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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일을 행하셨으니
눅 1:46-56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 1:46-56 / [마리아의 찬가] 마리아가 노래하였다. `오, 이 몸이 주님을 찬양하며 47) 내 구주 하나님을 기뻐함은 48) 주님이 비천한 계집종을 돌보셨음이라.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라 하리니 49)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그분이 내게 큰일을 하셨음이라. 50) 그분의 자비는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대대로 있으리로다. 51) 그분의 팔이 능력을 베푸심이여!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52) 그분은 왕들을 그들의 왕좌에서 쫓아내시고 천한 자들을 높이셨도다. 53) 그분은 마음이 갈급한 자들을 만족하게 하시고 부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냈도다. 54) 그분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심이여! 자비를 베푸시마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셨도다. 55)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분의 자비는 영원히 있으리로다.' 56) 마리아는 석 달쯤 엘리사벳과 같이 지낸 뒤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엘리사벳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마리아가 입은 복된 은혜를 예언하자 마리아도 동일한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입어 화답합니다.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46-49) 먼저 마리아는 그녀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행하실 일에서 자신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마리아 자신이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내 구주 하나님,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한 것입니다. 또한 마리아는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다고 했습니다(48).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에서 영적으로 비천하고 절망적인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리아의 겸손과 순종, 그리고 주를 향한 강한 신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50-53) 마리아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때 사람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상반된 결과로 드러나게 됩니다. 바로 높이심, 배불리심이란 의미가 있는 ‘구원하심’과 흩으심, 내리치심, 빈손으로 돌려보내심이라는 의미가 있는 ‘심판하심’이 그것입니다. 이 상반된 두 가지의 결과가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 땅의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각각 극적으로 반전되어 나타납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자주 반복되는 주제 중의 하나로서 메시야가 오셔서 나타나는 종말론적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54-56) 마리아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종인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돌아보며 오래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열방 가운데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마리아는 주인이시며 왕이 되신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터져 나온 찬양입니다. 마리아는 복중에 있는 아기의 탄생이 아브라함과 그의 백성에게 약속된 언약의 성취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적용: 하나님은 언제나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찬양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친구가 많은 것도 병입니다. 20대가 친구가 많은 이유는 20대는 연약하고 무섭기 때문입니다. 20대는 내면의 무서움을 감추고 두려움을 잊기 위해 친구들과 같이 있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50대가 되면 사람들은 혼자 있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서의 경험도, 세상에 대한 이해도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무 때나 불러도 나올 수 있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 둘 셋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 설 교 >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이영훈목사 / 눅 1:46-55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이 시간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배를 어쩌다가 급한 상황이 있어서 늦게 오거나 빠질 수 있는 경우가 있어도 우리 예수님은 늘 일찍 오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사랑의 예수님을 다 만나시기 바랍니다.
올해가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제 한 두 주 밖에 안남았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인데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한 것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정말 이제 올해가 지나기 전에 철저히 우리 회개하고 반성하고 다가오는 새해 정말 주님 앞에서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신 모습으로 쓰임받는 그런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옆에 분과 인사하겠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있습니다."
(찬송가 401장)
주의 곁에 있을 때 맘이 든든하오니
주여 내가 살 동안 인도하여 주소서
주여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빠른 세상 살 동안 주여 인도하소서
피난처인 예수여 세상 물결 험할 때
크신 은혜 베푸사 나를 숨겨 주소서
주여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빠른 세상 살 동안 주여 인도하소서
세상 풍파 지난 후 영화로운 나라와
눈물 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주여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빠른 세상 살 동안 주여 인도하소서
주여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빠른 세상 살 동안 주여 인도하소서
주님, 나의 일생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가정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일생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우리 교회에 일생다가도록 우리교회를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크게 부흥시켜주시고 주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대한민국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다같이 기도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
(통성기도)
주여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빠른 세상 살 동안 주여 인도하소서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가는데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부끄러움뿐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인데 감사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상처받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한 저희들의 모든 모습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시고 주여 우리 마음 가운데 풍성한 주님의 사랑, 은혜 ,치료, 용서가 임하여 일생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웃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믿음의 일꾼들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오늘의 제목은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누가복음 1장 46절로 55절 말씀을 가지고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눕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예수 믿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일생일대의 기적이요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 우리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의 출발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는 그 믿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성장은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고 말씀을 지켜 행할 때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믿음의 기초를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 여러분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여러분의 가진 그 어떤 것에 믿음의 기초를 두지 말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에 여러분이 믿음의 기초를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장차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된다고 하는 그러한 천사의 음성을 들었을 때 감사, 감격하며 하나님께 올려드린 찬송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마리아의 찬송으로 많은 곡들이 지어졌는데 이 마리아의 찬송 속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비천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
첫째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 번 따라해 주세요. "비천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힘 있고 권세 있고 물질 많은 사람들에게 그 앞에 가서 줄을 서고 잘 보이려고 하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데 가장 주님 앞에서 겸손하고 온유하고 깨어지고 낮아진 사람 그 사람을 택하여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47절 48절은 말씀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같이 낮고 천한 아무 보잘 것 없는 여종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마리아는 재벌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권세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닙니다. 가난한 시골 처녀에 불과했습니다. 아이를 낳고 정결예식을 드릴 때에도 성경에 율법에 원래는 어린 양 한 마리를 번제로 드리고 속죄제물로 비둘기 한 마리를 드리는데 돈이 없어서 어린 양을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비둘기로 대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둘기 두 마리를 드렸는데 그 성경 누가복음 2장 22절로 24절을 보면 마리아가 그와 같이 비둘기 두 마리를 드렸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삶이 여유가 없고 어려운 처지였지만 그러나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 마음이 순수하고 정결하고 흠이 없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그 누구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고 온유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뛰어나고 아름답고 주님 보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인이었기 때문에 마리아를 택하여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게 한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너무나 존경하다 못해 경배의 수준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문제가 있지만 실제로 마리아는 존경을 받을 아주 위대한 여인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사렛에 사는 처녀에게 나타나서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누가복음 1장 31절로 33절에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깜짝 놀라자 천사가 이어서 계속해서 말합니다. 35절에,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7절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마리아는 이와 같은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누가복음 1장 38절에,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그 당시 처녀가 결혼을 하지 않고 애를 가지면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습니다. 내게 어떠한 위험과 어려움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주의 뜻이면, 주의 말씀에 순종하겠사오니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명문 가정에 태어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고 그에게 큰일을 맡겨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겸손하고 온유하고 깨어지고 낮아진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품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내가 내 모습 이대로 주 앞에 나와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백할 때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큰일을 이루어주십니다. 우리 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고백합니다. 시편 18절 1절에, 나의 힘이신 야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나의 능력이신 주님, 생명이신 주님, 모든 것 되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까? 물질을 따라가고, 사람을 따라가고, 인기와 명예를 따라갑니다.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결국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가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무엇보다도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님의 복이 임합니다. 이 마리아의 순종에 대해서 그의 친척 되는 침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장 45절에,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할렐루야.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했을 때 성령이 임해서 독생 성자 예수님을 잉태하여 그 아이를 이 땅에 탄생하는데 쓰임 받는 귀한 주님의 여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아름답게, 귀하게 쓰임받기 원하오니 주님 은혜 내려 주옵소서.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님을 소개합니다. 순종과 헌신과 겸손의 여종. 증도를 복음화한 하나님의 귀한 여종. 이 증도는 신안군 목포 앞에 있는 조그만 섬인데 이 섬의 90% 이상의 사람이 다 예수를 믿고 이 섬에는 담배 피는 사람이 없어서 금연의 섬으로 불립니다.
열일곱 살 때 증도로 시집을 왔는데 와보니 이미 남편이 다른 사람과 살고 있어요. 자신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 집에 시집 와서 20년 동안 몸이 부서져라 시부모님 모시고 일을 하고 집을 꾸려 나가야 했습니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이제 살 길을 찾아서 목포로 나왔는데 거기서 어느 한 여성도가 길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는 이 분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 절망에 찬 한 여인이 예수를 믿고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너무나 큰 은혜와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 참된 사랑을 느껴보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했던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내가 받은 예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야겠다.”
할렐루야. 신학교에 진학을 해서 그가 40세 만학도 학생으로서 열심히 공부를 하며 또 복음을 전합니다. 신안 앞바다의 수많은 섬들을 다니며 하나님의 사랑을 저들에게 전해주었는데 별명이 “대리 거지”입니다. “대리 거지.” 왜냐면 잔칫집에 가서 음식을 얻어다가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헐벗은 사람들에게 옷을 전달해주고 장티푸스 전염병이 돌아 가족조차 돌보지 않고 환자를 내버렸을 때 가서 극진히 환자를 돌봅니다. 사람들이 말리니까 나는 어차피 홀몸이니까 죽어도 괜찮다며 환자를 돌보고 장례식을 치러준 귀한 사랑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 전도사님의 독특한 전도 방법 가운데 하나는 동네 어귀 언덕에 올라가서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 당시 라디오도 없고 TV도 없고 오락거리가 없는데 누가 노래를 부르니까 노래를 들으려고 사람들이 모였어요. 누가 왔나 하고. 그런데 “예수 사랑하심은” 여러 가지 찬송을 불렀는데 사람들이 평생 듣도 보도 못한 노래를 부르니까 거기 와서 모여 있으면 가사를 설명해주면서 전도를 합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예수를 믿기 시작해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는데요. 신학교를 다니던 1931년부터 6년 동안 무려 세 개 교회를 세웠는데 임자 진리교회, 증동리 성결교회, 대초리 성결교회를 세웠고 또 세 개 기도처를 세워서 정말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큰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이성봉 목사의 보고에 따르면,
“한 해에 고무신이 무려 9켤레나 닳도록 동분서주하면서 교회를 세웠다”
얼마나 귀한 사역을 했는지요. 6.25 전쟁이 나자 공산당원들이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란 죄목으로 문전도사를 체포해서 죽창으로 찌르고, 발로 차고, 총대에 찍혀 순교하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주님,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시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죄 많은 이 영혼을 받으소서.”
전도사님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증도 섬 90%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신안군 전체로 퍼져 나가 14개면, 1004개의 섬 가운데 약 100여개의 교회가 세워지고 이 분의 전도를 통하여 훌륭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대학생 선교회의 김준곤 목사님, 성결교의 대표되는 이만신 원로목사님, 한신대 총장을 역임하신 고재식 박사님, 한국교회치유상담을 맡고 계신 정태기 목사님 등 법관, 기업가등 100여명의 많은 지도자들이 이 분의 전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낳은 자녀들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지. 할렐루야. 이와 같이 귀하게 쓰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준비된 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둘째로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무하고나 함께 일하지 않으십니다. 준비된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 믿음의 사람, 겸손의 사람, 온유의 사람, 기도의 사람과 함께 주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1장 49절에,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마리아가 고백을 합니다. 주님이 내게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준비된 여인이었습니다. 언제 주님이 부르셔도 “네, 주님 뜻대로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아주 귀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준비된 사람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바로의 왕궁에서 자라면서 세상적인 학문을 많이 배우고 부귀영화 권세를 누리며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 하겠다 할 때는 하나님이 그를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깨어지고 낮아진 마음, 겸손한 모습이 보여야 할텐데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직 때가 안 되었다.” 그러고 광야에 내보내져서 광야학교에서 40년 동안 훈련시키시고 난 다음 80세 때 모세를 부르십니다.
