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5학년인 동훈과 진기, 그리고 세희는 셋의 손가락으로 만든
원 안에서 볼펜이 정말로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무서움을 느꼈
다. 허나 무서움보다는 눈앞의 신기함이 그들을 더 자극했다. 정말 말로
만 듣던 이런 방법과 주문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
지 못했었는데...
"진기야! 뭐라고 좀 물어봐!"
"뭘 물어보라는 거야?"
"아무거나!"
"이잉... 무서워.."
"세희 너 뚝 그치지 못할래? 진기야, 뭘 좀 물어 보라니깐!"
"음...귀신... 아니.. 영혼아... 아니 영혼님... 진짜 볼펜으로 대답을
해 줄 수 있어요?"
갑자기 셋의 손아귀안에서 볼펜이 가늘게 떨더니 천천히 동그라미를 그
려갔다.
"음! 정말이래! 정말!"
"신기하다 정말! 그럼 내 이름을 맞혀봐요!"
"음, 그런건 무리야. 동그라미하고 가위표밖에 못쓴대."
"어? 아닌데? 어어???"
볼펜이 아까보다 좀 더 강하게 떨리면서 종이 바닥에 엉성한 기호를 만
들어내고 있었다. 얼핏 무엇인지 알아 볼 수 없는 것 같은 도형을..
"음? 이게 뭐지?"
"가만... 아... 이건 내 이름같다! 최...준...아니 진....기... 맞아.
글씨는 왕못쓰네."
"너만큼 못쓰는구나!"
"아냐. 아직 미숙해서 그런가봐! 그나저나 진짜 신기하다! 이 주문 가
르쳐준 형의 말로는 동그라미 하고 가위표밖에 못그린다고 하던데."
"영도 영 나름이지! 우리가 부른 이 영은 굉장히 쎈가봐! 신난다!"
세희가 아직 겁먹은 눈으로 동훈을 처다 보았다.
"뭐가 신나? 난 무서워... 너무 추워..."
"뭐가 추워? 밤이니까 썰렁한 거지.."
"아냐... 추워... 소름이 막 끼치고..."
진기는 다시 조심스럽게 이름 모를 영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혹시 남자 분이세요?"
볼펜이 이번에는 좀 유창한 듯이 가위표를 그렸다. 이제 영도 조금씩
숙달이 되어 가는 듯 했다.
"그럼 여자세요?"
볼펜이 다시 가위표를 그렸다. 진기는 어리둥절했다.
"음? 그럼 뭐야, 이게..."
"동물인가? 으악! 호랑이나 여우 아냐?"
볼펜이 다시 떨리면서 화난듯이 가위표를 크게 그렸다. 그리고는 다시
힘겹게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음? 아... 여...러... 아하... 여러영이 같이 있는 모양이야. 몇명이
죠?"
볼펜이 엉성한 '3'자를 만들어 냈다.
"와! 셋이래! 우리하고 같다. 정말 재미있다! 우리 친구해요! "
"윽! 친구?"
"으앙... 난 싫어!"
"아냐아냐! 재미있을 거야! 누가 알아? 우릴 도와 줄지도 몰라! 재미있
쟎아?"
"재미? 이게 뭐가 재미있는거니? 난 무서워...!"
"그런 소리마. 이런게 아무데서나 되는 줄 아니? 잔말말고 해 보는 거
야. 영혼님, 아니 영혼님들! 그렇게 해주는 거죠?"
볼펜이 익살맞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우리 그럼 하나씩 자주자주 만나기로 해요!"
진기는 겁이 났지만 세희와 동훈의 앞이라 빼지 못하고 위세를 부렸다.
"음... 그러자! 까짓거!"
볼펜이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힘없이 옆으로 누웠다. 이제 끝난
듯 했다.
"오늘 일은 절대 비밀이다. 알았지? 이 일을 입밖에 내면...."
웬지 매서워진듯한 동훈의 눈초리에 진기와 세희는 잠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셋은 말없이 헤어졌고... 그러나 가슴은 한없이 두근거리
며 쿵쾅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동훈은 거의 매일같이 집에 숨어서 방문을 잠그고 밤이
면 그 영들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진기는 막상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뭔가 좀 캥기는 기분이 들어서 혼자서는 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고, 세
희는 무섭다고 며칠 동안 혼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영을 부를 생각
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동훈이가 맨날 70점을 넘지 못하던 국어시험을 다 맞고
의기양양해 하는 것이 보였다. 동훈이는 얼굴이 좀 파리하고 피곤해 보
였는데 처음에 세희는 동훈이가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런 걸로 알
았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동훈이는 세희와 진기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서 화장실 뒤의 으슥한 곳으로 가서 둘에게 자랑을 털어 놓았다.
