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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운명 .- 90년대 문학비평에 대한 비판과 문학의 정체성 찾기 /이정훈
올해 들어 노스트라다무스의 ‘지구 종말론’이 호사가들의 좋은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일견 쓸데없는 소리라고 치부하면서도 과연 그럴 개연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문제에 대해 매스컴에선 조심스럽게 과학적인 입증을 토대로 그 개연성의 여부를 파악해보는 등 놀라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호사가들이 아닐지라도 분명 세기의 전환은 우리 인류 문명에 일대 변화를 가져다 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미래사회에 대한 관심은 고대로부터 인간이 마음속에 끊임없이 품고 있었던 문제중의 하나였다.
그렇다면 미래 사회문명을 향한 시간 여행을 떠나보면 종말론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문학의 운명에 대하여.
우선 시대의 단절성을 문제 삼고 싶다. 요즘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각 문예지에서는 특집으로 90년대 문학에 대한 반성 내지는 점검과 새로운 세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정호웅 외, ‘특집-20세기 한국문학의 반성 1’, “문학동네” 1999년 봄호
서영채 외, ‘특집 20세기 한국문학의 반성 II', “문학동네” 1999년 여름호
최원식 외, ‘세기의 갈림길에 선 우리 문학: 90년대 비판’, “창작과비평” 1999년 여름호
그런데 그 새로운 세기라는 것도 인간이 그 자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데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지, 해가 바뀌고 세기가 달라진다 하여도 물리적 시간 자체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시대의 구분도 사실상 ‘점이적 시간대’를 거쳐 서서히 지난 시대와 구별되는 성격을 가진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지나친 시대 구분은 문학 담론에 있어 현상의 진정성을 파악하는 데 장애가 될뿐더러 그 진실을 담론자의 입장에 유리하게 왜곡시키는 데 이용될 소지가 있다. 다음으로 이 글의 한계부터 얘기하고자 한다. 유종호 교수도 얘기했듯이 유종호, ‘비평 50년’, “한국 현대 문학 50년” 민음사 1995. 245면.
90년대 비평적 문학 담론을 모두 다루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벅찬 일이며 필자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다. 여기서는 주로 90년대 비평에서 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과정에서 간과했던 문제들을 몇 가지 지적하면서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문학의 근대성 문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최근 우리의 문학지형에서 근대성이 핵심 논제로 떠오르다가 지금은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이 한창이다. 문단 한편에서는 이를 구태의 반복으로 치부하는 경향도 있는 모양이지만, 이ꡐ해묵은ꡑ문제들이 치열한 논쟁 형태로 재론되는 현상은, 과거 문학적 유산의 유효한 부분을 슬기롭게 계승하면서 달라진 현실의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하려는 비평정신이 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이상국의 “집은 아직 따뜻하다”(1998)는 주목할만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 곳곳에 농촌 공동체 삶의 흔적이 물씬 배어 있고, 근대성에 맞서 농촌을 지키며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엿보인다.
1) 집이여
아침저녁 연기 올리던 삶이 빠져나가니
이백년 삼백년 묵은 구들장도 잠깐 식는구나
사개 뒤틀린 마구채 기둥뿌리 버둥거리고
마당가 말풀에는 뜸부기가 집을 짓겠다
누가 알겠니
저 왕조의 엄청난 무게도 버텨왔던 대들보가
왜 우리들의 세상에 와 무너지는지를
(…)
집이여
한때는 고래등 같았던 마음속의 집이여
전답의 피가 다 빠져나가고도
삼포리 감은 붉게 익었는데
기왓장은 날마다 마당바닥에 그 몸을 던진다
아 이렇듯 오래 된 집의 임종은 길고 모질구나
-‘삼포리에 가서 1’ 부분
2)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국수가 먹고 싶다’ 부분
1)에서 집은 우리 삶의 터전이요 가족공동체의 출발점이다. 그러한 집이 이제 임종을 맞는다. 그 연장선상에 도시화․산업화가 가족공동체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이는 맹목적 ‘근대 추종’의 결과임이 자명하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이 더 이상 세인들의 관심이 되지 못하고 보편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왜 우리 시대에 들어와 그런 ‘집의 몰락’이 일어나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우리 농촌 현실에 대한 실상을 그리면서 근대 추종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깔고 있다. 문학작품에서 사회적 현상-비문학적 요소-을 취급하고 있다고 해서 더 이상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문제는 그러한 현상을 다루되 얼마만큼 미학적으로 형상화시키는가, 라는 데 있다. 비민족문학진영이나 유미주의자들은 말한다. 이제 문학으로 하여금 더 이상 무슨 양심이나 이념, 도덕 같은 미학 외 요소들에 대해 복무시키지 말자. 사실 민족문학 진영 자체에서도 과도한 이념이나 사상의 표출로 문학외적 요소가 문학의 기능을 상쇄하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예로서 박남원(89년 “노동해방문학”으로 등단)의 ‘시를 다시 쓰며’를 읽어보자.