80세에 부르시니까 모세가 “난 못합니다. 난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할 때 모세를 부르셔서 120세 까지 위대한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 늘 깨어지고 낮아져 겸손한 모습으로 쓰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맡겨진 사명 잘 감당하시고 늘 주님 앞에 인격적으로 주님 앞에 다듬어져서 겸손과 온유를 옷 입고 주의 사랑을 실천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내가, 내가하고 자신을 앞세우면 절대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참 겸손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다음 교만해졌습니다. 내가, 내가, 내가. 그래서 왕이 제사장의 일을 대신하고 또, 점치는 여인을 찾아가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심으로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주여 우리가 겸손으로 시작해서 교만으로 마치지 않게 하여 주옵시고 처음 부름 받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주 앞에 가는 그 날까지 겸손과 온유를 옷 입고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우리가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주님께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27편 1절에,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전폭적으로 주님만 믿고 의지하며 절대 긍정, 절대 감사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4장 12절과 13절에 고백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깨워지고 낮아져서 “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할 때 주님께서 이것을 이루어주세요. 여러분 특별히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순교자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문준경 전도사님과 함께 제가 오늘 한 분을 또 소개합니다. 머슴에서 마부에서 총회장까지 된 이자익 목사님. 한국 장로교 사상 유일하게 총회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신 목사님.
경상남도 남해 섬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돼서 열일곱 세에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을 방황하다 전북 김제에 와서 그 지역의 유지된 조덕삼 선생님을 만납니다. 근데 얼마나 그 집의 머슴으로 들어가서 일을 열심히 했던지, 주인의 인정을 받았어요. 그런데 선교사님을 통하여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주인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 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주님을 잘 섬겼던지 교회에서 인정받는 일꾼이 되었어요. 그가 섬기는 주인이 돈이 많아서 교회를 지었는데 그 교회에서 금산교회에서 장로를 뽑을 때 이 머슴으로 일하고 있는 이분이 장로로 뽑혔어요. 온 교인들이 걱정을 했습니다. 그 교회를 지어 준 그 주인 12살 많은 그 조덕삼 선생님이 집사님이 장로가 되지 않고 머슴이 장로가 됐으니. 그런데 참 그 주인 된 조덕삼 집사님도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 칭찬했어요. 그래서 교회만 오면, 집에서는 머슴으로 “얘야, 이리 오너라.” 하는 그런 관계인데 교회만 오면, “장로님.” 여러분, 쉽지 않습니다. 회사 사장님이 집사님이고 밑의 평직원이 장로면 어떻게 되겠어요. 회사에서는 “아, 이리와 봐.” 이러다가 교회 오면 “장로님.” 쉽지 않다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깍듯이 장로로 모시고 또 평양에 유학을 보내서 신학 공부하게 하고 목사님이 돼서 오셨는데 잘 목사님을 섬겼어요. 그분은 그 다음에 장로님이 되셨어요. 그래서 이자익 목사님이 20개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했으며 대전 신학대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고 장로교단 총회장을 세 번이나 역임합니다.
평생 큰 교회 청빙을 거절하고 농촌의 작은 교회를 지킨 귀한 목사님. 정치적 흥정에 흔들리지 않고 바른 길만 걸은 목사님. 일제의 신사참배, 창씨개명에 전혀 동의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목사님. 초대 함태영 부통령이 그를 불러 장관직을 제의할 때 “아닙니다. 저는 평생 주의 종의 길을 가겠습니다.”하고 장관직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을 한 목사님.
대전신학대학교 이자익 기념관의 표지에 이와 같은 그에 대한 평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가난과 고아와 마부’라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목사’로서의 최고의 영예와 영광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교만이나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던 한국 교계의 큰 바위 얼굴이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와 같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 위대한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 신분은 머슴이었지만 그 믿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가 준비된 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택하여서 장로로 또 목사로 세우시고 큰일을 할 수 있도록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은 말씀합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여러분, 일을 적당히 하지 마십시오. 게으르게 살지 마시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열심을 다하십시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십니다. 누가복음 16장 10절은 말씀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하고 부르실 때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최선을 다해 헌신함으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
준비된 자를 쓰시는 이 하나님이 셋째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모든 불신앙의 사람들을 물리쳐주시고 교만한 자의 세력을 꺾어버리시고 택한 주님의 자녀들을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51절로 53절은 말씀합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할렐루야!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힘없고 불쌍하고 어려움에 처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가복음 1장 50절에,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4절에,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할렐루야! 이 긍휼이란 말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우리를 보살펴주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안 되는 그러한 경우에 옆에서 지켜보다가 “안됐군.” 동정의 말을 한 두 마디 합니다. 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부도가 나고 문을 닫게 되었을 때에 “쯧쯧.. 안됐네.” 그 정도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힘들고 어렵고 괴롭고 슬프고 아플 때 옆에 와서 우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그 넓은 사랑의 품에 우리를 안아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03편 13절에,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야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성경은 말씀합니다. 시편 59편 17절에,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나를 불쌍히 보시고 나를 돌보시고 나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시고 나를 절망의 자리에서 붙들어주시고 일으켜주시는 주님!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나를 품어주시는 주님의 그 사랑을 감사합니다.
(찬송가 88장)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주는 저 산 밑의 백합 빛나는 새벽 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한없이 외로울 때가 있어요. 한없이 슬플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의 외로움을 아시고 우리의 슬픔을 아시고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사랑의 품에 안아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어려움 당할 때 참 저도 마음이 너무나 아파요. 어저께도 제가 급한 연락을 받고 병원에 심방을 갔다 왔는데 17살 난 우리 교회 잘 다니고 있는 학생이 학교가다 쓰러져가지고 뇌출혈로 지금 열 며칠 째 혼수상태에요. 참 공부도 잘하고 똑똑하고 곧 대학 갈 아이가 쓰러졌으니 온 가족이 그냥 가슴이 먹먹해서 눈물밖에 흘릴 것이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이 그 눈물을 보시고 하나님이 붙들어주시고 일으켜주시고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다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께 맡깁니다. 나는 못합니다. 주님이 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교만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을 깨뜨리시고 깨어지고 낮아지고 겸손히 주님을 섬기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을 붙들어주십니다. 누가복음 1장 51절에서 52절에,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말씀합니다. 사무엘하 22장 28절에,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마리아는 계속해서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주린 자를 배부르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누가복음 1장 52절에서 53절에,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에 주님이 오셔서 하신 그 위대한 사역을 설명합니다. 다 같이 고백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세요. 시편 34편 9절로 10절에,
너희 성도들아 야훼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야훼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로마서 8장 32절의 축복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예수님과 함께) 모든 것을(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한지. 이 얼마나 감사하고 이 얼마나 놀랍고 이 얼마나 기쁜 참으로 복된 주님 말씀인지. 할렐루야!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다 주님께 내려놓고 맡기세요. 개인의 염려, 근심, 걱정, 고통, 괴로움 다 맡기세요. 의사가 고치지 못한 그 병도 주님께 다 맡기세요. 주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시편 37편 5절, 6절 말씀으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우리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고백합니다.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아멘! 너의 길을 야훼께 맡기라! 너의 삶을 주님께 맡기라! 너의 염려, 근심, 걱정 다 주님께 맡기라! 주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라! 오늘 이와 같은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마리아의 찬송
정근두목사 / 누가복음 1:46-56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오신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 대강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며칠만 지나면 구주대망 2014년 성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잘 읽어보면 구주탄생을 둘러싸고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자주 터져 나옵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탄생 기사가 기록된 누가복음 처음 두 장에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찬송하는 노래들이 실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리아의 노래를 필두로 2장에는 베들레헴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천군 천사들의 찬송과 그 현상을 지켜본 목자들의 찬송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기 예수의 길 안내자로서 태어난 요한의 출생을 바라보며 부르는 그 아버지 사가랴의 찬송이 1장 끝자락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기 예수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봉헌 예식의 현장에서 부르는 할아버지 시므온의 찬송 역시 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찬송은 그의 거룩한 탄생을 둘러싼 성도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오신 성탄을 기다리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일한 찬송이 자리하고 있습니까?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은 우리의 입술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자비를 찬송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마리아의 찬송입니다. 주님의 모친 마리아가 자기 태를 통해서 구원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보십시오. ‘마리아가 이르되’ 라는 말로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에는 ‘그리하여 마리아가 노래하였다’고 마리아가 말한 내용이 노래임을, 찬송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하여’라는 접속사입니다. 직역하면 ‘그리고’ 라는 접속사가 거기 앞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늘 그렇듯이 그런 정도는 빠져 있습니다. 여기 접속사의 기능은 마리아의 찬송의 배경을 우리에게 생각하도록 합니다. 바로 앞에 나온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라는 엘리사벳의 말을 받고 있습니다.
좀 더 살펴보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건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기는 천사 가브리엘이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살던 처녀 마리아를 방문한 사건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가 궁금해 할만한 엄청난 인사를 하면서 나타났습니다.
그의 인사를 듣고 당혹한 표정을 짓는 마리아에게 그녀를 통해서 약속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을 통고합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묻는 마리아에게 천사의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이제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 천사의 결론 앞에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다” 하고 고백한 마리아의 신앙이 오늘 우리가 살필 찬송에는 깔려있습니다.
이 마리아의 찬송은 또한 엘리사벳의 노래나 사가랴의 찬송이나 시므온의 찬송처럼 성령 충만함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마음이 기뻐야 노래합니다. 마리아의 마음속에 성령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가득해 있었기 때문에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기쁨과 찬송은 성령이 충만한 결과적인 현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서론적인 고찰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마리아의 신앙적 태도를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 제사장 사가랴의 태도와 비교할 때 마리아의 태도가 더 두드러집니다.
제사장 사가랴는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자기처럼 늙은 부부가 어떻게 아들을 낳겠는가 하고 의심을 표명합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그보다 더 엄청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으로 응답합니다. 처녀인 자신을 향해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는 천사의 설명 앞에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믿음으로 응답합니다.
사가랴는 자신과 아내가 늙었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했습니다.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주리라”는 약속 성취에 대해서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복 받은 여인 마리아를 보십시오. 늙은 아내라도 가진 제사장 사가랴는 그래도 낫습니다. 남자를 알지도 못하는 처녀인 자신에게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고 말하는, 역사상 한 번도 듣고 보지 못하던 통고 앞에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믿고 응답합니다.
둘 다 아들을 낳으리라는 약속입니다만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처지입니다. 늙어도 아내를 가진 사람이 아이를 낳는 것과, 남자도 모르고 혼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있는 것과 없는 것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그 약속의 말씀에 대한 반응에 따라서 때로는 벌하시고 때로는 복 주십니다. 의심한 사가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기까지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믿은 마리아에게는 하나님을 미리 찬송하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언제나 동일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침묵의 시간을 만나기도 하고 찬송의 시간을 얻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 커 보입니까? 그래서 의심이 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찬송할 기회를 상실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때가 이르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약속 실현은 우리의 반응 여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에 따라서, 약속을 해 오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다만 우리의 반응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찬송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할뿐입니다. 우리의 부정적인 반응은 미리부터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뻐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에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그것이 아무리 크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 약속의 말씀의 말씀 성취를 미리 맛보는 즐거움이 자리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마리아처럼 하나님을 노래할 특권을 가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행하실 하나님의 사역을 미리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침묵과 찬송,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반응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러나 약속의 성취는 우리의 반응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때가 되면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미리 바라보면 우리는 앞당겨서 하나님의 크신 의를 노래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계속해서 불신으로 반응하면 그 복된 기회를 상실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 여부에 따라서 당신이 일을 실현 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때로는 우리를 만들어 가시면서, 우리를 빚어 가시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 성취가 하나님 자신의 신실성에 기초하지 아니했다면 성탄은 사람들에게 결코 있을 수 없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은 벌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모든 특권을 상실하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약속의 실현으로서 찾아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리아의 찬송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우리의 태도를 살피게 합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여러분은 침묵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리아처럼 여러분의 입술에 찬송이 가득합니까? 입술의 찬송은 마음의 확신에 따라 좌우됩니다. 침묵과 찬송,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따라서 좌우됩니다.
