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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트와이스(TWICE)의 멤버 쯔위(子瑜/본명 : 저우쯔위 周子瑜/주자유)
가 난데없이 동아시아 권력 패러다임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SK
텔레콤의 LUNA(루나)에 걸그룹 가수 AOA의 멤버 '설현' 이 모델로 나와 인
기를 끌면서 <설현폰>이란 이름으로 팔리자, 경쟁업체인 LG유플러스에서는
트와이스(TWICE)의 멤머 중 가장 큰키에 날씬한 몸매를 지닌 '쯔위'를 모델
로 쓰면서, 화웨이(华为/ HUAWEI)의 듀얼폰 Y6를 <쯔위폰>이란 이름으로
광고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쯔위의 주가는 순간마다 올라가고 그렇게 이름
이 날리는 그녀의 인기도 높아만 갔다. 그러나 이를 시샘하는 같은 대만출신
이면서 대륙에서 활동하는 황안(黃安)이란 가수가 꼬투리를 잡았다.
▲ SK텔레콤의 설현폰 LUNA 광고
▲ SK텔레콤의 LUNA 광고에 나오는걸그룹 가수 AOA의 멤버 '설현'의 모습
이번 쯔위 논란의 핵심을 한국, 중국, 대만의 삼각관계에 투영시켜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화웨이(华为)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는 LG 유플
러스의 중저가 스마트폰 중심으로만 이야기를 풀어내기에는 이번 논란이 너
무 복잡하고 광범위하며, 시사하는 바가 남다르다. 그런 이유로 이번 IT여담
에서는 약간 민감한 부분까지 넘나들며 쯔위논란의 이전 이후를 불문하고 그
내용을 살펴본다.
▲ LG 유플러스에서 판매하는 화웨이 Y6 쯔위폰의 구성품
▲ LG 유플러스 듀얼폰 Y6 광고 모델로 출연한 쯔위(周子瑜)의 모습
● 해협양안(海峽兩岸)
쯔위(周子瑜)는 지난 1월15일 오후 소속사 JYP엔터테인먼트(대표 박진영)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 등장해 사과문을 발표했다. 울먹이는 표정으로 글을 읽어
가는 모습이 애처롭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고, 마치 요즘 세계의 이목이 되고있
는 IS의 인질을 방송에 내보내면서 두려워 떨고았는 광경과 같다고 말하는 사
람도 있었다. 쯔위는 유튜브 방송에서 "중국은 하나밖에 없으며 '해협양안' 은
하나다. 나는 내가 중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라고 말했다.
▲ 대만 타이난(臺南)에서의 유아시절 쯔위(周子瑜)
▲ 유아시절부터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던 쯔위(周子瑜)
▲ 초등학교(國小) 상급학년시절의 쯔위(周子瑜)
▲ 대만에서 중학교(復興國中)에 다니던 쯔위(周子瑜)모습
▲ 대만에서 중학교(復興國中)시절에 노래하며 춤추는 쯔위(周子瑜)모습
▲ 사과문을 읽으면서 긴장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으로 보이는 쯔위 표정
해협양안은 무슨 뜻일까? '항상 대륙과 대만을 표시하는 어휘'이다. 즉 '해
협 양안이 하나다'라는 표현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중국과 대만이 하
나라는 뜻이다. 쯔위가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대만국기를 가지고 나왔던
순간과 대비하면 묘한 표현이다. 즉 자신이 대만사람이라는 것을 밝혔지만,
이후 중국의 반발에 직면하자 '중국과 대만은 하나이며, 난 중국인이다' 라
고 밝혔다.
▲ 한국으로 오기 직전의 끼가 살아난 13살의 쯔위(周子瑜)
▲ 한국와서 고뇌도, 보람도, 추위도, 외로움도 처음 알았다는 쯔위(周子瑜)
▲ 2015년도 세계중화권소녀 중 아름다운소녀(世界美少女)로 선정된 쯔위(周子瑜)
상황을 그냥 민낯 그대로만 보면 약간 희한하다. 대만사람이라는 것을 밝
혔는데 '왜 대만이냐?' 라고 지적을 하는 중국인들은 뭐고, 또 그걸 가지고
왜 '난 중국인이다' 라는 '사과'를 하는 것일까? 중국이 거대한 내수시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 한국에 와서 식스틴활동을 하면서 동료도 사귀고, 화교학교도 다니고~~
▲ 한국에서 소녀로 여학생으로 밤거리를 다니는 증거움과 설레임
▲ 한국에서 연예인으로 인기도 높고 팬들도 많이 확보되어 지인도 많아졌다
여기서 중국이 근대화되어가는 아편전쟁(阿片戰爭)이후의 청말(淸末)상황과
신해혁명(辛亥革命)을 겪으면서 계속된 혼란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태
후(西太后)의 폭정과 외세의 침략으로 황실의 존엄은 땅에 떨어지고, 국민은
도탄에 빠진데다가 만주족 청나라 정부(滿淸政府)에 대한 한족(漢族)들의 반
감도 많았다. 선통제(宣統帝/본명: 愛新覺羅溥儀/재위: 1908~1912년/1906~
1967)즉위 직후인 1909년 조정이 적극적으로 입헌군주제정부를 수립할 의도
가 있음을 공표하였다. 임오군란 때 북양대신의 파견원 신분으로 조선에도 왔
던 원세개(袁世凱)가 청나라로 돌아가 서태후의 신임을 얻어 직례총독(直隷總
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이 되자, 무술정변을 일으키는 등 온갖 패악질을 저
질렀다. 서태후가 3살짜리 부의(溥儀)를 황제로 지목하고, 유폐시켜둔 광서제
(光緖帝)를 원세개로 하여금 독살시키고 그 이튿날 서태후자신이 갑자기 죽었
다. 선통제가 즉위하여, 섭정하던 순친왕(醇親王)은 원세개(袁世凱)를 모든 직
무에서 해임시켰다. 1911년 신해혁명의 발단이 된 무창봉기(武昌蜂起)가 일어
나자, 원세개는 흠차대신(欽差大臣)이 되어, 진압군으로서 군권을 장악하고 내
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다.
