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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 땅을 정복하는 믿음 (창1:26-28)
이 세상은 아름답고 귀한 것들이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 세상을 처음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이 땅에서 흑암과 혼돈이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이 땅에 없는 걸 있게 하셨고, 안되는 걸 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이 땅에 살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의 모든 것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복도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행하신 이 모든 것을 ‘창조의 은혜’라고 합니다.
일단은 말씀을 이어가기 전에 먼저,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그런데 창조의 은혜 가운데서도 한가지,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통상 창세기 1장 28절은 신학자들에 의하여 ‘문화명령’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화라는 게 뭘까요?
영어에서 문화를 나타내는 ‘culture’는 단어는 라틴어 ‘cultura’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래의 뜻은 ‘땅을 가꾸다, 경작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밭을 가꾸고 경작하는 것과 문화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황무한 밭을 일구듯이 사람의 마음이나 생활양식을 가꾸고 다듬어서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문화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해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문화명령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과 세상을 가꾸고 다듬어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주어진 네 가지, 즉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정복하라.’는 명령에 있어서 창세기 1:22절을 보면 처음 세 가지의 명령은 물고기와 새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정복하라’는 명령은 오직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의미하는 참뜻은 무엇일까요?
‘정복’의 사전적 의미는 ‘군사로써 적군이나 반역도를 쳐서 복종시킴’이란 뜻으로 주로 전쟁에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이 명령을 내리셨다고 한다면 사람이 땅에서 살아가는 중에 정복해야 할 적군은 누구며 반역도는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여러분도 짐작하셨겠지만, 사람이 정복해야 할 상대는 바로 땅에서의 공중 권세를 잡고자 하는 사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처음 복을 주실 때부터 사탄은 이미 반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에덴에서 쫓겨났고 그곳에서 누릴 모든 복을 상실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요?
정복해야 할 사탄에게 오히려 정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성경은 사탄에게 정복당한 인간의 현실은 어떨 거라고 했습니까?
기억하시나요? 에덴에서의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복은 땀 흘리고 수고하지 않아도 되는 ‘불한당의 복’이라 했던 것을?
즉 수고하지 않고 땀흘리지 않아도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부족한 것 없고 더 원할 것도 없는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되었나요? 사탄의 술수에 넘어간 이후에는?
창세기 3:17절을 보면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던 아담을 향해 하나님이 그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결국 땀흘리지 않고 수고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충분히 먹고살 만한 상태에서 한순간에 땀 흘리고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까 말까 한 상태로 추락해 버린 것입니다. 왜요?
역시나 정복해야 할 사탄에게 정복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탄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사탄은 우리가 받을 복을 야금야금 가로채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역시 인생을 살며 당연히 받아 누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채 오늘까지도 여전히 땀을 흘리며 수고하는 인생을 살아야만 하고 그렇다고 땀 흘리고 수고한 만큼의 결과를 누리지도 못하는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그런 운명으로 태어났으니 그렇게 사는 것이 내 팔자려니 하고 살아야 할까요?
그건 아닙니다. 에베소서 6:12절 말씀을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했습니다.
보면 성경에는 창조 이후 사람이 정복해야 할 대적의 명단이 분명하게 적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라도 우리가 사탄에게 빼앗겼던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를 다시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가 사탄을 정복하는 힘을 가지기만 하면 가능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이 문제가 될 텐데, 우리가 뭘 어찌해야 사탄을 정복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사람에겐 사탄을 정복해 낼 힘도 능력이 없습니다.
사실이 이렇다 보니 사람은 여전히 인생을 수고해야 그나마 소산을 얻을 수 있고, 쉼 없이 땀을 흘려야 인생에서 겨우 버텨낼 수 있는 형편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류에게 ‘복음’ 즉 ‘좋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누구라도 사탄을 정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그 좋은 소식이 뭔지 아시겠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인류가 사탄을 정복할 수 있는 길을 완성해 주신 것입니다. 그랬기에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을 때의 ‘모든 것’ 속에는 사탄을 정복하는 것까지도 포함이 되는 겁니다.
이제부터라도 여러분이 인생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늘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던 사도 바울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이것만이 우리가 사탄을 정복할 방법이며, 그렇게 사탄을 정복하기만 하면 이후 우리에겐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복도 회복이 되게 됩니다. 아울러 ‘불한당의 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땅에서 수고한 대로와 땀 흘린 만큼의 소산과 열매와 결과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인생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건지 아닌지를.
물으나 마나 우린 예수님을 믿습니다. 문제는,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사도행전 2:21절에 답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한다면 그게 바로 나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으로 근거를 대자면, 로마서 10:14절에 기록되기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고 했습니다. 이때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는 말을 반대로 하면 ‘믿는 자를 어찌 안 부르리요.’가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 순간 여러분에겐 믿음이 있음이 증명되는 것이고, 믿음이 있기에 여러분에겐 믿음대로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사탄을 정복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때도 중요한 것은, 여러분은 평소 예수님의 이름을 얼마나 부르며 사시는가 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5:9절에서도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세요.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앞서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증거는 뭘로 알 수 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믿음이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을 성경적인 의미로 풀어 쓰면 ‘너희는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4:7절 말씀도 보면 “그런즉 너희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마귀를 대적함으로써 사탄을 정복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 사탄을 정복하고 대적하기 위해서라면 힘써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불렀다 안 불렀다 하면 안 됩니다. 나만 손햅니다.