그러면 이제 마리아의 찬송 그 자체를 한 번 살펴보시죠. 구약 성도들의 찬송과 그 표현 방식에 있어서 아주 흡사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마리아가 다니는 회당에는 “신앙교육, 가정에서부터”라는 표어를 정하지도 아니했을 것인데도 하나님 말씀에 젖어 살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동일한 구원 경험을 가진 성도의 노래는 닮을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특히 갈릴리에서 사나흘 걸리는 유대산중으로 오는 동안 마리아의 마음에 되새긴 말씀이 한나의 노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마리아의 찬송이 구약의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마리아의 찬송은 개인적인 구원 체험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자신의 상황이 하나님에 대한 찬송을 유발시킵니다. 하긴 누구라도 그러하죠? 마음속에 개인적인 구원의 감격이 있어야 찬송하는 일에 동참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찬송하는 일을 함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가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일인칭 단수는 의미가 깊습니다. 여기 앞부분에 나오는 일인칭 단수는 사사로운 나를 가리키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무엘상 2장 1절, 한나의 찬송과 비교해 볼 때에 두드러집니다.
한나는 아기를 갖지 못하는 여자의 슬픔을 아는 여자였습니다. 그것도 남편의 다른 아내는 자식을 낳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 한나의 고통이 불임에서부터 구원을 받음으로서 한나의 찬송으로 변했습니다.
마리아의 찬송은 한나의 고백을 그대로 되받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하나님께 기쁨으로 찬송했던 그 순간을 기억하게 합니다.
두 찬송의 서두의 표현이 비슷하며 그 분위기가 서로 닮은 것을 우리는 관찰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나의 표현을 빌려서 마리아는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전통 속에서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는 전적으로 유(類)를 달리 하는 새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사건입니다. 마리아와 한나는 적어도 동일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역사속의 나타남은 다르지만 동일한 하나님의 구원하신 일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언약공동체에 친숙한 이 노래에 자신의 음성을 보태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신앙의 전통을 지키는 한편 자신이 찬송하는 자기만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48절에서부터 49절 상반 절이 그 이유를 우리에게 소개해 줍니다. 물론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는 개역개정판에는 모두 빠져 있습니다만 표준 새번역에는 적어도 두 곳에서는 살려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주를 찬송하며 내 영혼이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주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일컬을 것입니다. 힘 센 분이 내게 큰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왜 하나님을 찬송하며 자기의 구주를 기뻐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거기 다루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첫 번째 이유는 비천한 상태에 있는 자기를 은총으로 돌아보셨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비천함을, 괴로운 상태를 돌아보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얼마나 나이가 많았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시집갈 적령기가 지났는데도 결혼을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는 그러한 이야기가 여기서는 아닙니다. 그녀의 보잘것없는 사회적인 위치가 이제 만대에 인정받는 확고한 위치로 바뀌기에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의미 있게 보심으로 그녀는 만대에 의미 있는 자로서 통하게 될 것입니다. 그녀는 이제 인간역사에서 의미 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이름이 별로 알려진 여자가 아닙니다. 가문이 대단하지도 않았습니다. 내어놓을 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의미 있게 보셨기 때문에 그는 이제 의미 있는 존재로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녀에게 품으신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꿈을 이제 후세가 모두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의 비천한 처지는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사는 데에 소망을 두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통적인 처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적인) 처지는 보잘것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자신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연대감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사람의 역사가 시작된 다음에 항상 하나님의 백성의 공통된 특징은 별로 내어놓을 만한 것이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읽어보면 거기에 모인 성도들 역시 세상에서 내어놓을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마 오늘 울산광역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을 비교해 볼 때에 마찬가지 느낌을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오직 그 구원만을 바라보고 살던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이 별로 특별히 내어놓을 것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마리아가 자신과 하나님의 백성의 연대감을 찾고 있습니다.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말할 때는 그 자신의 비천함과 함께 주님의 백성의 비천함을 하나님께서 권고해 주시는 새로운 때라는 소망이 그 속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여러분의 위치가 어떠합니까? 울산광역시에서 울산교회의 위치는 어떠하다고 생각합니까? 세상에서 여러분은 대단한 자라고 여기십니까? 세상에서 대단한 사람이 여러분을 인정해 준다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까? 그리하여 비천한 하나님의 백성과 자신이 무관하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지 마십시오.
울산광역시에서 울산교회의 위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마리아의 위치와 진배없지만 오늘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는 항상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사람들과 동일시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까?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세상 속에서 여러분의 위치가 대단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또 그녀가 찬송하는 이유를 여기서 더 밝히고 있습니다. “능하신 이가 내게 큰일을 행하셨기 때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능하신 분’ 이라고 하는 것은 표준새번역처럼 그냥 막연히 “힘센 분”이라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이 말 구약 계시의 역사 속에 하나의 분명한 전환점을 가져다준 단어와 맥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99세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라함에게 전능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라고 하십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합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처지가 어떠했습니까? 심히 많은 자손은 그만두고 딸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브라함은 그 때 딸자식 하나도 갖고 있지를 못했습니다.
창세기 28장 3절에는 이삭이 그 아들 야곱을 객지로 보내면서 하신 말씀 속에 같은 표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향해서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너의 외삼촌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사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복을 네게 주시리라’고 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 빌고 있습니다.
또한 환란의 날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자기를 소개하시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여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자기를 소개하면서 야곱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되어진 그 땅에 지금 살고 있었지만 그 땅에서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아들들이 가나안 사람에게서 나쁜 냄새를 피움으로서 그는 지금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르는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노년에 그 마지막 소망이던 베냐민을 애굽에 보내면서 하던 고백 가운데 이 표현이 또한 나타나고 있습니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
야곱이 정말 뒤에 애굽 임금 바로 앞에 서서 고백했던 것처럼 자기의 생애는 험난한 생애였습니다. 그처럼 사랑했던 아내에게서부터 난 두 아들 중 하나를 벌써 잃어버렸고 이제 하나 남았는데 그 아들을 내어주지 아니하면 먹고 살 수가 없는 처지에 봉착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내어주면서 “내가 잃으면 잃겠다”고 완전히 자기 한 생애에 주어졌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에 그는 다시 한 번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사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신앙의 고백이 거기 나타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이 단어는 종말론적인 구원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전능자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으로서 극한 상황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소개된 이름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개역한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십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기서 모여 예배하고 있는 우리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잠잠히 사랑의 눈길을 보내고 계십니다.
비천한 처지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나시고, 동일한 처지의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던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나타나실 것을 바라보십시오. 생애의 위기를 전능자 하나님 만날 기회로 바꾸어 보십시오!!
마리아와 함께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전기로 삼아 보십시오. 능하신 이가 내게 큰일을 행하셨다고 하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큰 일, 그것은 그냥 큰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 쓰일 때는 항상 하나님의 구원하신 큰일을 나타낼 때 쓰기를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리아는 지금 하나님의 큰일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사역, 그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사역으로 인해서 마리아는 찬송하고 있습니다. 자기 속에 구원의 경험이 있어야, 자기 속에 하나님의 큰일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역사 속에 하나님의 큰일을 볼 때에 함께 찬송할 수가 있습니다.
구약의 구원 역사를 주도하신 하나님께서는 신약 구원 역사의 장을 성령으로 열어가고 있습니다.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의 태를 여심으로 오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길을 대비할 요한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동일한 성령께서 마리아를 찾아 오셔서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마리아를 품으심으로서 이제 마리아에게 잉태된 그 아이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은바 될 것입니다. 처녀 마리아의 태중에 큰일을 행하심으로 세세에 복이 있는 여자의 위치에 그녀를 올리셨기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제 전반부 마지막 부분을 가봅시다.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루리로다.” 마리아의 노래 전반부는 하나님의 대표적 속성 두 가지를 찬송하는 말로 마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 두 가지는 거룩하심과 자비하심입니다. 거룩과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 거룩과 자비를 이 노래 전반부의 절정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이 나타남을 마리아는 찬송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해 보십시오. 그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세에 그를 일컬어 복이 있다고 할 것은 그녀를 통해서 메시아 예수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새 역사는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녀를 덮은 결과로서 새로운 메시야 시대가 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주 대망 2014년 대강절 마지막 주일, 이 마리아의 찬송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구속사를 주도하는 성령님께 여러분 자신을 기꺼이 내어 맡기십시오. ‘나는 이미 늙었다’고 대답하지 마십시오. ‘나는 아직 처녀입니다’ 라고 주저하지를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성령을 통해서 마리아를 통해 시작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지금도 이루어가십니다. 오순절에 성령주심으로서 메시야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을 지금도 모으시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큰일은 자신을 기꺼이 주께 맡기는 자들을 통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루어 가십니다.
마리아의 찬송에 진정으로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자는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신뢰해야만 합니다. 마리아의 찬송에 참으로 동참하기 바라는 자는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성령님께 자신을 믿음으로 내어 맡겨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큰일을 주도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성령님께서는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서 오늘도 이 땅에서 그 나라를 건설하고 계십니다. 약속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성령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 드릴 때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오늘 비천한 우리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구속 역사의 목표, 예수의 재림은 순종하는 그 백성의 결단을 통해서 도래합니다. 어린 아기로 오셨던 새 이스라엘의 왕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왕, 구세주, 심판주로서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날 모든 것은 회복되고 새로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고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할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를 것입니다. 그를 두려워하는 자에게 이 자비하심은 영원히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여러분 자신을 내어 맡기십시오. 전능하신 그분의 큰일에 성령으로 자신을 드리십시오. 그러면 기쁨과 찬송이 여러분의 삶에 회복될 것입니다. 그를 증거하는 여러분의 능력이, 전도의 능력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자로서 이 땅을 사셨습니다. 이제 사단의 지배력은 붕괴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찬송 소리로 지옥권세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2월은 구주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성탄절은 과거 지향적일 수는 없습니다. 구주께서 약속에 따라서 오셨기에 또 한 번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때가 되면 구주께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심판주로 찾아오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대장 예수께서 세상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사단의 권세는 파괴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지금 믿는 자는 지금부터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 양속에 자신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송 속에 이미 오셨던 그 주님께서 공동체의 찬송 속에 지금도 오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통해서 구원역사를 이루시고 계신 그의 자비하심을 대대로 찬송합시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그 나라를 이루시는 원동력임을 찬송 드립시다. 자비하심을 대대로 찬송하는 것이 그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의 모두의 특권입니다. 아멘
“거룩하신 아버지. 주님이 오신을 내다보는 대강절에 주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축하와 예배로서 송축 드리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에,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고 우리의 속화된 문화 속에 거룩하게 하나님의 성탄절을 맞이하지 못하도록 하는 요소들이 언제나 들어오려고 하고 있습니다.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아버지여, 대강절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기쁨에 동참하는 주의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오니 받아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약속 성취의 진실성을 믿게 해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다시 한 번 역사 속에 이루어질 것을 미리 내어다보고 지금부터 더 기뻐하며 찬송할 수 있는 신앙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당신의 나라가 온 땅에 가득해질 날을 내어다보게 도와주시옵소서. 주의 자비하심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영원토록 자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날 우리가 주의 자비를 송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부터 우리에게 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미리 그날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양하고 기뻐하게 하시는 하나님
눅 1장 46~48절 / 김영주목사
오늘 본문은 읽기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찬양으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라는 여인의 찬양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이렇게 찬양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고싶다는 소망이 생깁니다. 짧은 인생 살면서 우리가 늘 찬송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본문은 그 비결을 말해줍니다. 눅 1장을 읽어보면 두 가지 이유로 인해서 찬양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무엇일까요? 순종의 기쁨입니다. 눅1:30-31절을 보십시다.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1:38절을 보십시오. 마리아가 이렇게 응답합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가 천사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기까지는 엄청난 희생이 있었습니다. 치뤄야 할 댓가가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처녀가 아이를 낳으면 그 인생 끝난 것 아닙니까?