▲ 청말(淸末) 황실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든 후 죽인 여인
서태후와 비견되는 측천무후는 권력으로 살상을 했지만, 국가는 부강시켰다.
▲ 동치제(同治帝)는 함풍제(咸豊帝)와 서태후사이의 외아들로 6살에 황위에
오르고, 성년이 되어도 서태후의 섭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20살에 죽다
▲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자기 시동생과 여동생사이의
3살인 광서제를 황위에 앉혔으나, 감금시켰다가죽였다
▲ 3살도 안된 부의(溥儀)가 황제가 되니 곧 선통제
▲ 부의(溥儀)의 만주국 황제시절
▲ 직례총독과 북양대신시절의 원세개(袁世凱)
혁명군은 14개성(省)을 점령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임시정부의 초대대총통
으로 손문(孫文)이 선출되었다. 해외에서 귀국하여 이듬해 1월 1일, 손문은 남
경(南京)에서 취임하고 청나라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원세개(袁世凱)와 막후
협약을 체결하였다. 손문의 혁명당은 황제퇴위와 공화정 체제를 요구하고, 원
세개가 새로운 정부의 대총통으로 선출된다는 조건을 내놓아, 원세개(袁世凱)
는 혁명당의 이름을 빌어서 북경으로 돌아가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
統帝)를 퇴위시켰다. 그리고는 1913년에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하고 중국 국
민당과 국회를 해산했다. 1915년 12월에는 참정원을 조정하여 자신이 중화제
국(中華帝國) 대황제로 칭하고, 중화민국 연호를 폐지하고 중화제국으로 바꾸
었다. 1916년에 원세개는 중화민국 국민당의 항거에 군주제를 취소하고 중화
민국(中華民國)의 연호를 회복시키고, 그 해 5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원세
개가 죽고 나서 1928년까지를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아래 북양군벌계인 단기서
(段祺瑞)、풍국장(馮國璋)과 왕사진(王士珍)을 흔히 '북양삼걸(北洋三杰)' 이라
하는데, 이들과 려원홍(黎元洪) 등이 권력을 나누어 갖고 투쟁하고 협력과 반복
을 계속하였는데, 이때를 북양정권이라 한다.
▲ 중화민국 제2대 대총통 원세개(袁世凱)
▲ 중화제국 홍헌제(中華帝國洪憲帝)-원세개(袁世凱)
▲ 무창봉기가 발발하자, 려원홍(黎元洪)을 혁명당에의해 호북도독(湖北
都督) 부총통을 맡고, 원세개사후 북양정권에서 2번의 대총통을 지냈다
▲ 단기서(段祺瑞 :1865~1936)북양정권실권자. 1924~26임시집정(執政)
▲ 풍국장(馮國璋 :1859~1919)북양정권부총통, 대리대총통
▲ 왕사진(王士珍 :1861~1931)육군총장, 참모총장, 내각총리 등 역임
신해혁명으로 봉건국가인 만청제국(滿淸帝國)이 붕괴되었지만, 만청제국의
모든 것이 바로 통일된 공화국(共和國)으로 넘어간 것은 아니다. 중국 곳곳
은 강력한 군벌들이 지배하면서 서로가 자신의 세력이 중국을 지배하겠다는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든다. 그과정에서 서구열강의 이권다툼에 철저하게 이
용되는 등 20년 가까이 혼란상태가 이어지다가 1928년 광동성(廣東省)의 군
벌 출신인 국민당(國民黨)의 장개석(蔣介石)이 패권을 잡는다. 그렇다고 온전
한 통일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대륙 각지에는 국민당에 반하는 열강 및 공
산당의 반격이 격렬하게 일어난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다음
해 만주국(滿洲國)을 건국하는가 하면 훗날의 역사를 상기하면 아이러니하게
도, 대만인근의 강서성(江西省)일대에 공산당이 자신들의 공화국을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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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민국초대총통-손문(孫文)
▲ 신해혁명이 일어난 다음해 1912년 중화민국임시대총통-손문(孫文) - 달력
▲ 신해혁명은 손문(孫文)이 주도했지만, 혁명을 바로 국민속에 뿌리 내리지는 못했다.
▲ 신해혁명(辛亥革命)을 겪은 중국 내부의 세력과 주위 일본세력의 판도
▲ 무한(武漢)에 있는 신해혁명박물관(辛亥革命博物馆) - 두류봉이 직접 가서 촬영
▲ 무창봉기(武昌起義)에 사용한 혁명깃발
▲ 신해혁명박룰관으로 사용하는 무창봉기(武昌起義)당시 악군도독부(鄂軍都督府)건물
▲ 신해혁명박룰관 경내에 있는 손중산선생 동상(孫中山先生之像)
이 시점에서 국민당은 만주까지 넘어온 일제보다 공산당 세력에 대대적인 공
세를 감행한다. 이후 공산당은 궤멸 직전의 상태가 되어 3년 동안 9600km에
달하는 험난한 퇴각에 나서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대장정' 이다. 흔히 '고
난의 행군'으로 더욱 익숙한 말이다.
▲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시절의 주은래(朱恩來 ; 1898~1976) 전수상
▲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시절 모택동(毛澤東 ; 1893~1976)이 딸과 쉬고있다.
