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경주 남산리의 절 터를 찾아서
경주의 남산리로 들어가는 길목에 화랑교육원과 통일전이 있다. 통일전으로 가는 길 옆에 헌강왕릉도 있고, 정강왕릉의 바로 옆은 서출지이다. 안쪽으로는 쌍탑이 남아있는 절터가 두 곳이나 있다. 불교가 신라에 들어올 때의 일화도 있고, 불교가 꽃 피웠을 때의 불교 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지도 있다. 서출지 앞의 넓직한 주차장은 경주 사람들이 큰 야외행사를 치루는 곳이기도 하여, 나도 행사에 참석차 몇 번이나 들린 곳이다. 막연히 교통이 불편하여 승용차 없이는 가기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시내버스가 이곳까지 간다는 말을 듣고, 당장 이곳을 찾기로 마음 먹었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사금갑 전설의 장소가 바로 이 서출지이다. 신라 21대 소지왕(일명 비처왕)이 즉위 10년(488)에 못 속에서 나온 노인의 편지 때문에 죽을 위기를 넘겼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삼국유사』에 적힌 내용을 살펴보면 이 연못은 인위적으로 꾸며진 원지(苑池)가 아니라 마을 밖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못으로 보이며 곡지(曲池)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사금갑의 전설이 생겨난 뒤 서출지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사금갑 전설은 소지왕이 이곳에 유행을 나왔을 때 못에서 수염이 허이연 노인이 나와 글이 적힌 종이를 전해주었다. 그래서 서출지이다. 글의 내용은 궁으로 들어가서 바로 금갑에 활을 쏘아라, 활을 쏘면 두 사람이 죽고, 쏘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했다. 노인이 시킨대로 활을 쏘았더니 왕비와 스님이 연통하여 숨어 있더라고 하였다. 이들은 왕을 죽일 계획이었는데, 들통이 나서 목숨을 잃었다는 내용이다.
불교가 신라에 들어와서 궁전에서도 수용하였다. 이에 토속 신앙이(수염이 긴 노인으로 상징) 불안을 느끼고 미리 통보해줌으로, 자신의 종교적 우월성을 나타내려는 설화라고 설명하였다. 어쨌거나 불교의 도입기에 토속신앙과 불교의 갈등을 나타낸 것이 서출지 전설이다.
서출지는 마을 밖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못으로 보이며 곡지(曲池)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주변의 경관이 수려하여 경주 부근에서는 보기 드문 경승지가 되고 있으며 조선조로 접어들어서는 1664년(현종 5)에 임적(任勣)이라는 사람이 물 위로 누마루가 돌출한 팔작지붕의 건물을 지어 글을 읽는 한편 경관을 즐겼다고 한다. 예전의 방문 때는 폐가처럼 보였으나 최근에 많이 손 보아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우리나라에서 손 꼽는 아름다운 고 건축물이라고 한다. 서출지의 서북쪽 구석진 물가에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자태는 연못의 경관을 돋보이게 해준다. 추녀에는 ‘이요당(二樂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을 감싸듯이 우거진 여러 그루의 팽나무 고목과 물가의 배롱나무는 이 못, 원지가 더욱 더 아름답도록 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서출지의 못뚝에 서면 연으로 뒤덮인 이요당 건물이 그림처럼 아름다워서 자주 들렸던 곳이다. 모처럼 버스를 타고 와서 못뚝에 이르니 마침 연꽃이 피었고, 남산을 배경으로 한 건물의 형태가 더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마을 안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복원되어 있는 쌍탑이 있다. 절은 없어지고 탑만 남아있다. 절에 관한 자료나 흔적이 거의 없어서 어떤 절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쌍탑 형식임으로 쌍탑이 유행하던 시기에 절을 지었으리라. 그렇다면 통일 신라 때의 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쌍탑과는 형식이 다르다. 일반의 쌍탑과 형식이 다르므로 불교 미술을 하는 분들이 많이 찾아온다. 나도 그들을 따라서 이 탑을 여러 번 답사했다. 그러나 절의 내력은 알 길이 없어 더 이상 소개할 것이 없다.
