을 다 아는 것인양 생각하게끔 만들고 비판하게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의 이름과 가족, 학력과 직업, 성격을 아는 것이 그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긴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상대방을 정말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과 성향, 모두를 파악하기에 이러한 정보들은 아주 단편적인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일종의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의 직업과 어머니의 이름, 그리고 친척 형제, 자매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진정으로 어떠한 분인지, 그분의 말씀이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조건만보고 그분의 능력을 부러워하며 심지어는 못마땅하게 여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그들에게 남게 되는 것은 열등감 뿐, 주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을 받을 기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이와 같은 모습을 종종 보이곤 합니다. 세상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자기 삶의 틀 안에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을 판단하게 되고 사랑하거나 미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말 좋은 관계란 어떠한 군더더기와 판단도 제외한 채 나에게 보여지는 관계 그대로를 인정하는 가운데 맺어지는 법입니다. 상대방이 지닌 무언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계를 예수님과 나 자신의 관계로 옮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나는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나의 욕심과 편견으로 인해 종종 예수님을 느낄 수 없거나 그분이 원망스럽지는 않은지요. 이것은 나의 판단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기인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감각만으로 예수님을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단 예수님에 대한 단 하나의 명확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그 정도로 우리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것은 어떠한 편견에도 판단에도 변하지 않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이러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편견으로 인해 은총이 가려지지 않도록 보다 굳건한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다른 무엇이 아닌 그저 확실한 주님의 사랑만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힘들 때는 함께 근심하고 기쁠 때는 함께 미소를 지으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광고의 마지막처럼, 편견을 없애고 주님께 마음을 열 때 우리의 삶은 좀 더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그분의 은총이 여과 없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열지 않고 나의 편견대로 주님을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지요. 오늘의 복음은 이러한 경우 일어날 일을 다음과 같이 제시함으로써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아멘.
=====================
[전주교구 이정석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사람과 판단>
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연고와 서열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 어느 집안, 어느 학교, 그리고 요즘엔 어느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에 따라서 잘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렇게 공공연히 인정되는 줄을 잡는 것이 출세의 비결이라는 확신을 갖고 지금도 열심히 그런 사돈에 팔촌, 아니면 이웃사촌이라도 없는지 찾아보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좋은 학교의 기준은 어떤 교육을 시키느냐가 아니라 상급학교의 진학률과 취직이 전부인 사회. 그래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탄탄한 출세 가도를 만드는 것이 모든 학교의 졸업생들에게 주어지는 지상 과업이 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에 고향 마을인 나자렛에 가셨다가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한 사건을 보고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지혜와 기적의 원천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56)라고 물으면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비유 말씀과 그분께서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이 자기들이 알고 있던 ‘그 청년’의 배경으로 볼 때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것입니다.
성경은 예언자를 가리켜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예언자들 스스로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신탁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하신 말씀의 이유입니다.
비록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단순히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람의 말로 알아들을 때 예언자는 배척을 받게 됩니다.
오히려 자기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인 양 겉꾸민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합니다.
예언자는 자기의 말을 하는 사람도, 청중의 호응을 받으려고 진실을 외면하고 야합하는 사람도 아닌 하느님의 말만을 전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어느 예언자가 옳고 그르냐는 청중의 마음에 흡족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그 말씀이 제대로 효력을 발생하느냐에 따라서 판단됩니다.(신명 18,22; 이사 55,8 이하 참조) 현대사회의 보이지 않는 정보의 바다에는 수많은 말이 떠다닙니다. 국민들은 더 이상 단순한 정보의 소비자가 아니라 주체적인 생산자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말 가운데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는 예언인지는 그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떤 ‘진리’를 담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위정자들과 ‘잘나가는 사람들’은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늘의 마음이라는 민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
[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자기 인연에 가두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두루 다니시며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비유로 쉽게 깨우치신 다음 고향에 가십니다.
왜 고향에 가셨을까요? 지나는 길에 그저 들리신 것인가? 그리워서 일부러 가신 것일까? 금의환향을 기대하며 가신 것일까?
