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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눅 1:39-45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눅 1:39-45 /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39-40) 며칠 뒤에 마리아는 발길을 서둘러 사가랴가 사는 유대 산간 동네로 엘리사벳을 찾아갔다. 41) 마리아의 문안 인사를 받을 때에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아기가 뛰놀았고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였다. 42) 엘리사벳이 큰소리로 말하였다. `마리아는 모든 여자들 가운데서 가장 큰 복을 받았고 태중에 있는 아기도 복받은 분이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가 나를 찾아 주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44) 마리아의 인사하는 소리를 들을 때 내 태중의 아기가 기뻐서 뛰놀았다. 45) 하나님이 이루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믿은 마리아는 참으로 복된 여인이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습니다.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39-42) 천사로부터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잉태하였다는 말을 전해 들은 마리아는 서둘러 엘리사벳에게 갔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를 듣는 순간 복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감동하여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41-42). “당신은 여인들 중에 복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뱃속에 있는 아기도 복을 받았습니다.”(41)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으로 복중에서 아이가 움직이는 의미를 알 수 있었고, 요한이 마리아와 태어날 아이를 인지하고 기쁨으로 뛰는 사실을 말해 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감동으로 말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세상에 알리는 전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43-44) 또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43). 성령의 감동으로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말하기 전에 이미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실 아이와 자신의 관계를 깨달았습니다. 태어나실 아이가 어떤 분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비록 마리아에게서, 앞으로 태어나실 분이지만, 나이 많은 엘리사벳보다 먼저 계시며 주님이신 분, 즉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리아의 인사를 듣고서 태중의 아이 세례 요한이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인 요한이 오신 메시야를 확인한 기쁨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인 동시에 복중에 있는 아기 요한과 아기 예수님의 첫 만남이기도 합니다.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45)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45). 주께서 자신을 통하여 이루시리라 하신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주의 뜻에 자신을 내어 맡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는 은혜를 입었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에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유가 의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예고된 것을 기쁘게 확증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선한 일에 사용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요 기쁨입니다.
적용: 오늘 당신은 주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복된 삶을 살아가고 있나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는 말씀에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씀은 예수를 믿으면 죽어도 천국에서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의문을 가진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2000년 전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던 무리에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너희에게는 이 자가 죽은 것으로 보이느냐? 내 눈에는 잠들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육신만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아닙니다.
< 설 교 >
마리아의 찬양
눅 1:39-56 / 장선희목사
여러분! 마리아는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지만, 순수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택함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아기를 잉태해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오늘은‘마리아의 찬양’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매일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눅1:19).
1. 신앙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눅1:5-6)
여러분! 신앙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1:5-6).고 했습니다. 라틴어‘코람데오’는‘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입니다. 라틴어‘코람’은‘면전에서, 앞에서’이고, ‘데오’는‘하나님’을 뜻하는‘데우스’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영어로는‘before God’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말씀으로 분별하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즉 신앙인이란?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서있는 사람,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교회의 타락을 개혁하려고,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은‘코람데오’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사장 사가랴와 아내 엘리사벳(모세의 형 아론 자손)처럼,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그대로 준행하는 참된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마리아가 유대의 한 동네에 이르러(39-45)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39).
여러분! 나사렛에서 유대의 한동네까지, 이곳(현재-엔케렘)까지 거리는 약 165km입니다. 즉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살았고, 6개월 전에 세례요한을 잉태한 친척 엘리사벳은 유대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략 부산에서 대구거리보다 더 먼 거리라고 보면 됩니다. 비행기나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 이토록 먼 거리를 간다는 것은 그만큼 중대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36). 마리아는 천사가 전한 이 말을 확인하러 간 것입니다. 그냥 믿으면 되지, 왜 굳이 확인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천사의 말을 믿고 확인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증거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잉태 확인을 통해, 자신의 몸에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할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말씀에 따른 여러 가지 증거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눈으로, 손으로, 귀로 들음으로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4).
성지순례 :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주요무대이며,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공생애를 사신 이스라엘지역과 바울의 선교지역 등, 여러 지역을 순례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성경의 내용들을 확인하면서 더욱 확신을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인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테러를 일으키는 집단이 있으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성지순례를 해야만 신앙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마리아가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니까(40),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41). 이미 6개월 전에 아기를 임신한 엘리사벳은 아기를 잉태한 친족, 마리아를 보고 외쳤습니다.
1)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42).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43-44).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잉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자손도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2)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45). :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실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삶속에서 모두 이루어지는 복된 2023년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3. 마리아의 찬양(46-56).
여러분! 마리아는 구체적인 내용으로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기뻐하십니다.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1)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46) : 우리 자신이 영적인 존재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47) :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시나요? 하나님은 기쁨의 근원입니다.
3)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48) :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의 집은 부유한 집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낮고 비천한 신분일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복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앞에서‘종’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태초부터 그렇게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종의 신분을 버리고 ‘우상의 종, 마귀의 종, 귀신의 종’이 되었고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자유인이 되려고 하지만 결국은‘죄의 종’이 될 뿐입니다.
만세에 나는 복이 있다(48) : 여기서‘만세’는 ‘오랜 세월, 오랜 세대’를 말합니다. 마리아가 욕심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복음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은 오래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욕심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저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일까요? 믿음의 사람입니다. 죄를 짓고 살인하고 탐욕에 가득 찬 사람에게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4)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49) :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하나님의 이름은 세상의 어떤 신들의 이름보다 구별되는 고귀하고 높으신 이름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석가모니’와‘알라’등의 이름과 대등하게 나열하는데 이것은 틀렸습니다. 인류의 구원자,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이름입니다.
6) 긍휼하심(자비하심)이 두려워하는(무서워하다) 자에게(50) :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좋은 곳이라 두렵지 않겠지만, 지옥은 형벌의 곳이라 두려운 곳입니다. 지옥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나님을 경외하고, 더불어 예수님을 믿고 천국으로 발길을 옮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두려워 말라, 무서워 말라.”고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7)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51) :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셨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천사들도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손으로, 팔로, 일군으로 삼으셨습니다.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하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8) 내리치시고 높이시는 분이시다(52). :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높은 사람은 낮아질 것을 생각하고, 낮은 사람은 높아질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있고 오만방자하지 않고 소망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9)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자는 공수로(53). :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여러 가지 환난의 때에 인내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때가 있습니다. 예전부터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어려운 형편이 계속된다고 속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10)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54-56). :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는 영적인 이스라엘백성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얻습니다. 우리 자신이 영적인 이스라엘임을 인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늘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마리아는 신실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올려드렸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 서 있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임신이 불가능했던 친족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그녀의 아기 잉태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잉태한 마리아의 임신을 기뻐하고 축하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는 존귀하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순전하고 신실한 믿음의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순수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고 실현되어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를 체험하고 간증하는 2023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눅 1:39-45 / 정근두목사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나오신 이웃 여러분, 오늘 읽어드린 말씀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간 기사입니다. 그런데 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찾아갔을까요? 왜 그 먼 길을 갔을까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이 그녀를 움직였습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엘리사벳을 수태하게 한 지 이미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 현장에 가서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보고 싶었습니다. 엘리사벳에게 주신 놀라운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고 싶어 하는 동시에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친족 엘리사벳을 찾아 나선 마리아에 대해 우리가 한 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본문은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재빨리 유대의 한 산골 마을로 출발하는 마리아의 모습 속에 그녀의 벅찬 감격이 나타나 있습니다.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복된 소식을 듣고 빨리 일어나 사가랴의 집을 향하는 그녀의 모습은, 복된 구원의 소식을 들은 우리의 모습을 한 번 점검해 보도록 합니다.
마리아는 본래 수태 못한다 하는 자기 친족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이미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빨리’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왜 ‘빨리’라고 말했을까요? 그 말없이도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 편에서의 반응을 묘사하기 위해서입니다. 마리아는 빨리 일어나서 그 곳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마리아의 모습은 복된 소식을 들은 우리 자신들을 한 번 살피도록 합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자라난 사람들의 비극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 생활이 거듭될수록 쉽게 빠지게 되는 유혹이 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렇게 주일마다 시련 없이 교회당을 찾아 나오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 압니까? 이렇게 예배의 자리에 언제나 나오게 될 때에 빠져드는 위험이 무엇입니까?
저는 말씀에 대한 피상적인 수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에 대한 지적인 수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씀이, 본래적인 감격으로 와 닿지 않지만, 그 말씀에 대해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아, 내가 전에도 듣던 이야기구나’라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을 이 예배의 자리에 나가지 못하도록, 집에서 핍박을 하고 있다면 오히려 괜찮습니다. 그런 사람은 깨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 자기가 이 자리에 나오는지 알고 나오는 것입니다. 나올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안 나오는 것이 오히려 힘든 처지에 나와서, 매 주일 앉아 있다 보면, 이런 위험에 빠져들기 쉬운 것입니다. 여러분의 귀로 듣고 있는 말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당 교회에서는 전파되는 말씀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신실하시다”고 할 때 그렇다고 쉽게 인정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말씀을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해도 아무 감동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된다고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것과 그 신실하신 하나님 말씀성취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문제는 서로 다릅니다.
마리아의 즉각적인 반응은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검토하게 해 줍니다. “일어나 빨리 가서”라고 합니다. 말씀 성취의 현장을 보고자 하는 갈급함이 그녀에게는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처음 복음을 대할 때는 감격스러워 살다가도 햇수가 거듭되면서 무기력해진다고 하면 우리는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복음을 처음 깨달았을 때의 감격이 식어져 갈 때는 다시 한 번 갈보리의 언덕으로 가야합니다. 다시 한 번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 지이다”하고 감격하는 가운데 응답하는 자는 그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보기 위해 빨리 가는 마리아처럼 적극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녀가 살던,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스가랴가 살던 산골 마을까지는 상당한 거리입니다. 어느 주석가는 말하기를 120km-160km정도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식으로 말하면 3, 4백리는 족히 됩니다.
당시에 대중교통수단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걸어가는 것이 고작입니다. 종종걸음으로 걸어도 사나흘이 족히 걸리는 길입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해야 합니까? ‘아, 엘리사벳이 애기를 가졌나 보다’하고 왜 넘어가지 않습니까?
천사가 전해준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감격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머뭇거리지 않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말씀이 살아서 자기 마음에 감격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동일한 구원의 감격을 확인하기 위해서 며칠 길이라도, 아니 몇 달 길이라도, 가서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 성도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여러분의 형제자매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고 듣기 위해서 거리를 개의치 않고 시간을 계산치 않고 자리를 함께 하고 싶은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신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거기 가서 약 석 달간 머물면서 약속의 징표로서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고 돌아옵니다. 요한의 태어남을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 가운데서 마리아도 그 즐거움에 함께 했습니다.
다음 본문으로 가봅시다.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기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40~41절) 말씀의 성취의 현장에 있었던 반응 중에서 특이한 반응은 태아 요한의 반응입니다.
엘리사벳의 설명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44절) 태아가 기쁜들 뛰기밖에 더하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이 왜 뛰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44절)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에 대답하기도 전에 뱃속에 들어 있는 태아가 먼저 뛰면서 환영했습니다. 기뻐 뛰놀므로 예수의 모친이 나아온 것을 반기는 태아의 모습에서 우리는 복음이 어떤 것인지 배워야 합니다.
복중에 있는 태아지만 요한은 기쁨으로 뛰노는 것으로 자기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모친이 인사하는 소리에 주의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자답게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놉니다.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사람들은 우연히 그 아기가 뱃속에서 놀았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것은 인본주의적 설명입니다.
성령에 감동한, 기독교의 설명은 “기쁨으로 뛰놀았도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태아가 의식이 있냐구요? 태중에서 바깥사람을 인식하냐고요? 태중에서 어머니의 귀로 들리는 음성만 듣고, 주의 어머니인지 알고 기쁨으로 태아가 뛰놀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종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입니다. 그 아이는 마리아의 문안소리가 사가랴의 귀에 들렸을 때에 태중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의 소식은 성령이 충만하기만 하면 태아라도 반응을 보일 수 있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복음의 소식은 또 듣고 또 들어도 새로운 소식입니다. 그래서 옛 가사로는 “오래 전 옛날 말씀, 오래 전 옛날 말씀, 주 예수님의 사랑 또 들려주시오”라고 찬양합니다.
“주 예수 크신 사랑 늘 말해 주시오 나 항상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205장) 복음은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복된 소식이 됩니다. 기쁨으로 뛰노는 환희의 순간은, 주의 모친의 음성을 들은 요한에게만, 한정된 경험은 결코 아닙니다. 주의 음성을 자신의 귀로 듣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 공통 경험입니다.
주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분의 귀에 처음 들렸던 순간들을 한 번 되살려 보십시오. 말씀의 성취에 접하여 기쁨으로 맞이한 환희의 순간을 여러분은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신자입니다. 그 첫 번 만남의 경험은 우리 기억 속에 사라질 수 없을 것입니다.
만나서 사랑과 사랑이 통했던 그 시절을 부부들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신자가 주님의 음성이 처음 자기에게 들렸던 순간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까? 그 순간은 그 이전의 순간을 이후의 순간을 갈라놓는 분수령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삶에서 분명히 차이가 나는 하나의 새로운 장을 여는 순간입니다.
복음은 바로 깨달을 때, 세상이 알 수 없는 감격과 환희의 순간을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기쁨으로 뛰노는 태중의 아이를 통해서 복음의 합당한 반응이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반응은 전 인격과 모든 삶으로 응답합니다. 거기에 생각이, 마음이 감동되고, 거기에 자기의 전인격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것이 복음에 의해서 감동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다는 소식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 주셨다는 소식은, 그냥 ‘그랬어요’하고 앉아서 고개만 끄덕일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이 정말로 내 마음에 다가올 때는 콧물인지 눈물인지 잘 구별이 안 되는 것을 흘립니다. 그것이 복음의 역사가 일으키는 반응입니다.