동탑은 일종의 벽돌 석탑을 모방한 듯하다. 커다란 2층 지대석 위에 8개의 돌덩이로 짜 맞추어서 기단을 만들었다. 8은 불교에서 상징적인 수임으로, 그런 의미이리라 추정해본다. 그 위에 3단의 네모 난 굄을 마련하여 3층 탑신부를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석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탑의 전체적인 양식은 다른 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양식이다.
서탑은 전형적인 신라 3층 석탑 양식이다. 추정할 수 있는 건립년대는 9세기 탑이다.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으나, 기단에는 8부 신중이 조각되어 있다. 탑의 양식이 독특하여 여기에 조금 설명하였으나, 나의 절집 답사와는 무관한 일이다.
쌍탑이 있는 이곳을 양피사의 절터가 아닌가라고도 말한다. 탑의 동쪽에는 양피지라고 부르는 오래된 못이 있다. 동네 이름도 피촌이라 하고, 못 아래의 들녘도 양피들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쌍탑이 있는 이곳이 양피사라는 절터가 아닌가라는 학자들도 있다.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은 양피사인지, 염불사인지를 헷갈리게 하지만 옮겨보자.
“피리 촌이 있는 절 피리사에 스님 한 분이 있어 나무아미타불만 외웠다. 염불소리가 온 서라벌에서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서라벌 사람은 이 기이한 스님을 염불스님이라고 불렀다. 염불사 옆에 한 절이 있어서 양피사라 했는데 마음 이름을 따서 지었다.”
그러나 서출지의 위치를 두고, 지금의 서출지가 아니고 양피지가 서출지라는 주장도 있다.
남산리 마을을 지나 칠불암 가는 길을 따라가면 골짜기의 초입부에 통일신라 시대의 탑 2기가 서 있다. 2009년에 복원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처음 보는 탑이어서, 내가 이곳을 지닜던 일은 2009년 이전이었구나 싶어, 새삼 빠른 세월을 느꼈다. 이 탑을 복원한 곳이 염불사 옛 터라고 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양피사와 이웃하여 있었다고 하니, 염불사 터로 추정이 가능한 곳이다.
염불사지 쌍탑은 무너져서 탑재들이 뒹굴고 있었다. 이곳에 탑재가 있었다면 여기가 절 터가 맞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주의 유적지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신 분이었다. 1963년에 박정희 의장이 경주를 방문할 때 당시의 군인 출신 시장이 박의장이 지나는 길목인 불국사 역 로타리(구정동)에 이 탑 한 기를 불야불야 옮겻 세워두었다. 구정동 삼층석탑이라 불렀던 이 탑의 옥개석은 이거사지 삼층 석탑의 것을 가져와서 조립하였다.
2009년 1월에 염불사지 쌍탑을 복원하면서 불국사 역 앞에 있는 구정동 삼층석탑을 제자리로 올겨와서, 동, 서 3층 석탑으로 복원하였다. 그래서 사찰은 없이 탑만 복원해두었다. 1963년 1월에 대한민국 보물 200호로 지정하였다. 나는 이 탑들을 처음 보았다. 가까이 가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 탑들은 양피지 탑들처럼 이형탑이 아니고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의 석탑이었다. 그리고는 칠불암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는 서출지의 이요당을 좋아하여, 낙엽이 지는 가을날이나, 베롱 꽃이 피는 봄 날에 더러 이곳을 들렸다. 마을 안의 골짜기로 들어가면 시골 마을의 정취를 듬뿍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차를 없애고는, 서출지 찾는 일은 잊고 있었는데, 교통편이 좋아서 앞으로도 찾아올 만 하다.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시외버스로 경주에 와서, 서출지 오는 버스를 타고, 서출지, 양피사, 염불사를 한 바퀴 둘러보는 일도 괜찮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