"와! 정말이야! 국어책을 펴놓고 영을 불렀더니 볼펜이 시험 나올 페이
지만 끄덕거리며 줄을 쳐 주더라구! 정말 기가 막혀!"
그날 밤, 세희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책을 펴놓고 영을 불렀으나 영은
잘 오지 않았다.
'왜 그럴까...?'
의아하게 여기는 세희의 눈에 방문 위에 어머니가 붙여 놓은 부적이 눈
에 들어왔다.
'아하! 저것 때문에 못들어 오나보다!'
세희는 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부적을 떼어내고는 다시 볼펜을 손에 놓
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간, 진기도 방에 있던 성모상과 묵주를 감추고 있었다.
동네 놀이터의 그네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바로 학교 정문
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의 놀이터였다. 학교가 파해서 집으로 돌아
가던 세희는 문득 그 그네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눈이 좀 작고, 하얗고 예쁘장하게 생
긴 남자아이가 요즘 보기엔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흰 한복을 입고 자기
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이 무섭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뭔가 좀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세희는 그 쪽으로 걸어갔다. 청소를 마친 후여
서였는지 다른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왜 쳐다보니?"
그아이는 세희가 다가오자 대답은 하지 않고 갑자기 눈을 감았다. 뭔가
깊이 생각하는듯한 얼굴이었다. 세희는 어이가 없어서 잠시 그 아이를
쳐다보다가 삐져서 그냥 돌아서서 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뒤에
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 이름이 세희니?"
세희는 좀 놀라서 홱 뒤돌아섰다. 그 아이가 다시 눈을 뜨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아직도 아무 표정도 없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난 너 처음 보는데..?"
"너희 할아버님이 얘기해 줬어... 너 어젯밤에 무슨 짓을 했지?"
"뭐?"
"너 어제 방문 앞에 붙어있던 부적을 뜯어냈지? 그건 너희 할아버님이
손수 만드셨던 거야.. 그리고는 영을 불렀고..."
세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네...네가 어떻게 알지?"
아이가 그네에서 몸을 일으켜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키도 자
기보다 별로 크지 않고, 얼굴도 자기 나이또래밖에 안되는 아이같았는데
말하는 투나 다른 건 모두 어른 같았다...
"아까 말했쟎아... 너희 할아버님에게 들었다구.."
"거짓말마! 우리 할아버진 내가 두살때 돌아가셨댔어! 나도 아직 얼굴
도 본 적이 없는데 네가 어떻게 알아?"
아이는 세희가 말하는데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다행이야... 내일이 할아버지 제삿날이지?"
세희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 아이는 정말 이상했다.
"음? 그런가..? 음, 너 어떻게 알지? 수상하네!"
"그래서 너희 할아버님이 네가 좋지 않은 일을 한 걸 아신거야.. 들러
보셨다가.. 너 어제 꿈에 뵙지 않았니? 지금도 네 옆에 계셔."
세희는 다리가 와들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어제 꿈 이야기는 아직
진기에게밖에 하지 않았었다.. 거기에 자기가 두살때 돌아가신 할아버지
가 들르셨다면...아니, 자신의 옆에 있다니..!
"으악! 귀...귀신!"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널 수호해 주시는 조상님에게... 하여간 너,
그런 짓 다시하지 마!"
아이가 너무 엄하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세희는 조금 진정을 했다. 할아
버지는 세희를 퍽 예뻐했었다는 말을 들었었다. 어차피 불러낸 영도 대
화를 하는 것을 본 후인데 조상님이야 뭐... 무서워 할 필요가 있나...
이런 생각이 들자 세희는 웬지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무...무슨 짓???"
"쓸데 없는 영을 불러내고 부탁하고 하는것 말야.."
"너...너 귀신이니?.. 어..어떻게 그런걸 다..."
아이가 귀찮다는 듯 다시 내뱉었다.
"너희 할아버님이 방금 말해줬대두! 안그러면 내가 그런걸 어떻게 알
어?"
세희는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일견 신기하기도 해서 말을 더듬
었다.
"그..그러면.. 너... 너도 귀.. 아니 죽..죽은.. 아니아니, 돌아가신
분들과 말을 할 수 있단 거야? 볼펜 안 쓰고???"
아이가 슬픈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이는 학교쪽을 뭔가 선망하는듯한 눈초리로 쳐다 보았다.
