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행복하게...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의 헌신
한국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부흥이 일어나 그리스도인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민족의 근대화에 기여했지만 최근엔 그다지 선한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탄까지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원인 중에
하나로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모습에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헌신된 소수의 사람이 역사를 바꿉니다.
초대교회가 한 시대를 바꾸는 능력을 가진 것은 모이는 숫자나 교회의 크기, 혹은 성도의
지식수준이나 부요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능력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했습니다.
초대교회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을 보면 한 지역, 또는 한 도시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 일어났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말씀에 헌신된 사람이 세상을 바꿉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과의 만남은 이들 부부의 삶의 방향, 목적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정도 고린도에서 사역했을 때 가장 가까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 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 부부였습니다. 왜 고린도에 그렇게 오래 머물러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선교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인구학자들은 2030년이 되면 세계 인구가 81억명이 되는데 그 중 60%인 50억 인구가 수도권에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메가시티 트렌드’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학자들도
이런 메가시티 트렌드에 따르는 세계 복음화 전략을 중요한 미래 선교전략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셋째, 교회와 영적 지도자에 대해 헌신해야 합니다.
브리스길라 부부의 또 다른 헌신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 특히 바울에 대한 헌신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세워졌고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8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가게 되는데,
이때 브리스길라 부부가 동행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동행이 아닙니다.
아예 영적 지도자를 따라 이사를 가는 것입니다.
넷째, 헌신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헌신의 자리에 서지 못하는 것은
자기 계획, 자기 방법, 자기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버릴 정도로 그리스도가
귀하고 자기 계획을 버릴 정도로 교회와 주의 종이 귀하게 보일 때 헌신이 가능합니다.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대 헌신된 자로 우뚝 서게 되길 축원합니다.
김동연 목사(솔로몬일터교회)
겨자씨
이미 사랑하신 하나님
누구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에는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다.
내가 어려운 환경에 있을 때에 어떤 이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고 그분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 없이 무조건 사랑하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명기 6장 5절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이 말씀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마음, 뜻, 힘’이라는 단어의 기본 의미를 찾아보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나타나 있다.
마음은 히브리어로 레브, 뜻은 네페쉬, 힘은 메오드이다.
이 단어들의 기본 뜻은 심장(heart), 목(neck), 힘(power)이다. 심장은 몸에 피를 흐르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고 목은 호흡하게 하는 기관, 힘은 움직이게 만드는 원천이다.
이들의 첫 번째 공통점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기관들이다.
두 번째는 전부 생명과 관련돼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분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수단인 마음, 뜻, 힘, 이 단어에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충분히 들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다.
신민규 나사렛대 총장(상암동교회 목사)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1)
일가 친척 ‘목회자 150여명’ 은혜 주신 하나님
오늘도 어김없이 동네 수영장을 찾았다. 직선거리 25m인 수영장을 정확히 50회 왕복하면
1250m가 된다. 보통 1시간10분이 소요되는 이 수영은 숨도 가쁘고 힘들지만 건강을 위해
주일 외엔 하루도 거르지 않는 나의 일과가 되었다. 주위에서는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는
것이 내가 아직 현장에서 왕성한 사역을 펼치는 힘의 원천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나 역시 이 말에 공감한다. 하나님의 종은 사명자로서 자신을 잘 가꾸고 또 건강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더 역동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내 나이 69세. 참으로 숨 가쁘게 달려온 세월이다. 숱한 희로애락과 거친 파도를 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님은 나와 함께해주시며 힘과 용기, 은혜와 능력을 주셨다.
내 삶에 좌정해 역사해 주신 좋으신 주님을 두 손 들어 찬양한다.