그 순간에는 세상은 그대로 있고, 환경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는 변해버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확실히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사람에게 역사 하는지 볼 수 있는 것을 엘리사벳에게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 엘리사벳의 축복을 들어 보십시오.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주위에 화가 나서 소리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 여러분 자신이 끓어오르는 분노로 고함을 쳐 본 적은 없습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소리쳤던 부끄러운 경험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극도에 달한 증오심 때문에 저주의 말이 여러분의 입에서 튀어나온 적은 없습니까?
그런 분이라면 엘리사벳에게 나타난 성령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일상적인 삶과 다를 수 있는 것인지 쉽게 그 차이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분노에 끓어올라 폭발하는 사람처럼 성령에 충만한 상태에서 성령에 사로잡혀서 터져 나오는 말도 큰소리로 부르짖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충만했을 때는 분노에 충만한 사람과 다른 내용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분노의 고함이 아니라 거기에는 기쁨의 외침이 있습니다. 저주의 고함이 아니라 거기에는 축복의 선언이 있습니다. 화가 나서 고함을 치듯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도 높을 수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소리를 높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기도의 자리에 함께 무릎을 꿇었을 때에 소리를 높여서 부르짖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5-17절에서도 소리를 높여서 그리스도를 증거 했던 세례 요한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는 소리를 높여서 외쳐서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고 하였던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령에 충만해지면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됩니다.
여기 복음으로 말미암는 삶의 극치가 엘리사벳을 통해서 서술되어 있습니다. “큰 소리로 불러 복이 있으며 복이 있도다.” 여러분, 두 삶이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습니까? 분노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도 고함이 터져 나오지만 내용은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향한 저주가 튀어나게 됩니다.
자기 태로 나온 아이조차 저주하는 그 악담이 나옵니다.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주는 부모를 향해서 욕을 하는, 극악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혔을 때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자주 경험하고 있습니까?
복음은 인간으로 서로 기쁨 가운데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복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서로 축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삶을 직시하십시오. 만나서 기뻐하고, 보지 못하면 만나고 싶어 하고, 만날 때마다 축복해 주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 외에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연말을 맞이해서 이런 저런 모임이 많겠지만, 만나서는 반갑게 인사하고, 앉아서입을 열면 남편 자랑, 자녀 자랑이고, 자기 잘 사는 이야기입니다. 만날 때는 반갑지만 술이 한 잔 들어가면 달라집니다. 어쩌다 수틀리면 서로를 향해서 고함을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는 삶은 완전 판이한 것입니다. 복음으로 인해서 사람이 바뀌고, 극치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에 그 삶은 서로를 향해서 축복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저주와 욕설 대신에 축복과 찬양이 우리 입술에서 터져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복음 안에는 있는 것입니다.
그대로 버려두었더라면 여러분도 길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사람들과 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의 삶에 작용하지 않았더라면 여러분도 자기 뱃속에서 태어난 자식을 저주하는 이들과 별다른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 안에 역사했기 때문에, 때로 우리도 실수해서 그럴 수 있지만, 이제는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자기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자식을 향해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자기 사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그는 달라진 사람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결과는 엘리사벳으로 하여금 외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내적인 변화에 이르도록 했습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이 말은 여자들 가운데 네가 가장 복된 자라는 것입니다. 아시죠? 여자가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는 것!
“네 태중의 아이가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결과로서, 하늘의 분별력이 엘리사벳에게는 있었습니다. 찾아온 마리아가 아직 앉아서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기도 전에 성령으로 알아본 것입니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가”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수태고지를 듣고 바로 엘리사벳을 찾아왔습니다. 어떤 과학적 수단으로도 알아보기 힘든 상태입니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 표시가 납니까?
아무런 임신의 흔적도 나타나지 않는 처녀를 보고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 자기에게 나아오고 있는 마리아는 친척이고 처녀입니다. 그런데 성령에 사로잡혀서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라며 감격해 합니다.
성령으로 하나된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함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밤을 새워서 관심사를 나누면서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오히려 예외에 속하는 일입니다. 엘리사벳의 경우는 마리아의 인사만 듣고도 주의 모친 됨을 알고, 비천한 자인 자기를 찾아줌으로 인해서 감격합니다.
우리가 비록 엘리사벳처럼 성령으로 충만해 있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하늘의 형제자매들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아니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자매와 형제 안에 있는 성령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들의 영적 본능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죽은 기독교는 누가 성도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없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다릅니다. 입술로는 정통 신앙을 고백하나 가슴에는 정통 신앙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지나친 독단처럼 들리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미천한 성도들은 미천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성도라고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 안에 작용하는지 안 하는지 이야기하고 함께 해 보면 이 사람이 나하고 지금 함께 하늘나라를 걷고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이 사람도 나와 함께 하늘의 본향을 향해서 걷도록, 위하여 기도해야 할 자인지 분별합니다.
그것은 신비적인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의 본능에 속하는 지식입니다. 젖꼭지를 찾아서 빠는 것은 사산아가 아닌 살아있는 아이의 본능입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누가 내 형제인지 자매인지 알아보도록 하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화답하게 하는 것은, 그 음성이 목자의 음성인지 알아보도록 해 주시는 것은 영적인 본능에 속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더 빨리, 더 확실히 알아보는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누구나 다 기본적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에게는 자기 형제자매를 인식한다는 것은 땅위에서 함께 누릴 수 있는 성도의 교제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특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형제자매를 만날 때마다 이 사람이 나와 함께 영광의 주님을 만났는지 아닌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형제를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주안에서 성장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내게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기를, 알아야 우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누구인지 서로 알지 못하고 성도가 서로 교통할 수 있습니까?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을 입으로만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렇게 알아본다는 이야기가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것을 삶에서 체험하는 사람은 그것이 상식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수긍할 것입니다. 우리 울산교회는 이름만의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아니라 주님의 피로 한 몸 된 형제자매 된 지체들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찾아옴을 이전의 인척관계로 파악하지 않고 주의 어머니의 방문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네 친족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졌다고 천사가 말해 주었지만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나왔을 때 인척간의 높낮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어머니로 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모든 인간관계를, 이전의 인간관계로 파악하지 않고 새로운 것으로 파악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안에 일어난 내적인 신분 변화는 우리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켜 줍니다. 동향인지, 동문인지, 종씨인지, 그런 것이 신자에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속 그것들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파악할 때에 단 두 가지 분류만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이 나와 같이 형제로서 하늘을 향해 가고 있는지, 아니면 이전에 내가 걷던 그 길을 아직도 걷고 있는지 그 둘로서 신자는 사람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만나게 되면 거기에서 새로운 교제가 생기게 됩니다.
엘리사벳이 연장자 아닙니까? 나이 많은 할머니인데 불구하고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가?” 나 같은 사람에게 주님의 모친이 찾아온다는 것은 감당하지 못할 황공한 은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 자기 삶에 역사한 사람에게 있어서 달라지는 모습입니다.
예수를 알게 된 사람들은 서로 만날 때에 더 이상 자존심 튕기기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 마디 말을 해도 서로 밀리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는 관계로 서로가 만나고 있다면 그것은 건강한 성도의 교제가 아닙니다.
성도는 “내 주의 어머니가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가”라고 감격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 나이 어린 쪽이지만 그렇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찬사가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기 전에는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을 만나면 신경이 쓰이게 됩니다. 자기보다 더 가진 사람, 자기 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면 신경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서로가 만날 때 우리는 형제자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때문에 형제자매가 지니고 있는 그 탁월한 것들이 그 좋은 특성들을 볼 때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게 됩니다.
엘리사벳은 자기에게 나아온 주의 어머니를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태중에 있는 아이에게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축복에 축복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그런 면에 있어서도 엘리사벳과 함께 하는 자들입니다. 신자들은 모든 인생을 긍휼히 여길 뿐 아니라 주안에서 형제 된 자들을 축복하는 자들입니다.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경험한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마리아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절에,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우리의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거기에 달려있습니다.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사나흘 걸리는 그 먼 길의 피로도 간 곳이 없이 찬양으로 화답한 마리아의 심정을 이제 이해하십니까?
성도는 서로 만나보고 싶어 합니다. 성도는 예루살렘에서 “내노라” 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헤롯 궁에서 큰소리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을 자랑으로 삼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산 중 한 동리에 있는 사람이라도 같은 말씀의 체험이 있는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와 더불어 감격스런 체험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성도는 같은 체험을 가진 사람을 만남으로 격려하고 격려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혼자서 감격하기보다는 나눔으로써 더 감사,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혼자서 음미하기보다는 나눔으로써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이 성도들입니다.
여기 46절 이하에 나오는 마리아의 놀라운 찬양은 성령이 충만한 엘리사벳을 만나 축복 속에 터져 나온 화답인 것을 우리가 기억합시다. 마리아가 나사렛 그 동리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이 아름다운 노래는 터져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와서 문안했을 때에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해서 큰 소리로 축복하고 있었습니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가 . . .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고 했을 때 마리아가 화답해서 한 찬양이 이어서 터져 나옵니다.
여러분은 오늘 같은 주일날 이렇게 서로 만남의 귀중성을 알고 계십니까? 축복은 축복을 낳고 감사는 더 큰 감사를 유발시킵니다. 마리아의 문안은 엘리사벳이 축복을 하게 했고 엘리사벳의 축복은 마리아를 찬양하게 합니다.
우리의 오늘 만남도 서로 상호 격려와 더 놀라운 하나님을 칭송하기 위해 이렇게 만나야 합니다. 여기는 모였다가 빨리 돌아가기 위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집에 돌아가서 오후에 마음 편히 발 뻗고 지내기 위해 오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 만나서 상호간에 있었던 하나님의 역사들을 나누면서 우리들의 마음은 더 하나님께 향할 수 있도록 감사하고 감격하는 그런 교제를 위해서 나아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주일은 기쁜 날입니다. 주님의 승리하심은 함께 기뻐하면서 주님의 승리하심으로 산 경험들을 나누고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은혜가, 내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어떤 부분에서 연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지 서로 이야기해서 함께 기도하기 위해 주일날도 만나고 구역모임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배당은 음식점하고 달라야 합니다. 각자 돈 내고 음식을 사먹고는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오듯이 그렇게 예배당을 드나들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는 여러분의 형제자매가 나온 자리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하여 함께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해서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 나온 것입니다. 성탄을 앞둔 복된 주일의 축복을 경험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모습
임현수목사 / 눅 1:39-45
우리에게 성탄의 기쁨을 전해주고 있는 성서속의 인물들을 보면 그들은 모두 겸손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서 기다렸던 사람들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그런 부부였고, 여선지 안나와 시므온이 그런 경건한 노인들 이었으며, 양치는 목자들과 동방의 박사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천사들도 그런 일군들 이었습니다.
특별히 주님의 성탄의 역사 속에 가장 귀하게 쓰임 받았던 마리아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기 전까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자신들에게 이렇게 적용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영접하셨다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까지 어떤 모습으로 기다려야 할까요? 하나님의 쓰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람마다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요?
1. 기뻐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성탄절 카드에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적혀 있는 멧세지가 있습니다.
“즐거운 성탄을 보내시고 복된 새해를 맞으십시오.”
성탄이 즐겁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성탄은 기쁜 소식이 하늘로부터 전해진 날이기 때문에 기쁘다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이라는 말은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이니다. Good news. good tiding. 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원래 옛날에 전쟁에서 승리하면 먼저 전령들이 달려와서 전쟁의 승리의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개선가를 부르면서 승리한 군대의 귀환을 환영하게 됩니다. 이때 전령이 외치던 소리가 바로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입니다. 승리했습니다.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천사들의 멧세지가 바로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동방박사들도 예수님이 계신곳을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마 2: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엘리사벳도 기뻐하고 , 요한도 기뻐하고, 마리아도 기뻐 합니다.
눅 1: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왜? 기뻐 했을까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저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려하심이라(마1:21) 흑암에 갇혔던 백성에게 큰빛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사슬에 매어있던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의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인류최대의 사면령이 선포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엘리사벳의 아기 요한이 마리아의 아기를 알아보는 기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눅 1: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요한이 구세주를 알아보고 기쁨으로 뛰놀았다고 합니다. 마리아도 찬양하며 기뻐합니다. 이 기쁜 소식을 확실히 들은 사람들은 모두 정말 기뻐 하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의 삶의 스타일은 마땅히 기뻐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마리아가 기쁨거리가 많이 있어서 기뻐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 이라면 지금 마리아의 경우는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어야 할 시간입니다. 그 당시의 율법과 문화적인 관습에 의하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확률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자신의 유익을 생각했더라면 기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기뻐할수 있었던 기쁨의 비밀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존재의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했기 때문에 기뻐 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구주를 기뻐 했습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은 감옥 안에서 편지를 쓰면서도 무엇이 그렇게 기쁜지 계속 기뻐하라는 멧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빌 1:17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자기를 생각했다면 기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에게 행한 것을 생각했더라면 기뻐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기뻐합니다.
바울이 기뻐 할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 입니까? 바울은 초점을 자기에게 맞추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기쁨의 비밀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기뻐 할 수가 있었습니다.
바울도 마리아처럼 오직 구세주를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어떤 모습 이어야 합니까?