--약혼자 요셉이 결혼하려고 하겠습니까?
--또 간음했다는 얘기밖에 안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여자는 율법에 의해 돌로 쳐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마리아가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했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순종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를 위한 인생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종이후에 엄청난 기쁨이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눅 1장에서 마리아와 사가랴를 보면 이들이 하나님말씀에 순종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기쁨이 없었어요. 하나님말씀을 믿지 못할 때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잠시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런데 순종하고 나서는 둘 다 무지 기뻐했습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눅1:63-64절 사가랴의 순종에 대한 말씀입니다.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순종하고 난 결과 무엇했습니까? 입이 열리고 바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마리아도 순종하고 나서 무엇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보세요. 순종하고 불행해진 사람 있는가? 아닙니다. 순종은 놀라운 기쁨을 줍니다. 순종하기까지가 힘들지 결단하고 순종하면 그렇게 기쁠 수 없습니다. 순종하고 잘못되는 경우 없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불행하게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만세에 복 있는 여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높이십니다. 크게 만드십니다. 믿음 없이는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 본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왜 하필 하나님은 처녀에게 나타나 잉태할 것이라고 했을까? 결혼한 유부녀에게 나타나 말씀해도 되잖아요? 그러면 고민하고 갈등하고 할 것 없이 '할렐루야!' 하면서 순종할 것 아닙니까? 왜 이런 쉬운 방법 놔두고 꼭 그렇게 안될 방법만 찾아서 고민하게 하실까? 여러분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때로는 처녀에게 나타나서 '아이를 낳을 것이다' 하지를 않나?
또 반대로 언제는 할머니에게 나타나 '아이 낳을 것이다' 하지를 않나?
하나님은 참 이상하신 분 같습니다. 쉬운 방법 놔두고 어려운 방법만 골라서 쓰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에게는 쉽고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인간 편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믿음을 보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분명하게 믿는 사람은 순종합니다. 그 일이 아무리 어려워도, 이해가 안되어도, 상식을 초월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순종합니다. 믿음 없이는 순종 못합니다. 하나님이 거짓말하는지, 농담하는지, 신실하신 분인지 정말 모르는 사람은 절대 순종할 수 없습니다. 내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순종하겠습니까? 그래서 순종과 믿음은 같이 갑니다. 믿음이 자라면서 순종이 됩니다.
눅1:45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이 단어는 순종이라는 단어를 대치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순종한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이 얼마나 자랐는가는 순종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여러분 순종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찬양이 나옵니다. 이건 하나님이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행5:40-41절입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들은 매를 맞고, 욕먹으면서도 기뻐했습니다. 이 기쁨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아십니까? 순종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슬프게 하지 않으십니다.
순종하는 것이 왜 기쁨을 가져다주는지 아십니까? 순종하려면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하려면 내 뜻을 포기해야 합니다. 참 기쁨은 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움켜쥐고만 있는 사람은 그 쥐고 있는 것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놓칩니다. 마리아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포기해야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지금까지 누려왔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꼭 포기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포기해보지 않은 분들은 진정한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을 보면, 예수 믿으면서도 늘 찡그리고, 짜증나고, 만족이 없는 사람들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라고 보여집니다.
첫 번째,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어떤 것도 포기해 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행복하지 못합니다. 행복은 포기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포기하는 자에게 부어집니다. 받으려고만 하고 포기해보지 못한 분은 믿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못 가진 것, 안 주신 것, 받을 것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신앙생활을 교양으로 취미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갈 때 교양강좌 하나 듣는 기분으로, 나쁜 말하지 않으니까, 들으면 도움이 되니까, 사람이 종교를 하나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좋으니까, 나오는 사람들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기쁨이 없습니다. 신앙을 위해 포기해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 저는 아침에 어느 유치원에 성경공부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찬송가 102장을 부르는데 그 가사가 새롭게 느껴지더라구요. 특별히 후렴의 가사가 와 닿았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맘속에 질문이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나서 세상 즐거움 다 버렸는가? 나는 정말 세상 자랑 다 버렸는가? 아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자는 즐거움, 먹는 즐거움, 대접받는 즐거움, 티브이 보는 즐거움....이 아직도 많이 있었습니다. 세상자랑도 많이 있었습니다. 자식자랑, 교회자랑, 학벌자랑,.....등 오히려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너무 적다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요즘 생각해보니까 처음 예수 믿고 나서는 포기한 것 많았는데, 시간 지나면서 포기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 버린다 해놓고 다시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과거보다 행복할 리 없죠. 기쁨이 많이 사라졌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세상 즐거움 다 버렸습니까? 세상 자랑 다 버렸습니까? 아직도 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를 위해 그것까지 포기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기쁨도 적습니다.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48절에서는 그 두 번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비천함을 돌아보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돌아보셨습니까? 비천한 한 여인을 돌아보셔서 만세에 복이 있다 일컬음을 받게 하셨습니다. 여기 이 말씀은 좀더 자세히 봐야 합니다.
--먼저 계집종의 비천함이란 말입니다.
마리아는 왜 자신을 비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볼 때 몇 가지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고후7:6절에도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이 말을 어떤 학자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 말은 주로 세 가지를 가르킬 때 쓰는 말인데 가난한자, 압박된 자, 겸손한 자의 낮은 마음을 가르킨다." 이 설명과 성경을 종합해볼 때 우리는 마리아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여인입니다.
--높은 지위도 없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시골처녀입니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도 아닙니다.
---더구나 갈릴리 나사렛동네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 갈릴리입니다. 갈릴리 중에서도 가장 낙후된 동네가 나사렛동네입니다. 어디 가서 갈릴리 나사렛출신이다 하면 사람들이 두 번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럴 정도로 소외된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말로 골짝 중의 골짝사람입니다. 완전히 촌닭입니다. 한마디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주목받을 만한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비천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계집종이라고 부른 것 보면 자신에 대해 주장하거나 내 세울만한 것이 별로 없는 여인입니다. 하나님도 사람도 주목할 만한 어떤 것도 없다고 느꼈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천한 여인을 하나님이 어느 날 돌아보셨습니다.
돌아보시니까 그 날부터 이 여인의 인생이 달라지게 됩니다.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 다음 구절을 읽어보십시오. 무슨 단어부터 시작합니까? '보라!' 얼마나 자신 있는 말입니까? '나를 보라!' 과거엔 이렇게 천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보라!' 이제는 다르다.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그 동안 얼마나 속상하는 소리를 들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한번 돌아보시고 은혜 주시니까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주목받지 못하는 인생이 가장 주목받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한때 그런 것이 아니라 만세에 두고두고 가장 복 받은 여인이라 칭함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인생,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돌아보시기만 하면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도 나를 다르게 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 여인을 돌아보셨을까요?
먼저 돌아보셨다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봅시다. 돌아본다는 말은 어떤 태도를 가르킵니까? 이런 경우입니다. 사람들이 무심코 길거리를 가는데 방금 지나친 사람이 좀 다릅니다. 복장도 외모도 다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끄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가다가 고개를 돌려 이렇게 돌아봅니다. 돌아본다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잉태할 여인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땅에 샅샅이 뒤지면서 합당한 여인을 찾습니다. 그런데 합당한 여인이 없습니다. 다들 죄와 짝하고 죄를 밥먹듯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이 이스라엘 땅을 훑어보시면서 지나가시다 갈릴리 나사렛의 마리아를 발견한 것입니다. 내 맘에 꼭 드는 여인이 있구나! 그래 가다가 돌아보시면서 찾아오셨습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왜 주목하셨습니까? 그녀의 신앙 때문입니다. 저번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마리아가 살던 당시는 영적으로 아주 어두운 때였습니다. 선지자가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400년 동안이나 말씀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다 각자 생각대로 감정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도 없이, 말씀도 없이 살아갑니다. 죄를 밥먹듯이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들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고, 치우치고, 어긋나서 맘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시고 시골이고 할 것 없이 다 엉망입니다. 그런데 가장 소외된 지역, 가장 주목받지 못하는 여인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니까 가장 깨끗하고 순결한 여인이요,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돌아보신 것입니다. 어, 저런 여인도 있네! 하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 어둠 속에서, 고통 속에서, 힘든 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키는 사람--찾으십니다. 비록 하나님이 내게 아무 은혜도 주시는 것 같지 않고, 내 기도도 듣지 않으시는 것 같고, 내게 아무런 눈에 보이는 축복을 주시지 않는 것 같아도 여전히 믿음을 지키고 있는 사람--돌아보십니다.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섬기는 사람---하나님이 돌아보십니다. 사람들이 죄를 밥먹듯이 먹고 마셔도 휩쓸리지 않고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이런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비천함은 잠깐이나 하나님의 돌아봄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든 시간이 있습니까? 속상한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믿음으로 살아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 생각되십니까? 다 포기하고 싶은 그런 유혹이 있습니까?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견디기 바랍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돌아보실 것입니다. 반드시 돌아보십니다. 하나님이 돌아 보시 날 그 인생은 피어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받고, 칭송 받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한때 잘 견디다 하나님이 돌아보시는 날에 엉뚱한 일 하고 있으면 안되죠.
요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소위 성공 신드롬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 주목받지 못하는 것,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낮은 자리, 천한 자리,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일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자리가 사실은 하나님이 돌아보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기 전에 먼저 낮은 곳에 두시고 시험해 보십니다. 왜요?
사람만큼 변덕이 심한 존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해보고 테스트해서 확인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시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낮고 천한 자리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는 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일에 충성하다보면, 낮은 곳에서 충성하다보면 언젠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돌아보시는 날이 있습니다. 분명 돌아보십니다. 이 땅에서 돌아보시지 않는다면 천국에서라도 빛나는 영광으로 채워주십니다.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랑과 섬김, 헌신이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분명 돌아보십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게 해 주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이 땅에서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빌2:5-11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마리아의 찬가(讚歌)
눅 1장 46~55절 / 김태한목사
오늘 누가복음 본문 말씀은 흔히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 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46절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이 말씀이 라틴어로 “Magnificat anima mea Dominum” 이렇게 시작한데서 유래(由來)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나사렛에 사는 평범한 처녀였습니다. 어느날,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엄청난 말씀을 듣습니다. “마리아야,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네가 수태(受胎)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 때 마리아는 요셉이라는 청년과 약혼을 한 사이였습니다. 이 청천벽력 같은 말씀에 마리아가 반문합니다. “저는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다……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 말에 마리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누가복음 1:38).”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사리(事理)에 맞아야지 어떻게 이런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지 못한 이유는 그 말씀이 자기들 생각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안합니다. 자기 생각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놓고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게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믿음을 못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자기 생각, 자기 경험, 자기 판단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다가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그 말씀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23년을 목회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깨져서 거듭나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반대로 그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깨지는 것은 한번도 못 봤습니다. 저는 이제껏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고 그 사람의 말이 옳았다는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마리아에 대한 인상(印象)은 어떤 것입니까? 크리스마스 연극을 할 때도 늘 마리아 역을 맡은 아이는 예쁘고 참하게 생긴 아이를 골라 시킵니다. 얼굴도 갸름한 형(形)보다는 동그란 형의 아이를 골라 시킵니다. 그리고 마리아 역은 말이 많지 않습니다. 늘 다소곳이 요셉을 순종하는 현모양처(賢母良妻)로 묘사됩니다. 맞습니까?