▲ 중국 사천성 금사강(金沙江) 루딩교(爐定橋) - 대장정에서 홍군이 건넌다리
▲ 금사강(金沙江) 루딩교(爐定橋) - 1935년 홍군대장정에서 격전이 있었던 곳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고, 만주군벌이던 장작림(張作霖)의 아들 장
학량(张学良)이 일으킨 서안사건(西安事件)으로 국민당은 공산당과 협력하게
된다. 이후 국공합작과 남경(南京) 대학살 등의 변곡점을 거치며 대륙에는 국
민당, 공산당, 일제가 상황에 따라 협력과 투쟁을 반복하며 자웅을 겨룬다. 그
러다가 시간은 흘러 1945년에 결국 제2차세계대전은 서유럽과 미국의 승리로
끝난다. 그리고 당시 일제 식민지였던 대만(臺灣)은 1945년 8월 연합군에 양도
되었고, 당시 중국의 국민당은 국부군을 파견해 대만을 접수한다. 한편 만주와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북한에는 김일성을 내세워 소련의 위성정권을 세우고,
만주는 연안(延安)에서 움츠리고 있던 모택동(毛澤東) 공산당에게 인계하게 된
다.
▲ 대만과 중국은 같은 사람인 장학량(張學良 : 1901~2001)을 서로 다르게 평가하고 있다.
대만에서는 매국노, 중국은 애국자이다. 대만의 신죽현(新竹縣) 청천촌(清泉村) 고거(故居)
▲ 장학량(張學良)은 54년이나 연금생활을 하고 술. 담배. 여색을 즐기고도 100살 이상을
살았으며, 유부남 장학량과 불같은 사랑을 했던 조일적(趙一荻)과의 뜨거운 부부애가
흔히 장수비결로 본다. 사진은 심양(瀋陽)의 장학량이 어린시절살던 장씨수부(张氏帅府)
▲ 심양(瀋陽)의 장씨수부(张氏帅府) 앞 공원에 세워진 장학량(張學良)장군 동상(塑像)
▲ 심양(瀋陽)의 장씨수부(张氏帅府) 안으로 들어가는 장학량생가(張學良生家) 대문
대륙에서 겨루고 있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마지막 일전을 치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만주를 손에 넣고, 반한족(反漢族)성향의 몽골족주민이 많이 살고있는
내몽고(內蒙古)를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 내몽고독립정부를 승인해
주겠다는 달콤한 말로 부추겨 내몽고를 그들의 용어로 제일 먼저 해방시킨다.
그렇게 되어 등 뒤에는 모든 지역이 소련과 맞닿게 되어 적극적인 군사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국민당보다 군사력이 우위에 서게 된다. 1949년10월1일
모택동(毛澤東)은 천안문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을 선포하
고, 1949년 12월 7일 국민당은 대만으로 중화민국 정부를 이전하기로 결정하
면서 갈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공산당이 본토를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과 대만의 국제무대에서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 국민당 지도자로서 군인복장을 한 장개석(蔣介石)
▲ 1945년8월28일 모택동(毛澤東)이 중경(重慶)의 장개석(蔣介石)을 방문하여 이튿날
부터 43일간의 긴 협상끝에 10월10일 합의문에 서명한 쌍십협정을 발표하였다.
사진왼쪽은 8월28일 重慶에서 만나 촬영한 것. 오른쪽은 10월10일 합의문 서명후 사진.
♣ 태평양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종결되고, 중국에서는 전후 처리를 둘러싼 국민당정
부군에 대한 공산군의 대항이 예견되어 국공내전의 움직임이 보이자 오랫동안 전
쟁에 시달려온 중국 민중들은 평화와 민주를 외치며 내전반대를 소리높여 부르짖
었다. 이렇게 내전반대의 여론이 높아지자 1945년 8월 28일 모택동(毛澤東)이 장
개석(蔣介石)의 초청을 받는 형식으로 주중미국대사 하레와 함께 중경(重慶)에서
그 이튿날인 8월 29일부터 국공화평을 위한 교섭에 들어갔다. 장개석과 모택동의
직접회담 이외도 국민당측의 장군(張群), 왕세걸(王世傑)과 공산당측의 주은래(周
恩來)사이에도 협상이 진행되었다. 양측은 43일간의 긴 협상 끝에 10월10일 ‘회담
기록요강’에 서명하였다.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된 무창봉기가 발생한 날이 1911년
10월10일이라서 10월 10일을 중화민국의 건국기념일로 정하고 쌍십절이라고 한다.
이 협정도 그 정신을 받들어「쌍십협정(雙十協定)」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월 공산당이 이 협정을 지키지 않자, 6월에 국민당군은 공산당군을 공격하여 협정
을 파기하였다.
▲ 지도자로서 군인정신과 국민적 리더십을 갖춘 장개석(蔣介石)
▲ 남경(南京)총통부의 총통집무실 - 벽에는 장개석(蔣介石)총통의 사진이 걸려있다.
▲ 중화민국정부가 공산군에게 쫓겨 수도를 대만의 타이베이(臺北)로 올긴 경로
♣ 중화민국이 공산당에게 쫒겨 대만으로 갈 때까지 남경(南京)의 장개석(蔣介石)총
통이 중국의 국가원수인 것은 세계의 모든 국가에 통용되는 일반적인 사실이었다.
다만 공산당은 중국의 단순한 반국가단체의 한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장개석(蔣
介石)이 국제회의에서 거둔 가장 큰성과는 1943년11월22일부터 카이로에서 열린
미국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대통령, 영국 처칠(Winston Churchill)수상과
함께 가진 유명한 카이로회담에서 제④항에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
평양 여러 섬을 박탈하고, 또한 만주(滿洲)와 대만(臺灣) 팽호열도(彭湖列島)등을
중화민국에 반환하고,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축출한다는 사항
과 특별조항으로 ⑤항을 첨가하여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아래 놓여있음을 유의
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는 합의를 얻어
냈다. 그 이전의 유럽의 여러나라는 "만주는 만주족의 나라로 독립시켜야 하고, 대
만도 청나라가 강제로 중국에 편입시킨 섬으로 독립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그러니 일본이 패망한 1945년8월까지도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존재는 미미한
상태였다.