우리도 쓰임 받길 원하면 기뻐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2. 교제하며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기뻐할 대상을 찾았습니다. 눅 1: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빨리 산중으로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나사렛 산골에서 유대지방 까지 약 120킬로미터의 거리를 3-4일을 걸어서 갔습니다. 왜 찾아 갔을까요? 눅 1: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천사가 전해준 소식을 들었던 마리아는 어쩌면 자기와 비슷한 입장이었던 엘리사벳을 생각하며 그녀에게 달려 간 것입니다.그리고 그곳에서 세달을 머물게 됩니다. 애기를 못나을줄 알았던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한지 6개월이 되었을 때 입니다.
이 두사람의 잉태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지만(유부녀,처녀/ 인간,하나님의 아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면 <두사람이 동일하게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이야 말로 자기를 이해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과 교제 할 때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과의 교제가 바로 이런 모습의 교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우리를 그분이 이해해 주셨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 그것이 성탄의 기쁨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대신 담당해 주시고 천한 나에게도 찾아 오신 것입니다.
동일한 아픔과 상처와 기쁨을 경험한 사람들이 같이 모이면 치료가 됩니다.
마약.자살.이혼한 사람들에게는 support group 이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들의 아픔을 내어놓고 자기들의 경험을 토로하며 자기들을 coming out 시킬때 그들은 서로 격려를 받고 치유를 받으며 서로 위로를 받고 재기 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를 너무 감추고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저력의 비밀은 날마다 같이 모였다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모여 떡을 떼며 음식을 나누며 힘써 기도하며 말씀 가운데 교제했습니다. 이 평화로운 성도의 사랑의 교제가 초대교회 부흥의 비결이었습니다.
중국기독교 역사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문화혁명 이후 선교사는 한명도 남김없이 쫓겨나고 교회는 모진 핍박을 받았습니다. 지도자가 없는 중국교회는 소위 말하는 지하교회로 처소교회로 모였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5-6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5-6명씩 모여 기도하고 교제하며 격려의 삶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사랑을 경험하고 서로 위로와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결과를 잘 기억 하실 것 입니다. 지금 중국교회는 1억이 훨씬 넘는 단일 국가로서는 세계최대의 그리스도인 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많아도 성도의 진정한 교제가 없습니다.주일날만 오는 교인들로 아무리 예배당이 가득 채워진다 해도 그것은 교회의 심각한 위기입니다. 우리교회 안에서도 소그룹이든, 가정교회이든....몇 군데 다녀보고 자기에게 맞는 소그룹 속에서 고통과 아픔, 시련과 상처를 함께 나눌 때 치유가 가능해집니다.
<교제하는 공동체>, <화목한 공동체>, <사랑과 돌봄이 있는 공동체>, <평화로운 공동체>가 진정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기들 끼리 만 좋아하는 모임이 되어서 내향적이 되고 패쇄적인 그룹으로 변질 되면 안됩니다.
크리스천 작가였던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이런 재미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개와 고양이를 한 우리 안에 넣어 보았다. 뜻밖에도 그들은 내 기대를 뛰어넘어서 잘 지내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번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은 약간의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마침내 그들도 더불어 잘 어울릴 수가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장로교인과 감리교인과 침례교인을 한 우리 안에 함께 있도록 했다. 그런데 그들은 결코 잘 지낼 수가 없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교제를 소중하게 관리하지 못하는가!라는 모습을 꼬집은 풍자적인 해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빌레몬서 1:6
성탄의 계절에 교제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평화를 회복하여 서로 화목 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은 기쁨의 계절인 동시에 평화의 계절이기 때문 입니다.
3. 소망 가운데 찬송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성탄절은 찬송의 계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둘러싸고 울려퍼지는 찬송이 성탄의 멧세지입니다. 마리아의 찬송,사가랴의 찬송, 시므온의 찬송, 안나의 찬송, 그리고 천사들의 찬송을 보십시오.
성탄절을 위한 가장 탁월한 우리 시대의 찬송은 무엇일까요?
<헨델의 메시야>가 단연 탁월할 것입니다. 1742년 4월 13일에 첫 선을 보였던 이 곡 만큼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은 곡도 없을 것입니다. 24일 만에 완성 했다는 메시야. 첫 공연때 할렐루야를 부르는 대목에서 너무 감명을 받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왕 죠지 2세가 그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도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경배하는 이 찬송도 바로 오늘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작곡 된 것입니다.
눅 1:46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여기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내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내 안에 계신 내 구주 그것도 <하나님 내 구주>라고 하는 신앙고백은 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그러면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권능과 거룩 하심과 긍휼을 노래하며, 교만한자를 낮추시고 비천한자를 높이시는 은총의 하나님,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제사장 사가랴의 찬송을 보십시오.(1:68-79)
눅 1: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경건한 평신도 시므온의 찬송입니다.
눅 2:28-30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여선지자 안나의 감사 찬송이 있습니다.
눅 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천사들의 찬송이 있습니다.
눅 2: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밤의 장막이 걷히고 하늘에는 천군천사로 가득하였는데 이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동시에 이 찬양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언하는 웅장한 합창으로 하늘에 울려 퍼졌습니다.
여러분 찬양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찬양을 너무 종교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찬양이란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말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꼭 곡조가 붙어야지만 찬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찬양이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감사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칭찬보다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비결도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선생과 학생의 관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주고 칭찬해 주고 세워주고 인정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성도의 교제는 없습니다. 찬양이란 이렇게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찬양이 살아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에수 그리스도로 구원 받은 사람들은 마땅히 그 분을 찬양하면서 기다리게 됩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그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성탄은 기쁨을 회복하는 계절입니다. 성탄은 성도의 평화스런 교제를 회복하는 계절입니다. 성탄은 소망 가운데 찬송하는 계절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뜻밖에 천사들(중년천사)의 합창으로 성탄을 맞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이 찬송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면 좋겠습니다.
힘찬 박수로 이 분들을 격려하며 다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합니다.
첫 성탄을 이렇게 준비했던 성도들 처럼 저와 여러분도 다시 오실 주님을 이렇게 찬양하며 기다리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가장 위대한 축복의 통로
양인순목사 / 눅 1:39-45
1934년 6월 빛고을 광주에서 미국 선교사 한 명이 과로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 남긴 것은 담요 반 장, 강냉이 가루 2홉이 전부였습니다. 그녀의 시신은 유언을 따라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했습니다.
그녀는 어둠의 땅 조선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주고 떠났습니다. 그녀는 가난과 질병으로 얼룩진 조선에 와서 22년을 살았습니다. 그는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그는 조선인의 친구로 산 것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살았습니다. 하늘의 벌을 받았다고 조선인들도 버린 나병 환자들을 사랑으로 돌봤습니다. 아프고 병들어 죽어가는 이들을 정성껏 치료했습니다. 그렇게 한 평생을 조선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녀가 바로 독일계 미국인 선교사였던 엘리자베쓰 셰핑((Elisabeth J. Shepping, 1880~1934)입니다. 한국 이름은 서서평 선교사입니다. 그는 1912년에 한일병합 이후 32살 처녀의 몸으로 미국 남장로교회 간호선교사로 조선 땅에 들어왔습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얼룩진 조선 땅을 돌아다니며 병든 자를 치료했습니다. 이름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당시 여성들 500명 가운데 자기 이름을 가진 사람은 10명도 안됐습니다. 그는 학교를 세우고, 여성들을 가르쳤습니다. 과부들이 자립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의 권익을 위해 일했고, 나환자를 포함해서 14명을 양자와 양녀로 키웠습니다. 나병인들의 어머니로 불렸습니다. 일본 총독부가 나환자가 출생을 못하도록 정관수술 정책을 발표하자 나환자를 이끌고 총독부를 찾아가 데모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나환자 요양소인 소록도가 세워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최초로 광주시민사회장으로 10일 동안 장례를 치뤘습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수천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쫓아 나와 어머니라고 부르며 오열했다.”고 합니다.
서서평 기념사업회 회장 홍정길 목사는 이렇게 그의 삶을 조명했습니다. “서서평 선교사의 삶,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게 원본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원본을 잃었습니다. 믿음은 늘 구체적인 삶의 용솟음입니다. 믿음의 원본을 되찾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한국교회는 이 자리로 돌아와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는 가장 어두울 때 조선에 들어야 희망의 빛이 되었습니다. 가난하고 병마에 시달리며 꺼져가던 영혼들이 하늘의 빛을 보도록 등대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서서평 선교사야말로 이 땅의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요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한 여인의 삶이 어둠의 이 땅을 밝히는 등불이 됐습니다. 아주 오랜 전 어둠의 땅에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오시기 전에 온 인류는 어둠 가운데 방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 700여 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9:2)
예수님의 오심은 흑암의 땅에 빛을 비추신 사건입니다. 죄와 사망으로 얼룩진 어둠의 땅에 구원과 생명의 빛을 주신 사건입니다. 성탄절이 우리에게 기쁨이고 감격인 것은 흑암에 살던 백성들에게 생명의 빛이 비추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오심으로 어둠은 물러가고, 새 시대, 새 하늘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들이 하늘의 축복을 받는 문이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의 은혜와 사랑을 맛보는 신비한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하늘의 신비가 이 땅에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구원의 계획이 드러났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드러난 절기입니다.
그 결과 어둠의 자식들이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죽음의 길로 향하던 자들이 생명의 길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저주를 받던 자들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늘과 땅의 가장 소중한 축복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요 사랑이시요 생명의 본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하늘과 땅을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통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구체적으로 준비한 두 여인입니다. 그녀들은 하늘과 땅의 신비를 연결하는 가장 위대한 축복의 통로입니다. 바로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두 여인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가장 중요한 축복의 통로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은 이미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예고가 되었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눅1:31-32)
당시 많은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기다림에 실패했습니다. 어둠 가운데 빛으로 오신 주님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무지의 잠에 빠졌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과 명예를 지키려는 이기심의 잠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잠에 빠져서 주님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맞이한 것은 당시의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아닙니다. 서기관이나 율법사가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을 연구하며, 제사를 드리며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지만 정작 주님이 오셨을 때 잠들어 있었습니다.
오히려 메시야 이신 예수님을 맞이한 자들은 의외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탄절에 위대한 찬양을 드렸던 천군 천사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양을 치던 목자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바로 유대 시골의 한 처녀인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먼저 이 놀라운 성탄의 복음을 듣고, 가장 위대한 믿음의 고백으로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물론 마리아에 대한 평가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이 다릅니다. 가톨릭은 성모 마리아로 지나치게 신격화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죄가 없다 라든지, 마리아는 승천했다는 주장을 합니다.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성당 앞에는 마리아 성모상이 세워져 있고, 신실한 분들은 마리아 상을 중심으로 제단을 꾸미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성경적이고, 우상숭배의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신교는 중세 가톨릭의 비성경적인 내용을 개혁하면서 신의 위치에 있던 마리아를 인간의 자리로 내려놓았습니다. 그래서 애써 마리아에 대해서 무관심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기사와 관련하여 마리아는 결코 주연이 아닌 조연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첫 계시의 말씀인 오늘의 본문 속에서도 천사들의 계시의 초점은 분명 예수님이십니다. 단지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탄생하게 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생명의 빛을 이 땅에 비추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뿐입니다.
또 한 여인은 엘리사벳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오심을 미리 준비한 세례요한의 어머니입니다. 그는 세례 요한을 임히사고 있던 중에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의 방문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왔을 때 성령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외칩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눅1:42-43)
엘리사벳은 영안이 활짝 열린 여인입니다. 아직 태중에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축복하며 마리아를 향해 ‘내 주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믿음을 꿰뚫어보는 혜안이 있는 여인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 비해서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그녀는 마리아에게 성탄의 의미를 확신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비천한 자를 들어 복되게 하심을 찬양하게 만듭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여인은 성탄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님이 오시는 길목에서 가장 위대하게 쓰임 받는 하나님의 도구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두 여인이 성탄을 맞이하는 자세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어떻게 이 두 여인은 예수님의 탄생을 성취하는 가장 위대한 축복의 통로가 되었을까요?
첫째, 성탄의 출발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가 선포한 첫 번째 말씀은 “은혜를 받은 자여”입니다. 누가복음 1장 28절에 보면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말씀합니다. 그 말을 들은 마리아가 이런 인사가 어디 있느냐생각할 때 천사가 다시 말합니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눅1:30)
성탄의 출발은 바로 은혜입니다. 마리아가 남 보기에 의로운 여인이기에 특별히 그녀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요 은혜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인입니다.
그녀는 이제 갓 약혼한 시골의 처녀입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동네는 나사렛입니다. 당시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입니다. 평판이 좋지 않은 지역입니다. ‘이방의 갈릴리’ 라고 불려 질 정도로 무시당한 지역입니다. 이방지역이 아니었지만 외국 군대가 쳐들어올 때 갈릴리 쪽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외국인들과 결혼을 많이 했습니다. 유대인의 피를 더러운 이방인들과 섞였다고 해서 이방의 갈릴리로 무시를 당했습니다. 또한 그곳에는 가난한 이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나다나엘이 그의 친구에게 전도할 때,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란 말을 듣고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런 정도로 무시받고 천대받는 지역이 바로 갈릴리 나사렛 지역입니다.