알 수 없지만 만일 금의환향을 기대하며 가셨다면 그 똑똑하신 주님도 보통 사람들의 보통 심리를 모르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스님들에게 나이를 묻고 과거를 묻는 것은 대단한 실례이고 수녀님들에게도 이런 점은 비슷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인연, 과거를 털어버리고 미래를 사는 사람에게 과거와 과거의 인연을 들먹이는 것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부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통의 인간은 자기와의 인연에 다른 사람을 가두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의 아들이라는 인연에 아들을 가두어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막으려 합니다.
코 흘리던 초등학교 때 인연에 친구를 가두어 친구의 놀라운 성장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인연에 성공한 고향 사람의 운신을 곤란하게 합니다. 심지어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나이가 위인 성직자를 만나면 성직자로 상대를 합니다. 나이가 어려도 성직자로 상대를 합니다.
그러다 어찌 나이 얘기를 하다가 동갑임을 알면 그때부터 분위기가 묘해집니다. 성직자로 대하던 사람이 그때부터 동갑네기로 대하려는 기류가 역력합니다.
이런 식으로 보통의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도, 하느님의 일도 자기 인연에 가두고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자기 인연에 가둡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도 예외는 아니었나봅니다.
=====================
[예수고난회 서현승 베드로 신부님]
<아는 게 병이다>
복음에서 묘사하는 동네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모두 놀랐으면서도, 그분의 출신을 알아내고는 못 마땅해 했습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의 가정이 동네 사람들에게 신비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유별나지 않았으며 예수님 역시 어렸을 적부터 신동이었다거나 특별히 뛰어나 보이지 않으셨을 것 같아서, 별로 내세울 것 없는 민초 출신인 나로서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이셨던 분이 그렇게 동네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할 만큼 진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어서 기분이 괜찮습니다.
물론 동네 사람을 보면서는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차라리 예수님의 가족과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아는 게 병입니다. 우리 말에도 ‘사람은 열 번 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이 시대를 사는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민정 지음, 생활성서사)라는 책 서문에서 인용하는 어떤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중죄를 짓고 수감 중인 아들을 찾아가, 사람들이 자기 아들이 얼마나 착한지 알았으면 좋겠다며 끝까지 아들을 믿어주었던 어머니의 마음이 결국 아들을 새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사람을 변화시킬 뿐더러 실제로 구원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는 몇 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요? 연구자마다 견해가 다르기는 하지만, 최하 4,000가지에서 최고 1만 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주 많은 표정을 가지고 있는 우리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우리 몸 전체의 근육 수와 비교해 얼굴의 표정에 관여하는 근육은 4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한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합니다. ‘지금 저 사람의 표정은 이런 내용이다.’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고 ‘화났다.’라고 판단할 수 없으며, 지금 웃고 있다고 기쁜 상태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남을 판단한다는 것, 특히 겉모습과 말 자체를 두고 판단했다가는 잘못된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실제로 세계의 역사 안에 그런 오류의 죄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머리의 형태, 얼굴 모양, 머리카락 등을 통해 죄의 유무를 판단했던 적이 있습니다. 즉, ‘죄인은 ~ 이러하다.’라는 잘못된 판단 오류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긴 예수님도 이 잘못된 프레임에 갇혀서 십자가형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 역시 잘못된 프레임에 갇혀서 주님을 잘못 판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향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향해 사람들은 쑥덕대며 자신의 판단을 뱉어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성경은 그들이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잘못하셨을까요? 그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보다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셨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적이라는 놀라운 표징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잘못된 판단의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없을까요? 지금도 여전히 많은 판단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남을 잘못된 모습으로 단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 잘못된 판단이 자기 하나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잘못 판단했던 고향 사람들이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8) 우리의 판단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제대로 된 판단일까요? 남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주님을 판단하는 커다란 불경으로 옮아갈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은 자신의 겸손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
<내 삶을 변화시키고, 낡은 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법정 스님의 ‘스스로 행복하라’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인용된 서산 대사님의 글을 적어 봅니다.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편함과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고,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해서도 아니다. 생과 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고, 끝없는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이 출가 정신이고, 이 각오, 이 정신을 늘 지녀야 한다고 법정 스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제가 되었을 때의 첫 마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타성에 젖어 편하고 쉬운 것만을 쫓았던 저를 향한 스님의 일성 같았습니다.