Robert McAfree Brown이라는 신학자가「Theology in a neo-key」라는 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성화(聖畵) 속에 있는 마리아는 초생달 위에 서서 왕관을 쓰고 반지를 끼고 금으로 수놓은 파란 옷을 입고 있군요. 그런데 누가복음 1:46-55절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그의 신앙고백을 노래하고 있는 마리아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군요." 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리아에게서 왕관을 벗기고, 반지를 벗기고, 비단 외투, 후광들을 벗겨냅니다. 그랬더니 마리아는 어느새 순박한 시골 여인의 모습으로, 뜨거운 태양 빛을 피하기 위해 두껍고 남루한 베 조각을 걸친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이것은 대성당에 있는 마리아의 모습도 아니고, 잘 차려입고 멋있는 맨션 아파트에 사는 여인의 모습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그 현장에 있던 그런 여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천사의 고지(告知)를 들은 마리아는 속히 자기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 당신을 보니 내 태중의 아이가 기뻐 뜁니다. 당신은 이 세상 어느 여자보다도 복받은 여자입니다. 당신의 태중에 있는 아이도 복받은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줄로 믿은 당신은 참 복된 여자입니다(누가복음 1:41-45).”
엘리사벳의 말에 마리아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卑賤)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이제 후로는 만세(萬歲)에 나를 복이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나에게 큰 일을 행하셨으니……”
이스라엘의 에인 카렘(Ein Karem)이라는 곳에 가면 「마리아의 방문교회(Mary’s church of Visitation)」 가 있습니다. 교회의 서쪽 벽에 「마리아의 찬가」가 41개국 언어로 씌어져 있습니다. 한글도 있는데 전(前)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 씨가 썼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가면 정면에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마리아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을 만나서 천사가 말한 것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마리아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마리아의 찬가를 한절 한절 묵상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順從)한 한 여자의 벅찬 기쁨과 행복을 느껴 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비천한 처지에(the humble state) 있는 여자(48절)”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어떤 비천한 처지에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마리아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마리아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가 그렇듯이 마리아는 한 시골의 평범한 여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나의 비천한 처지를 돌아 보셨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그 순간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는 것을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그 행복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했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그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데서 온 행복이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순종하기 위해서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는 진정한 순종이 불가능합니다. 순종하는 것처럼 순종을 흉내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순종은 순종에 방해되는 것들을 온전히 포기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고 행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이 행복을 알고 계십니까? 아니, 이 행복 안에서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15:11).”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이 기쁨이 무슨 기쁨입니까? 저는 아무리 성경을 읽어봐도 이 말씀을 달리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쁨이 제자들의 삶 속에 충만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까? 복잡하게 여러가지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그냥 단순하게 순종하십시오.
마리아의 찬가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계획과 목적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의 탄생의 비밀을 이 세상에 선포하셨습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예수님의 사역(使役, ministry)의 목적과 내용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첫째로,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내게 큰 일을 행하셨고, 하나님의 긍휼(mercy, 矜恤)하심이 그를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대로 임한다고 찬양합니다(49-50절). “큰 일을 행하신다”는 말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하나님은 모든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항상 부족한 사람들을 통해서 “큰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 가운데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가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들은 그 나름대로 쓰임받을 준비를 하는 것은 좋지만 준비하는일에 세월을 보내서는 안됩니다. 우리 인생은 짧은데……결코 우리가 충분히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준비가 된 때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갖추어야 할 자격이 있다면 마리아가 자신을 비천한 사람으로 고백한 것처럼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를 두려워 하는 사람에게는 대대로 그의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긍휼(mercy)과 비슷한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은혜(grace)라는 단어입니다. 비슷한 말같지만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은혜보다는 긍휼이라는 말이 훨씬 강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사랑 받을 자격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긍휼은 죄의 결과로 빚어진 그 비참함을 불쌍하게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닐까요?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아닐까요? 날이면 날마다 웬 그리 비리(非理)사건이 많이 터집니까? 그저 들추면 부정(不正) 사건이요, 속속들이 썩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뉴욕에 공항이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John F. 케네디 공항이고, 하나는 라 과디아(La Guardia) 공항입니다. 본래 라 과디아는 뉴욕 시민들이 매우 사랑했던 유명한 시장(mayor) 이름입니다. 이 사람이 시장이 되기 전에는 명판사였습니다. 라 과디아 판사가 한번은 어느 추운 겨울날 재판석에 선 한 노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은 추운 겨울에 외롭게 가족도 없이 살다가 너무 배가 고파 20달러를 훔치다가 체포되어서 법정에 선 것입니다. 판결을 하기 전에 라 과디아 판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무슨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노인은 재판장을 향해서 “판사님, 저에게 한번 긍휼을 베풀어주십시오.” 잠시 동안 그 노인을 바라보던 판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당신에게는 긍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잘못한 그 20달러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마침 제게 10달러가 있는데 제가 당신을 대신해서 10불을 변상하겠습니다. 당신을 춥고 배고프도록 버려둔 데에는 저의 책임도 있습니다.” 그리고 방청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0달러가 더 필요한데 이 법정에 계신 여러분! 우리 사회와 여러분도 이 사람이 춥고 배고프고 방황하고 도둑질하도록 버려둔데 대해서 공동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말에 동의한다면 누구라도 좋으니 후원금을 내지 않겠습니까?” 얼마가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10달러는 더 나왔을 것입니다. 이 명판결 소식을 들은 뉴욕 시민들은 그를 마음이 따뜻한 긍휼이 많은 판사로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나중에 뉴욕 시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라 과디아 판사보다 더 긍휼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성경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who is rich in mercy)”입니다. 우리는 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 주셨습니다.
둘째로,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다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51절). 여러분, 이 말씀이 사실입니까?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strength)이 드러났습니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에게 안수하시고 낫게 하셨을 때, 예수님께서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을 때,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았을 때,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을 때, 예수님께서 벳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five loaves and two fishes)의 기적을 일으켜서 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았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3년 간의 공생애(公生涯, public life)를 통하여 그 크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교만한 사람들을 내리치신 일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대신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시고,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는 힘으로 교만한 사람들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겸손과 섬김으로 교만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웠습니다(빌립보서 2:6-8).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은 악을 악으로 이기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악을 사랑으로 정복(征服)하라고 합니다. 힘으로 교만한 사람들을 꺾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겸손으로 교만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겸손의 삶을 배우십시오. 예수님처럼 자기를 비우십시오. 그래서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십시오.
셋째로, 마리아는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를 그 위(位, thorns)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신다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52절). 우리 말에 “비천하다”는 말은 “낮고 천하다”는 뜻인데, 영어 성경에서는 이 말을 “humble” 로 번역했습니다. 이 “humble”이라는 말의 어원(語源)은 “humilis”라는 라틴어에서 왔습니다. “humilis”라는 말에서 “humiliation”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humble(겸손)이 무엇입니까? 굴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걸 감수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힘있는 사람은(the mighty) 그 자리에서 끌어 내리고 그 자리에 humble한 사람을 앉히시는 분입니다.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가 1989년 은퇴 의사(意思)를 밝히면서 만류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보다 겸손하고, 보다 헌신적이며, 보다 복종하는 또 다른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 선교회의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God will find another person more humble, more devoted, more obedient to Him, and the Society will go on.).”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일을 위해 겸손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의 눈을 높은데 두지 말고 낮은데 두십시오.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삶을 살지 말고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는 삶을 사십시오.
넷째로, 마리아는 하나님은 주린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자를 공수(空手, empty-handed)로 보내시는 분이시라고 찬양했습니다(53절). 하나님은 공의(公義, righteousness)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公平, fair) 하나님이십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으로 먹이시고, 부자들을 빈 손이 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가진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소유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그것도 적어서 더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진 것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나누라고요.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것,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즘에 박찬호가 사람들의 관심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그가 얼마를 받고 어느 팀과 계약을 맺을 것인지 사람들의 관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가 메이저 리그에 들어와서 아직 기록이 신통치 않을 때에 한 신문 기자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동안 기량이 얼마나 자랐는가?” “기술적인 면은 물론이고 기술 외적(外的)인 면에서도 많은 발전을 했다고 생각한다.” “기술 외적인 면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모든 사람이들이 동경하는 메이저 리그에서 뛰고 있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매달 1,000불 씩을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내고 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손을 빈 손이 되게 하시기 전에 우리 스스로 우리의 손을 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손을 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그의 손을 벌리셨습니다. 그분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 주셨습니다. 헨리 나우엔(Henri J. Nouwen)은 그의 책 「열린 손으로(With open hands)」를 이런 감동적인 기도로 끝을 맺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제가 손을 펴려고 할 때에 당신은 제 손을 잡으시고 당신의 집으로 이끌어 가시리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마리아 송가
눅 1장 46~55절 / 윤창용목사
음악에는 여러 장르가 있습니다. 클래식이 있는가 하면 재즈가 있고, 팝송이 있고 가요가 있습니다. 재즈만 해도 모던 재즈가 있고 쿨이라고 불리우는 재즈가 있고, 요즈음 콘템포러리(contemporary zazz) 재즈라고 하는 재즈가 있고, 크로스오버(cross-over)라고도 하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마리아 송가라고 불리우는 부분입니다. 영어로는 Magnificant라고 불리웁니다. 이 찬양은 어떤 장르의 음악을 도입해서 불러야 할지는 모르지만 엘리사벳의 성령 충만한 모습을 본 마리아가 하나님의 높으심과 긍휼을 베풀어 주심에 찬양을 드린 내용입니다. 약한 자들을 돌보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메시야 오심으로 이루어질 온전한 나라를 바라보면서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시, 즉 송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마리아 송가를 생각하면서 설교제목을 "마리아 송가"라고 지었습니다.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가 하루는 로마에 있는 '스칼라 산타'라고 하는 성당에 갔었답니다. 루터가 살던 시대는 지금과 같이 비행기가 있고, 기차나 자동차가 흔한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루터가 로마에 한번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가는 순례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로마에 도착한 루터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오르셨다는 그 계단을 보러 '스칼라 산타'라는 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혹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로마에 왜 그 계단이 있는가 의구심을 가지실 분들도 계실텐데 그 계단은 28개의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13년에 기독교를 믿어도 좋다는 밀라노 칙령을 내린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뜯어다가 이 스칼라 산타 성당 안에 갖다 놓은 것입니다. 아주 극성스럽고 억척스러운 헬레나 때문에 유럽의 신앙인들은 지금도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이 오르셨던 계단을 볼 수 있는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카톨릭에서는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고 심지어 연옥에 가 있는 선조들을 위해서 이 계단에서 기도하면 천국으로 옮기워 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루터 당시에도 이런 가르침이 있어서 루터는 이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계속 주기도문을 외웠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 문제건, 다른 사람의 죄 문제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때에 마치 큰 불빛을 보는 것처럼 전광석화와 같이 눈이 번쩍하면서 하늘에서 말씀이 귀에 들려 왔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인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깨달았습니다. 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지 이까짓 빌라도 재판정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른다고 죄사함 받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긍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을 루터는 깨달은 것입니다. 그 이후 루터는 그 깨달음을 실천함으로 종교 개혁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루터에게 임하여 일어난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긍휼함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2001년 12월 23일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우리를 가엽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가장 필요합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경험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어떤 것입니까? 그 경험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마리아는 하나님이 자기를 택하여 주심에 감사하며 송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택하여 주면 그것처럼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많은 목사 가운데 부족한 나를 택하여 준 동광 성도들이 고맙습니다. 많은 남자들 가운데 째보는 아니지만 그래도 못난 나를 남편이라고 택하여 주고 일생동안 반려가 되어준 아내가 고맙습니다. 성질도 나쁘고 반찬도 제대로 입맛에 맞게 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래도 팔등신 같은 이쁜 여자들이 많은 데에도 나같이 미련한 사람 택하여 준 남편이 고맙습니다.