그런데 주의 천사는 유다 지방으로 가지 않고 갈릴리 나사렛으로 향합니다. 기왕이면 만왕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라면 번듯한 유다의 중심 도시인 예루살렘으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기왕이면 무명의 시골처녀보다는 영향력이 있는 유명한 문벌 좋은 가문의 규수를 택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처럼 아들을 세상에 보내야 했다면 절대로 그런 곳으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는 로마를 그냥 지나칩니다. 예루살렘도 지나칩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헤롯 궁전을 지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 갑니다. 한 무명의 시골 여인을 찾아갑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은혜를 입은 자여’ 라고 말씀합니다. 성탄은 은혜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은혜를 입은 자이기에 성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70억의 인구가 성탄을 맞이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기분을 맞추는 성탄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우리들은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은혜의 빚을 진자로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감사 또 감사할 뿐입니다. 은혜를 입은 마리아가 주님의 오심을 찬양 드렸던 것처럼 진심으로 경배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성탄 이브에 교회학교 자녀들이 축하 잔치를 합니다. 성탄절에는 찬양대가 정성껏 준비한 칸타타를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은혜를 입은 감사의 고백입니다. 비천한 자를 들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고,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놀라워서 기쁨과 감격으로 주님께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감사해서 우리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해서 주님의 오심을 경배했던 동방박사들처럼 예물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 예물을 가지고 이 추운 겨울에 연탄조차 넉넉히 땔 수 없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연탄을 사서 나누어 줍니다. 바로 ‘사랑의 연탄 나눔’입니다. 나에게 따뜻한 집을 주시고, 일터를 주신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따뜻한 곳에 있다고 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지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내가 배불리 먹는 다고해서 다른 사람들이 다 배부르게 먹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서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이 모아지면 큰 사랑의 강물이 됩니다. 어린 소자와 같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푼 사랑이 바로 주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몽골성지교회 사랑의 옷 보내기에도 많은 분들이 기쁨으로 동참해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선교사역위원회에서 여러분이 내신 선교헌금으로 재봉틀 5대를 구입해서 함께 몽골로 보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봉제를 배워서 생계를 유지하는데 유용하게 쓰여 질 것입니다. 우리의 정성이 모아지면 사랑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판 우물이 영하4-50도가 넘는 날씨 물을 길러가는 수고를 덜어주었습니다. 우리가 건축한 게르를 통해 복음을 듣지 못했던 청소년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중국의 쿤밍성지교회도 삼자교회로 공인을 받아서 나날이 부흥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의 성지아카데미를 통해서 청소년들에게 비전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인도의 뉴델리에서도 성지유쓰센터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역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은혜요 축복입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성탄예물을 드리실 때도 정성을 다해 하십시오. 내가 받은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내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와 사랑을 담아 성탄예물로 드리십시오. 그 속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쳐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칭찬받는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금번 성탄절은 우리 모두가 은혜를 이미 입은 자로 그 은혜를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둘째, 성탄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천사를 통해 성탄의 복음을 들은 마리아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여기서 ‘종’은 ‘둘로스(dulos)’로 ‘노예’를 뜻합니다. 이런 점에서 개역성경이 더 실감나게 번역을 했습니다. “주의 계집 종이오니”
성탄을 맞이하는 자세는 바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겸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에게 성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교만한 자의 마음속에 성탄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마리아처럼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당시 정혼한 처녀가 아이를 가지면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헌신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계절에는 자신의 이기심을 비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만일 마리아가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결단과 헌신이 없었다면 성탄은 이루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천사의 음성을 듣고 결단합니다.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이 가라하면 가고, 서라하면 서야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성탄절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마리아와 엘리사벳을 통해 주님의 성탄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 있었기에 성탄은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깊히 기억합시다. 그리고 그 은혜에 우리 모두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미련하고 부족한 우리를 통하여서 어둠의 이 땅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증거 하기를 원하십니다. 서서평 선교사, 한 여인의 헌신이 어둠의 조선 땅에 희망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작은 사랑과 정성이 어둠의 이 땅에 새로운 소망의 빛을 비추는 등불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성지교회가 이 성탄에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로 아름답게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마리아처럼, 엘리사벳처럼, 서서평 선교사처럼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위대한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 말씀하시면> 찬양드리며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 이끄시는 데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
눅 1:39-45 / 이준행목사
서론
지난주일 목사님들 모임에서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한숨 섞인 설교를 하셨습니다. “제가 20년을 넘게 설교했는데, 절대로 사람은 설교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많은 목사님들이 큰 소리로 “아멘”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이분만이 아니라 많은 목회자들이 느끼는 큰 좌절과 실망은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쉽게 변하지 않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 저도 우리 대공원 교회에서 11년 동안이나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살아계신 성전이다.”라고 말해왔지만 아직도 교회로 살기를 소망하는 분들이 많지 않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설교를 통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왜 설교를 해야 할까요? 저는 설교를 통해 마음이 찔리고, 고민하고, 회개하고, 새롭게 살고자 변화를 결단하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이 저의 설교를 통해 큰 은혜를 받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결단이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이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그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그 마음의 생각을 감찰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이렇게 은혜 받은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목장을 찾아가 나눌 때 변화하고자 하는 마음에 불을 댕기는 것과 같습니다. 장작의 불길도 혼자 타오르면 약하여 연기만 피우면서 쉽게 꺼져버리지만, 모아지면 그 불길이 이글거리면서 활활 타오릅니다. 교회도 받은 은혜를 혼자 간직하면 주일에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하지만 토요일쯤 가면 “내 잔이 빵구가 나서 다 새버렸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받은 은혜가 모아져서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어야 활활 타오릅니다.
박노해라는 시인이 호미에 관한 글을 남겼습니다. “잘 보관된 호미는 녹이 슬고 만다. 호미는 밭고랑에 있을 때 상처로 닳아가야 온몸이 빛난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편하게 살도록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혼자 신앙생활하면 그 믿음과 은혜가 녹이 슬어버립니다. 설교에 감동을 받아도 금방 녹이 슬어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쁨과 슬픔, 감동과 은혜를 서로 나누며 호미처럼 살 때, 서로 부딪치며 그 삶이 광을 내는 것입니다. 2015년도 부딪치면서 상처로 닳아 아프기도 했지만 한 번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그 부딪침 때문에 여러분의 인생이 광나는 것입니다(광나는 인생이시군요. 집사님을 보면 눈이 부십니다).
지난주에 묵상한 말씀에서 마리아를 찾아온 천사가 하늘의 은혜를 전했습니다. “성령이 너를 덮어 아기가 태어날 것이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분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마리아는 이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듣고 주저하지 않고 “아멘, 주의 말씀이 이루어지이다”라고 응답했습니다. 이 은혜가 너무 커서 혼자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도 혼자 그 은혜를 감당하려고 했다면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 은혜를 나누고 확인할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 은혜가 식기 전에 따끈따끈한 그 은혜를 붙들고 빨리 찾아갔습니다.
39절,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절,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아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했지만, 성령으로 자신에게 아이가 잉태할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때 만나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을 만나면 “너는 바보다. 이거야말로 미친 짓이다” 이런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믿음으로 사는 사람,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합니다. 마리아는 동일하게 이러한 은혜를 받은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은혜는 같은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더 풍성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모닥불처럼 활활 피어오르는 은혜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나누는 관계를 지체라고 부릅니다.
지난 수요일 간증을 하나 나누었습니다. 40대를 시작하는 한 형제가 직장에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아내와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고, 건강에도 이상이 왔습니다. 정신과 의사, 그리고 선배들과 상담했지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민하다가 죽고 싶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침대에 누워있는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아들 곁으로 가서 미안한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아들,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 그러자 아들이 즉시 답변했습니다. “아버지 같은 사람이요.” 그 순간 기중기로 한 대 얻어맞는 충격을 느꼈습니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뛰쳐나와 화장실로 들어가서 세면대에 물 틀어놓고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삶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이렇게 강한 영향력을 주는 관계가 가족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19절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부릅니다. 마음속에 담아 있는 아픔을 다 이야기 할 수 없지만 서로 나누면서 새 힘을 얻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구나. 나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구나. 힘들어도 나를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이처럼 교제하면서 새 힘을 얻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도 교제하며 서로 힘을 얻었습니다.
41절,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절, 큰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왔을 때 놀랍게도 엘리사벳이 임신하고 있었고, 그 아이가 뛰놀았습니다. 엘리사벳을 직감했습니다. “여기 찾아온 마리아가 세계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주님을 품고 계신 어머니구나” 두 어머니의 만남은 새 시대가 동터오는 만남입니다. 이 일은 사백년의 침묵을 깨시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시작하시는 창조의 역사인 것을 서로 확인하는 만남입니다.
마리아의 손을 잡고 엘리사벳이 묻습니다. “얼마나 당황했니? 천사가 너에게 뭐라고 말했니?” 마리아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나에게도 그랬단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 사백년의 침묵을 깨고 어둠을 밝히는 어머니 둘이 이런 교제를 나누는 만남입니다. 혼자 가면 힘든 길인데, 함께 가는 길이기에 행복한 길입니다. 이 만남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태중의 아이조차도 성령이 충만하여 기뻐 뛰노는 만남이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라고 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내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위대합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 모세를 지킨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히브리인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다 죽이라”는 왕의 명령이 산파들에게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믿음은 쉬운 믿음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믿음입니다. 이 여인들의 믿음이 모세를 태어나게 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도 목숨을 걸고 모세를 지켰습니다. 3개월 동안을 숨어 기르다가 갈대상자에 아기를 담아 나일강에 띄웠고, 애굽의 공주가 그 아기를 건졌을 때에 유모가 되어 그 아기를 데려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자녀를 지키며, 믿음으로 왕의 말을 거부했던 위대한 여인들의 믿음이 위대한 구원의 아침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볼 때 이 여인들보다 더욱 위대한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여인으로 보였습니다. 처녀인 마리아가 자기의 인생을 송두리채 걸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는 태어날 예수님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긴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오직 태어날 아기, 그 이름을 예수라 할 아기를 위해 존재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여인, 위대한 어머니 마리아를 엘리사벳이 칭찬합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우리 교회 자매들이 이런 칭찬을 듣는 위대한 믿음의 자매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즈음 KBS 드라마 “부탁해요 엄마”가 시청률이 높은가 봅니다. 엄마 고두심과 딸 유진이 원수처럼 서로 싸우지만 엄마의 마음에는 오직 딸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드라마입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울 수도 있고, 시장에 나가서 막일도 할 수 있고, 잘못도 없이 무릎 꿇을 수 있는 분들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사는 분들은 위대합니다.
고종만 시인이 쓴 ‘어머니의 기도’입니다. “이 땅에는 오늘도 기도하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드리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영원까지 계속될 간절한 기도입니다.” 어머니들은 자녀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십니다. 이러한 위대한 어머니들이 있기에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대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는 믿음입니다. 우주를 밝히는 생명의 빛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빛이 있으라.”고 하신 말씀의 능력으로 생겼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푸른 바다, 각종 새와 물고기, 수많은 짐승들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있으라. 충만하라”고 말씀하심으로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많은 별들이 생겼습니다. 그 별을 바라보고 있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하늘의 별들만큼 너의 후손이 무성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슬픈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나이 늙도록 한 명의 자녀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없는 아브라함을 도닥이며 말씀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너의 아내 사라가 아들을 잉태할 것이다” 처음에는 믿지 못했지만 말씀대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 말씀에 인생을 걸고 살았을 때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이 마리아의 믿음입니다. 나이가 늙었지만 그래도 사라는 아브라함이라는 남편이 있었고, 엘리사벳은 사가랴라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처녀의 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분이 글을 올렸는데, 세상을 바꾸는 데에는 단 두 명만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무엇인가에 미친 사람과 그 미친 사람을 지지하며 돕는 사람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말씀대로 창조하시는 하나님께 미친 사람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이러한 마리아를 지지하며 돕는 사람입니다. 이 두 어머니가 세상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보물이 들어있는 거대한 비밀금고는 힘으로 열리지 않습니다. 내 생각대로 이리저리 돌려도 열리지 않습니다. 그 비밀금고의 주인이 입력해놓은 비밀번호가 일치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여는 키도 이와 같습니다. 내 힘과 내 계획, 내 뜻대로 열심히 살아도 열리지 않습니다. 내 인생을 창조하시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내 편 만들려고 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 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편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 코드가 맞으면 철컥 하고 인생이 열리게 됩니다.
마리아는 도무지 윤리적이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의 계획과 딱 들어맞는 코드입니다. 이 믿음이 마리아로 하여금 위대한 어머니의 길을 가게 한 것입니다.
45절,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평가입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여자다. 복이 있는 여자다.” 얼마나 감동적인 평가입니까? 누군가가 2015년을 살아온 여러분의 삶을 평가한다면 무엇이라고 평가할까요? 여러분에게도 이런 평가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세상과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여러분이길 기도합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분이구나” 이런 인사가 있는 교회되기를 기도합니다.
성탄의 기다림
눅 1장 39~45절 / 이동원목사
최근에 목회자를 청빙 하고 있는 교회의 한 장로님이 저에게 추천을 의뢰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목사님,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어요". 오늘 이 땅의 교회들은 신학교 졸업생 과다 배출로 고통받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엔 신학교에 학생이 안와서 일군 부족으로 사역의 정체현상을 겪는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목사 후보생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사람이 없다니". 이것은 결코 숫자상의 문제는 아닌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질적으로 우리시대의 이 민족사회, 우리교회가 필요로 하는 준비된 일군의 부족이 문제인 것입니다.
어쩌면 마리아와 요셉이 살고 있는 시대가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세계를 정복한 로마엔 철학적으로, 사회적으로 훈련된 얼마나 많은 일군들이 많았고, 예루살렘에도 유대교의 엄격한 종교적 훈련을 받은 얼마나 많은 일군들이 있었는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찾고있는 사람들은 이들 가운데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은 뜻밖에 나사렛 땅에서 이름 없는 틴 에이져 의 소녀 마리아를 선택하여 구세주의 탄생이라는 기적의 일을 행하고자 하셨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어떤 자질을 보셨는지를 보았고, 오늘의 본문은 마리아의 잉태이후의 출산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그녀는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역사의 무대 위에 그녀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고 있었던 시점이었습니다.