이제 시에게 힘든 일을 시키지 말자.//어디 가서 돈을 벌어오라든가/어디 가서 밥을 구해오라든가/어디 가서 권력의 그림자를 적셔오라거나/혹은 어디 가서/구차하게 성망(盛望)의 찌꺼기를 얻어오라거나/같은……//참뉵(慙恧)스럽게 나는 왜/그런 군색한 일들만 시에게 시켰을까./내 곁에서 시를 떠나가게 했을까.(전문)
그들은 문학에서 도덕적․계몽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 문학을 다루고자 하였다. 물론 어느 면에서는 일리 있는 논의지만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러한 ‘경향’이 과거 일제 강점기나 군사독재 정권 때 자의반 타의반으로 체제 옹호나 합리화에 이용되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2)에서는 ‘집’에서 살았던-혹은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오늘날 사회에서 개인주의나 이기주의 발달로 인간관계는 매우 계산적이며 마음의 문을 좀처럼 열어놓으려 하지 않는데 비해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막역한 인간관계의 사회에서 살았다. 오늘날 한국 또는 한국인을 비판할 때, 흔히 하는 얘기가 정(情)에 얽매여 사리를 그르친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엔 서구적 사고 곧 이성주의와 합리적 사고의 가치를 존중하고 동양적 사고를 격하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물론 정(情)적인 사회가 갖는 단점도 있겠지만 긍정적 면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과거에 대한 동경을 부각시키려 하기보다는 과거에 대해 쉽게 잊는 현대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시인은 “우리는 읍으로 간다”(1992)에서 근대 추종이 한국적 분단 상황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 바 있다.
그대가 속초 거친 명파 지나
동해 통일 전망대 이르러 두려움에 가슴 조이며
망원경 구멍에 500원 주화를 넣어보면 알게 되리
빨려들어갈 듯 북쪽을 바라보다가 화면이 끊기면
결국 북조선이 500원짜리 상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리
반도의 몸값을 관리하는 아메리카 같은 큰 자본가들의 나라나
돈이 되는 것이라면 에미 속곳도 팔아먹는
그런 장사꾼들 손에 들면
조국이니 통일이니 하는 것들이 결국
닳지 않는 장사 밑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리
- ‘분단 장사’ 부분
아직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전지구화적 자본주의와 매판자본주의 세력에 매몰되어 가는 세태에 대해 현실을 환기시켜 주는 작품이다. 맹목적 근대 추종자들이나 근대 인식이 결여된 사람들은 자기합리화를 위한 방법으로 이러한 작품을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작품, 과거에 매달려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작품으로 매도해 버린다. 이상국 시인은 농촌을 지키며 줄곧 “인성과 자연의 황폐성을 비판하고 노래”(고형렬)했지만 정작 ‘근대 극복’의 전형이 되는 작품을 낳는 데는 미흡했다.