내 삶을 변화시키고, 낡은 타성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는 성직자, 수도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말로, 그래야 새로운 세상인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게 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와 구원>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오늘은 7월31일, 7월의 마지막 날이고 예수회의 창립자이자 초대 총장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입니다. 참고로 예수회의 표어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이며, 예수회의 영성을 대표하는 표현으로는 '활동 중의 관상(Contemplation in Action)',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Finding God in All Things)' 등이 있습니다.
내일부터는 8월의 시작 첫날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십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늘 새로운 시작의 삶입니다.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게 하는 회개입니다. 참으로 회개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수행인지 늘 실감합니다. 믿는 이들의 삶만 봐도 회개의 메타노니아에 이은 친교의 코이노니아, 봉사의 디아코니아를 통해 회개가 믿음 생활의 기초임을 깨닫습니다. 성인들의 삶을 봐도 회심 체험이 얼마나 결정적 계기가 되었는지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선물처럼 교회가 필요로 할 때 마다 선물처럼 성인을 보내 주십니다. 대략 5세기 간격으로, 6세기의 어려운 시기에는 정주의 산山같은 성 베네딕도를 보내 주셨고, 12세기 혼란중에는 흐르는 강江같은 성 프란치스코를, 16세기에는 도시都市 한 복판에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보내 주셨으며, 21세기에는 사막의 성자 샤를로 후고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이어 시대의 예언자와도 같은 예수회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교회에 선물하셨습니다.
특히 오늘 축일을 지내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물론 전격적 회심체험도 참 전설적입니다. 군인으로 전쟁중 부상으로 인한 전격적 회심체험에 이어 33세 만학도가 되어 신학을 공부했고 마흔 여섯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생몰연대를 보니 만65세, 참 치열한 삶을 사셨습니다. 성인 축일 때 마다 늘 계산해 보는 바, 제 나이와의 비교입니다.
교회에 보내 주신 성인들은 회개의 표징이자 희망의 표징입니다. 부단히 우리를 회개를 통한 구원의 삶에로 이끌며 늘 새로운 시작, 파스카의 삶을 살도록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참으로 절실한 생활 양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내적혁명의 회개입니다. 특히 기후변화로 인해 하나뿐인 공동의 집 지구가 위기를 맞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강조되는 '생태적 회개'입니다. 어느 지구과학자의 호소입니다.
“오늘날 지구가 파괴되는 것은 욕망의 과잉 때문이다. 우리는 생명 파괴의 ‘거대한 가속’에서 생명이 지속할 수 있는 ‘담대한 전환(Great Transformation)’을 해야 한다. 미래란 그냥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담대하게 선택해야 할 때 올 것이다.”
아주 예전 써놨던 내적혁명이라 글이 생각납니다. 비온 뒤 얼마 안 지난 다음이라 요즘은 시냇물이 흐릅니다.
-“이런 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
바짝 마른 바닥에 잡초와 오물들
대책없이 썩어 악취를 발하던 시내가
폭우내리니 말끔히 씻겨 정리되고
하얀 모래에 맑게 흐르는 물
살아 노래하는 시내가 되었다
이런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2001.7.19
내적혁명의 회개를 통해 내면은 하느님 바다 향해 맑게 흐르는 강물처럼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도 뚜렷이 부각되는 바,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한 겸손과 구원이요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회개, 끊임없는 회개뿐입니다. 하여 우리 삶의 여정을 회개의 여정이라 정의하기도 합니다.
강론때 참 많이도 강조했던 무지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빛, 주님의 빛입니다. 회개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와 예수님의 처지가 흡사합니다. 무지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참 고독한 모습입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너희 앞에 세워 둔 내 법대로 걷지 않는다면, 내가 잇달아 보낸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다면,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겠다.”