아마 여기계신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것을 확신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쓰임 받는 인생을 살고있지 못하다고 느끼신다면 그가 나를 본격적으로 쓰실 때까지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쓰심을 기대하는 사람마다 어떻게 준비하며 때를 기다려야 할까요?
1. 기뻐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42절에 보면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마리아의 구세주 잉태를 알고 "큰소리로 불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큰소리'라는 단어는 본래 "기쁨의 부르짖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어서,44절에 보면 엘리사벳의 아기(요한--6개월 앞선)가 마리아가 잉태한 구세주이신 아기를 알아보고 기쁨으로 뛰놀았다고 고백 합니다. 마리아 자신도 이 사건후에 찬양하면서 47절에 보면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소식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당연한 라이프 스타일은 기쁨의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마리아의 인생의 장에 좋은 일만 예측되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만일 마리아가 삶의 초점을 자신의 편안함과 안전함에만 맞추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으나, 그녀의 기쁨의 비밀은 하나님의 뜻의 실현에서 자기의 존재의 의미를 찾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2. 교제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쓰심을 기대하는 사람마다 해야 할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교제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는 기뻤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쓰시겠다는 선언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기뻐만 한 것이 아니라 이 기쁨을 나눌 대상을 찾았고 그래서 엘리사벳을 찾아 간 것입니다. 본문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39절에 보면 이때에 마리아가 빨리가서 40절에 엘리사벳을 만나게 됩니다. 왜 하필이면 엘리사벳을 찾았을까요? 친척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36절--친족) 아마도 더 중요한 이유는 그녀가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36절을 읽어보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어떻게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는 것이 가능한가를 설명하면서 엘리사벳의 실예를 든 것입니다.(물론 이 두여인의 경험에는 본질적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마리아는 결혼이전이었고 남자 없이 잉태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두 여인 에게는 공유하는 경험이 있었는데 곧 같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끼리 끌리게끔 되어 있습니다. 공감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만남으로 형성되는 그룹을 사회학적으로 homo-geneous 그룹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치유의 경험이 발생합니다. 나눔이 잘 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교제에는 위로, 모방, 치유 그리고 변화의 강력한 경험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건강한 삶을 위해 소그룹의 교제가 필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약 3개월 여의 엘리사벳 과 의 교제를 통하여 미래를 직면할 새힘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미래의 사역을 위해 이런 교제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3. 찬양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마리아의 기쁨은 한걸음 더 나아가 찬양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본문 바로 다음 문단이 바로 "마리아의 찬가"(THE MAGNIFICAT)입니다.-46절에 보면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하며 노래를 시작합니다. 마리아는 찬양하면서 출산을 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은 최고의 태교교육 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찬양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찬양 중에 거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찬양할 때,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 하시고, 능력을 행하시고, 기적을 베푸십니다. 때로, 우리가 찬양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찬양이라는 단어가 너무 종교화된 까닭입니다. 찬양은 영어로는 PRAISE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칭찬입니다. 여러분, 칭찬 받으시면 소감이 어떠신지요? 기쁘시지요? 삶의 에너지가 생깁니다.
이것이 칭찬의 능력 곧 찬양의 능력입니다. 칭찬하는 관계, 칭찬하는 공동체에는 건강함이 있습니다. 이 건강함은 바로 미래를 준비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저의 기도는 우리 모두가 이렇게 기뻐하고 교제하고 찬양하면서 미래의 사역을 준비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 받은 여인의 노래
눅 1장 39~54절 / 이병일목사
오늘은 예수님이 오신 날, 즉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절기인 대림절 첫 주입니다. 대림절은 성탄절 앞의 네 주 동안인데, 한 주마다 보라색 초를 하나씩을 더해가며 켜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하늘말씀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와서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 후에 마리아는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를 받자마자 성령이 충만해져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은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았고, 당신의 태중의 아이도 복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의문이 나는 점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복이 과연 어떤 복일까? 통념적으로 생각한다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인이 임신을 했는데, 복은 무슨?’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복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 여인의 노래에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누가의 탄생이야기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경건한 기도문이라기보다는 혁명적인 구원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앙에서 마리아는 복 있는 처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순종하여 메시아가 인간으로 태어나는 데 그릇이 된 여자로 여겨져 왔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오히려 마리아의 노래에 나타난 혁명적 성격을 희석시키는 작용을 했습니다. 전통적인 마리아의 이미지는 권위에 순종적인 여인으로 각인되었습니다.
또한 성서를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이 마리아의 노래 속에 담겨있는 내용과 의미보다는 그 노래의 저자나 특성에 관하여 논쟁함으로써 그 노래의 혁명적 성격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 노래를 종교적인 한계 안에서만 연구하는 것은 이 승리의 노래가 구체적이고 총체적인 사회정치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는 점과 고대 유대 사회의 특정한 역사와 성서적 유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를 사회정치적 관점, 그것도 민중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면서 이 노래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성서에는 마리아의 노래와 전승사적 맥을 같이하는 노래가 몇 가지 있습니다. 루가복음에서 스가랴의 노래(1:68-79), 시므온의 노래(2:29-32)가 있으며, 히브리 성서의 미리암의 노래(출애 15장), 드보라의 노래(사사 5장), 한나의 노래(1사무 2장), 유딧의 노래(유딧 16장)가 있습니다.
이 노래들은 모두가 이미 일어난 구원사건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기쁨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들에 사용된 단어들은 억압적인 원수들을 무찌르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하느님을 기리는 승리의 노래 전승에서 나왔으며, 다시금 그 전승을 생생하게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노래를 종교적으로 경건한 사람의 칭송이나 순종적이고 유순한 여인의 다소곳한 찬양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아무런 전제를 하지 않고 마리아의 노래를 읽는다고 할지라도 그 내용은 분명히 혁명적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분명 마리아의 노래는 이스라엘의 해방자인 하느님에 대한 찬양에 집중하고 있으며, 출애굽과 같은 해방의 사건에 대한 기억, 새로운 구원을 약속하는 예언의 말씀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노래를 부르는 마리아나 이 노래를 듣는 청중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사건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고, 가나안의 왕들로부터 구조되고, 블레셋 족속으로부터 보호받았던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마리아에게 임심의 사실을 알려준 천사 가브리엘은 계시적 비전의 상황에서 등장하여 백성들이 계약에 대한 헌신을 지속하고 압제자들에게 저항할 수 있도록 독려하며, 하느님이 그 백성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압제자의 지배를 머지않아 끝장낼 것임을 알려 주는 천사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하느님을 구원자로 찬양하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목소리이며, 구원의 실현을 위한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복 있는 여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여인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구원 사건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복 있는 여인입니다. 마리아의 노래에서 선포된 하느님의 혁명적인 행위는 종말론적인 구원이 아니라 역사적인 구원이며,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마리아의 노래가 예수 탄생 이야기의 서두에 배치된 것이 그 증거입니다.
마리아 노래의 내용을 봅시다. 마리아는 영혼[ψυχή]과 마음[πνεύμα]으로 해방자[σωτήρ]인 주님[κύριος]을 찬양합니다. 여기에서 찬양한다는 것은 미친 듯이 “기뻐하며 날뛰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48절은 마리아가 이렇게 기뻐하며 날뛰듯이 찬양하는 이유[ὅτι]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이 비천한 여종[δούλη]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하느님의 종”이라고 하고, 하느님을 “자기의 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가 된 유대의 상황 속에서는 굉장히 의미있는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너무나 쉽게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스스로를 하느님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로마의 식민지 하에서는 태양신 아폴로의 아들인 로마 황제만이 “주, 퀴리오스”라고 불릴 수 있었으며,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은 “종, 둘로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로마의 황제가 아닌 하느님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황제숭배를 거역하는 것이고, 로마 황제의 통치를 부정하는 국가전복을 기도하는 죄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바울로가 그의 서신 서두에서 항상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은”이라고 시작하는 것의 의미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의 49절부터는 비천한 여종인 마리아가 당당하게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찬양할 수 있었던 근거가 나옵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의 사람들이 극명하게 대립되면서 거론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교만한 사람들, 권세 있는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사람들, 부유한 사람들과 배고픈 사람들.
이 사람들에 대하여 거룩한 이름을 가진 전능자 하느님이 행하신 큰일은 그들의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입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 먹이시고, 치부하여 풍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내어 쫓습니다. 가난하고 초라하여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높이시고, 권력을 휘두르며 통치하는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립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풀어 동정하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을 흩어버립니다. 이 것은 하느님의 큰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강렬한 희망이 됩니다.
51절에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교만한”을 다르게 표현하면 “마음[καρδία]을 이해하는[διάνοι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카르디아’[καρδία]는 욕망의 자리로써의 마음을 표현하는 단어이고, ‘디아노이아’[διάνοια]는 목적과 계획을 가진 생각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즉 교만하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목적으로 삼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느님은 이런 사람들을 키질하여 흩어버린다는 것이 마리아의 희망이고, 이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행하신 거룩한 일은 마리아가 하느님을 찬양하는 근거가 되고, 마리아가 이러한 하느님의 일을 찬양하는 것은 그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입을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라 온 몸으로 그 찬양의 근거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마디즘”(유목주의)입니다. 노마디즘이란 이미 굳어진 관계의 망을 뚫고 나가 기존의 배치에 저항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사유․실천의 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정된 관계의 질서 속에서 지배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지배질서에 저항하여 굳어진 관계를 바꾸는 것을 혁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노래는 혁명적입니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대선 후보가 누구냐, 서울시장 후보가 누구냐 하며 경쟁을 합니다. 그들이 정권을 향한 욕망으로 그들의 길을 달려갈 때에 그 옆에서는 850만 명의 비정규직들이 산재보험의 혜택도 받지 못하면서 1년에 3천명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350만 명의 농민들이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항의하는 자리를 고도로 훈련된 기독대원들을 투입하여 진압하고, 게다가 고 전용철 님의 죽음을 은폐조작으로 책임회피하려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정권을 향한 욕망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항의가 매년 되풀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한 장기적인 대책은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불을 찾아 그대로 돌진하는 불나비나, 떼 지어 몰려다니는 하루살이처럼, 그들의 모습은 마치 스스로의 목숨을 불 속에 태워 버리려는 듯 정권을 향해서만 달려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권을 잡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앞에서 설명한 교만한, 즉 “자신의 욕망을 목적으로 삼는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하느님은 반드시 그들을 흩으시고, 우리도 그것을 희망하고 그렇게 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를 비롯한 성서의 많은 노래들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는 근거는 예수님이 그의 전생애와 목숨까지도 바쳐서 이루려 했던 하느님 나라와 전승사적 맥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거룩하신 큰일이 실현된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의미를 기억하는 대림절 기간에 우리를 독려하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실천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마리아를 복 있는 여인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 마리아의 노래를 소리 높여 함께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복은 어려운 현실, 모든 사람이 외면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그것에 희망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그 꿈이 현실이 되기 위해 온 몸으로 찬양하며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부끄러움을 하느님의 복으로 바꾸며, 사람의 비천함을 뚫고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는 근거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들과 다가올 시간들 속에 언제나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현실로 이루는 것은 바로 우리의 묷입니다. 우리의 복입니다. 우리의 찬양입니다.
세상으로 나가십시오. 부딪혀오는 현실과 당당히 맞서십시오. 그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펼치십시오. 우리의 힘이 겨자씨처럼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하느님과 함께 만들어갈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받아들여 당신의 나라를 향해 걷게 하신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먼저 걸어가신 예수님의 용기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걸으며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거룩한 영의 역사가
예수님의 오심과 동시에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펼치려고 노력하는
당신의 자녀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언제나 어디서나 일어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리아의 고난과 영광
눅 1장 39~56절 / 홍문수목사
금년에도 어김없이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벌써 12월이 되기가 무섭게 세상은 성탄 분위기를 내느라 야단입니다. 번쩍거리는 트리, 요란한 캐럴, ... 물론 장사 속으로 그런 거지만 교회보다 세상이 더 빨리 더 열심히 성탄절 준비를 하나? 그런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세상이 주도권을 쥐고서 성탄절 문화를 점점 세속화시키는 것 같아서 속이 상합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예수님이건만 그분은 온데간데없고 흥청거리고 먹고 마시며 노는 게 주류를 이루는 듯합니다. 그래서 마치 성탄절은 1년 중에 ‘제일 잘 노는 날’로 낙인찍힌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태와 달리 성탄절은 가장 경건하게 보내야 할 신앙 부흥의 계절입니다. 또한 가장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되는 전도의 계절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이런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세상의 들뜬 분위기에 편승해서 엄벙덤벙 지나갈 게 아니라, 세속 문화에 경건한 신앙으로 맞불을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성탄절의 기쁨을 맛보고 또 세상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먼저 성탄과 관련된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사9:, 11:, 마1:~2:, 눅1:~2:, 요1:를 비롯해서 복음서를 많이 읽을 것) 그러면 성탄의 참 의미를 발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에는 특별히 불신 이웃에게 성탄의 의미를 적어 전도 성탄카드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성탄절을 가장 성경적으로 보내는 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 취지에서 오늘부터 3회에 걸쳐 성탄 메세지를 전해 드립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 성탄의 참 의미를 되새겨 보시고 구체적인 신앙의 결단과 실천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금년 성탄절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오늘은 수태고지 사건(천사가 마리아에게 잉태 사실을 알려준 사건, 눅1:26~38)과 그 이후에 마리아가 불렀던 찬양마리아 송가(마리아 찬가, Magnificat, 눅1:46~55)에 관해 살펴봅니다.