"차라리 그런걸 몰랐더라면... 나도 너희처럼 학교도 다니고... 맨날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아도 됐을지도..."
아이의 눈매는 너무 서글퍼 보였다. 세희는 아까의 무서움은 잊고 불현
듯 그 아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넌 학교 안다니니?"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시간이 없어..."
"음? 너같은 아이가 (아니 하긴 나도 아이지만) 뭐가 그리 바빠서?"
"할 일이 많아... 시간은 없고..."
"시간이 없어?"
"없어... 이승에서 내 시간은 이제..."
갑자기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을 좀 빠르게 이어가
기 시작했다.
"이승과 저승은 원래 분리되어있는 세상이고, 그 사이에서는 원칙적으
로는 소통이 있어서는 안돼... 영에게 뭔가를 얻으려면 역시 뭔가를 해
주어야 한다는 식이야... 영에게 지식을 얻으려해도 그들도 특별히 대단
한 지식은 없는거고... 그 영이 지독한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단 말야...
대부분 선한 영이 많지만, 사람에도 악인이 있는것 같이 악령들도 있는
거야... 거기에 빙의까지 될 수 있으니 그런 건... "
세희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멍하니 아이를 보면서 대
꾸했다.
"야... 너 유식하다..."
아이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다시 좀 처연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어갔
다.
"아니... 뭐 이런 것 알 필요도 없어... 모르고 사는게 제일 좋지...
귀신을 섬기되 멀리하라, 괴력난신(怪力亂紳)에 대해서는 논하지 말라(*
논어에 나오는 말임)... 그게 맞는 말이야..."
"?????"
"하여간에 너 정말 다행으로 생각해야돼... 우연히 만나기는 한 거지
만... 그런 거 다신 해선 안돼. 알았지? 나 며칠 후 다시 올거야..."
세희는 멍하니 있는데 아이는 어느새 휘적휘적 사라지고 말았다.
"원 참.... 미친 아이인가봐..."
그러고보니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었는데....
다시 어김없이 밤이 되었다. 세희는 책상 앞에 앉아 볼펜을 손에 들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어제 영을 불렀을때 오늘 또 불러주기로
약속해 주었던 것이다.
"다시 해 봐?"
그러나 낮에 이름 모르는 아이가 한 말들이 너무 캥겼다.
"그만 둘까?"
사실 무섭기는 했지만 또 나름대로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세희는
아직 혼자서 영을 부르는 것은 단 한 번밖에 성공해 보지 못했었고 별다
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자신에 대한 것들을 척척 맞추는게 너무 신
기했다... 그리고 어제 약속마저 했으니...
막 볼펜을 들고 정신을 모으고 있던 세희는 짜증을 냈다. 잘 되지 않았
기 때문이다. 아직 문 위에 부적을 다시 붙인 것도 아닌데... 갑자기 누
군가가 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희는 기겁을 하며 창문
쪽을 쳐다 보았다. 낮에 보았던 그 아이가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이고 간 떨어질 뻔 했네. 너 어떻게 우리집을 알았지?"
세희가 일단 귀신이 아닌것을 맘속으론 기뻐하면서 창을 열어 주었다.
아이는 세희의 문 위에 붙어 있던 것과 비슷한 부적을 하나 팔락거리며
흔들면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너 또 영을 불러 냈지?"
"음.. 아냐! 내가 언제!"
"그럴줄 알았지... 그래서 내가 이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그놈을 잡아
버렸지..."
세희가 얼굴이 해쓱해져서 되 물었다.
"잡아?"
"음.. 이 부적에 일단 가둬 놨어. 적당한 때에 승천하게 해 줘야지...
혼좀 내 준 다음에..."
"호...혼을 낸다구?"
"그래. 이놈도 별로 좋은 영은 못돼. 부유령이나 지박령들은 일반적으
로 그리 질이 좋지 않아... 틈만나면 사람의 육신을 가지려 하지..."
세희는 다시 다리가 덜덜 떨리는 걸 느꼈다. 아이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는 세희에게 말했다.
"넌 참 운이 좋은 거였어... 이 어지러운 세상에 누가 영을 부르는지
뭐하는지 알 수는 없는건데... 너는 수호령이 강해서 문득 내가 느낄 수
있었지."
"으...저리가! 무서워!"
아이가 금새 울적한 얼굴이 되었다. 세희는 또 그걸 보니 그 아이가 가
엾어졌다. 그러고보니 그 아이는 자길 도와 주려고 한거 아닌가? (사실
귀신을 잡고 뭐 했다는 것, 믿기는 힘들지만...)
