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건 명예와 가난 뿐입니다
"대한독립만세!"
1919년 4월 1일.
104년 전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명의 사람들이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 선두에는 유관순 열사가 있었습니다.
출동한 일본 헌병이 총을 쏘았고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19명이 사망했습니다.
19명 안에는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계셨습니다.
그리고 유관순 열사마저 시위를 주도한 죄로
오빠와 함께 일본 헌병대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법정에 선 유관순 열사는 더 이상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 살아간다면
정상 참작을 해주겠다는 판사를 향해
의자를 집어던졌습니다.
그리고 모진 고문을 당하는 와중에도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을 외치던 유관순 열사는
결국 1920년 9월 28일, 향년 17세의
꽃다운 나이에 극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유관순 열사가 남긴 유언이 있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은 고통만큼은 견딜 수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조카 세대 중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유장부 님이 있습니다.
아버지 유관석 선생님은 유관순 열사의
막내 남동생입니다.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이 벌어졌을 때
유관석 선생님은 아직 어린아이였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제들이 체포되어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고,
일본 헌병들의 보복이 무서워서
아무도 유관순 열사의 어린 동생을
돌봐주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 겨우 삶을 연명하던 유관석 선생님은
어린 아들 유장부 님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유장부 님은 큰아버지인 유우석 선생님 댁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어려운 삶이었지만
큰아버지인 유우석 선생님도 유관순 열사만큼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셨습니다.
해방 후에는 신분 세탁을 목적으로 사람들이
가난한 유우석 선생님께 뭉칫돈을 갖고 찾아와서는
남몰래 독립운동자금을 대고 있었다는
거짓 증언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유우석 선생님은 그 사람들에게
폭언을 쏟아내며 쫓아냈다고 합니다.
유우석 선생님 또한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대쪽 같은 분이었습니다.
유장부 님은 생계 때문에 독립유공자 복지회관에서
건물 청소와 주차 관리를 맡아 일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이유 없이 시비 거는 취객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하지만, 한 달 월급 100여만 원을
받을 수 있어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마저도 85세 노환으로 몸 여기저기
불편한 상황이기 때문에 곧 그만둬야합니다.
유장부 님이 현재 살고 있는 집은 대출로
간신히 마련한 전셋집이기에 대출이자도 내야 하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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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부 님을 비롯한 다른 독립유공자 후손분들이
노년만큼은 편안하게 보내실 수 있도록
따뜻한 하루가 돕고 싶습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도록 따뜻한 하루 가족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원문기사 보기 : https://www.onday.or.kr/wp/?p=316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