[1] 동정녀 잉태의 필연성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굳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셔야 했는가? 인간 구원이 방법이 다른 건 없는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얼마든지 다른 방법도 가능할텐데 말입니다. 아주 궁금합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와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 죄가 인생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만족과 기쁨을 빼앗아갑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영혼을 지옥으로 끌어갑니다. 롬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육체의 죽음 외에 ‘영적인 사망’과 ‘영원한 사망’을 포함합니다. 죄가 인생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근본 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다른 문제들은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위해 애를 써도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물질을 많이 소유한다고, 출세한다고, 세상 향락을 누린다고 인생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까? 단 한 가지 죄 값을 치루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히9:22에 보니까,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므로 죄를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죄 값을 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인간이 직접 죄값을 치루고 멸망 당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십니다. 이 두 가지 면을 잘 조화시켜서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 것이 곧 ‘대속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인간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신 겁니다. 그게 곧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인간의 죄를 대속하려면 인간과 같아져야 합니다. 동시에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대속이 가능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인간의 몸으로 오시되, 죄가 없는 모습으로 오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녀의 성관계를 통해 태어나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원죄를 물려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이 원죄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동정녀의 몸을 사용해서 탄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동정녀 중에서도 정혼한 여인이 가장 적합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역사적 배경에서 보면 정혼한 여자가 그 순결성에 대해 공적으로 보증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사생아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혼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법적인 효력을 가질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결혼을 약속했지만 함께 동거하지는 않습니다. 1년 정도 그렇게 지냅니다. 이 기간 동안은 순결이 유지돼야 합니다. 만일 이 때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면 간음죄로 인해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니까 정혼한 여인은 절대 순결합니다. 마리아가 정혼한 시기에 그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케 하신 것은 하나님의 절묘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2] 마리아에게 제시된 고난
문제는 이 방법이 하나님의 아들이 구세주로 오시기 위해 유일한 길이지만 마리아로서는 엄청난 고난을 요구받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마리아가 잉태하면 대번에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게 됩니다. 잘못하면 돌에 맞아죽을 위험조차 있습니다. 혹시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평생 사생아를 낳은 미혼모라는 낙인이 찍혀 수치와 굴욕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정혼한 요셉에게 파혼을 당할 게 뻔합니다. 그 당시 마리아가 10대 소녀였을 텐데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고난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다가와서 전해준 잉태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을 겁니다. 마리아가 얼마나 당황했을까 짐작이 됩니다. 34절 보면 그 심경의 일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기쁨의 찬양
당황하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차근차근 설명을 해줍니다. 마리아가 잉태할 아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다며, 그 예로서 친척 엘리사벳을 언급합니다. 엘리사벳은 늙었지만 잉태했지 않았냐 하는 겁니다. 35절~37절.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런데 놀라운 것은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가 고백합니다. 38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자신을 계집종으로 말하는데, 이 말은 헬라어로 ‘둘레’(δουλη)인데 여자 하인 혹은 여자 노예라는 뜻입니다. 주인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만 되는 존재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겠다는 겁니다. 이래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게 된 것입니다.
그후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지금 자신의 잉태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은 그 사람밖에 없습니다. 오직 그로부터 격려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를 방문해서 이야기하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재확인하고 찬양을 부릅니다. 46절~55절 내용입니다. 이를 가리켜 흔히 ‘마리아 찬가’ 혹은 ‘마리아 송가’(Magnificat)라고 부릅니다.
마리아는 비록 자신에게 큰 고난이 닥쳐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높이 찬양합니다. 특별히 비천한 여인을 선택해서 그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로 찬양합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사실 그에게 예상되는 고난은 엄청난 것인데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목숨의 위험, 수치와 파혼의 위험 등이 코 앞에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내내 모친으로서 겪을 고난도 엄청난 것입니다. 눅2:35 보면 시므온 선지자가 마라아가 장차 겪을 고난을 가리켜 이렇게 예언합니다.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을 지켜봐야 되는 어머니의 고통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가 보면 그 입구에 큰 조각상이 하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달려 주은 예수님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품인데 마리아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나 가슴에 확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이토록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건만 마리아는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그리고 기쁨과 감사로 찬양합니다. 놀라운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잉태도 기적이지만 마리아의 신앙 또한 기적 같습니다.
[4] 마리아의 축복과 영광
이렇게 믿음을 순종한 마리아가 어떻게 됐습니까? 놀랍게도 그 인생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이 임하였습니다.
① 축복 : 마리아는 큰 위험만 당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하나 하나 해결해 주셨습니다. 마1:18~25 말씀을 보면 요셉에게 천사를 보내 마라아의 잉태에 대해 해명해 줍니다. 그로 인하여 마리아는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고 수치를 당하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이 천사의 말을 그대로 믿고 마리아를 져러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탄생할 때까지 동침하지 않고 잘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사생아라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도 사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에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후에 헤롯왕의 핍박 등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었지만 오히려 예수님 때문에 철저한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절대로 손해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마6:33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은 우리 인생에 무거운 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 생활이 때때로 부담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내 인생을 붙들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마11:29~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 선교사가 새로 부임했습니다. 처음이라 지리를 잘 몰라 현지인의 안내만 받아야 했습니다. 어느날 강물을 건너게 됐는데, 현지인이 큰 바위를 안겨주면서 건너가라는 겁니다. 빈 몸으로 가기도 힘들텐데 이게 웬 일인가?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하는 수 없이 따랐습니다. 그런데 강물 한 가운데 가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물살이 하도 세서 만일 큰 바위를 안고 가지 않았다면 휩쓸려버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큰 바위돌은 짐이 아니라 그를 지켜주는 안전 장치였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보장해 줍니다. 책임져 줍니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며 사는 성도입니다. 솔로몬이 구했던 ‘지혜로운 마음’(왕상3:9)이 바로 그겁니다. ‘지혜로운 마음’은 히브리 원어로 ‘레브 쇼메아’인데 ‘듣는 마음’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 지혜라는 겁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은 이런 신앙을 잘 배워서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항상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② 영광 : 마리아는 인류 역사 상 여인 중에 최고의 영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구별됩니다. 그들은 마리아를 신성시하여 숭배의 차원까지 치우칩니다. 성모 무죄 잉태설, 성모 승천설 등을 주장하고, 성모는 하나님의 어머니라서 기도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비성경적인 내용들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마리아도 우리처럼 죄인이고 예수님으로부터 대속의 은총을 받았던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의 영광은 대단합니다. 천사의 예언(31절~33절)이나 엘리사벳의 칭송(42절~45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죠. 엘리사벳은 산골 처녀 마리아에 비해 지체가 높은 분이었지만 마리아를 높여 칭송합니다. ‘내 주의 모친’이 자기에게 찾아와 주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면, 주의 일에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예비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피동적으로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자발적인 고난에 헌신하면 하늘의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면 마리아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겪지만 장차 얻을 영광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것입니다. 롬8:17~18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런데 이런 영광은 솔직히 부럽지만, 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헌신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남의 이야기일 때는 쉽지만 내 이야기가 되면 너무 어렵습니다. 어느 선교회 모임에 갔다가 한 목사님의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선교하는 목회를 지향하는 분으로 선교 메세지를 전하며 많은 선교 헌신자를 배출하는 분입니다. 선교 헌신자가 나오면 너무 귀하다고 격려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분의 따님이 선교사로 헌신했다고 선언하자 가슴이 철렁했다고 합니다. 물론 금세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님을 축복했지만 말입니다. 그 간증을 들으면서 제게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우리가 남은 생애 주의 일에 더욱 힘쓰고 헌신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하는 신앙을 위해서! 그래서 주의 영광에 동참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성탄의 계절! 마리아의 고난에 관한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기시고 그 귀한 신앙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이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앙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부디 마리아가 체험한 축복과 영광을 우리도 체험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나님
눅 1장 39~56절 / 성홍모목사
우리 주님의 나심을 축하하는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대림절 기간 우리는 다시 오시는 주님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와도 감동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 최대의 명절인 성탄절이 오는데도 감격이 없습니다. 또 한번의 성탄절이 지나가고 있다는 식으로 무덤덤 합니다.
기다림이란 말을 합니다. 기다림이란 가슴이 저미도록 아픈 일입니다. 기다림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합니다. 출근한 남편이 저녁이 되면 퇴근하여 집에 돌아옵니다. 밤7시를 넘기지 않고 돌아옵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럴 것이요, 내일도 그렇게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규칙적으로 집을 나서고 돌아오는 남편이라면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그저 당연히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녁 8시가 됩니다. 남편이 아무런 연락도 없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 늦어지는 것이려니, 이제 9시가 됩니다. 9시가 되었는데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나도 분명 문제가 난 것입니다. 이러다가 밤 11시가 되었는데도 전혀 연락도 없다고 하면 집에 있는 아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야단납니다. 아이도 아닌데, 어디 가서 찾아올 것입니까? 연락이 닿는 곳은 다 연락해보지만, 쉽지 않습니다. 아무런 연락도 안하고, 아내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밤 11시에 들어올 남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매맞아죽든지, 혼자 고독을 씹으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이제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오늘의 현실을 거부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물질만능과 쾌락적인 삶은 우리의 기다림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 노아의 시대처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집을 늘리는데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그런 생활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필요한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집을 늘리는 것으로 일생을 마친다고 하면 그는 동물적인 삶을 살고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수단이지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현실의 권력은 기다림을 그대로 두지 않고 말살시키려고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많은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들 중에 많은 이들이 기다림을 포기하고 지금 현실에 만족하고 시류를 좇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기다림이란 언어자체를 버린 것은 아니지만, 기다리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처음의 기독교인들은 임박한 주의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답게 살았습니다. 그런 간절한 기다림은 현실 사회를 정화시켰으며, 주의 복음을 전파하려고 자기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많은 이들이 기다림의 모양은 그럴듯하지만, 기다림의 알맹이는 빠져버렸습니다. 천국이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천국이란 말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신이 죽어가니 할 수 없이 천국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다양합니다. 가족끼리 휴가를 떠나는 이들이 있고, 연인끼리 다정한 추억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조용히 집에서 쉬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아기 예수님이 이 땅 위에 탄생하신 것을 감사하고 축하드리고, 주님이 기뻐하실 일들을 찾아 열심히 감당해야만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나심을 감사하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성탄절의 주인이 아니라, 아기 예수가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더욱 낮아져야만 합니다.
어떤 글을 보았는데 일년 중에 악한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달은 12월 달이며 제일 좋아하는 날은 바로 성탄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가장 경건해야 하는 날인데 많은 사람을 죄악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특수를 노리는 백화점과 할인 매장들, 관광지나 호텔과 오락시설들은 손님을 유치하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주님이 좋아하실 일은 하지 않고 마귀가 좋아할 일들만 하고 있어,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탄절에는 청소년들을 지켜야 한다"는 광고문구를 보았습니다. 가장 탈선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표어를 만드는 것입니다. 목자들이 양떼들을 지키는 것처럼 교회와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청소년들을 안전하게 지켜야 합니다. 교회에서 밤을 새워도 좋으니 교회에 나와서 놀았으면 좋겠습니다.
성탄절을 잘못 지키는 사람들 때문에 교훈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성탄절을 바르게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은혜도 받고 본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탄절을 바르게 보내는 사람들 중에 동방박사나 목자들이 있습니다. 백성의 서기관들과 제사장들 심지어 헤롯왕까지도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에 가지 않았어도 동방박사와 목자들은 경배하러 찾아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의 탄생을 가장 감사하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성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조연 역할을 잘 감당하신 분이 있는데, 그가 마리아였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사람으로 태어나시려면 한 분의 어머니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처녀이어야 하였으며, 그의 자원하는 헌신이 없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나사렛이라는 같은 동리에 사는 요셉이라는 청년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유대인들의 결혼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약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약혼은 어릴 때 양 부모님의 의사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직업적인 중매인에 의하여 어른들끼리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약혼은 결혼할 당사자 두 사람의 맞선도 없이 이루어집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보다는 인생을 오래 살아왔고 세상을 잘 아는 부모들이 알아 판단하여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습니다. 그들 유대인들은 결혼이란 인생사에 있어 너무나 진지하고 중요하고 신성한 것이기에 인간의 애정이나 마음 같은 것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어른들이 다 알아서 맺어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정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혼은 이미 맺은 약혼을 공식화하고 랍비 앞에 가서 서약을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알도록 널리 공포합니다. 일단 정혼이 이루어지면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게 됩니다. 만일에 약혼한 사이 인데 어느 한 편에서 상대가 싫다고 하면 파혼해야 됩니다. 그러나 정혼한 후에는 이혼수속을 밟아야 헤어질 수 있지, 일방적인 말 한마디로 파혼이 되지 않습니다. 정혼한 마리아라는 하면 결혼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세 번째로 결혼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정혼한 후 일년 안에 좋은 날을 잡아서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대개 일년의 정혼기간이 끝나는 때에 결혼식을 거행합니다.
정혼한 사이에 예비신랑이 죽든지 예비신부가 죽으면 과부처녀가 생기든지 홀아비총각이 생기게 됩니다.