그의 시가 근대 추종의 황폐성에 대한 “우리 민중의 주체적 자기변혁의 노력”(백낙청)을 핍진하게 형상화하지 못했던 점은 사회와 일국을 넘어서는 국제 관계에서 근대성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각성된 시각에서 우리 사회를 바라보아야 한다. 맹목적 근대 추종자들이 낡은 개념으로 생각하는 과거는 우리의 ‘오래된 미래’이다. 우리 전통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근대 적응에서 오는 한국인의 ‘실사구시 정신’은 세계화․개방화 시대에
우리 문학이 세계문학과 더불어 발전할 수 있는 첩경이다. 한국인의 자기 변혁 노력은 폐쇄적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와는 다르다. 이 점에 대해 평자들은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20세기 한국문학사는 근대성의 쟁취와 근대의 철폐라는 이중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고투의 역사였다. 발전 도중에 있었지만 오로지 자기 역량으로 근대성을 쟁취하는 결정적인 우위에 오르지 못한 시민 계급의 근본적 미성숙단계에서 조선왕조가 서구자본주의와의 파경적 충돌 세계자본주의 시장에 강제 로 편입되고, (…) 이런 조건에서 러시아혁명 이후 레닌주의 모델이, 조선의 낙후성을 일거에 또는 최 단시일 안에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는 하나의 매혹적인 환상으로 진보적 지식인들을 사로잡음으로써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
70년대 이후 남한의 민족문학운동은 20세기 한국문학사의 해묵은 과제를 창조적으로 해결하려는 소 중한 씨앗이 아닐 수 없다. 맹목적 근대추종과 낭만의 근대부정을 넘어서, 자본주의와 일국 사회주의 를 넘어서, 근대성의 쟁취와 근대의 철폐를 자기 안에 통일할 것을 모색하는 민족문학운동은 하나의 대안적 운동으로 출범하였던 것이다. 최원식, ‘한국문학의 근대성을 다시 생각한다’, “창작과비평” 1994년 겨울호. 30면.
최원식이 지적하듯이 우리는 근대에 적응하기 위한 자생적인 힘을 기르지 못한 채 외부적 상황에 의해 근대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근대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가질 틈도 없이 모든 사회적 상황이 맹목적 근대 추종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는 데 있다. 새로운 세기의 문학을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서구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해묵은 과제를 매듭지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뿐만 아니라 근대를 우리 주체적 시각으로 파악하려고 했던 문학에 대한 발굴과 올바른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근대 한국의 현실에서 근대주의 현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그 단순한 반대가 어느것도 흡족한 대안이 못된다는 점, 동시에 사실주의 차원의 고발조차 여전히 폭발력을 지니는 상황이라는 점을 감 안할 때, 예의 대안으로서 ‘리얼리즘’을 떠올리는 것이 우리로서는 일단 당연한 현실적 요청이다. 게 다가 우리의 전통, 특히 근대에 와서 그 의의가 더욱 절실해진 실학 전통이 중시해온 ‘실사구시’의 정 신도 이에 가세하고 있다. 따라서 바깥 세상의 대세가 어떻게 돌아가든 이런 실정을 외면하고는 주체 적인 대응이 불가능할 것이다. 백낙청, ‘문학과 예술에서의 근대성 문제’, “창작과비평” 1993년 겨울호. 29면.
둘째, 민족문학론에 대한 비판과 전망의 모색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보자. 90년대 들어와 민족문학론은 심심치 않게 비평가들에 의해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고, 그 무용론까지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에 관련하여 진정석은 “오늘날 민족문학의 위축은 그동안 민족문학론이 민족사의 특수한 과제에 대한 문학적 응전의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근대성이라는 인류사의 보편적 경험이 제기하는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석, ‘모더니즘의 재인식’, “창작과 비평” 1997년 여름호.라고 주장한다.
사실 그 점에 대해선 민족문학이 너무 경색된 점이 없지 않지만 임규찬은 90년대 민족문학의 쇠퇴 요인 중 외부조건으로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몰락과 우리 사회의 민주화 발전을 들고 있는데(‘민족문학의 자기 갱신과 민족문학의 가능성’, “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9), 이는 역설적으로 민족문학이 정치적 권위주의의 청산과 같은 큰 문제에만 치중함으로써 내부의 문화적 권위주의를 바라보지 못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평단의 분파주의나 신인에 대한 문호 개방의 인색함은 민족문학의 입지를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마치 민족문학을 문학 전반에 걸쳐 쇠퇴를 자초한 요인으로 취급하고 민족문학에 대해 과도하게 매도하는 것은 바로잡아져야 한다.
