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시절 서울문화풍경> 선성원
필자가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은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으로 기억된다. 1.4 후퇴로 대구에 피난을 갔다. 아버지는 북에서 쫓겨나 월남한 피난민으로 비록 재산이 없었지만 자식교육만은 꼭 시키겠다며 내가 10살 때 형들과 함께 서울로 유학을 보낸 것이다.
서울로 올라와 처음 타보는 전차도 신기했지만 영화를 처음 봤는데 그 감동이란 내가 영화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당시 본 영화가 아마도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 주연의 '로마의 휴일'로 기억된다. 며칠후 알란 라드 주연의 '쉐인'도 본 기억이 난다.
어린 놈이 무슨 영화냐고 할텐데 우리 집안 셋째형이 지금 생각하면 비록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대중문화의 선구자였다. 지금은 세상을 떴지만 필자와는 11살 차이로 그때 고대생으로 지독한 영화광이었는데 충무로 중국대사관앞 외국책방에서 영화잡지를 사다가 스크랩을 하고 커버는 아버지가 사준 벨벳(비로드)점퍼를 잘라 만들어 주위사람들한테 자랑스럽게 보여주곤 했다.
그러가하면 AFKN라디오를 학교를 갔다오면 하루종일 청취해 필자는 어린나이에 형옆에서 자연스럽게 들으면서 그시절 팝송을 익혔으며 주말이면 형이 필자를 영화관에 늘 데리고 다녔다.(왜냐하면 내가 막내이기 때문에 부모와 떨어져 있는게 측은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이런 환경으로 인해 나 자신도 모르게 영화와 팝송에 취미를 붙이게 되었고 후일 내 직업에 길을 결정적으로 설정해 준 계기가 된다.
학창시절 영화를 보기위해 사복을 입고 극장에 몰래 들어가 미성년자 출입금지 영화를 보던 기억, 명동 달러골목과 중앙극장 뒷골목의 헌 책방을 뒤져 영화잡지(당시는 국산잡지는 나오질 않았고 대개가 미국과 일본잡지였음)를 사 모으던 추억이 새록새록 난다.
필자는 오전에 영화를 보러 가는 습관이 있는데 조선일보 문화부장이자 영화평론가인 정영일 선생(KBS명화극장을 소개한 분)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1회때에는 극장에 손님이 없어 영화에 몰입하기 좋은 시간이라고 했던게 내개 전수돼 그대로 실천하고 있고 지금까지 본 영화가 4000편은 족히 될게다.
이게 도움이 돼 영화와 음악에 관련된 책을 20여권 썼는데 원래 필자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시나리오를 쓴다는게 여간 어렵지않아 포기하고 말았지만 영화는 언제나 내 마음의 안식처이다.
국제극장
1960년대까지만해도 서울시내에 영화관은 열손가락 꼽을만큼 많지 않았다. 당시는 개봉관, 재개봉관, 3개봉관으로 나뉘었는데 본 란에서는 개봉관만 소개한다.
광화문4거리에 국제극장이 1959년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러브 스토리'가 개봉했을 때 광화문 일대에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 극장앞에는 분수대가 있어 젊은이들이 데이트 약속장소로 유명했다. 지금은 롯데면세점이 들어섰다. 여기서 태평로 코리아나호텔로 가다보면 조선일보사가 있는데 옆골목 초입에 아카데미극장이 1960년 문을 열었다.
당시 조선일보사가 운영하고 젊은이의 극장이란 캐치프레이즈를 알렸으며 바로 이곳에서 신성일, 엄앵랑 주연의 '맨발의 청춘'이 개봉돼 대단한 화제를 불러 모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극장위 옥상에 롤러스케이트장이 있었고 극장 옆에는 아카데미 음악감상실이 있어 이른바 우리나라 최초의 젊은이 집결지로 화제를 모았다.
단성사 극장
피카디리 극장
지금은 젊은이의 집결지가 대학로와 홍대앞으로 대표되지만 1960녀대와 1970년대까지만해도 종로2가에서 3가가 집결지였다. 이유는 간단한데 이 일대에 학원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근처에 음악감상실도 있었고 극장은 종로3가가 대세였다. 우선 단성사를 거론하면 종로3가에서 비원 방향 묘동입구에 위치한
단성사는 1907년에 지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으로 재정난과 붕괴사고로 다시 지었다. 일제시대에는주로 신파극단 공연을 주로 했으며 1930년부터 영화관으로 나운규의 '아리랑'을 상영한 유서깊은 극장이다.