택하여 주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마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에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임마누엘 아기 예수를 잉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요즘 말로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처녀가 아이를 갖는다뇨?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요셉이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그 관계를 끊고자 했다는 요셉의 입장만 전하고 있고, 아예 마가 복음에는 이런 이야기가 삭제되어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에도 예수님의 출생 이야기는 없습니다. 다만 누가복음에만 1장 28절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인사가 천사의 입에서 나오는지 어리벙벙한 가운데 있는데 다시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수태고지'라고 하고 이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의 고향에 지금 수태고지 교회가 서있습니다.
처녀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서 아기를 갖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고 당황했겠습니까? 그야말로 돌을 맞을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되면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부랴부랴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성경에서는 39절을 보면"일어나 빨리"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 말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빨리 갔다는 말입니다. 이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걱정스러운 일을 상의하려 엘리사벳 집으로 간 마리아가 느닷없이 송가까지 부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산중에 있는 엘리사벳의 집이 어디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호수아 21장 10절의 말씀에 의하면 산중의 동네는 바로 '헤브론'입니다. 유대의 동리라고도 하고 산중에 있는 동리는 바로 '헤브론'입니다.
이 땅은 이삭에게 약속이 주어진 땅입니다. 다윗이 첫 번째 왕관을 쓴 곳입니다. 또 아브라함 부부와 이삭 부부, 야곱과 레아 부부가 묻힌 땅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옛 사람들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가 묻힌 땅이 바로 산중에 있는 동네, 헤브론입니다. 이곳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을 것입니다. 성지를 가면 그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듯, 아마 마리아도 이 산중의 동네 헤브론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임재를 온 몸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급히 이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간 마리아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찬양하는 송가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송가에서는 마리아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먼저, 마리아는 자기를 비천한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살고 있는 동네가 나사렛이란 동네입니다. 말하자면 예루살렘은 그 나라의 수도였고 잘 사는 사람, 그야말로 난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만, 상대적으로 이 나사렛이란 동네는 못사는 사람, 못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부를 때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그때에는 아주 혐오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만큼 나사렛이란 동네는 인기 없는 동네였습니다. 사람들이 살러 오지 않는 동네입니다. 달동네입니다. 그 동네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처녀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니 얼마나 두려워겠습니까? 게다가 지금 자기에게 일어난 일은 로맨스에서 스캔들이 될 소지가 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제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 분홍색깔의 로맨스에 젖어 있어야 할 처녀에게 말못할 스캔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의 이야기를 들은 마리아는 이제 수긍하고 1장 38절에 보면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왜 두려움에 젖어 있던 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고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되라고 했습니까?
이 마리아가 수긍하고 두려움을 버리게 된 한 마디 말이 있었습니다.
바로 37절의 말씀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이 말씀으로 잉태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마리아도 이 말씀에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하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처지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에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열등감과 비천함에 쩔어 있는 나사렛이란 작은 동네에 어린 처녀에게 찾아가신 위대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 그것을 마리아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열등감이나 비천함이 아니라 사랑을 부어주시고 이제는 자신감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을 마리아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광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각별한 사랑을 우리는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열등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열등감이란 내가 남보다 모자란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형편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 속에서는 아무런 일도 해낼 수가 없습니다. 물론 교만한 생각에서도 아무런 일도 해낼 수 없습니다만, 이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엘레오스'라는 단어인데 히브리어로 '헤세드'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라고 해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헤세드에 의지해야 합니다. 당신이 직접 약속하신 헤세드,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만 비천하고 낮은 우리들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헤세드가 있어야만 우리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이제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시작하셨습니까? 집에서 벽면을 향해 구도생활을 10년,20년 한 후에 얻은 결론으로 예수를 믿어야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셨습니까? 아니면 어거스틴처럼 이 생이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까?
제 생각에는 어쩌다 믿은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옆집 아줌마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거나 성탄절 때 교회에서 먹을 것을 주기 때문에, 아니면 어려운 시절 미제 구호품을 준다기에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신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는 이렇게 바울은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은 우리가 의롭게 되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바울은 분명한 은혜의식을 가지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신학적인 주요한 주제들 가운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이하에서 그 교리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는, 긍휼은 바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독일의 시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 1749∼1832)는 "하늘은 필요할 때마다 은혜를 베푼다. 신속히 이것을 포착하는 사람은 운명을 개척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도 은혜를 베풀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부모로서, 때로는 스승으로서, 때로는 친구로서 은혜를 베풉니다. 은혜는 사랑이요, 축복입니다. 은혜를 통해 많은 사람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죄도 버리게 되고, 저주아래 있던 모습도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용서받고 축복받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불교에서 은혜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보셨습니까? 은혜는 우리 기독교에서만 강조합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등지고 도망을 치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은 바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은혜의 사건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나사렛이란 비천한 동네에 가여운 처녀 한 명이 난데없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은 난데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그 비천한 처녀에게 임한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어린 처녀의 두려움이 바뀌어 즐거움이 된 사건, 황당함이 바뀌어 은혜를 체험하는 사건이 된 사건의 내막이 그리고 처녀의 심정이 이 마리아의 송가에 잘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이 마리아와 같은 은혜의 체험의 시간이 올 2001년도 성탄절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성탄절 기쁜 성탄절이 세상 사람들처럼 들뜬 성탄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함으로 기쁜 성탄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성탄절이 되길 바랍니다.
마리아의 찬가
이동원목사 / 누가복음 1:46-55
녜, 귀한 찬양 감사 합니다.
우리교회 성가대 찬양을 Miss 했는데요 아주 오늘, 아~ 너무 아름다운 찬양 축복이 됩니다.
우리가 함깨 봉독한 본문은 교회사회에서 마리아의 찬가라고 불리워지는 아주 유명한 대목입니다. ‘The Magnificat’ 라고 불리워지는 마리아의 찬가, 마리아의 송가. 이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를 잉태하고 불렀든 기쁨의 노래의 찬양입니다.이 찬양의 내용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또 하나님이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가를 아~노래하고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녀가 경험하는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서 본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긍휼이라는 단어입니다.
마리아가 경험한 하나님. 이 첫번 크리스마스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면서 경험했든 그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의 긍휼을 마리아는 경험할 수가 있었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50절 말씀입니다. 본문의 50절, 본문의 50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본문의 5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여기보시면 긍휼하심이,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또 54절 한번 보겠습니다. 54절요, 54절 같이 읽겠습니다.시작,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여기서 두 번씩 반복된 단어가 긍휼이라는 단어죠? 자, 마리아의 잉태 경험에 있어서 그가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경험했든 하나님, 그것은 긍휼의 하나님이였습니다.
저는 이번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저와 여러분에게 또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긍휼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긍휼이란 무엇일까요? Mercy, 긍휼이란, 비참함의 상태 속에 그 상태를 향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켜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Mercy,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이 긍휼하고 비슷한 단어가 하나가 있어요. 이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아주 비슷한 내용이지만 조금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 은혜보다는 사실 긍휼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강도가 진한 단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사랑 받을 자격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 죄 때문에 자격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을 나타낼 때 그것을 은혜라고 Grace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긍휼이라는 것은 죄의 결과로 빚어진 그 비참함을 향해서 비참한 상태나 비참한 인생을 향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성경은 긍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시대에 무엇보다도 이 긍휼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뉴욕을 가게 되면 일반적으로 KAL기는 그 케네디 공항에 도착을 합니다. 그런데 뉴욕에는 케네디 공항말고 또 하나의 공항이 있습니다. ‘라구아르디아’ 라는 공항이 있습니다. 본래 이 ‘라구아르디아’ 라는 것은 뉴욕시민이 아주 사랑했든 유명한 그 시장의 이름입니다. 메이어 시장, 라구아르디아 라는 시장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시장이 되기 전에 판사였습니다. 아주 명 판사였습니다. 한번 그가 추운 겨울날 재판석상에서 한 노인을 보았습니다. 그 노인은 아~추운 겨울에 아~외롭게 사는 분으로서 가족들 없이 살다가 너무 배고프고, 그래서 그 지갑에서 한 20불을 훔치다가 체포되어서 법정에서게 되었습니다. 판결을 하기 전에 판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노인장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이 노인은 재판장을 향해서 라구아르디아 Judge를 향해서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런 말을 했다고 그래요. “판사님 저에게 한번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요.”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요. 잠시동안 그 노인장을 조용히 굽어보든 판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노인장에게는 정말 긍휼이 필요하시군요 그러나 노인이 잘못한 그 20불에 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마침 제게 10불이 있군요. 제가 10불을 아~노인장을 대신해서 변상하겠습니다. 노인장을 춥고 배고프도록 버려둔데는 저의 책임도 상당히 크기 때문이죠. 10불이 더 필요한데 여기 계신, 이 법정에 계신 방청하시는 여러분, 우리 사회와 여러분도 이 노인이 춥고 배고프도록 방황하도록 도둑질 하도록 버려둔데 대해서 우리도 공동의 책임이 있습니다. 좀 자유롭게 Voluntary 로 헌금을 좀 하시죠”. 하~ 그래서 헌금대를 돌렸습니다.그러니까 10불 더 나왔겠죠?
녜, 이 명 판결을 보고 뉴욕 시민들은 참 긍휼이 많은 판사다. ‘라구아르디아’ 는 긍휼이 많은 Judge다. 그는 후일에 존경 받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에요. 성경은 하나님을 표현할 때 그냥 긍휼의 하나님 정도가 아니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는 과정, 또 잉태 하고 나서 기쁨의 찬미를 부르는 이 마리아의 찬가를 통해서 그녀가 경험한 하나님, 이 첫번 크리스마스에 경험한 하나님의 긍휼을 같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마리아가 경험한 하나님의 긍휼은 어떤 경험이였을까요?
우리는 첫째로 마리아의 선택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마리아의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가 50절을 한번더 같이 읽겠습니다.
50절, 같이 읽습니다. 시작,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자,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 시점에서 마리아는 스스로를 어떻게 느끼고 있었을까요? 그러니까 본문에 마리아의 노래를 가만히 보시면 살펴보면, 마리아가 느끼고 있었든 자화상이 한 두 가지 인상적인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선 48절에 보시면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으며” 비천한 계집종이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 또 하나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그것은 아~우리가 조금 아까 읽었든 50절의 말씀인데 긍휼하심이 어떤 사람에게 다가온다구요? ‘두려워하는 자에게’ 저는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는 그 과정에 있어서 이 두 가지를 특별히 경험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비천한 어린 소녀, 비천한 어린 소녀. 여기서 비천하다는 단어가 많은 영어번역에 보시면 ‘로 스테이드’ ‘로 에스데이트’ 라는 단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어떤 번역에는 ‘humble’ 이라는 단어가 쓰여지기도 합니다마는 아주 낮은 신분, 낮은 상태를 나타내어주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이 단어 속에 열등감이 배어있는 그런 단어입니다.