“그러므로 민족문학에게만 반성과 갱신을 요구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물론 민족문학도 반성할 것은 하고 갱신하여야 할 것은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이 시점에서 더 절실한 것은 비민족문학의 반성과 갱신이라고 본다.” 김태현, ‘리얼리즘의 꽃’, “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9. 123면.라는 김태현의 지적은 적절하다고 본다. 이는 비민족문학진영이 자기 진영에 대한 반성과 갱신을 도외시하고, 민족문학을 공격함으로써 독자의 시선을 본질로부터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위험스런 결과를 낳고 있다. 이점에 관해서 독일 통일 당년의 크리스타 볼프Christa Wolf를 둘러싼 문학논쟁 구동독의 크리스타 볼프를 비롯한 다수 작가들은 동독의 스딸린주의식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개혁적인 사회주의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독일의 통일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고, 통일 당년에 크리스타 볼프는 급기야 구서독 보수 우익 세력에 의해 ‘과거극복’이라는 명제 아래 “짜이트”의 울리히 그라이너와 FAZ의 프랑크 쉬르마허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는다. 이른바 ‘어용작가’로 불리게 된 크리스타 볼프의 문제점은 문학의 미학적 기능을 배제한 채 사회․정치적인 문제에 매달려 정치와 문학의 정경 유착을 낳게 했다는 데 있다고 보수 우익 측은 주장한다.
1차적으로는 구동독의 작가들이 비판 대상이 되었고, 2차로는 구서독 내의 귄터 그라스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 비판세력들이 공격을 받았고 마지막으론 구동․서독을 막론하고 ‘신념미학Gesinnungsästhetik’이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구동․서독 출신의 양심 작가들은 크나큰 침묵에 빠지게 되고 독일문학계는 사회성․정치성이 배제된 유미주의 경향의 작품이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상세한 내용에 대해선 다음 자료를 참조하기 바란다.
김누리, ‘통일 독일의 문학논쟁’, “창작과비평” 1993년 여름호.
김누리, ‘유토피아의 그늘-통일 7년, 독일문학의 동향’, “실천문학” 1998년 겨울호
전영애, “독일의 현대문학”, 창작과비평사. 1998.
을 상기해보면 우리에게 많은 교훈이 된다. 독일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이 우리나라와 다르기 때문에 독일의 상황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동독이 서독의 자본주의 체제에 흡수통일될 때 동독문학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나라도 80년대 민족문학이 90년대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휘말리게되었던 시점-90년대 말에는 급기야 미국 자본주의에 백기를 든 IMF 사태를 맞이하였다-에서 민족문학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결코 우연의 일치로 보기 힘들다.
따라서 민족문학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져야 한다. 새로운 세기에 있어 용도 폐기하거나 청산할 문학이 아니라 비민족문학과 함께 좌익과 우익의 두 날개로 새로운 세기를 향해 갈 동반자 문학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세기말 시점에서 민족문학의 전망에 대해 논의해 보자. 90년대 문학 화두였던 ‘근대성’문제와 ‘신세대문학’의 출현, 개인주의의 홍수 속에 민족문학은 ‘후일담문학’이 하나의 경향을 이루듯 현재의 대안보다는 과거에 대한 향수에 매달려 있는 느낌을 준다. 점점 새로운 세대가 문학의 소비층을 잠식하는 현 상황에서 민족문학은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는 한 전망은 없다.