▲ 1943년 11월 미국의 루스벨트대통령, 영국의 처칠수상과 장개석이 모인 카이로회담
▲ 1949년 10월 1일 천안문광장에서 모택동(毛澤東)은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건국을 선포한다
▲ 대만의 일본통치시대에 총독부로 쓰던 건물을 국민당은 중화민국 총통부로 사용하였다
- 국민당은 1949년12월7일 “중화민국” 정부를 대만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으며(國府
遷臺), 12월 11일에는 타이베이(臺北)로 국민당의 중앙당부를 모두 옮겼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후 중국과 대만은 격렬하게 대립한다. 1978년 중국의 개혁
개방노선을 채택할 때까지 대륙과 대만의 양안관계는 최악이었다. 그러나 국제
적으로 1990년에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의 사회주의정부가 무너져 미국이 세계
유일의 최강대국이 된다. 이렇게 냉전의 시기가 끝나고 미국을 중심으로한 패권
이 정립되자, 중국과 대만도 오래된 이데올로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 신해혁명 이후 혼란기의 중화민국 최고지도자가 되었지만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합법적인 나라의 영토와 백성을 공산당에게 뺏기고 대만으로 쫓겨난 장개석
▲ 국공투쟁에서 중국대륙을 모두 차지하고 중국 최고지도자가 된 모택동(毛澤東)
▲ 장개석(蔣介石)의 유해는 도원시(桃園市) 대계구(大溪區) 부흥로(復興路)一段1097號에
안치되어 있는데, 흔히 <자호릉침(慈湖陵寢)>이라고 하며 아들 장경국(蔣經國)전 총통도
가까운 곳에 같이 안장된 공원형태라 <양장문화원구(兩蔣文化園區)>라고 한다. 장개석이
생전에도 고향과 비슷한 경치라며 종종 방문했다고 전해지며, 대만헌병대가 관리한다.
▲ 장개석(蔣介石)의 영구(靈柩)는 지하에 매장되지 않고 지상에 토관묘 형식으로 안치되어
있는데, 중화민국이 대륙을 수복하면 그때 본토의 고향에 매장해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 모택동(毛澤東)이 죽자 중화인민공화국의 개국영수인 모택동 전 주석을 기리는 모주석
기념당(毛主席纪念堂)을 북경의 천안문광장 서쪽에 건립하여 그의 시신을 안치해두었다
▲ 모택동(毛澤東)시신은 방부처리되어 모주석기념당(毛主席纪念堂)에 안치되어 있는데,
최근의 소식통에는 2년이내에 고향인 호남성의 소산(韶山)에 매장하기로 했다고 한다
2015년 11월 7일 싱가포르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국가주석과 마잉주(馬英
九) 대만 총통이 만난 소위 ‘시마회(習馬會)’ 장면은 유명하다. 당시 두 사람은
70초 동안이나 손을 맞잡은 채 악수를 하며 미소를 지어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하나의 중국'을 원하는 중국의 뜻은 변함이 없지만, 양안(兩岸)이 함께 '협력'
의 분위기를 강하게 뿜어낸 것이다. 여기에는 중국과 긴밀하게 협조하기를 원
하는 대만(臺灣) 국민당(國民黨)의 의지도 작용했었고, 벌써 그 당시에 2016년
1월에 치를 총통선거는, 민진당(民進黨)의 차이잉원(蔡英文)이 국민당(國民黨)
의 주리룬(朱立倫)보다 높은 지지를 받아 우위에 서있어 정권을 빼앗길 가능이
높았다. 마잉주(馬英九)총통은 국민당소속으로 국민당이 재집권할 수 있도록
하기위하여 최후의 몸부림이라는 생각을 하게하였다. 1992년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각자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 92공식(九二共識)의 미래형으로 평가 받
았다.
▲ 국민당 주리룬(朱立倫) 新北市長은 총통후보로 주민들의 반대에도 대륙을 방문하였다.
- 국민당은 대륙을 공산당에게 넘겨주더니 이제는 대만까지 공산당에게 넘겨주려느냐?-
▲ 2015년5월 주리룬 국민당주석의 대륙방문을 반대하는 시위대가 공항을 막고있다
-국민당은 반공을 외치다가 친공을 말하더니 이제는 공산당에게 투항하자는 거냐?
이 지점에서 쯔위(周子瑜) 논란이 발생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중국과 대만이 협력의 바람을 타고 나름의 성과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던 기
간이던 1월16일 총통선거에서 차이잉원(蔡英文)이 이끄는 민주진보당(民主進
步黨)이 압도적인 표차로 국민당(國民黨)을 누르고 정권교체에 성공한 것이다.
거기다가 국회인 입법원의 총의석 113석 중 민진당(民進黨)이 68석을 차지하
여 국민당(國民黨)이 차지한 35석을 거의 곱절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면서 과반
수를 넘겼다.