"아니...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아이의 얼굴이 다시 좀 밝아지더니 얼굴이 조금 붉어진 듯 했다.
"뭘... 앞으로 다시는 그런 거 하지마...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세희의 머리속에 갑자기 동훈이의 생각이 났다. 혹시...
"얘! 근데 이를 어쩌지?"
"뭘?"
"나하고 이 장난 같이 했던 애가 둘이나 더 있어..."
"뭐? 저런!!!"
"그 중에서도 동훈이는 오늘 퍽 얼굴이 안돼 보였는데..."
아이가 심각한 얼굴이 되더니 다시 물었다.
"지금 한 번 전화를... 아니, 그것보다 그 동훈이라는 애에 대해 설명
좀 해줘... 내가 투시를 한 번 해봐야겠어..."
세희는 뭣에 씌인듯한 기분으로 그 아이에게 동훈이에 대해 이것저것을
설명 해 주었다. 아이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감고 양손가락을 옆이
마에 대고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외쳤다.
"이게 어찌 된거지! 그 아이가 보이지 않아!"
"안보이다니?"
"그 아이... 지금.. 지금..."
갑자기 말도 다 잇지 않고서 그 아이는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세희는
왈칵 겁이 났다. 뭔가 동훈이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걸까? 세희는 전
화를 들고 동훈이네에 전화를 걸었다. 동훈이 어머니가 받았다.
"아.. 안녕하세요... 동훈이 있나요?"
"아, 세희구나. 그래 있지. 잠깐만 기다려.."
세희는 안심했다. 그 아이가 헛소리를 한 것에 불과한 것에 틀림 없었
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아니, 얘가 어딜갔지? 세상에! 얘가 창문으로 빠져 나갔나봐!"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동훈이 어머님의 목소리가 세희에게 천둥같이 울
렸다. 세희는 급히 전화를 끊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저만치 어둠속에서
도 달려가는 아이의 흰 한복이 희미하게 보였다. 세희는 반에서 여자 1
등인 달리기 실력을 발휘하여 그 뒤를 이를 악물고 달려갔으나 거리는
잘 좁혀지지 않았다...
준후는 피화부(避火符)와 주문을 있는대로 발휘하여 몸을 보호하려 했
으나 얼마 못버틸 것 같았다. 기름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 안은 정말
생지옥이었다. 준후는 앞에 건물의 문이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안으로 뛰
어 들어갔다. 다행히 그 안은 불길이 침투하지 않아 연기와 열기만이 좀
심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펼쳐진 광경에 준후는 뒤로 주춤 물러
섰다.
한 아이... 분명 동훈이일것에 틀림없는 아이가 땅바닥에 듸굴고 있는
두사람의 몸에 석유를 붓고 있었다. 두사람은 뭔가 날카로운 것에 찔린
듯, 바닥에 피가 흥건했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뜬채 죽어있었
다. 동훈은 동작이 뻣뻣한 것이 꼭 기계같았다.
"멈춰!"
준후가 소리치자 그 동훈 - 아니, 동훈이의 몸을 빈 뭔한령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희게 뒤집어져 있었다.
"이...이... 고약한.... 아이를 이용하여 이런 짓을 하다니!"
동훈의 입에서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뭐라고 욕을 해도 좋다... 흐흐흐... 하여간... 하여간 나는 원수를
갚았다... 내 손.. 내 손으로... 흐흐흐..."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지옥에 쳐박아 주지!"
동훈은 뒤로 조금 물러섰다. 준후의 몸에서 강한 기운을 느낀 듯 했다.
"흐흐흐... 애당초 각오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원한
을 갚았다....흐흐흐..."
"썩 그 아이의 몸에서 나오지 않으면 내 꺼내 주겠다!"
"너무 심하게 굴지 마라... 이 아이에게 죄를 씌우진 않을테니... 그래
서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이렇게 불까지 낸 것 아니냐..."
"닥쳐!"
준후가 이를 갈면서 인장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동훈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남자의 목소리가 비명을 질러댔다. 준후는 주문을 외운 후 힘
을 모으면서 계속 외쳐댔다.
"이 사악한... 이 아이가 어떻게 이 불 속을 빠져 나간다는 거냐! 앞뒤
가릴 줄 모르는 철면피! 지옥으로 떨어졌!!!"
준후가 일갈을 하자 허공중에 커다란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동훈의 몸이
털썩 땅에 쓰러졌다. 준후가 한숨을 쉬며 막 동훈에게 다가가려는데 주
유소 아래의 석유 탱크가 폭발했는지 엄청난 소리와 함께 불길이 밀려
들었다. 준후와 동훈은 불길의 압력에 밀려서 건물의 안쪽에 쳐박혔다.