정혼이라는 것은 우리의 결혼과 같은 법적인 효력을 가지면서도 사회적으로 약혼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습에서 정혼은 신부가 신랑의 집에서 살지 않는 것뿐이지 결혼한 것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정혼한 사이는 아직은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신부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혼전 탈선으로 보아서 엄청난 사회적인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요 동정녀였습니다.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순결한 처녀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처녀들은 상식적으로 살아야 하고, 그리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부정모혈을 통하여 태어나는 법인데, 처녀가 임신하였다고 하면 임신을 가지고는 거짓말 할 수 없습니다. 둘러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만천하에 공개되는 법입니다. 정혼한 기간에 부정한 아이를 가졌다고 하면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 사람도 못할 일이요, 불행한 일이지만, 돌을 들어 치는 사람들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의 가정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자기의 가정을 귀하게 여기고, 혼전에 순결을 지키려고 힘을 썼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천사 가브리엘이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마리아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에게 천사가 나타난 것이며, 천사의 인사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이런 인사가 어찌된 일인가 하여 생각하고 있는데,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이 때에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하실 것이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어 아들을 가질 것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노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정말 그렇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더 이상 의심할 것도 없고, 안 되겠다고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드리니까 천사는 마리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신실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앞으로 자기에게 쏟아질 엄청난 수모와 비난과 멸시와 그리고 목숨을 내어놓아야겠다고 각오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다가오는 여러 문제들, 조금만 지나가면 배가 불러오게 될 것이요, 가족이 알아차리고, 남편 될 요셉이 알아보게 될 것이요, 아기를 어디 가서 낳을 것입니까? 인간의 논리와 경험을 가지고 이런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어떤 영적인 진리를 가지고 설명한다고 하여도 그 말이 먹혀 들어갈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포기하고 자신의 미래를 다 하나님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도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신에 홀려서 임신하였다고 하는 말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누구에게도 설명이 되지 않는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마리아는 제사장 사가랴의 집으로 가서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사가랴로 인하여 임신한 엘리사벳을 찾아서 3개월 정도 있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에는 세례요한의 어머니는 세례요한을 임신하여 6개월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문안했을 때에는 세례요한이 될 아이가 복중에서 뛰어 놀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가...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여 마리아가 임신한 것이며,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인간이 지은 모든 죄를 우리 하나님이 직접 감당하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는데,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성육신의 교리를 이해하고 영원한 진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의 일치는 하나님이기도 하고, 인간이기도 하신 중보자가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으니 그는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셨습니다. 마리아가 낳게 될 예수님은 단순한 유대인이지 않고, 주후 1세기에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였다는 사실을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뻐하였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의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찬송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눅1:46-55의 말씀은 마리아의 찬미, Magnificat라고 하여 유명한 찬송이 되고 있습니다. 내용은 마리아가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으며, 권세 있는 자와 비천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평하신 정의를 말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성취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마리아의 찬송을 통하여 만나게 되는 하나님은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나님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가난하였으며, 눈에 띄는 여자도 아니었고, 알려지거나 중요하게 여김을 받거나 그럴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자비와 긍휼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가장 작은 자를 선택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세상에 알아줄 만한 사람, 너무나 소중한 사람, 눈에 잘 띄는 그런 사람을 택하시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자기는 계집종, 여종이었습니다. 이름도 없습니다. '여종'이란 말은 여자 노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둘로스'가 남자노예를 말하고 '둘레'라는 말은 여자노예를 말합니다. 노예라고 하면 그는 자기의 목숨은 자기의 것이 아니었으며, 자기의 시간이 없고, 자기의 소유가 없고, 그는 오직 주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겸손한 사람으로 자기를 그렇게 비천한 여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여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장 위대하신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려고 하셨습니다. 비천하다는 말은 '타페이노시스'라고 하여 굴욕, 비하, 겸비라는 말이었습니다. 약하고, 의기소침하여 있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낮은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는데 우리의 비천함을 벗어버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반열에 세워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여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만인이 사모하고 우러러보는 주의 모친 마리아가 된 것입니다. 천주교회가 신의 어머니로 숭배하지만 않았다면 참으로 존경하고 좋아할 믿음의 어머니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습니다. (53)
하나님은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은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주린 사람이란 배고픈 사람을 말합니다. 굶주린 사람입니다. 굶주린다는 말을 목마름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주리다는 말은 "페이나오"라는 말인데, 예수님이 40일간 금식하고 주리셨을 때 사용한 말입니다. 주린 영혼에게 가장 위대하고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지치고 기진하고 피곤한 심령에게 좋은 것으로 먹이시고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구원받을 수 있었는지 다만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고 긍휼히 여기고 기억하십니다. (54)
하나님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에 석달 동안 머물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받들고 섬길 수는 없지만, 그의 순수하고 정직하고 겸손한 신앙과 인격은 본받아야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그에게 "주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하였으며, 엘리사벳은 "여자 중 가장 복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하였으며,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해야 하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기 희생과 헌신으로 응답할 때에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비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비천함을 돌보시고 주린 심령을 좋은 양식으로 채워주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소리높여 찬송해야 합니다. 성탄절에 되면 천사들이 불렀던 찬송, 마리아가 불렀던 찬송, 시므온이 불렀던 찬송을 부르면서 아기 예수님의 나심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증언하는 것과 노래로 증언하는 것은 전연 다른 감동과 느낌을 주게 됩니다. 늘 찬송하면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비천함을 돌보아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능력있는 신앙생활로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한 믿음으로 메시야를 맞읍시다
눅 1장 41~42절 / 강성찬목사
메시야의 오심을 에언한 미가 선지자는 이사야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로서, 제사장이나 귀족 출신이 아닌 예루살렘 동남쪽의 한 작은 마을 출신입니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남왕국 유다는 끊임없는 위협에 놓여 있던 때에 활동하였는데, 이사야가 정치 현실에 초점을 맞춘 데 반해 미가는 철저히 가난한 백성들의 입장에서 메시아의 오심을 부르짖었다는 점에서 대조를 이룹니다.
4장에서는 주로 종말에 도래할 메시아 왕국과 그 구성원들인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메시아 왕국의 영광과 평화 및 남은 자의 포로 귀환을 통한 선민 이스라엘의 회복과 열방에 대한 선민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어 5장에서는 그 초점을 새 왕국의 주인이신 메시아께 맞추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탄생 직전에 선민 이스라엘이 대적들에게 받을 수치와 고난을 서론적으로 간략하게 언급(1절)한 이후, 예루살렘 남방에 있는 작은 성읍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나실 것(2절)과, 메시아가 포로생활의 속박으로부터 남은 자들을 해방시키실 것, 그분의 통치와 함께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것(3절), 그리고 오시는 왕이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를 보여준다(4절). 그분은 평화를 가져올 것이며 그 자신이 우리의 평강이시다(5절)고 합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 5:3)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미 5: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미 5:5)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라고 말씀 합니다.
유대인의 제사 제도에 능통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제사 제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와 대조합니다. 죄를 없이 할 수 있는 제사에 대하여 성경적 근거 아래에 말씀하고자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6-8)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임하셔서 새 언약을 세우셨음을 말씀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의 우월성을 다룬 히10:1~18절의 가운데에 놓인 5-10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의 완전성과 일회성이 반복되며, 특히 영원성이 강조합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라 드려지는 동물의 희생 제사는 반복적으로 드려져야 했는데,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인 번제나, 범죄한 자가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하나님께 드린 속죄제(6절)와 같은 제사는 인간의 죄를 없애 주지는 못하였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충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셨고 그 효과는 영원합니다. 이제 동물의 희생 제사 형식의 옛 제사 의식은 폐지되었으며,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제물인 스스로의 몸을 희생하여 드리심으로써 불완전한 구약의 제사는 완성되었음을 말씀합니다.
(히 10: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히 10: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히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히 10: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고 말씀 합니다.
미가 선지자와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한 메시야에 대해 누가 복음을 통해서도 말씀 합니다
처녀의 몸으로 수태하게 된 마리아가 자신의 친척인 동시에 장차 자신이 낳을 예수의 선구자가 될 세례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이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고 했을 때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라고 대답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는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겸손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은 자기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가브리엘로부터 엘리사벳의 수태를 고지 받았을 때 모든 일을 제쳐 두고 과거에 잉태치 못하던 엘리사벳의 아픔을 위로하고 또한 늦게 하나님의 은혜로 수태케 된 엘리사벳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눅1:39)라는 말씀은 마리아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즉시 떠났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수태고지를 들으면서 엘리사벳 방문을 떠올린 것입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사흘 길입니다. 이러한 전제에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먼 여행을 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눅 1:40)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 1:41)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눅 1:42)고 합니다.
임신 6개월에 엄마 뱃속의 아이가 뛰노는 것은 흔히 있는 자연적 현상입니다(창 25:22). 그런데 자연적인 것 같은 현상을 특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까닭은 이 순간 아이가 뛰 노는 태동이 다른 때와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이것을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기록하였음이 분명하다고 이해합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요한이 복중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방문을 기뻐 뛰놀며(44절)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역사하신 성령의 감동이 그의 모친 엘리사벳에게도 역사해 그녀의 마음에 놀라움과 감사, 사랑을 가득 채워주었다. 엘리사벳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는 예언을 통해 나타났으며, 이러한 예언의 영은 구약에서도 종종 나타났습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 그 인사를 들은 엘리사벳, 복중의 태아, 모두가 성령 안에 있었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기적들과 비교했을 때 그 의아함과 이해 불가능성에 있어 전혀 뒤지지 않는 놀라운 사건들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탄생에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한 믿음으로 메시야를 맞이 합시다.
성부와 성자를 연합시키는 성령 충만함으로 메시야를 맞이 합시다.
태초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성부로서만이 아니라 삼위일체로서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천지창조의 순간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말씀(로고스)으로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안에서 내재적으로 연합하여 상호교류, 내주하십니다.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있는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범죄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대속의 방법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놀라운 일, 성부가 성자를 보내시는 기적이 인류 역사속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는 경탄할만한 접점에 바로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성령으로’잉태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감싸져서 마리아의 태중에 성자로 임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인류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서막이 오르는 그 시점에, 하나님이 이제 하늘에 계시지 않고 땅으로 거처를 옮기신 것이 아니요, 성부는 성부로서 성자는 성자로서 사역하며 활동하실 때에 삼위 하나님을 일체로 연합시키십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한 연륜 있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를 반신반의하던 한 남자가 수도사에게 다가가 진정 기적이 일어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약 자네 아내가 벙어리인데 어느 날 갑자기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게 바로 위대한 기적이 아니겠는가요?” 그러자 수도사를 찾아온 그 남자가 대꾸했습니다. “어르신은 진정한 기적이 무엇인지 모르시는군요.” 이 말에 노승이 벌컥 화를 냈습니다. “그럼 당신은 진정한 기적이 무엇인지 안단 말인가? ”남자가 말했습니다. “제 집사람의 입이 닫히기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기적이겠지요.”
유대 사회에 한 풍자적인 속담이 있다합니다. 랍비가 간절히 바라던 바를 하나님께서 아시고 이루어 주실 때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랍비가 이루어 드린다면 그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라고 원하던 메시야가 오시는 기적이 성부와 성자가 일체이심을 보증 하시는 성령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함으로 메시야를 맞이 합시다.
성자와 우리를 연합시키는 성령 춤만함으로 메시야를 맞이 합시다.
친척 마리아가 방문한 것을 알고 기뻐한 것은 엘리사벳이기 이전에 그녀의 태중의 아이었습니다. 엘리사벳 복중에 있던 세례 요한은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태중에서 기쁨으로 뛰어놀았으며,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 1:15) 라고 하신 말씀대로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음으로써 가능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서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분이 메시아임을 알았기 때문이며,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도 41절 말씀대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음으로 마리아가 메시아를 잉태했음을 알고 기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원사를 이루어가고 계시건만, 정작 우리가 오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지 못한다면, 유대 땅에 태어난 한 아기가 바로 우리에게 주신 바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죄로 인하여 인간과 하나님은 분리되었고, 이에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를 화해시킬 수 있는 중보자로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부와 인간 사이에서 중보자로서 연합의 길을 열어 주시지만,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서 예수님을 주로 믿고 시인하게 하는 중보의 역할을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알고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우리 같은 무지한 존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진짜 기적 아니겠습니까. 이 기적을 일으키시어 ‘오셨고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소망을 갖게 하고, 믿음을 갖게 하며, 회개하게 하시는 영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충만함으로 메시야를 맞이 합시다.
우리 서로를 연합시키는 성령 충만으로 메시야를 맞이합시다.
어머니 복중에 있던 요한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음으로서 마리아 태중의 메시아를 알아보고 복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또한 그의 어머니도 성령이 충만하여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성령님은 전 인류를 위하여 오신 메시아가 다름 아닌 나의 구주가 되게 하시고,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신 나의 하나님이 되게 하시며 하나님과 우리를 연합시키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은 그 기적과 은혜안에서 우리 성도들 서로가 기쁨으로 연합되게 하십니다.
메시아의 초림이 임박한 상황에서 마리아는 홀로 열 달을 지내지 않고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갔고,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반갑게 맞이하며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참된 교제(코이노니아)를 이루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입니다.
메시아의 재림을 앞둔 오늘의 성도들도 홀로 기도하며 지낼 뿐 아니라, 주님 오심의 기쁨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기쁨을 전하여 알게 함으로써 우리 서로를 연
합시키시는 성령님의 충만한 은혜 안에 거해야 합니다.