▲ 대륙방문을 반대하는 시위대를 비켜서 공항을 빠져나가는 朱立倫 국민당 주석
▲ 중국의 시진핑(習近平)주석을 방문하여 악수를 나누는 주리룬(朱立倫)국민당주석
▲ 북경대학(北京大學)에서 강연하는 주리룬(朱立倫)국민당주석(2015년5월)
사실 쯔위 논란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중국이 '친중국' 성향의 국민당과 협력
해 서로의 간극을 메우는 사이 대만에서 '반중국'을 주도하던 민진당이 정권교
체를 이루면서 의회까지 점거한 것이다. 선거를 치르기 직전 불거진 쯔위사건
은 정치권의 움직임과는 별개로, 양안(兩岸)의 민심을 절묘하게 보여주게 되었
다. 쉽게 말하면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다'로 볼 수 있었다. 논란이 벌어지자 대
륙의 네티즌들이 쯔위를 공격한 것과, 대만 총통 및 후보자들이 쯔위를 옹호하
고 나선 부분은 이러한 현상의 표출점이다. 친중국 성향의 마잉주 총통 심정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 마잉주(馬英九)총통님! 싱가포르에 가서 시진핑(習近平)과 회담하는 건 안됩니다
- 하나의 중국이란 대만이란 나라가 이 지구상에서 없어지는 겁니다 - 馬習會談반대
▲ 2015년11월7일 싱가포르에서 양안이 서로 손을 맞잡은 후 기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
- 오른쪽이 중국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이고, 왼쪽이 대만총통 마잉주(馬英九)이다 -
결론적으로 쯔위라는 하나의 대상을 바라보는 중국대륙과 대만의 반응은, 이후
반중국성향이 강한 대만의 행보와 맞물리며 묘한 변곡점을 그리게 될 전망이다.
남중국해 분쟁 및 기타 범아시아 경제블록 구성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는 중국도 마음이 편치 않다. 쯔위논란은 이러한 '양안의 복잡한 셈법'을 가장
날 것 그대로, 하지만 뚜렷하게 보여주는 현상이자 '앞으로 일이 쉽지 않을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이다.
▲ 중화민국이 성립되고 손문(孫文)이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를 국기로 할것을
주장하였으나 일치를 보지못해 지역마다 군벌마다 국기가 달랐다. 북양정권에서는 오색기를
사용. 1925년광주(廣州)정부에서 북벌개시부터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중화민국기로 정하였고
1928년부터 오색기는 사라지고 전국에서 청천백일만지홍기를 통일된 국기로 결정하였다.
▲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이 선포되기 이전까지의 국기로는
중국 모든지역에서 중화민국기를 쓰다가 건국후부터 오성홍기를 사용하였다
● 우리 한국의 입장
이번 논란이 한국에서 벌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과 대만, 그리
고 한국은 1950년 벌어진 한국전쟁의 아픈 기억과 이후 1992년8월24일의 우리
나라와 대만과의 국교단절(韓臺國交斷絶)에서부터 한중국교수립(韓中建交)으로
일어난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이 또한 묘한 시사점이다. 역
사의 장난이라는 표현도 어울릴 수 있겠다.
▲ 대만은 비록 3만6천제곱킬로미터의 좁은 땅에 2300만명의 인구를 가진 작은 나라지만
대만사람들은 자부심이 대단히 높고 알찬 경제생활을 한다. 타이베이 101빌딩중심모습
먼저 한국과 대만의 '민심'은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2010년 중국 광저우(廣州)
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대만 태권도 종목의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양수쥔(楊
淑君)선수가 베트남 선수에개 9대 0으로 앞서가다가, 마지막 12초를 남기고 심
판은 양수쥔 선수에게 실격패를 선언했다. 심판은 “양수쥔이 전자양말 뒤꿈치
에 불법 전자센서패치를 붙인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규정위반”이라고 밝혔다.
당시 주심은 필립핀 사람이고, 3명의 부심에도 한국인은 없었으며, 감독위원회
위원장은 중국인이고 심판위원장은 싱가포르 사람이었다. 다만 이 사실은 경기
를 지켜보던 한국의 전자양말 제조업체관계자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
에서는 난리가 났다. 양수쥔에게 실격패를 선언한 심판이 한국계라는 말이 퍼지
면서, 들불처럼 혐한 감정이 들끓었다. 대만에서는 태극기를 불태우고 한국라면
과 삼성 및 LG의 제품 불매운동을 선언하고, 거리에 내동댕이치면서 짓밟았다.
분노한 시민들이 한국인들을 공격하는 극단적인 사태도 벌어졌다.
▲ 대만의 태권도 영웅 양수쥔(楊淑君)선수
▲ 2008년 베이징(北京)하계오올림픽에서 활약하는 대만의 양수쥔(楊淑君)선수
이 파국의 원인은, 그 근원을 따라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 한국에 있는지도 모른
다. 일제치하의 상해임시정부 시절부터 중화민국과 장개석(蔣介石)총통에게서 많
은 도움을 받았고, 1950년 한국전쟁을 겪을때까지 한국과 대만은 소위 '혈맹'이었
으나, 1992년 한국의 노태우정부가 대만과 상의도 없이 중국과 수교했다. 당시 중
국의 수교조건은 대만과 단교하는 것을 요구하였고, 한국은 6·25전쟁에 중국의 인
민해방군이 참전한 것에 대하여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은 160만명이나 되
는 중공군이 참전하여 우리의 국토를 피로 물들이고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면서 통
일을 가로막은 행위에 대하여 한마디의 사과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수교하고 말았
다.
▲ 2010년 광저우(廣州)아시안게임에서 실격패 당하자 매트에서 울고있다
▲ 2010년 광저우(廣州)아시안게임에서의 양수쥔(楊淑君)선수의 여러 모습
대만과 중국은 외교무대에서 치열한 '내편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혈맹이라 믿었던 한국정부가 대만을 버리고 중국을 택하였는데, 중화민국은 대
한민국이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건국하고, 첫번째로 수교하여 서울에 상주대
사관을 설치한 나라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명동의 중화민국 대사관을 하루아침
에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으로 바꿔버리니 그 분노는 대단했다. 2015년말현재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중국과 수교하고 있어,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
라는 불과 22개국뿐이다. 그 중에 파나마(Panama)와 같은 나라는 청(淸)나라시
절부터 수교하다가, 1912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국(淸國)이 망하고 중화
민국(中華民國)이 성립되자 지금까지 계속하여 수교하고 있는 나라도 있다. 그
러나 세계 대부분의 나라는 중국이 대만을 승인하고있는 나라와는 수교하지 않
는다는 할슈타인정책(哈尔斯坦主义/ Hallstein Doctrine)을 내세워 세계의 대국
인 중국과 수교하려면 어쩔 수 없이 대만과는 단교하지 않을 수 없다.