여러분, 그 당시 이스라엘에 많은 도시마을 가운데서 가장 화려한 각광을 받고 있었든 곳이 물론 예루살렘이죠. 그러나 나사렛은 상대적으로 아주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든 타운이였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 나사렛 사람, 이 말도 예수님을 혐오하는 단어 중에 하나였습니다, 본래는. 그런데 이런 시골 나사렛에서 가난하고 평범하게 살든 어린소녀, ‘주님 나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 나 같은 사람을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이 단어 속에서 그동안 살아왔든 인생의 자리에서,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많은 열등감을 가지고 살고있었든 이 소녀의 심정을 어느 정도 우리가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비천한 소녀입니다. 열등감과 싸우고 있었든 이 소녀의 모습. 또 하나는 저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소녀,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 이 마리아가 임신을 했잖아요. 이것은 스캔달입니다. 지금도 스캔달일수 있는 사건인데 그 당시에는 얼마나 봉건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잉태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크다란 스캔달이였을까요?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스캔달이 아니에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사건이였습니다. 그당시 이런 어린 소녀가 임신을 하게 되면은 그 소녀를 죽여도 그 사회는 무관했습니다. 얼마나 두려움이 컸을까요? 이것 때문에 내가 당해야 할 수모? 사람들에게 받아야할 손가락질? 그 혐오와 그리고 수많은 그 비방의 말들? 그리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어쩌면 잃어야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소녀가 겪고 있었든,그 마음에 내제하고 있었든 엄청난 두려움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이러한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두려움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님은 이 소녀에게 다가오셨습니다.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누가복음 1장을 보시면 마리아가 잉태를 하자 마자 두려움 속에 사로잡힌 여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십니다.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죠? 그리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자, 우리가 같은 누가복음 1장에 보시면 30절에 ‘천사가 일러 가로되’ 한번 그 부분을 같이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 30절 시작,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녜,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뭐라고 그랬습니까? 제일성이, 무서워말라, 두려워말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이것은 네가 두려워해야 할 사건이 아니고 부끄러워할 사건도 아니고, 이것은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거야. 너는 구세주 메시야를 낳을 꺼야.
나 같은 계집종을 주께서 찾아오시고 그리고 나를 쓰시겠다고, 이것은 결코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사건이 아니라고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다가오시고 그 마음을 만져주시고, 그 메세지를 주시는 그 순간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마리아는 무얼 느꼈을까요? 하나님이 정녕 나를 얼마나 긍휼히 여겨주셨는지.
이 마리아의 선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상상해 보세요 우리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히브리 말로는 그 하나님을 표현하는 독특한 단어가 있습니다. “엘 라훔” 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엘 라훔”.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그런데 “라훔” 이라는 단어는 본래 그 “렉켐” 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유래했다고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그 본래의 뜻은 뭐냐하면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뜻이에요. 혹은 어머니의 가슴, 자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이것은 생명을 품고 생명을 낳는 그 여인의 깊은 가슴과도 같은 것입니다.지금 여기에 외로워 하고 두려워하고 아파하면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든 이 어린소녀 외로운 소녀, 그리고 비참함을 느끼고 있었든 열등감 속에 빠져있었든 이 소녀, 그러나 하나님이 다가오시면서 그 사랑을 부어주시고 주님의 긍휼을 부어주는 그 순간 이 소녀의 열등감은 아마도 눈처럼 녹아 나면서 ‘그래, 나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여인이야’
그 열등감을 넘어서서 두려움을 넘어서서 일어서게 된 한 여인의 심정을 여러분 생각 해보세요. 이런 긍휼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오늘 여러분에게나 저에게 긍휼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겪고있는 열등감은 무엇입니까? 이 생존경쟁, 무한경쟁의 시대 속에서 끊임없이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느껴야 하는 나의 열등감은 무엇입니까? 나만이 가지고 있는,붙들고 있는 나의 외로움과 나의 두려움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의 두려움이 무엇이든지간에 내가 겪고있는 열등감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가 한번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면, 마리아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너는 은혜를 받은 자야, 만약 주께서 다가오시고 우리에게 그의 은혜와 긍휼을 부어주신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얼마만큼 달라질까요? 따라서 마리아에게 부어주셨든 그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의 선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 우리가 크리스마스 사건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교훈입니다.
우리가 두번째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이스라엘의 선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리아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그 경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 이 시점, 아~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그 시점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현실은 어떤 현실이였을까요? 우선 노예였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로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든 이스라엘 민족이죠. 녜,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많은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자, 이집트에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기도 했구요? 또 저 북방에 있든 앗시리 앗수르에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기도 했죠.그런가 하면 저 남쪽에 바벨로니아에 끌려가서 그 바벨로니아에서 또 노예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주 자존심이 강한 민족입니다. 노예생활 하면서도 결코 자기들이 한번도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이고 이 노예의 속박은 곧 벗어질 것이라고 그들은 확신했습니다. 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주변 강대국에 의해서 부서지고 끌려가고 그리고 짓밟히는 노예의 경험을 계속 해야만 했었습니다. 이 시점에도 이스라엘은 아직도 노예였습니다. 로마의 노예였습니다. 이번에 이스라엘을 장악하고 통치하고 있었든 로마제국은 지금까지의 어떤 과거의 제국과도 비교될 수 없는 아주 강력한 철의 제국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들은 로마에 대해서만은 승산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끌려가면서도, 앗시리아로 끌려가면서도 바벨로니아로 끌려가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돌아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강력하게 전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든 로마의 철권을 향해서만은 그들은 민족해방의 어떤 소망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점에서 마리아가 한 생명을 잉태합니다. 천사는 말하기를 그가 바로 기다리고 있었든 메시야 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자,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까지 기다렸든 메시야, 궁극적으로 본질적으로 그 백성에게 참된 자유와 해방과 구원을 줄 수 있는 놀라운 그 메시야. 멧사이야, 메시야가 이 마리아를 통해서 탄생한다 그것은 마리아 개인에게 소망이였을뿐 아니라 그것은 민족의 소망이 회복된 순간이였습니다. 아! 우리민족을 그대로 버리지 않으셨구나, 노예 되었고 또 앞으로 다시 로마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아무런 승산이 없었든, 미래의 희망에 대해서 단절된 이 상태의 민족, 이스라엘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긍휼, 이 민족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세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우리 민족이 긍휼이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다시 IMF가 온다고 난리인데요? 제가 외국에 나가보니까 미국에 살고있는 우리 교포들도 조국 걱정이 보통이 아닙니다. 에~나라가 잘되어야 할텐데, 이 나라의 현실은 그대로 외국에 살고있는 교포들에게도 불안을 증대 시키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다시 한번 일어날 수가 있을까요? 저는 우리민족이 또 한번 낮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낮아져서 ‘하나님 우리 민족 한번 긍휼을 베푸세요’.이렇게 정말 기도할 수 있다면 저는 우리 민족에 소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면, 교만한 사람은 깨닫지 못해요.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계속 느끼고 부딪히고 또 확인하는 사실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신다고 말입니다. 대적하신다고, 개인 뿐만이 아니라 교만한 개인 뿐만이 아니라 교만한 가정도, 교만한 민족도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습니다.그저 IMF 시작되니까 조금 겸손 해지는 것 같더라 구요 우리 민족이, 조금 있으니까 극복했다고 다시 옛날처럼 방탕하고 사치하고, 우리가 또 한번 낮아 질 수가 있다면,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겸허할 수 없다면 저는 우리 민족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요. 정말 낮아져야 할 때, 긍휼을 구해야 할 때.
교만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특성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뭐냐하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용서나 도움을 정직하게 구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그 다음엔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용서나 도움을 정직하게 구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정직하게 라는 단어를 쓰는데요? 필요하니까 도움을 구하죠.그러나 이상한 방법으로 구합니다. 꼭 저 북한 같아요. 도움이 필요한걸 알면서도 정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비비 꼬아가지고 도움을 얻어낼려고 한단 말이죠. 이 잘못된 공산주의 철학이 사람들의 윤리와 가치관을 파괴시키는 결론이에요. 얼마 전에 저희 교회에 연변 과기대에 우리 김박사께서 다녀가셨습니다마는 김진영 박사께서 그 중국에서 사시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이 공산 사회에 세뇌된 사람들에게 두 가지 특성이 있다면, 결코 볼 수 없는 두 가지, 절대로 하지않는 두 가지, 첫째는 뭐냐하면 I’m sorry가 없다는 것,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I’m sorry, 또 하나는 들어볼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Thank you, 감사합니다. 이 소리가 없다는 것, 그러나 미국 사람들 만나면 얼마나 자주 이 소리를 합니까? I’m sorry, I’m sorry. 자기가 발을 밟는 사람이 아니라 밟히고 나서도 밟히는 사람이 I’m sorry 그래요. 한국 사람들은 밟아 놓고도 I’m sorry를 안해요. 그러니까 I’m sorry, 그리고 Thank you, 기독교 문화가 준 그 영향입니다. 기독교 문화가 준 영향,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 문화가 우리에게 생활화 되지 않아서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도 아직도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겸허함이 우리 문화나 라이프 스타일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우화가 생겼어요. 오직하면 이런 얘기가 생겼겠어요? 미국 사람하고 인도 사람하고 한국 사람이 셋이서 함께 식당에 갔대요 아마 한국사람이 주문을 했습니다. 비후 스테이크를 살려고 비후 스테이크를 주문을 했는데 웨이터가 말하기를 ‘죄송하지만 비프 스테익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더래요. 그런데 미국사람이 보여준 반응이 뭐에요? ‘떨어졌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떨어졌다니, 미국사람은 이 풍요의 나라에 살다보니까 떨어졌다는 말을 이해를 못해요. 그런데 인도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하면 ‘비프 스테익이 뭡니까? 소를 먹다니요?’ 하하~ 소는 경배해야지 먹는게 아니거든요 그 사람들은,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한국사람은 ‘죄송하다는 뜻이 무슨 뜻입니까?’ 하하~, 한국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죄송합니다에요. ‘죄송합니다 마는 비프스테익이 떨어졌습니다’. 녜, 떨어졌다는 것을 미국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인도사람은 비프스테익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한국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죄송합니다란 뜻이 뭡니까?’ 그걸 배워야 해요. 우리가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낮아질 줄 알아야 되요.
그래서 한번 더 이민족이 정말 겸허의 자리에 앉아서 살아계신 주님 앞에, ‘하나님 한번 더 이민족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요’. 만약 이 낮아짐이 있다면 저는 우리 민족에게 소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때가 아닌가요? 이스라엘 민족사 가운데 긍휼을 베풀어 주시든 하나님, 동일한 긍휼을 이민족 가운데 베풀어 주시옵소서.
마리아가 체험한 성탄의 사건. 첫째로 자신의 선택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했고, 둘째로 마리아 개인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가운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그러면 우리의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선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
여러분과 저의 신앙생활의 출발을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예수 믿어셨나요? 여러분과 저가 어떻게 예수 믿으셨습니까? 어떻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까? 여러분의 당당한 구도의 결론이였습니까? 생각해 보면 돌이켜보면, 어쩌다 믿은 거에요. 또 생각해 보면 그것이 은혜에요. 나 같은 사람이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든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였습니까? 우리 부모가 믿어서 믿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도 은혜가 아니에요? 그대로 놓아두었으면 내가 예수 믿었을까? 내가 하나님을 알았을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내 삶을 만들어가는 이 놀라운 삶이 가능할 수가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은혜에요. 긍휼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고백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에베소서2장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뭘 받았어요?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그 다음에 뭡니까?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구요.
그러나 이런 은혜로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이 놀라운 강조점은 그 앞서서 더 강조된 것이 하나 있어요.
에베소서 2장8절이 나오기 전에 같은 맥락 속에 에베소서2장 4절을 읽어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에베소서 2장4절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이 대목이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한번 따라서 읽어보셔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성경은 은혜에 앞서서 먼저 강조한 것이 긍휼이였습니다. 긍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주어졌고 또 우리가 그를 믿으므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인지요.
여러분과 저가 구원 받은 구원사건이 하나님의 긍휼때문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게 믿으세요? 그러면 그 다음에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후에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구원 받았으니까? 당당하게,진실하게 겸손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놀라운 승리의 삶을, 거룩의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아마도 이 질문 앞에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않을 것 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은혜인줄 알면서도,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실망 시켜드리고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런데도 아직도 살고있는 이유, 그리고 또다시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해를 바라보고 있는,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든 것, 무엇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긍휼때문이 아니에요?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주께서 나를 받아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 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 아니냐 말이에요.