"으음..."
머리를 부딪힌 동훈이 의식을 차리는 듯 했으나 아직 깨어나려면 한참
더 지나야 할 것이었다. 이제 창문과 문이 모조리 부서져서 불이 밀려들
고 있었고 아까 동훈이 뿌린 기름통에도 불이 옮아갔다.
"안돼!"
준후는 기름통에 불이 옮아가는 것을 보고는 반사적으로 동훈을 끌고
구석으로 향했다. 등 뒤에 뭔가 닿았다. 뒷문이었다.
"살았다!"
이제 열기와 연기가 엄청나게 밀려 들고 있었다. 기름통이 터지지 않더
라도 얼마 견디기가 어려운 판이었다. 준후는 다급하게 문을 열려 했으
나 하필 그 철문은 잠겨 있었다.
"으아! 이걸 어째!"
기름통에서 불길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그 불길은
구석에 쌓인 윤활유더미에까지 번질 것이고.. 그러면...
"할 수 없다!"
준후는 인드라의 뇌전을 양손에 일으켜서 문고리에 대고 냅다 쏘았다.
그러나 문고리는 조금씩 흔들리면서도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다.
두번... 세번..
준후는 이를 악물고 계속 문을 강타했다. 불은 이제...
"됐다!"
준후가 여섯번째로 내 쏜 번개가 문고리를 부수는 순간, 쌓여있던 기름
통들이 일제히 터져 나갔고 준후와 동훈의 몸은 바깥으로 날려갔다...
준후는 사람들이 멀리서 달려 오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몸을
보니 별로 상처는 없어서 걸을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일은 알려지지 않는게 제일이었다. 두 사람의 죽음은 동훈의 잘못
이 아니었고... 그를 은폐하기 위해서라도 이대로 가는 것이 나았다. 준
후는 쓰러진 동훈을 그냥 놔두고 절룩거리며 길 옆의 덤불로 몸을 숨겼
다. 주유소는 연달아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마 시체가 나오더라도
알아 볼 수 없을 것이었다... 준후는 달려온 사람들이 동훈을 데려가는
것을 보고는 주유소 안에서 죽은 두명의 누군지 모를 사람들의 영이 안
식하기를 빌었다...
세희는 동훈의 병문안을 다녀오면서 내내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
다. 동훈은 의식을 잃은 채 주유소의 뒷뜰에서 발견 되었고 사람들은 동
훈이 지나가다가 불에 쏘인 걸로 알았다. 그러나 주유소 안에서 두구의
시체가 발견 되었지만, 그 아이의 시체는 나오지 않았다... 그 아이는
귀신이었을까? 그리고 동훈이 그 시간에 아무 기억이 없이 그 주유소 근
처를 방황한 것은 또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리고 그 아이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아니, 그 아이의 이름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의문은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세희는 하나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동훈의 상세는 많이 회복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동훈은 멀쩡하다가도
잠만들면 자신이 어떤 남자 두명을 처참하게 죽이는 악몽에 시달려서 정
신과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었다... 대체 동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 아이는...
"세희야! 엄마 일 좀 거들어줄래?"
"예?... 아... 예! 엄마.."
"오늘이 할아버지 제사 아니니! 너도 도와야지..."
아.. 그랬었다. 세희는 그런 복잡한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말자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감추어 두었던 부적을 방문 위에 다시 붙이고 방 밖으
로 나갔다...
제삿상위에 놓인 할아버님의 사진... 젊었을때 찍으신 것 같았다. 세희
는 이제 다시 보니 그 사진이 자신의 꿈에 나왔던 그 무서운 할아버지의
모습과 정말 닮았다고 느껴졌다... 세희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기는 오늘도 자기와 이젠 정말 친해진 그 영을 불러내고 있었다. 전
번부터 그 영은 자기와 같이 가자고 했었다... 자기 아들처럼 느껴진다
고... 처음엔 무섭고 어이도 없었지만... 가련하지 않은가? 진기는 오늘
은 허락을 해주고 어떻게 하는가 볼 심산이었다... 자기를 따라가면 아
주 잘해준다고 그랬었다... 한 번 가 보자는 생각이 이상하게 머리속에
맴돌았다... 볼펜이 움직이는데... 웬지 점점 졸려워진다... 아니 점점
멍해지고 의식이 없어지는 건 왜일까... 이 사람, 아니 이 영은 나와 친
구인데... 같이... 같이 가자고?...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