▲ 동북아에서 가장 높은 대만 옥산(玉山 :3952m)은 국립공원이면서 대만사람들은
자신들의 정기가 서린 산으로 여겨 모두가 숭배하고 있다 <남록에서 본 최고봉>
▲ 옥산(玉山)의 주봉과 주봉에서 갈라져나온 능성을 촬영하였다
한중수교 당시에 한국정부의 선택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수만은 없다. 크고
넓은 내수시장을 가진 중국은 지리적이나 경제적 정치적 요인을 따질 때, 반드
시 수교해야만 하는 국가이다. 그러나 외교적인 절차도 매끄럽지 못했고, 방식
도 세련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한국과 대만의 관계를 고
려했을 때, 쯔위 논란이 더욱 이채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2015년말 현재 중국
은 우리의 통상순위 첫 번째이고, 대만은 제5위국이다. 중국은 거대한 정치 경
제 군사 강국이고, 대만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크기에 비해서 그 비중은 만만
치 않다.
▲ 서울의 북한산이 서울과 경기도에 걸쳐있듯이 양명산(陽明山)은 臺北市와 新北市에 걸쳐있다.
- 사진은 대만의 국립공원 제3호인 양명산국가공원(陽明山國家公園)관리처에서 세운 표지판 -
▲ 양명산은 일제통치시대인 1937~1945에는 대둔국립공원(大屯國立公園)으로 지정하였다. 일본
패망후 대둔산(大屯山), 칠성산(七星山), 사모산(紗帽山)과 주위의 경사진 초목지대를 포함한
전체를 아우르는 초산(草山)이란 이름을 되찾았다. 1950년초산(草山)을 명나라의 유학자이며
철학자인 왕수인(王守仁 :1472-1529)의 호인 양명(陽明)을 따서 양명산으로 변경하였다.
▲ 양명산(陽明山)은 1985년9월1일 대만국립공원제3호로 공고하고 9월16일 시행되었다
양명산국가공원(陽明山國家公園)관리처 입구에 있는 꽃시계 - 둘레에 서있는 관광객
▲ 양명산국가공원(陽明山國家公園)에 있는 장개석동상(蔣介石銅像)
▲ 양명산국가공원(陽明山國家公園)의 유황분기공(硫黃噴氣孔) <4명중 흰점퍼차림이 두류봉>
▲ 유황냄새가 가득찬 양명산국가공원(陽明山國家公園)의 유황분기공(硫黃噴氣孔)
▲ 양명산국가공원의 유황기공과 온천원수
▲ 양명산국가공원의 유황분기공(硫黃噴氣孔)과 온천원수(溫泉源水)가 솟아흐른다
▲ 양명산국가공원(陽明山國家公園)의 유황온천(硫黃溫泉)
● 사과의 방식
자연스럽게 '방식' 에 집중하면, 쯔위의 소속사인 JYP도 대만과의 국교 단절 당시
한국정부의 하는 짓과 그대로 닮아있다. 그냥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 회사가 잘 되
기만 바라보는 사람으로서도 JYP의 행위는 매끄럽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대
만의 매스컴이나 포털사이트 혹은 현지의 사람들을 접촉해보아도 덩리쥔(鄧麗君)
이 일본에 진출하여 세계에 그 명성이 알려지는 성공을 거둔 이래, 저우쯔위(周子
瑜)에 대한 사랑과 기대는 대단하다.
▲ 트와이스 멤버 안내용 사진의 쯔위(周子瑜)
▲ 쯔위(周子瑜) 개인 홍보용 사진
▲ 트와이스 멤버로 노래부르고 있는 쯔위(周子瑜)의 모습
JYP의 박진영 대표는 별도로 발표한 사과문을 통해 "어린 나이에 집을 떠
나 한국에 온 쯔위의 부모님을 대신해 잘 가르치지 못한 저와 회사의 잘못
이 크다고 생각한다" 며 "쯔위의 모든 중국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보고있는 우리 국민들 누구도 적절한 사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냥 어쩔 수 없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 학교에서 돌아와서 포즈를 취한 쯔위(周子瑜)
▲ 트와이스 멤버들과 함께 있는 쯔위(周子瑜)의 모습
▲ 트와이스 멤버들과 함께 노래부르는 쯔위(周子瑜)
먼저 사과의 주체를 쯔위에게만 너무 집중시켰다. 이렇게 되면 쯔위는 희생
양이 되어 분노한 중국 네티즌의 먹이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나는 자랑스러
운 중국인'이라고 말한 쯔위가 대만에서도 '아쉬움'을 남기는 것을 고려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시스템과 더불어 중국시장의 중요성에 바탕을 둔 내외부의
변화를 치밀하게 내보이는 것이 맞다. 쯔위를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포지셔닝
한다면 그것도 나름의 전략이지만, 최소한 이러한 사과문은 사태 진작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중론이다. "쯔위는 아직 미성년자로 정치적 의견
을 주장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는 잘못의 책임을 쯔위에게만 지우려는 극
적인 심정의 발로로 보인다.