바울 사도는 그래서 어느날 자기가 살아왔든 인생의 모든 길을 되돌이켜 바라보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오직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무어라구요? 은혜라구요. 그 말을 하나님의 긍휼로 바꾸어도 조금도 착오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우리는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사건 어떤 사건입니까? 여러분과 저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하나님이 아기 예수님을 보내주신 사건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 속의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돼요.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바로 그분,그 예수님, 아기 예수로 오셨든 예수님이 이땅에서 33년 동안 삶을 살 때에 예수님이 사람들을 만날 때에 제일 많이 가졌든 마음이 어떤 마음이였습니까? 예수님이 주변의 사람을 볼 때마다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주님의 시각, 또 사람들을 보셨을 때 그분이 느꼈든 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하나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시면 자주 반복되는 표현이지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실 때 어떻게 느껴셨다구요? 민망히 여기셨다. 혹은 불쌍히 여기셨다. 여기서 민망, 불쌍히 여겼다라는 말은 영어로는Compassion 이라는 단어가 쓰여집니다. Compassion, 같이 느낀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아픔, 우리의 좌절, 우리의 낙심, 우리의 절망을 같이 느껴주시고 아파하시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신 바로 그 분, 그 분이 우리의 주님이라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한 해가 흘러가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우리는 그 분 앞에 나와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요!’ 바로 그 긍휼을 빌어야 할 때가 아닌가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열등감 많았든 한 소녀, 두려움 많았든 한 소녀. 그러나 이 소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든 바로 그 주님이 여러분과 저의 주님인 것을 인해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자, 이스라엘 민족, 보잘것없는 한 민족, 한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시고 그를 긍휼히 여겨주시든 바로 동일하신 주님이 바로 이 민족, 이 역사에 주님이 될 수가 있다면, 우리 민족 가운데 주의 긍휼을 구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됩니다. 정말 낮아져야 되요. 우리가 성경에 보면 바리세인과 세리 두 사람이 동시에 성전에 왔습니다. 두 사람이 꼭 같이 성전에 왔습니다. 똑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기도를 주께서 외면하셨어요. 거절하셨어요. 그러나 또 한 사람의 기도 세리의 기도를 받아 주셨습니다. 무엇이 그 차이를 가져 왔을까요? 바리세인의 기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 저는 저 토색질하고 강도질하고 간음하는 저 사람들과 세리와는 절대로 같지 않습니다. 저는요 십일조 잘하고, 헌금 잘하고, 주일 성수하고요, 저는 모태 신앙이고요, 만세 전부터 택정함을 입었고요’ 주님은 그것을 기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교만이였습니다. 그것은 프라이드 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전시, 자기 과시의 불과한,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발언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들어야 할 가치가 있는 기도가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내어놓을 곳이 없었든 세리, 그래서 세리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슴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단어는 단 하나였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러나 주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 세리를 받아주시는 바로 그 순간 세리의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이 비천한 여인, 이 어린소녀, 두려움 많은 소녀, 그러나 이 소녀가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그 곁에 다가오신 하나님, 두려워하지 말라고,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그 순간 깨끗이 열등감이 사라지고 “아! 하나님이 나도 쓰신다, 나 같은 사람도 쓰신다” 그 순간 마리아는 찬양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동일하신 주의 긍휼을 체험하는 이 크리스마스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요즘 어떻게 살고 계시나요? 마음의 아픔이 없습니까? 고통이 없습니까? 밝아오는 새해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우리가운데 많은 두려움, 많은 혼란, 당황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일의 앞에 불안해 하는 많은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괜찮아요 우리가 주앞에 엎드릴 수 있다면 기도할 수 있다면 그의 긍휼을 구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우리가 약할 때 그가 우리의 강함이 되어주시고, 그가 우리의 보배로운 주님이 되어주신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날수 있어요. 우리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꿈을 꿀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로 나아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저의 가정을, 그리고 저의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다같이 통성으로 함께 기도 드리겠습니다.
기도 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앞에 나와 머리 숙여 기도합니다. 우리의 아픔과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벌거벗음을 주앞에 숨기지 않겠습니다. 비천한 종들이지만 주님 불쌍히 여기시고 한번 우리를 붙잡아주시면 우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오셔서 우리를 텃치 해주시고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옵소서
약할 때 강함 되시는 나의 보배가 되시는 주 나의 모든,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주님만 함께 하신다면 주님이 저를 불쌍히 여겨주신다면 저는 다시 일어 설 것입니다. 찬양 할 것입니다.그리고 새로운 내일을 향해서 걸어갈 것입니다.
오 주님, 2000년 전 마리아에게 주셨든 그 찬양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그녀에에 주셨든 그 소망과 꿈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영혼의 찬미
눅 1장 46~56절 / 조재호목사
오늘은 대림절(待臨節) 둘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평화와 사랑과 기쁨과 구원의 메시아를 대망하고 다시 오실 주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의 색깔은 보라색인데, 정숙과 존엄, 왕권과 회개를 의미하는 색깔입니다.
"길거리의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제과점의 마늘 빵에는 마늘이 없듯이 세상의 크리스마스에는 예수님이 없 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은 크리스마스로 연말로 바쁘게 돌아가는 계절,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뜬구름 같은 분 위기에 아무 의미 없이, 뜻 없이, 정신없이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예수님의 오심을 생각하고 내게 주신 구원과 삶의 의미들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소식을 마리아는 들었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마리아는 하나님 앞에 자 신의 몸과 순종을 드렸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 그리고 나서 마리아는 하나 님께 인간으로서는 감히 부를 수 없는 영혼의 찬미를 드리게 되는데 오늘의 본문은 마리아의 그런 영혼의 찬양의 내용입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6-47)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주님은 왜 오셨으며, 여러분에게는 어떤 축복으로 임하는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로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러 오셨습니다.
"(예수님 오심으로) 긍휼 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리로다"(50)
예수님이 태어나신 때의 유대 임금은 헤롯이었습니다. 이 헤롯 대왕은 포악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처남 둘과 자신의 아내 미리암네와 아들 두 사람을 죽인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기 5일 전, 많은 백성들을 잡아서 자신이 죽는 날 함께 처형하라고 칙령을 내렸는데, 그래야 온 나라가 울음바다가 되어 자신의 죽 음을 애통해 하는 것 같이 보이도록 하려고 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통치하는 날 동안 매일 같이 처형이 자행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헤롯의 비밀 경찰들이 백성들을 감시했 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상처투성이가 된 가엾고 처량한 양처럼 내일이 없이 처량 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공포와 억눌림 속에서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희망이 없이 하루살이 목숨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의 구름이 저들의 영혼과 삶을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백성들을 불 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방황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길잡이와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한없는 사랑과 긍휼을 베푸시 므로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참된 신앙적 용기를 주십니다.
골리앗은 큰 소리로 골짜기를 울리고 이 쪽에 서 있는 이스라엘 군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 들은 골리앗 앞에서 맥을 못추고 기가 죽었으며 심히 두려워 떨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용기를 주셨 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3년을 같이 다니던 제자들은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버리고 말았 습니다. 세상이 변하여 자신들을 잡으러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부활의 주님은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 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100여 년 전에 미국에 피터 카트라이트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주일의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주일 에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참석할 것이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그러니 정부를 공격하거나 과격한 말을 삼가라는 부 탁을 받았습니다. 기도하면서 준비하다가 성령님께서 그에게 대단한 복음의 담력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설교 중에, "저는 오늘 이 예배에 잭슨 대통령이 참석하실 것이라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을 조심하라는 주문도 받았 습니다. 제가 대통령께 꼭 드릴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앤드류 잭슨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아이의 방에 영화 쇼생크 탈출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의 포스터가 있습니다. 쇼생크 감옥에서 탈출한 주인 공이 하수도 구멍 진흙더미 위에서 비를 온 몸으로 맞아 가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두 손을 높이 뻗치고 서있는 모 습입니다. 그는 탈출의 희망을 가지고 20년 넘게 매일 작은 망치로 감옥에서 굴을 파서 바지주머니로 조금씩 흙을 담아 내었습니다. 포스터 밑의 글귀는, "fear can hold you prisoner, hope can set you free"이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당신을 죄수와 같이 감옥에 가두지만 희망은 당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라는 문구입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세네카는 말하기를 "인간은 두려움이 있는 곳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 독일의 철학자 괴테는 또한 "불안과 공포는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독사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실직의 두려움, 입시의 두려움, 사업의 두려움, 다른 사람들의 오해와 공격의 두려움. 등을 우리는 겪습니다. 그 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긍휼을 베푸셔서 희망과 용기를 주러 오셨습니다.
다시금 내일의 희망을 노래하고 믿음의 용기를 소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둘째로 예수님은 비천한 사람을 높이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51-52)
하나님의 팔은 힘이 세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어렸을 때 가장 힘이 세 신 분이 우리 아버지이신 줄 알았습니다. 팔 씨름하면 당할 재간이 없었으니까요. 중학생일 때는 이 세상에서 힘 이 가장 센 사람은 역도산과 김일 인줄 알았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유신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힘센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대학교 다닐 때는 세상에서 가장 힘 센 사람은 인내를 잘하는 어머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러나 가장 힘에 세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할 자가 없습니다.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니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 손은 높으시니이다" (시89:13)
그리고 하나님은 그 팔의 권능과 능력으로 비천한 사람을 높이십니다. 하나님은 아이가 없어서, 천대받고 비천하 게 살아가던 한나의 눈물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잉태하게 하셨다.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도다"라는 찬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절하며 고쳐 달라고 간절히 원했던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깨끗하게 만들어 주 셨습니다. 손을 내밀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십 수년 동안 피가 흐르는 병에 시달려 온갖 고초를 다 겪고 재산을 다 날린 불쌍하고 비천한 여인을 보시고 예수님은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간음죄로 현장에서 잡 혀온 비천한 여인을 보호하시고 용서하시고 새 삶을 주셨습니다.
가장 낮고 비천한 사람을 높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전능하신 손이 함께 하시면 변하지 못할 것이 없고 바뀌 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아들이 어느 날 저녁 복음 성가 CD를 한 장 선물해 주었습니다. 차분하고 조용하게 신앙 고백적으로 부르는 것이 너무 좋아 목양실에서 듣고 또 듣고, 어제는 혼자 운전하고 가다가 그 CD를 듣고 싶어 다시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예수여 이 죄인이 .." 그 찬양을 들으며 부르며 눈시울을 붉히면서 운전을 했습니다. 다시금 성령님께서 차안에서 구원의 감격을 새롭게 하시고 자녀 됨의 행복을 노래하게 해 주셨습니다. 가장 큰 은혜는 비천한 죄인이 용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던 비천한 인생을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님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이 감격과 은총을 확신케 하실 줄 믿 습니다.
3. 셋째로 예수님은 주린 사람에게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주린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53) 이 말씀 안에는 세 가지 진리가 녹아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배고파하는 사람에게 공급해 주신다는 것이고, 둘째로 하나님은 공급해 주시되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공급해 주시되 배 부르도록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께 찾아 온 사람들을 절대로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백부장이 자기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내 종이 낫겠나이다"라고 말씀드리자 "이 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집에 가보니 종이 이미 강건해져 있었습 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집에 오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열두살 먹은 내 딸이 죽어갑니 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에게 요구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 하는 것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명절에 큰집에 가면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가지고 간 것 보다 더 많이 얻어 옵니 다. 페트병에 식혜, 그릇마다 떡과 전, 비닐 주머니에 과일, 빈손으로 보내지 않는 형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빈손 으로 보내시지 않는 주님! 주시되 반드시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주실 줄 믿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 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11)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34:10)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7:9)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인간과 같은 형상을 하고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마리아의 영혼의 찬미 속 에 드러난 복된 일들을 우리를 위해 이루셨습니다. 금년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성도님! 마리아의 영혼의 고백 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하늘로부터 가져오신 모든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