1940년 대륙극장으로 이름을 지었다가 1945년 해방과 함께 지금의 단성사로 재단장 한후 우리나라 극장의 메카로 수많은 작품을 소개했고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상영시 영화를 보기위해 관람객이 종로 2가 파고다공원앞까지 줄을 던 기억이 난다. 2005년 멀티플렉스(3개관)로 바꿨으며 2008년 경영난으로 부도가 나 지금은 아산엠 단성사로 주인이 바꼈다.
맞은 편에 있는 피카디리극장은 1958년 지은 현대식 극장으로 주로 외화를 많이 다뤘는데 007 시리즈가 이곳에서 상영했다. 1980년대에 비디오가 유행하면서 극장건물 1층에 젊은이를 위한 비디오극장 에스엠이 인기가 좋았는데 이곳에서 외국의 팝스타 뮤직비디오를 보기 위해서이다.
종로3가 4거리에서 청계천쪽으로 틀어 20-30미터 내려가다보면 우측에 세기극장이 있었는데 영화제작자이자 배우 고은아의 남편인 곽정환이 운영한 국산영화 전문관으로 서울극장, 세기극장으로 상호를 몇차례 바꿨다.
한편 을지로4가 삼풍상가 옆에 위치한 국도극장은 1913년 경성보찬극장으로 출발, 황금좌로, 일제시절 '춘향전'을 상영한 유서깊은 극장으로 해방후 1946년 국도극장으로 재탄생했다. 지금은 그자리에 국도호텔이 들어섰다.
국도극장
여기서 퇴게로 방향으로 가다보면 인현동 입구 4거리에 명보극장과 스카라극장이 마주보고 자리했다. 1957년 개관한 명보극장은 영화배우 신영균이 지은 것으로 처음에는 국산영화를 주로 상영하다가 1970년대부터 외국영화도 같이 상영하기 시작했다. 1994년 한국최초로 복합상영관(멀티플렉스)이며 2008년 폐관을 한후 현재는 신영균 예술문화재단이 명보아트홀로 개명 다양한 예술공연과 실버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맞은편 스카라극장은 1935년 약초극장이 6.25전쟁으로 화재가 나는 바람에 복구불능으로 환도이후에도 그대로 두었다가 1960년대 중반 수도극장으로 문을 열었다. 일제시대에 지은 대리석건물로 그리스풍의 반원형기둥으로 문화재청에 보존신청을 했으나 건축주가 2007년 철거했다.
2009년 명보극장과 건너편 스카라극장 일대를 '가요인의 거리'로 명명했는데 이 일대가 일제시대 영화거리였으며 음악인들이 모여 선술집이나 대폿집에서 모여 인생과 사랑을 논했던 거리로서 스카라극장 건너편에 스카라다방은 1980년대까지도 가요인들의 집결지였다.
여기서 명동입구로 들어가기전 을지로세무소와 평화방송이 있는 4거리에 중앙극장이 있었다. 1934년 지은 중앙극장은 주로 외화를 상영했는데 '토요일밤에 열기', '지옥의 묵시록' 등 작품성있는 영화를 많이 다뤘다. 2014년 철거한후 그자리에 대신증권 사옥이 들어섰다.
여기서 퇴계로로 나가 좌회전하면 퇴계로3가에 1958년에 개관한 대한극장이 있다. 이곳에서 당시 최고의 규모와 영화 장비를 자랑했는데 '벤허', '사운드 오브 뮤직' 등 70밀리 영화를 최초로 상영한 극장으로 20세기 기술팀이 직접 설계를 해줬다. 2001년 멀티플렉스(11개관)을 변경, 지금에 이른다.
대한극장
Sad movie - Sue Thomson
첫댓글 국제극장은 생소하고
나머지 극장들은 가봤거나
지나다니면서 봤던 극장들이네요
예전 제가 다 가봤던 극장들
외화를 보기위해서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영화관들 추억이
되었네요
그시대에 제일많이 본 영화는
나타리 욷. 라챠드 베이머. 죠지
차키리스 주연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영화를
한 10번은 본거 같아요
그때는 음악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햇어요
세드무비
노래가 경쾌해서
우리말로 많이불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