한편 임규찬은 “민족문학론은 그동안 농민문학론․노동문학론․제3세계문학론 등 다양한 층위와 교섭하면서 심화․발전되었듯이 이 시대가 요청하는 다양한 운동과의 연계도 필요하다. 페미니즘문학론이나 생태주의문학론 등이 그런 예에 해당될 것인데, 그 과정에서 민족문학론은 이제 다양한 층위에서 스스로 해체되기도 하고 또 재결합도 하는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움직임으로 작동되어야 할 것이다.” 임규찬, ‘세계사적 전환기에 민족문학론은 유효한가’, “창작과비평” 1998년 여름호.
라고 말했는데, 시대 상황은 좀처럼 그러한 현상의 도래를 허용할 것 같지 않다. 90년대 문학 경향의 하나였던 댄디즘과 내면 지향의 문학, 그리고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정보사회의 출현, 전지구촌을 풍미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등 민족문학에 대한 순탄치 않은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페니미즘 문학의 경우, 어느 평론가가 주장하듯이 “90년대 말 이른바 <386>세대 작가들은 치열하고도 건강한 여성성을 놓치지 않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서사화에 대한 인식의 폭은 삶과 문학을 연계시키는 데 매우 적절한 매개고리로 작용하고 있다.” 문선영, ‘90년대 말 여성시의 서사전략’, “오늘의 문예비평” 1998년 가을호.
그러나 그러한 여성성이 실제 작품을 통해 어떻게 독자와 교감되고 사유체계 속에 확산되느냐, 라는 문제가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 생태주의문학론의 경우도 아직 그 가능성과 개념을 세우는 단계 남송우, ‘생태문학론 혹은 녹색문학론의 현황과 과제’, “오늘의 문예비평” 1998년 가을호.
이어서 생태학적 사고에 기초한 문학 작품이 독자들에게 자연과 인간에 대한 미학적 인식으로서 읽혀지기에는 걸림돌이 많다. 정보사회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구조가 개인주의와 개인중심 윤리의 바탕 위에 자본의 권력화 형성을 촉진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시대의 흐름에 성급하게 편승하려기 보다는 현실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대안세력으로서 민족문학의 정체성 확보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셋째, ‘디지털 시대’의 문학 위기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의 위기에서 시작된다. 언론보도에 의하면('인문학의 위기' "중앙일보" 1999. 3. 31) 대학의 학부 통합문제에서 야기되는 문제중의 하나가 대학생의 인문학 관련학과의 선택 포기라고 말한다. 그동안 인문학 관련자들이 “학과간 벽을 높이 쌓고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에 바쁘다 보니 인접학문간 교류를 등한히 하고 전공을 지나치게 세분화해 숲을 보지 못하는 잘못도 저질렀”지만 정부가 이공계 분야에 대해 재정지원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인문학이나 문학의 위기설이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배금주의 사상이 충만해 있고, 사회구성원의 개인주의 경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보사회로의 이행은 인간관계에서 전통적인 가족개념을 붕괴시키고 “네트워크형 가족이 ‘새로운 가족'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조 은, ‘가족제도의 운명과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 “창작과비평” 1999년 봄호.
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특히 컴퓨터 통신의 발달과 보급은 문학분야에서 새로운 지형도를 그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른바 ‘알파베틱’ 세계에서 ‘텔레마틱’ 세계로 글쓰기 형태의 대전환을 가져왔다. 이제 문학적 글은 종이 위에서 문자의 형태로 나타내어지기보다는 컴퓨터상에서 ‘0과 1’이 조합된 디지털 신호로 나타난다. 이러한 하이퍼텍스트의 출현은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독자들에게 전해질 수 있고 편집이 자유롭다는 이점이 있다.
더구나 컴퓨터 통신 작가라는 용어의 등장이 의미하듯이 글쓰는 계층이 다양화되고 보편화되었다. 컴퓨터 통신을 이용한 글쓰기는 채팅과 같은 개인의 취미나 신변잡기의 사소한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 된다. 남진우가 말했듯이 남진우,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 “숲으로 된 성벽”, 문학동네. 1999.
‘글쓰기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가벼움’이 곳곳에 발견된다. 더구나 익명성을 띠고 통신에 참여하는 경우도 생김으로써 문학적 완성도에 대한 작가의 책임감도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플루서(V. Flusser)가 지적했듯이 빌렘 플루서,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윤종석 옮김, 문예출판사.