창조 세계의 창시자이신 하나님께서도 창조의 질서를 준행하시며 그 질서 안에서 행하시고 일하십니다. 그런데 창조 질서를 초월하여 발생하는 일을 기적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창조 질서보다 상위의 개념인 구원 질서를 위하는 한에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동정녀가 잉태하게 된 것은 우리의 과학적 지식으로 설명 불가한 기적이지만, 이처럼 규명할 수 없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기적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성 안에서 성부 여호와와 성자 예수님을 연합시키시고, 경륜적 삼위일체 안에서 성자와 우리를 연합시키시며, 나아가 성도들 서로를 연합시키는 보혜사(pracletos, 중재자)이십니다. 이 같은 연합은 성령님과의 연합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령님과의 연합은 성령의 연합, 그 기적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페르시아 왕 압바스는 종종 농부로 가장하고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살펴보곤 했습니다.
성탄절이 되어 그는 어떤 특별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길을 떠나 공중목욕탕 근처를 한동안 돌아다녔습니다. 얼마 후 그는 불 때는 방으로 들어가 불을 때는 사람과 더불어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니다. 그 사람은 자기 점심을 왕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왕은 그 후 그 사람을 만나러 여러 차례 갔습니다. 그 때마다 그 두 사람의 우정은 깊어갔습니다. 드디어 왕이 자신이 페르시아 왕임을 밝히고 나서 그에게 성탄절에 무슨 선물을 원하는지 묻자 볼 때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부(富)를 원치 않습니다. 다만 당신이 지금까지 주신그것만을 계속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시 찾아 오셔서 저와 더불어 얘기만 나눠 주시는 것으로 족합니다.' 성탄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오심입니다. 이 일에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부와 성자를 성자와 우리를 우리 서로를 연합시키시는 성령 충만으로 메시야를 맞이 합시다.
말씀대로 믿은 복 받은 여자
눅 1장 39~45절 / 성홍모목사
성탄절이 되면 항상 생각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한 부분을 편집하였습니다. 감상하신 후에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생애 최고의 성탄절” 프로페차이 동영상 자료실 - ‘성탄절’에서 2번 상영
세상에는 참으로 존경받을만한 여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유교사상과 봉건제도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나라에서 여성대통령이 탄생하는 것을 보면, 민주화 되어졌습니다. 우리나라가 참으로 많이 발전되었습니다. 당선자께서는 아주 잘 하실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예배와 설교 핸드북에 나와 있는 한 여성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전라도 광주에서 1934년 6월 미국선교사 한 분이 과로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 남긴 것은 담요반장과 강냉이 가루 2홉이 전부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의학연구용으로 의대에 기증되었습니다. 가난한 조선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주고 떠나셨습니다. 가난하고 어두운 나라 조선에 와서 22동안 가난한 조선 사람들이 먹는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신고 살다가 모든 것을 주고 떠났습니다. 그는 ‘조선인의 친구’로 산 것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살았고, 천의 형벌을 받은 것으로 버림받고 내침을 당한 나환자들과 병든 이웃의 친구로 살다가 떠났습니다. 그는 독일계 미국인 선교사였던 엘리제베스 셰핑(Elisabeth J. Shepping 서서평 1880-1934)이란 여자 선교사님이셨습니다. 그 분이 1912년에 한국에 들어오셨으니 올해가 101년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조선 땅은 가난과 고난으로 얼룩져 있었고, 사는 환경이 매우 열악하였습니다. 선교사님은 순회 진료를 다니며,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고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당시 여성들 500명을 만나면 이름을 가진 여성은 10명이 채 안 되었다고 합니다. 선교사님은 학교를 세워 배우지 못한 여성들을 가르쳤으며, 나환자들의 권익을 위해 힘썼습니다. 과부들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일본총독부가 나환자들의 정관수술 정책을 세우자 나환자들을 이끌고 총독부를 찾아가 행진을 벌림으로 오늘의 소록도 갱생원이 세워지게 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최초로 광주시민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는데, 기록에 의하며 ‘수천의 광주시민과 나환자들이 좇아 나와 어머니라고 부르며 오열했다’고 합니다. 서서평선교사의 삶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이요,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원본의 삶입니다. 1934년 그녀가 사망하자 동아일보는 "자선, 교육 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민의 자모 서서평 양 장서. 생전에는 재생한 예수의 칭호" 라는 4단 톱기사를 대서특필하였습니다. 그녀가 별세하자 광주유사이래 처음인 사회장을 치렀습니다. 독일출신 간호사 쉐핑(서서평)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입니다. 32살의 처녀의 몸으로 한국에 들어와 그는 여러 병원, 군산예수병원- 세브란스- 광주제중병원에서 근무하고, 무명 배 저고리와 검정통치마에 남자용 고무신을 신고 금주금연운동, 인신매매반대, 축첩금지, 공창제도 폐지운동을 벌였으며 고아들을 14명이나 양자로 입양하여 먹이고 입히고, 교육 시키려고 미국으로 보내서 그 아이들이 잘 자라 세계 곳곳에 훌륭한 일들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누군가가 찾아오므로 빛이 비추어지기 시작하고,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되었고, 가난하던 사람들이 부요해지고, 비참한 삶이 변하여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 얼마나 갑사한 일입니까?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온 세상이 캄캄하고 암울하였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을 때에 한 줄기 빛으로 찾아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죄악을 다 사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사야9:2에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어둡고 암울하며, 희망도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영원한 생명, 온전한 축복의 세계가 열려졌습니다. 우리는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고 있었는데, 빛이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어두움이 물러가고 생명이 들어오고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오심으로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성탄절은 드러남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습니다.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만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드러났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오심으로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드러났습니다. 인간의 어두운 죄악이 드러나고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절을 기다립니다. 어릴 때에는 크리스마스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요즈음에는 제발 아무런 사고 없이 지나가기만 바랄 뿐입니다. 요즈음 교회들은 대부분이 차분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술집과 호텔, 백화점은 성탄특수를 노리고 판촉에 열을 올리고 기독교인들보다 비기독교인들이 더 좋아하는 크리스마스가 되었습니다. 시내에 나가보면 정말 화려합니다. 일 년 중에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달이 12월이고 가장 좋아하는 날은 성탄절이라고 합니다. 10월 초에 태어난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베이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장 경건한 날인데, 가장 타락한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성탄절에는 청소년들을 지켜야 한다"는 광고 문구를 보았습니다. 가장 쉽게 탈선할 수 있기 때문에 청소년들을 둔 가정에서는 유념하라는 뜻으로 이런 표어를 만든 줄 압니다.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청소년들을 안전하게 지켜야 합니다. 교회에서 밤을 새우며 놀아도 좋으니 교회에 나와 놀았으면 좋겠습니다. 명동이나 신촌에 나가지 말고, 교회에서 캐럴을 부르고 선물을 교환하면서 교회에서 놀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했던 구세군의 창설자 윌리엄 부스 목사님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자녀 중 하나가 부스 목사에게 사인을 부탁했습니다. "아버지, 힘드시겠지만 이 서류를 서명해주시면 재산이 정리됩니다." 부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까스로 서명한 후 그 서류는 봉해졌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서류를 열었을 때 가족들 모두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 부스가 사인해서 남긴 마지막 서류에는 부스 자신의 이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대신 그 서류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그가 마지막 까지 남기고 싶었던 이름, 그가 세상을 떠나가는 순간까지 붙들고 있었던 이름, 그의 자녀들이 붙들고 살아주기를 기대했던 이름, 그가 그의 가족들에게 남길 수 있었던 최대의 유산은 돈이 아닌 예수의 이름이었습니다.
윌리엄 부스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장차 교회에 닥쳐올 위기를 내다보면서 외쳤습니다.
"20세기의 최대 위기는 성령 없는 종교,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회개 없는 용서, 중생 없는 구원, 하나님 없는 행정 그리고 지옥 없는 천국을 외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알맹이가 없는 빈껍질만의 교회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진정 있어야 할 것이 들어 있을 때, 소중한 것이지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는 불에 태워질 뿐입니다.
오늘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예수님이 없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축하공연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리 준비를 잘하고 멋진 연출이라고 하여도 예수님이 없는 예배는 콘서트는 될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아닙니다. 무슨 축하 예배를 준비하던지,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항상 말하게 되는 사람, 마리아에 대하여 말씀드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리아의 수태고지의 사건이 있은 이후에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있어 마리아의 헌신을 높이 평가해주고 칭찬해주고, 길이 기억해야 하는 인물인데, 마리아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한 편에서는 지나치게 높이고 받들고 숭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라고 하면서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를 신의 반열에 놓고 예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그를 애써 외면하고 오해받기 싫어서 말하지 않고 넘어가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전자의 사람들, 마리아를 숭배하고 지나치게 높이는 이들은 가톨릭교회가 그렇고, 개신교회는 그의 고귀한 헌신마저도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숭배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그의 헌신과 순종은 참으로 귀감이 되고, 우리도 그를 본받아야 하는 귀한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 가브리엘 천사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란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이르렀습니다. 마리아에게 다가가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처녀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고 안심을 시켰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1-32)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는 처녀로 남자를 가까이 한 적이 없었습니다. 한 동리 청년 요셉과 약혼한 사이였지만, 그도 경건한 사람이요, 결혼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1:35)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요, 지금 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둘러 덮으면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여도 여전히 불안해하였습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6-37)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은 성경 중에 가장 확신을 주고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못할 일이 없으시고, 하나님은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라면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마리아가 천사 앞에서 신앙고백과 같은 말을 합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38)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의 여종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둘레”라고 하여 노예를 뜻하는 둘로스의 단수 여성형입니다. 마리아는 처녀로 임신한 것이 드러나게 되면 온갖 수모와 비난과 나아가 돌팔매질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감수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를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마리아의 이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아첨하는 노예적인 복종이 아니라, 인생의 겸손함을 보여주는 것이요, 하나님의 더 크신 뜻에 순종하려는 헌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면 능치 못하실 일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모든 생명의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위임합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고백은 참으로 위대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제3자적인 심정으로 이 사건을 보고 있지만, 아기를 수태하므로 받게 되는 수모와 위기는 상상을 초월할 문제였습니다. 장차 약혼자인 요셉이 어떻게 돌변할지 모릅니다. 파혼은 물론이고 부정한 여자라고 하여 장로들에게 끌려갈 수도 있습니다. 성문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돌에 얻어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떠나면서 하신 말씀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간구하는 것보다 더 좋고 귀한 것으로 역사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마리아는 성탄절에 있어 절대로 주인공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의 헌신은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수단이 되었고, 방법이 되었고, 귀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아들 예수님에게 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모든 성도들에게 존경받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였다는데 있습니다. 지금 거룩한 성탄을 맞이하고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데 있어 가장 본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친족 엘리사벳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나이 많으신데, 임신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천사의 말로는 그가 임신하여 여섯 달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유대의 한 동리로 뛰어 달려갔습니다. 나사렛에서 엘리사벳이 사는 유다는 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습니다. 엘리사벳의 몸에 있는 세례요한이 이제 몸 안에서 6개월정도였는데, 복중에서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눅1:42)라고 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어떻게 아기를 가진 것을 알겠습니까? 마리아가 무슨 자랑이라고 남자 없이 임신하였다고 떠벌리고 다닌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엘리사벳은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 마리아가 임신하였는데, 그것도 성령으로 임신한 것을 알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여 마리아는 세상의 모든 여자 중에 가장 복을 받은 여자임을 알았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43-44)라고 했습니다. ‘내 주의 어머니’라는 말을 하여, 이 말 때문에 천주교회에서는 마리아는 신의 어머니라고 하여 마리아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였다고 말합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실 주님을 그 몸에 모시고 있기에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내 주의 어머니라”고 하였을 뿐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을 인성에 포함시켜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예수님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리아는 메시아요, 주님이신 예수의 어머니이시지만, 하나님의 어머니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신의 어머니라고 마리아를 신성시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수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문안할 때에 엘리사벳의 몸에 있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앞에는 항상 기쁨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당연한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있을 때에 기쁨으로 뛰놀아야 합니다.
엘리사벳은 마지막으로 가장 위대한 설교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45)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은 여자라고 하였습니다. “믿은 ”이란 말은 그리스어로 ‘피스튜시사’라고 하여 동사 ‘피스튜오’의 부정과거능동태분사형으로 이미 믿었다는 말이요, 어느 한 때만 믿은 것이 아니라, 항상 믿고 있었고, 꾸준히 지금도 계속하여 틀림없이 믿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호티’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은 “....이기 때문에, for because)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를 믿은 여자 곧 마리아는 복되다는 말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천사가 와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지금 엘리사벳에게 왔을 때에도 어김없이 자기 몸에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습니다.
시와 시학을 통하여 등단한 시인 김상현의 “노루는 발을 벗어두고”라는 시에서 이런 아름다운 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까마득히 어렸을 땐/ 누워서 별을 세고/ 그 보다 조금 커서는 / 뜨락의 꽃송이를 세고 /그리고 어느 날부터서는 돈을 세다 늙어버렸다.// 가슴에 꽃 시들고/ 꿈 잃어버린 지금은/ 그저 가난할 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탄의 계절에 마리아를 사용하신 것처럼 주의 복음전파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나를 사용하여 달라고 헌신을 드려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의 여종이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목숨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대가를 치루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말이요, 즉시 순종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겸손과 순종, 기쁨과 찬양, 자기 드림과 복종은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여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기쁘게 드리고는 하나님은 비천한 몸을 돌보셨으며, 복되게 하시려고 선택하셨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다음에“라는 말이 가장 고약한 말이요, 우리를 실패로 끌어내리는 사탄의 말입니다. 이런 말은 자기 무덤을 파는 말입니다. 흔히 인생에는 중요한 날이 두 번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자신이 태어난 날이고 다른 하나는 태어난 이유를 발견한 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우리 주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는데,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나를 쓰십시오. 라고 결단하십시오.
말씀대로 믿은 복 받은 여자, 마리아처럼,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