연약하기만 했던 한 홀사모에게 주신 주님의 강력한 은혜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만들어냈고
이제 그 간증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내 고향은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평양이다. 서양 선교사에 의해 증조부부터 복음을 받아들여 난 출생부터 이미 4대
신앙인이었다. 우리 집안이 얼마나 신앙의 뿌리가 깊었는가 하는 것은 아들로 태어나면
목사가 되거나 장로가 되고, 또 딸로 태어나면 사모가 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가풍으로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우리 집안의 일가친척까지 목사가 된 분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니 무려 150여명이나
되었다. 조부도 목회자(이상기 목사)셨고 선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다. 외가 친가가
다 독실한 기독교 가계(家系)였다. 둘째 딸인 나는 할머니의 낭랑한 기도 소리를 언제나
자장가처럼 들으며 성장했다. 새벽기도도 할머니의 등에 업혀 빠짐없이 참석했다.
할머니는 강대상에 호롱불을 켜 놓으시고 잠든 나를 무릎에 누인 채 기도하셨다.
5살 때 6·25가 일어났다. 우리 가족도 평양 큰집을 버리고 남한으로 피란길에 나섰다.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힘든 멀고 먼 길이었지만 우린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걷고
또 걸어 경북 김천에서 얼마 안떨어진 종산골이란 곳에 안착했다. 영양실조에 너무나 힘이
들었던 나는 형체만 겨우 알아보는, 눈이 안 보이는 실명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의사에게 가볼 수도 없는 가난한 형편에 부모님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주님. 이 딸의 눈을 치료해주세요.” 간절한 부모님의 기도는 기적을 일으켜 시력이
회복됐고 다른 어린이들과 다름없이 뛰놀 수 있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당시
설교하던 외국인 선교사 특유의 말투를 곧잘 흉내내 어른들을 배꼽 잡게 만들곤 했다.
그때부터 예능에 자질을 보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씩씩하게 길가로 나가 전도지를 돌리며 전도를 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내가 신앙인으로서 제대로 하나님을 만난 것은 중학교 시절,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결교단 임영재 목사님을 통해서였다. 부흥사셨던 임 목사님은 영적 카리스마도
대단했지만 포용력과 자상함으로 목회자의 본을 보여주심으로 나의 신앙이 바르게
뿌리내리는 데 큰 도움을 주셨다.
오늘의 예배
[6월 3일] 새 역사를 기대하신다면
찬송 : ‘내 주여 뜻대로’ 549장 (통 431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사무엘상 1장 12∼20절
말씀:
‘한나의 기도’에 대해 말씀을 나눌 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엘리 제사장입니다. 한나가 괴로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심연의 깊은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설주 옆 제사장의 의자에 앉아 있던
엘리 제사장의 눈에 들어온 한나의 모습은 기도하러 온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한나에게 꾸짖듯이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2∼14절).
엘리 제사장의 모습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영적인 민감함을 잃어버린
엘리 제사장의 모습은 그 시대가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에 빠져 있음을 알게 합니다.
두 번째는 엘리 제사장이 한나가 취했다고 판단하고 서슴없이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당시 많은 사람이 술에 취한 채 하나님 앞에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대단한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의미 없는 신앙생활, 목적 없는 믿음생활 등 아무런 죄의식 없이 짓게 되는 ‘습관적인 죄’
때문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자신의 간절함이 묻어나는 기도를 알아채지 못하고,
술 취했다고 핀잔을 했지만 한나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15∼16절). 한나는 자신은
술 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원통함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았음을 토로한 것입니다.
한나의 대답은 엘리 제사장의 태도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엘리 제사장은 한나에게 복을 빌어줍니다(17절). 더 놀라운 사실은 한나의 반응입니다(18절).
한나는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주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알고
음식을 먹고 다시는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한나가 엘리 제사장의 영적 권위를
인정한 것입니다. 제사장의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축복 기도를 하나님 음성으로 인정하고, 들었던 한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나의 간절한 기도와 제사장의 말을 믿는 단순한 믿음이 하나님께서 한나를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으로 아들을 낳았고 그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뜻인 ‘사무 엘’이라고 지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한나는 그렇게 부르짖어서 응답으로 받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소중한 아이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한 것을 받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과감하게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최용태 목사(오곡감리교회)
기도:
엘리 제사장의 축복기도를 받고 돌아간 한나가 얼굴에 다시는 근심빛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영적 권위를 인정하는 믿음으로 기도의 응답을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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