1998.
미래사회에서는 개인 대 개인의 직접적인 접촉보다는 컴퓨터 네트워크를 이용한 사이버 공간에서의 접촉이 더 중요하고 보편화되기 때문에 문자체계는 하이퍼텍스트에 의해 소멸되거나 크게 위협을 받을 전망이다. 따라서 기존의 글쓰기체계는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로 변모하지 않는 한 미래에 대한 전망은 어두운 편이다. 또 영상매체나 디지털 체계를 통해 글쓰기체계가 변모하더라도 글쓰기가 더 이상 전통적인 문자체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정체성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다.
다가오는 미래사회에서 문화의 정체성은 어떻게 변모할까. 또 문화의 범주에 속한 문학의 정체성과 기능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앞으로 논의하면서 문학의 생존 전략에 대해 알아보자. “정체나 후퇴는 없다. 통합과 분화, 첨단 하이테크와 결합과정 등을 거쳐 발전만 있을 뿐이다”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21세기 문화 전반에 걸쳐 낙관적 전망을 내놓고 있다(‘21세기 문화기상도’ “대한매일” 1999. 7. 16). 문화의 전파과정은 진행방법상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계층확산hierarchic diffusion’이나 ‘전염확산contageous diffusion'의 형태로 나타난다. 오늘날 교통․통신의 발달은 문화소비자들간의 계층 벽을 허물어 계층확산을 약화시킨 반면 인터넷을 이용한 전염확산이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이제 문화도 고급문화와 대중문화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대중과의 접촉이 활발한 분야만 살아남게 된다. 또 하나 과거 문화 생산자가 소비자를 향해 보냈던 일방적 의사 구조는 컴퓨터 통신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쌍방향성 의사 구조로 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앞으로 문화는 사이버 공간에서 시장경제의 지배를 강력하게 받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문학의 경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른바 고급문학과 대중문학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문학도 하나의 상품으로서 시장경제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문학의 위기라는 것도 엄밀히 말해 고급문학의 와해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급문학이란 무엇인가. 지식인 위주의 문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자의 형태를 지니고서 인간의 보편적 문제인 생사병노(生死病老)의 문제와 사회적 문제인 정치적 갈등과 대립의 문제를 다루려는 문학이다. 물론 대중문학이라 해서 이러한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나 사회적 문제보다는 개인적 문제에 더 관심을 보인다고 하겠다. 90년대 문학에 대해 임규찬도 다음과 같이 발언한 바 있다.
“오늘의 상황은 한마디로 갈수록 공동체적 유대를 잃게 하고 (…) 소설을 완전히 유희적 대상으로 생각하여 스스로 상품제조자라 생각하는 부류도 생겨났다. (…) 남녀문제라든가 가족관계가 소설대상의 중심을 차지하고 사회적․계급적 갈등보다는 가족간의 갈등, 남녀갈등, 개개 인간과의 갈등이 주를 이루게 된다.”(‘90년대 리얼리즘 소설의 몇몇 풍경’, “왔던 길, 가는 길 사이에서” 창작과비평사 1997, 38면)
이점이 대중문학과 민족문학의 큰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세기에는 사회집단이나 공동체보다는 네트워크 구성원인 개인이 더 중요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문제는 개인적 문제에 비해 주된 관심사가 될 수 없다.
핵가족, 원룸 아파트, 독신 선호 경향, 능력 위주 사회, 무한 경쟁 시대 이러한 말들은 바로 개인의 비중을 시사하고 있다. 문학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사회집단이나 공동체의 붕괴 시점과 맞물려 있다. 앞으로 문학의 역할과 기능은 이러한 개인 중심 사회에 대한 진단과 문제점을 제시하고 공동체 생활과 개인 중심 생활간의 조화로운 결합을 통한 인간성 회복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궤도 수정이 없다면 새로운 세기의 문학은 문화라는 거대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폭발하고 말 것이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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