▲ 지난달에 쯔위문제로 내한했던 어머니 황옌링(黃燕玲)여사
- 나이 50으로 보이지않는 너무 젊은 미인 - 대만언론보도
▲ 지난달 내한했을때의 저우쯔위(周子瑜)와 황옌링(黃燕玲)모녀
▲ 노래하는 딸 쯔위(周子瑜)를 응원하는 그의 어머니 황옌링(黃燕玲)여사
▲ 대만기자들 앞에서 손을 들어보이며 명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쯔위(周子瑜)
▲ 고국의 대만사람들 모두 안심하라는 표정의 저우쯔위(周子瑜)
대만과 중국을 저울질하고, 적극적으로 중국을 택하는 스탠스를 노골적으
로 보인 대목도 눈길을 끈다. 시장을 선택한 경제적인 결단이지만, 결과적
으로 쯔위와 JYP, 심지어 한국 민간외교의 근간을 부정하는 뉘앙스로 들린
다. 대만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시사하는 발언이 더욱 극적으로 나왔어야만
했었다. 절차도 매끄럽지 못했고, 방식도 세련되지 못했다. 1992년 한국 정
부와 소름 끼치게 닮았다. 그 뜻과 의지는 당연히 인정될 여지가 있어도, 때
로는 보여지는 것도 중요하다
▲ 목이 타고 마르면 드링크류 한병을 마시면서 노래하는 쯔위(周子瑜)
▲ 저 쯔위(周子瑜)의 이런 표정은 어때요?
▲ 노래부르지 않고 활동이 없는 쯔위(周子瑜)는 여유로워 보이죠?
▲ 저우쯔위(周子瑜)를 이렇게 소개하였네요. TZUYU는 쯔위의 대만식 영어표기 이름
. ▲ 트와이스의 멤버로 노래부르는 표정을 클로즈업 시킨 저우쯔위(周子瑜)
●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2015년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 : one belt and one road)의 기치를 내걸고
추진 주변국에 인프라 구축 및 무역협정 등을 통해, 경제 통로 건설에 박차를 가
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쯔위가 사과문을 발표하고 대만의 정권교체가 이뤄지던
순간 미국이 주도해 온 국제 금융질서에 본격적인 도전장을 내민 중국의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이 개소된 것이 흥미롭다. 아시아 · 태평양 지역 개발도상
국의 인프라구축을 내건 AIIB는 중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경제의 천리지망이다.
▲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전세계를 하나의 길로 통하게 하겠다는 일대일로프로젝트
▲ 중국을 출발하여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향하는 국제화물열차
여기서 중국의 정치 및 경제적 야심을 엿볼 수 있다. 일종의 패권국으로 자리 매
김하기 위해 대국굴기(大國崛起)를 일으키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해 인터넷 플러
스 정책을 화두로 걸고 나선 대목이 극적이다. 인터넷 플러스는 인터넷 플랫폼과
기존의 모바일 인터넷, 클라우드 컴퓨팅,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등의 정보통신기
술을 제조업, 금융, 교육 등의 전통산업과 융합해 산업구조를 바꿈으로써 혁신적
인 성장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통산업에 인터넷을 접목시켜
발전시키겠다는 국가전략으로 풀이할 수 있다.
▲ 중국이 자랑하는 고속철도로 윈난성의 쿤밍(昆明)에서 라오스 비엔티얀과
태국의 북부도시 치앙마이를 연결하는 고속철도가 착공되어 완성될 것이다.
그 외 알리바바(阿里巴巴/ 1688.com), 텐센트(腾讯/ tencent.com), 바이두(百
度/ baidu.com)로 대표되는 BAT와 화웨이(华为/ HUAWEI), 샤오미(XIOMI/小
米) 등 무자비한 ICT 라인업은 중국을 중심으로 삼는 글로벌 경제의 화두를 선
언하고 있다. 쯔위 논란으로 대표되는 중국대륙과 대만의 '감정대립'은 결국 이
러한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천명하고 나선 중국의 '질주'에 대한 주변국의 단편
적인 '화답'으로도 이해된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은, 하나의 세상을 포기하지 않
는다는 것을 말한다.
▲ 중국의 저장성(浙江省) 이우시(义乌市)를 출발하여 17일 동안 9500㎞를 달린
고속화물열차가 2월15일(현지시간) 이란의 테헤란(Teheran)에 도착하였다.
● 성공여부
쯔위논란에는 중국의 야심, 한국의 방식, 대만의 정서가 복합적으로 일렁이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중국의 이러한 꿈은 가능할까? 현재의 패권국인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에 힌트가 담겨 있다.
▲ 대만 마잉주(馬英九)총통은 TV에서 차이잉원(菜英文)이 양안문제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 92공식(九二共識)은 대만측이 주도적으로 제안한 것으로 양안문제를 풀어나가는 좋은방법-
▲ 차이잉원(菜英文)당선자는 양안문제와 대만의 독립적인 태도는 새로워져야 한다
- 지진사태로 희생된 주민들과 유가족들에 대하여 기도하는 차이(蔡)당선자와 일행
▲ 2016년2월6일 총통선거도 끝나고 대만 국민이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춘절을 앞두고
규모6.4의 강진이 대만남부에 발생 타이난의 17층주상복합 웨이관진롱빌딩이 무너졌다
▲ 대만중앙재해센터에 따르면 대만남부의 이번 지진으로 모두 116명이 사망하였는데,
사망자 중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상복합빌딩인 웨이관진룽 빌딩에서 나왔다. 수색팀은
총 289명의 매몰자중 이 빌딩붕괴현장에서 175명을 구출, 생존자 중 96명은 치료중이다.
▲ 대만검찰은 웨이관건설의 린밍후이(林明輝) 당시 사장 등 3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수사중이고, 마잉주(馬英九)총통은 대만전역의 노후주택안전점검을 실시할 계획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신년 국정연설에서 "세계적인 문제가 생길 때 사람들은
중국이나 러시아로 찾아오지 않고 미국을 찾는다"고 말했다. 단순한 자신감일
까? 자신감은 맞지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현재의 패권국은 미국이며, 그것
은 미래에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시사(示唆)하기 때문이다.
