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제봉 까실쑥부쟁이
전날 오랜 가뭄을 해갈시킨 흡족한 비가 내린 사월 넷째 수요일이다. 비가 오길 틈타 집안에서 서가의 책을 정리한 이튿날 아침에는 이른 시각 산행을 나서려다 미적댔다. 올봄 퇴직 이후 자유로운 영혼으로 산야를 누비면서 귀로에는 맑은 술잔을 기울이기 예사였다. 예전엔 곡차를 즐겼다만 민감한 부위에 염증이 생겨 찾아간 병원의 의사는 술을 끊으라고 하는데 끊을 수는 없었다.
맑은 술을 매일이다시피 거르지 않으니 염증이 재발할 기미가 보여 자존심이 꺾였지만 아침나절 병원을 찾아갔다. 주치의가 간단한 문진으로 끊어준 처방전에 따라 약국에서 약을 탔다. 앞으로 약을 복용할 기간만은 금주해야 하는 입장인데 당장 오늘 저녁 예전 근무지 동료와 술자리가 약속되어 난감했다. 모레는 현직 교장으로 재직 중인 대학 동기들과 저녁 식사가 예정되어 있다.
수요일 아침나절 병원 진료와 약을 탄 이후 곧바로 산행을 나섰다. 대방동 뒷길에서 대암산 등산로를 비켜 성주동 아파트단지를 돌아갔다. 용제봉으로 가는 등산로로 드니 금난초가 노란 꽃봉오리를 밀어 올렸다. 지난해 여름에 용제봉 숲으로 들었던 이후 드물게 찾아가는 산자락이다. 예전엔 봄날도 더러 찾아갔으나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불모산터널이 뚫린 이후 뜸해졌다.
이십여 년 전 봄날에 용제봉 계곡이나 불모산 기슭에서 참취나 머위를 뜯어왔다. 초여름엔 산딸기를 따기도 했고 돌복숭을 채집해 왔다. 근래 산 아래 아파트단지 입주민들의 산행이 잦아지고 터널이 개통되면서 숲이 망가져 예전과 같지 않아 북면 야산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는 그곳도 신도시가 들어서 내 남새밭은 사라져가는 지경이라 여항산이나 서북산까지 진출하는 실정이다.
이번에 용제봉 기슭으로 찾아감은 숲속으로 들어 산나물을 뜯을 생각보다 나중 저녁 무렵 예전 근무지 동료와 대면할 약속 시간까지 숲속에서 보내다 나올까 싶어서였다. 임도처럼 널따란 등산로를 따라 걸어 상점령 못 미친 지점에서 불모산 숲속 길을 걸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용재봉과 상점령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곳을 지나니 까실쑥부쟁이 잎맥이 보여 허리를 굽혀 뜯었다.
용제봉 기슭이 창원터널 입구로 향하는 계곡에는 전날 내린 비로 냇물은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갔다. 비가 내린 이후여서도 송홧가루와 미세먼지로 대기는 깨끗한 편이 못 되었다. 계곡물이 하류로 흘러가는 산기슭에도 까실쑥부쟁이와 참나물이 보여 몇 줌 더 뜯고는 개울가 바위에서 챙겨간 김밥을 비웠다. 쉼터에 앉고 보니 시원스레 흐르는 물소리는 공으로 거저 들을 수 있었다.
김밥을 비운 후 계곡을 건너 상점령으로 가는 정자 근처 숲에서도 까실쑥부쟁이와 구릿대가 보여 더 뜯어 모았다. 그새 뒤늦게 나타난 한 아낙이 뽕잎을 따다가 내가 뜯은 산나물이 뭐냐고 물어와 까실쑥부쟁이라고 했다. 삶아 데쳐 나물로 무쳐 먹거나 전으로 부쳐 먹어도 맛이 향긋하다고 했다. 나는 아낙에게 뽕잎도 좋지만 그 곁에 덩굴로 뻗어나간 노박의 여린 잎을 따길 권했다.
용제봉 기슭의 사방댐에서 불모산 숲속 길로 들었더니 인적은 드물어 호젓했다. 오래도록 먼지가 폴폴 일었을 등산로는 어제 내린 비로 습기를 알맞게 머금어 등산화 바닥의 촉감은 폭신했다. 소나무가 우거진 숲을 지나니 상수리나무를 비롯한 낙엽활엽수림은 연녹색 잎이 돋아 싱그러웠다. 통나무 쉼터에 앉아 한동안 명상에 잠겼다가 몇몇 지기에게 숲속의 풍광 사진을 날려 보냈다.
성주사까지 가려면 길이 한참 남은 곳에서 불모산동 저수지로 내려섰다. 숲이 끝난 경작지에서 개울을 건너니 불모산동 저수지가 나왔다. 종점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고 집 근처에 닿아 친구와 약속된 주점에 들렸다. 예전 근무지에서 만났던 두 동료인데 한 친구는 내보다 먼저 퇴직했고, 다른 한 친구는 내년 이월 퇴직을 앞두었다. 나는 두 친구에게 잔을 채워주고 귀는 열어두었다. 22.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