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은 모노톤으로
김비주
숨겨놓은 사랑을 끄집어낸다 '그해 여름'은 초록이 빗방 울에 돋고 주인이 두고 간 잠에는 어린 딸이 마을을 이고, 월북한 빨갱이 아빠의 그늘을 뒤집어쓰고 있다 시간이 몇 개의 다리를 건널 때 편백나무 향은 사람을 부르고 군사정권의 마지막은 고운 첫사랑을 조각냈다
비가 올 때마다 만어사의 물고기들이 노래를 부르고 딸의 유일한 기억의 가족 나들이가 네 살에 머물러 있을 때, 아버지가 남긴 마을의 도서관은 활활 타오르는 불더 미 속으로, 지워지지 않는 상처는 비릿한 바람을 몰고 최 루탄 속으로 굴렁대며 캑캑거린다
흑백영화처럼 나의 청춘은 영화 속에 돌돌 말려 오랜 시간을 끄집어내여 한다 사라진 모든 것은 풋내 오른 오 월의 나무들을 안고 잃어버린 퍼즐을 초록이 우거진 모든 곳에서 복원해야 한다
눈물이 숨은 가장자리엔 잃어버린 연인을 찾아가는 한 남자의 애절한 상심이 화면을 뚫고 나와 먼지처럼 내 폐 에도 쌓인다
사랑, 고귀하고 상습적인 이야기의 뒤 끝에 매달린 정치 의 폭력성과 인간의 나약함이 비에 젖은 풍경을 만든다
아직, 가벼워지지 않는 내 무지의 뒤편에는 절대선이라 는 편협한 논리를 가슴 밑바다에 묻어둔 채, 풍경이 탁하 게 덧칠된다
* 영화 제목
낯설게 하기
낡은 시로 인사를 건네고 신선한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낡지 않아서 신선하다 못해 물비늘 튀던 어판장 공매 시간에 나를 데리고 간다
퍼덕이던 생이 활어처럼 공중에서 날것의 언어를 뱉는다 한참의 피차가 서로를 건너고 실려 가던 물고기들 언저리엔 물이 쏟아지고 물메기, 땅에 파닥이던 붉은 고기, 작은 쥐치가 손에 들려 있다
낯선 곳에서의 하루는 바다를 통으로 가르고 세 마리의 물고기를 얻었다 성부 성자 성신이 함께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펜션의 주방에서 소금과 물로 태어나고 낡은 시를 생산한 날에 낯선 곳에서의 아침이 낯설지 않다
―시집 『그해 여름은 모노톤으로』 2022. 9 상상인 ------------------- 김비주 / 전남 목포 출생.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8년, 2020년, 2022년 부산문화예술재단 예술창작지원금 시부문 선정. 시집 『오후 석 점, 바람의 말』 『봄길, 영화처럼』 『그해 여름은 모노톤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