▲ 2016년 1월 신년국정연설을 발표하고 있는 오바마 (Barack Obama) 미국대통령
무슨 말이냐고 하면,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를 꿈꾸며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중국색을 강하게 드러내는 길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다르다. 다양성을 표면적으로 인정하며 논란을 스스로
빨아들여버리는 정책이다. 어느 나라가 더 강력한 폭발력을, 영향력을 장기적
인 관점에서 확보할까? 정확한 예상은 할 수 없지만, 미국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한계, 그리고 일말의 가능성이다.
▲ 2015년 9월 25일 워싱턴에서 미중정상회담이 열렸지만, 북핵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 미중정상회담이 워싱턴에서 열렸지만 우리의 문제는 의제에도 들지않았다
결론적으로, 이번 쯔위논란에는 중국과 대만, 한국을 넘어 패권국 경쟁이라
는 복합적인 현상들이 비빔밥처럼 뒤섞여 있다. 역사는 이를 어떻게 기록할
까? 재미있다고 할까? 슬픈 현실이라고 할까? 마침 남북한과 중국, 대만, 미
국, 일본에 얽힌 외교적인 문제와 군사적인 문제 및 통상과 경제적인 상황이
계속하여 이슈가 되고 있다. 남북한 긴장완화의 중재자가 되면서, 북한에 핵
문제와 군사적인 준동에 억제압력을 행사할 것으로 믿었던 중국이 어떤 중재
자나 핵개발과 군사적인 행동에 어떤 관여도 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자위수단
인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의 한국 내 배치하는 일에는 크게 간섭하
고 강력한 방해를 한다.
▲ AN/TRY-2 레이더
▲ 북한에서 미국이나 일본 및 남한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과정을 가정한 사진
▲ 한국에 THAAD의 사정거리 2000km설치할 경우에 중국이 주장하는 사정권
우리는 대북압력수단으로 개성공단을 긴급하게 폐쇄하였다. 동서독이 분할
되어있던 시절 1955년 서독은 할슈타인정책으로 동독을 고립시키는 외교노
선을 폈다. 그러다가 1969년 이 원칙을 포기하고, 1972년에는 동서독기본조
약을 맺어 철저한 상호주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서로 교류하였다. 우리나라도
1973년에 6.23선언을 통하여 사실상의 할슈타인정책을 포기하고 남북한이
UN에 동시가입을 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대등한 자격으로 활동하는 정책을
폈다.
▲ 북한은 남한을 미사일이나 근거리 유도탄 등 여러 공격무기를 갖추고 있어,
한국이 이러한 공격에 대비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THAAD를 배치하려 한다.
▲ 한국에 만약 THAAD를 배치한다면, 일본의 대탄도미사일시스템은 최대의 수혜자가 된다.
- 사진은 북한의 노동 중거리 미사일 - <중국이 주장하는 의견과 사진>
그러다가 1998년 김대중정권이 들어서고,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아래 북한에
유무상원조와 금강산관광 및 개성공단을 조성하여 합법적 비합법적으로 막
중한 외화를 퍼주는 행위를 시작하고, 김대중대통령 자신이 남한의 국가원수
자격으로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다. 그러나 북한은 상호주의 정신을 무시하면
서 그해에 김정일이 남한방문을 하기로 한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노무현정권
은 김정일이 남한답방을 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북한을 또 방문하였다. 그리고
대북경협은 늘리고 금강산관광을 더욱 활성화하고 개성공단도 더욱 확대하였
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대중과 노무현정권에서 북한은 연평해전을 일으키고,
핵실험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김정은이 권력승계이후에는 더욱 노골적으로 남
한에 대하여 군사적 협박과 핵이나 미사일실험을 강행하고 있다.
▲ 추꿔홍(邱國紅)주한 중국대사가 임오군란을 평정한다는 명분으로 한국에와서
점령군행세를 한 원세개(袁世凱)처럼 내정간섭을 하기위해 야당을 방문하였다
▲ 한중외무장관회담 - 윤병세외무장관과 왕이(王毅)중국외교부부장
▲ 한중외무장관회담에서 왕이(王毅)중국외교부부장이 연설하고 있다.
▲ 한미외무장관회담에서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연설하고 있다.
▲ 우다웨이(武大偉)6자회담중국측수석대표가 방한하여 황준국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서울외교부청사에서 자리를 안내한다. 회담을 아무리 열어도 북핵문제는 해결되지않고
북한이 핵실험하고 장거리미사일 발사하여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고 군사력만 증강된다
첫댓글 정성 어린 자료, 감사합니다.언제나 건강하시고요.
글 읽어주시고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혜안과 통찰력이 가득한 자료입니다. 편을 가른다기보다 공정성이 돋보이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의 생각이나 행동이 어쩌면 저의 개인생각이지만 땅덩어리 크기만큼만의 생각만 하는것이 아닌가하는 느낌도 받습니다.
,F T A 를 뱆은 지역은 늘어나지만 생각이나 행동의 크기와 깊이는 그렇지 않은것 같은 느낌이 팍팍듭니다.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은 파도타기만을 좋아할뿐 밀물인지 설물인지 태풍인지 ..........국민 각자가 똑똑해져야 하겠지요 의식수준의 지평을
두류봉이 쓴 조금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웃나라의 역사도 조금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으며, 민족적인 충돌에는
항상 자기 나라 이익이 우선하는 흐름이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항상 우리민족과 국가를 지키며 애국애족의 사상으로 힘을 기르며 살아가야 합니다.
@두류봉 감사합니다. 저는 늘 저의 뼈를 뭍을곳이 대한민국이라고 가슴에 새겨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웃집에 누가 어떤 행동을 해왔는지도 잘 알고 있어야 휘둘림에 당하지 않겠지요 두류봉님의 글을 읽을 때면 생각을 많이 합니다. 좋은글 늘 감사합니다.
박학한 지식에 탄복과 찬사를 표합니다!
덕분에 크게 시야를 넗혔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