회개를 촉구하는 예레미야를 배격하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의 무지한 무리들이 배격했다 하니 흡사 무지의 악에 휩싸인 고립무원 처지의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처지도 대동소이합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 편견, 질투의 무지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지의 벽앞에 잠시 좌절하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게 됩니다. 주님의 일방적 기적은 없습니다. 무지로 마음을 닫고 있으면, 믿음으로 마음을 열지 않으면 주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고향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못한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무지의 고향사람들은 그대로 우리의 부정적 모습이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무지의 늪에서 벗어나야 늘 맑게 흐르는 새로운 시작의 삶입니다. 영성체송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주님의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타는 불’이라는 뜻의 이냐시오 성인이 흡사 세상에 던져진 주님의 회개의 불처럼 생각됩니다. 우리의 무지를 불태워 정화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회개의 불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의 빛으로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새하늘과 새땅의 새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이냐시오 성인이 선물하신 기도문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오! 주님, 저의 자유를 모두 드리오니 당신 마음대로 하소서.
저의 생각과 이해력, 저의 모든 의지를 받으소서.
제가 가진 것은 모두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제 당신께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도로 돌려드려
당신께 맡깁니다. 그러하오니, 당신의 뜻대로 처리하소서.
저에게는 오직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함께 주소서.
그러면 저는 충분하게 가져
다른 것을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섣부른 앎이 병이다>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 법입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할 수밖에 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13,5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는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로마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1코린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루카2,40.콜로2,3)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감각입니다. 한 번 뿐인 나의 인생여정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균형감각, 조화 감각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스스로 똑똑하고 잘났다고 내세우는 지식의 소유자 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헤아리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소위 가문도 별로이고 배움도 많지 않은, 엘리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가르침을? 잘난 척 하지마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뿌리 깊은 선입견이 진실을 왜곡하고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으며 결국은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지요? 혹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불평불만 하는 것은 아닌지요? 내 마음의 옹졸함이 불평을 키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에는 '불평금지' 스티커가 붙여있답니다.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살펴야 하겠습니다.
자기정보가 다 인양, 그리고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섣부른 앎이 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뿌리 깊은 선입견은 대상을 왜곡되게 보게 하는 색안경이 되어 진실을 가립니다.”(함께야) 내면을 모른 체 외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운명을 보여 줍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그분 모습에 의아해합니다. 자기들이 아는 출신과 계급이 지금 보이는 능력과 연결되지 않나 봅니다. 관건은 "어디서"입니다. 그래서 현재 그분에게서 드러나는 하느님 현존의 영광이 아니라 다만 가르침의 지혜, 기적의 힘이 흘러나오는 출처가 궁금할 뿐이지요.
"어디서"
하느님을 경외하고 율법을 가까이하는 유다인이라면 예언자의 입과 행동을 통해 전달되는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기인함을 모르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말, 행동뿐 아니라 인생 자체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도구니까요.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태 13,57)
하지만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그분께서 누구를 대변하시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신비에는 눈을 감고 그저 자기들이 아는 세속적 계보에 매달릴 뿐이지요. 그런 폐쇄적 상태에서는 차라리 거짓 예언자의 달콤한 감언이설이 달갑습니다.
"내가 너더러 그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한 모든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전하여라"(예레 26,2).
이것이 예언자의 기본 수칙입니다. 예언자도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뜻을 편집하거나 재단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도 더하거나 빼거나 돌려말하거나 과장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그저 하느님 말씀을 전달하는 투명한 통로여야 합니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예레 26,8)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합니다. 혹독하다 못해 참혹한 지경에 이르기도 하지요. 예언자가 백성을 위해 전달한 하느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이 자기 이익에 반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진위 여부와 상관 없이 예언자를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그의 입을 막는다고 하느님 뜻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일단 그를 공격합니다. 이를 모르시지 않는 하느님께서 왜 예언자들을 계속해서 위험 한가운데로 보내시는 걸까요?