불러야지 하다가 정작 불러야 할 때 까먹어도 안 됩니다. 역시나 나만 손햅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우리가 매번 주의 이름을 불러 사탄을 대적하고 정복하려면?
유다서 1:3절 말씀을 보면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하는 권면이 나오고, 마태복음 11:12에서도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침노’한다는 말은 ‘전쟁에서 다른 나라를 공격하고 쳐들어가서 빼앗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이 말인즉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군인처럼 자신의 인생을 걸고 힘써 하나님께 충성한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 땅에서도 사탄을 정복함으로써 천국 같은 삶을 살게 됨을 약속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만약 아무나 들어갈 수 있다면 그곳은 천국이 아닌 것이며 지금 사는 세상과 다를 것이 없는 곳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에덴동산의 장면을 돌이켜 보세요. 하나님은 이미 에덴과 복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문제는 저들이 그것들을 사탄에게 빼앗긴 채 누리지 못하는 인생이 되고만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이미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도 그것들을 사탄에게 모두 빼앗기고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제부터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언제 어디서든 사탄을 정복하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30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세상을 살며 우리가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로 살기에 이것이 우리가 사탄을 정복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 약한 자는 사탄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약하다’고 하는 말은 ‘모자람이나 부족함’을 뜻합니다. 세상적으로 힘이나 능력이나 체력이나 실력이나 권력 등등의 약함은 차치하고라도 영적으로는 성령의 부재 즉 성령의 능력이 모자라고 부족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가 정복해야 할 사탄의 상태는 어떤가요?
사탄은 그야말로 ‘악령이 충만’합니다.
그렇다면 ‘성령 부재’와 ‘악령 충만’이 맞붙게 되면 결과가 어떨까요?
이런 이유로 사탄 정복의 출발점은 항상 나에게는 언제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있음을 믿음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병든 자는 사탄 정복의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 역시도 육신의 질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병든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닌 말로 육체가 병들면 가정 먼저 찾는 게 약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영적으로 병들면 어떤 약을 찾아야 할까요?
말장난이 아닙니다. 영적 병든 것을 치료하는 유일한 약은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병든 자’라고 한 말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것만이 영적 병든 것을 치료하는 약이 되며 그렇게 해서 건강해지게 되면 그땐 사탄을 정복할 힘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려 할 때 예수님은 사탄 마귀를 말씀으로 물리쳐 정복하셨음을 상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영적으로 약하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았다고 여기는 분이 계신다면, 그렇기에 ‘나는 사탄을 정복할 수 있다.’라고 믿어도 될까요?
아닙니다. 그런 생각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필히 ‘나는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는 아닌지?’를 확인해 봐야 합니다. 잠자는 자는 창조의 은혜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은 시편 127:2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했는데, 잠자는 자가 은혜를 받지 못한다니요? 라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시편 13:3절에서는 “여호와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고 기도하는 말씀이 있다는 것도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허구한 날 잠만 자고 있다면 그에게 남는 건 시험에 드는 것뿐입니다.
잠이란 게 뭔가요? 사전에는 ‘생물이 일정 시간 동안 마음과 몸의 활동을 쉬면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있는 일.’을 잠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리 어렵게 말할 필요 없이 잠이란 곧 ‘활동을 안 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를 위한 잠은 필요하지만 ‘믿음의 잠’은 어떨까요?
야고보서 2:26절을 보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사탄을 정복할 수 있다 했는데 믿음이 없는, 즉 활동하지 않아 행함이 없어 죽은 믿음이라면 오히려 사탄에게 정복되고 말 뿐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들거나 졸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무어라 말씀하셨던가요?
누가복음 22:46절을 보면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을 정복함에 있어서는 정복의 시기가 빠를수록 복을 받아 누리는 기간이 길어집니다. 따라서 이젠 우리의 잠자는 믿음이 깨어나야 합니다. 즉 그동안 침묵했던 예수님의 이름을 매 순간 부르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젠 잠들었던 기도에서도 깨야 합니다. 잠자는 말씀도 일으켜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현재도 나를 정복하려고 달려드는 사탄의 공격은 쉬지 않는데 나만 믿음이 쉬고 기도가 쉴 수는 없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었는데 혹시 기도 중에 가장 짧고 쉬운 기도가 뭐라 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주여!”라고 부르는 이 한마디입니다.
어떤 상황에서건 우리가 ‘주여’라고 부르는 이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모든 사정을 이미 아시는 하나님은 같은 ‘주여’라도 각각의 사정과 형편을 헤아려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빈궁할 때 ‘주여’라고 하면 하나님은 ‘아 지금 물질이 없고 일용할 양식이 떨어졌구나.’로 알아들으셔서 물질과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십니다.
병들어 ‘주여’ 할 때든지, 원수로 인해 ‘주여’ 할 때도 하나님은 각각을 구별하여 알아들으셔서 병든 자는 낫게 하는 응답으로, 원수에 대해서는 이기게 하시는 능력으로 역사해 주십니다. 그러니 각 사람이 각기 ‘주여’라고 한다 해서 다 같은 ‘주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각각의 ‘주여’를 각자의 기도로 들으시고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혹여 ‘주여’라고 하는 것이 어렵다 해도 해내야 하겠건만 솔직히 ‘주여’라는 이 한마디 하는 게 어려우면 얼마나 어렵습니까?
안 하려니까 안 하는 것이고, 잊고 살기에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이라면 ‘세상에서의 땀’을 흘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나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의 땀’을 흘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으로 인해 결국엔 여러분을 대적하는 사탄을 정복함으로써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해 주시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케 하시는 복을 되찾아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