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일신의 안락을 마다하고 늘 사회적 약자와 같이 어울려 사는 삶을 실천하는 의인이자 존경하는 글벗인 대구 범어송치과 송필경 원장께서 이소선 여사의 12주기 행사에 부친 글입니다.
ㅡ작은 선녀, 이소선 어머니 9월3일 12주년 기일을 맞아
‘리틀 빅 맨’이라는 농구에서 사용하는 영어 표현이 있습니다. 키는 작아도 키 큰 선수 이상으로 높이 뛰어 올라 골을 넣는 능력을 가진 선수를 일컫는데 우리 민중의 어머니 이름은 소선(小仙), 작은 선녀라는 뜻입니다. 어머니의 몸은 작았지만, 이 땅의 모든 억압받은 민중을 껴안은 가슴은 한없이 넓었고 선녀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는 독립운동 혐의로 일제 순사에게 처형을 당하고, 개가한 어머니 밑에서 ‘몸에는 이밖에, 집에는 쥐밖에 없는‘ 비참한 가난 속에서 갖은 구박과 설움을 겪었었고 학교를 다니지 못해 교실 창문 너머로 글을 배워 까막눈에서는 벗어났고 일본 정신대에 끌려가 강제 노동을 경험했습니다.
18살에 결혼하여 2남 2녀를 키웠지만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 남편 때문에 가난을 몸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시장 바닥에 떨어진 배춧잎을 모아 깨끗이 씻어 시래기로 팔아 입에 풀칠했고 심지어 한 때는 걸식으로 아이들 주린 배를 겨우 달랬습니다.
41년을 그렇게 사시다가 1970년 11월 13일을 맞았습니다. 그날 큰 아들 전태일은 노동자의 비참한 처지를 알리기 위해 자기 몸을 불태웠고 숯덩이가 된 아들은 병원에 온 어머니에게 ‘자신의 죽음을 결코 헛되이 말라’고 부탁했고 어머니는 ‘꼭 그렇게 하마’라고 말했습니다.
노동자 분신이 불러온 파장이 만만치 않자 권력 최고 실세인 중앙정보부가 나서서 상인들에게 돈을 거둬 보상금을 마련했는데 먼저 어머니에게 3천만 원을 제시했습니다. 그때 중산층 집 한 채가 2〜3백만 원 정도니 집 10채 이상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불러 모았습니다. “거절하고 싶지만 그럴 경우 너희들은 공장에 다니며 학비를 벌어야 한다.” 딸 전순옥(*19대 의원)이 물었습니다. “그 돈 받으면 어떻게 돼요?” “그건 오빠를 팔아먹는거다.” “그럼 저는 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공장에 가겠어요.” “그럼 됐다.”라고 말씀하시고, 영안실에서 기다리던 정보부 요원과 상인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 온 돈 가방에서 1만원 다발들을 한 움큼 쥐어 영안실 공중에 뿌렸습니다. “돈 좋아하는 놈들 다 가져가라, 나는 돈이 없어도 된다.” 이 돈을 공중에 뿌리는 순간 <전태일-이소선 어머니>의 신화가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아들이 목숨까지 던져가며 얻으려고 한 "노동자의 권리'를 흩뿌릴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막 시동을 걸기 시작한 남한 자본주의 체제의 잔인함과 쓰라림과 부조리를 민중이 깨우친 첫 외침이었습니다. 아들 몸에서 타오른 불꽃의 사자후에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셨고 그 후 어머니는 2011년 눈감을 때까지 41년 동안 아들이 열망한 민중의 존엄성을 찾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세상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이 몸이 자그만 어머니가 한없는 용기와 민중에 뜨거운 사랑을 지닌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억압받는 노동자들, 독재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희생당한 사람들, 분단 조국을 극복하려는 통일 열사들, 고되고 헐벗은 빈민들, 그 모든 민중의 포근하고 든든한 어머니 역할을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 사회는 전태일 열사가 그토록 당부한 노동자 세상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소선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촛불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그런데도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 사회적 약자의 삶은 여전히 팍팍합니다. 노동자의 산업재해 사망률, 국민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의 수준입니다.우리 사회는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속은 곪은 상처투성이입니다.
소수의 젊은이들이 수억 원 이상 하는 고급차를 몰고 유흥가를 질주할 때, 많은 비정규직 젊은이들이 지하철에서, 발전소에서, 건설현장에서 일하다가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컵 라면 먹을 여유조차 없이 말입니다. 누추한 곳에 사는 사회적 약자는 자연 재해 참사에 목숨을 잃고, 생활고에 찌든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끓고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숯덩이 몸으로 눈 감은지 53년, 이소선 어머니가 온 몸으로 억압에 저항하다 눈 감은지 12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엄청난 물질적 생산을 자랑하지만, ‘우리 사회는 진보하고 있는가?’, ‘과연 민중의 삶은 행복한가?’ 라고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가꾸면서 바랐던 길로 우리는 올바로 가고 있는가를 정직하게 말입니다.
요즘 갖은 명목으로 민주와 노동을 배신하는 탕아들이 많습니다, 어머니!
그 날 분신 소식을 듣자마자 어머니를 찾은 서울대생 장기표와 전태일 기념회 사무총장을 지낸 김문수는 1990년대 중반에 민주와 노동을 배신한 원조였지요. 하지만 “남들은 다 장기표 욕을 한다 해도 나는 절대 못한다. 난 장기표 편이다. 진짜 잘 됐으면 한다. …김문수처럼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 들어가서 대가리 숙이더라도…”
“효도하던 자식이 불효한다고 내칠 수 있나. 만나서 야단치고 달래고 회초리를 들기도 하고 어르기도 해야지. 또 잘난 자식이 있으면 못 난 자식도 있는 법 아니냐.” 사회의 어머니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이런 어머니 말씀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다 큰 자식에 손주까지 둔 제 처지에서 이제야 어머니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한 때나마 전태일 정신을 잇겠다고 가열 찬 투쟁을 하며 아들같은 인연을 맺은 장기표, 김문수를 끝내 잊지 않으셨습니다. 탕아도 어머니에게는 자식이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때에 참 고마웠던 아들로 생각하셨습니다.
아, 이게 어머니의 너른 가슴이었던가요?
첫댓글 뜻 깊은 글 고마워!!!언제나 멋진 래철 친구님!!!
가슴이 먹먹해
그 사건 정말 충격적이였죠
세월이 흘러도 다시 한번
그 분의 숭고한 희생 정신 깊이 새겨 봅니다...
내가 이글을 이제사 보게되네.
이소선 작은선녀시네.
본시 뿌리가 있던 집안이었고마~
그시절에 비하면 노동조건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고칠게 많지~
나또한 그러한 불공정 노동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충분히 이해가 가네만 현재의 한국산업 구조에서 임금만 제대로 주면 노동시간은 그렇게 쿤문제가 아닌것 같은데 임금을 제대로 안주면서 그렇게 하면 안되지.
김문수 장기표 한때는 독재정권에 맞서서 목숨걸고 싸웠지만 그렇게 쉽게 변절해 버리니 많이 안타까웠었네.
김문수가 보건복지부 장관할때와 경기지사할때 동포와의 대화를 우리가게에서 했었는데 사람은 괜찮아 보이더만~
좋은글 잘 읽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