"그들이 이 말을 듣고서 저마다 제 악한 길에서 돌아설지도 모른다."(예레 26,3)
이것이 하느님의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분도 요행을 바라시는 걸까요? 번번이 틀려도 번번이 희망을 돌이키는 모래바람 같은 기대에 불과한데 말이지요.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언자를 보내고 또 보내십니다. 어느새 예루살렘은 예언자에게 죽음의 도시가 되어버리지요(루카 13,33 참조). 그래도 하느님은 지치지 않으십니다. 결국 당신 아드님까지 인간 손에 넘기셨지요. 하느님은 인간의 악함을 모르지 않으시지만, 사랑 때문에 눈먼 그분은 그 사랑을 멈출 수 없으십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마태 13,58)
결국 인간 구원의 책임은 인간에게 돌아갑니다. 믿지 않는 이에게는 지혜도 기적도 영향을 미칠 수 없으니까요. 예언자는 인간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믿음을 주지 못한 채 변방으로 밀려나 죽음을 당할 겁니다. 하지만 예언자의 죽음이 하느님 말씀의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인간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니까요.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바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이다."(복음 환호송)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신뢰는 우리의 불신보다 큽니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지요. 그분 말씀은 누구를 통해서든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믿기에 굼뜨고 더디고 우매한 우리에게 말씀과 사람과 사건으로 인내로이 다가오시는 그분 앞에 이제는 겸손히 마음을 열어야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상을 가득 메운 소음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따르는 지혜를 청하며 오늘 하루도 말씀과 함께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Dedication to Jesus
Lord Jesus Christ,
take all my freedom, my memory,
my understanding, and my will.
All that I have and cherish you have given me.
I surrender it all to be guided by your will.
Your grace and your love and wealth are enough for me.
Give me these, Lord Jesus,
and I ask for nothing more. Amen.
=====================
[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 -심리학자 칼 로저스
사람의 감정은 부정되거나 억눌리게 되면 점점 커집니다. 반대로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거나 수용되면 온화하고 조용한 감정으로 변화됩니다. 자기 자신조차 억제할 수 없이 치밀어 올랐던 격심한 감정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게 되면 ‘자기의 일부’로 여겨져 자기 힘으로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unconditional positive regard)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는 감정 표현을 억제시키거나 감정 자체를 신앙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여겨서 많은 신자들을 힘들게 하는 오류에 빠지게 했습니다. 감정 표현에 자유로우셨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안타까운 일일 겁니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에서
____________________
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의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워했습니다.’(마태 13,54) 그러나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태 13,57)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까?
대체, 왜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놀라워하면서도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 하고,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56)라고 하며,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고, 자신들의 ‘모름’,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55-56)
이처럼, 그들은 ‘나는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 곧 자신들의 고정관념,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이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아는 것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 곧 ‘자신이 안다.’는 사실로부터 벗어나고,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 곧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은 불신의 씨요,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그러기에,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나아가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의 변형’을 이루는 일, 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겸손으로 존경하고, 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9TKs_Tl9c&feature=youtu.be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 56)
성찰 없이
하루를 보낸
제 자신을 아프게
성찰합니다.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닦습니다.
내리막길을
체험한 이가
말씀을 만납니다.
너무 많은
생각으로
삶을 놓쳐버린
매정하고 비정한
우리들 모습입니다.
뜻밖의
고향도 죽어야
말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끊긴
고향이 아니라
영원한 말씀에서
출발합니다.
우리의 의식도
말씀과 함께
자라나야 합니다.
삶의 이유를
꿰뚫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은 영혼의
처방전이 됩니다.
영혼의 처방전은
양심성찰이라는
놀라운 깨달음으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새롭게 합니다.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노예근성에서
벗어나
일상 안에서
자유인이 되는
묵직한 그 기쁨을
알게 하여 주십니다.
하느님에게서 받은
말씀이며 묵상이며
영신수련입니다.
양심성찰을
권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태어나는 이 기쁨을
함께 나눕시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