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찬송가 597장 (구 378장) / 사도행전 17 : 16 - 34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겠습니다.
* 찬송가 597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 하나님 말씀은 사도행전 17장 16절 – 34절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아멘!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까지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활동한 교부 신학자 터튤리안(Tertullian, AD150-230)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유명한 질문을 남겼습니다. 그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기독교 신앙이 태어난 모태가 갈보리 십자가 언덕이 있는 예루살렘이라면, 아테네는 철학이 태어난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469년에 철학의 대명사인 소크라테스(BC469-399)가 태어납니다.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제자 플라톤(BC427-347)은 그의 스승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정치적 야망을 버리고 철학연구에 몰두합니다. 그는 기원전 385년경 아테네 근교에 오늘의 대학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를 설립합니다. 이 아카데미에서 다시 플라톤의 탁월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가 입학하여 20년을 공부한 후 불세출의 철학자가 됩니다. 그래서 아테네는 그 후 인류 지성을 대표하는 도시가 됩니다.
우리는 지금 사도행전을 통해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를 떠난 바울은 에그나티아 길을 따라 베뢰아로 갑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는 약 60km거리로 2-3일 정도 걸렸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인들보다 더 신사적이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예찌 있게 경청하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17:11-12)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남겨두어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돌보게 하고 자신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드디어 지성의 도시 아테네에 도착하게 됩니다. 베뢰아에서 아덴까지는 320km의 거리가 되는데, 바울은 배를 타고 아테네에 입성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렇게 아덴에 입성한 바울의 선교와 바울이 전한 설교를 들은 아테네의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 바울이 입성한 아덴 - 아테네라는 도시는 한마디로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아덴은 지성의 도시, 철학의 도시였지만 오늘 바울이 바라 본 이 도시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들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신까지도 우상으로 섬길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지성의 실상, 인간 지식의 실상, 그리고 지식의 도시 아덴의 실상이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지성, 하나님 없는 지식은 결국 인간과 도시를 우상 숭배로 이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도시를 자랑했지만, 바울이 본 아덴의 거리는 우상의 거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후일 로마서 1장 22절 - 23절에서 하나님을 떠난 마음, 하나님을 떠난 지식의 결국이 곧 우상 숭배라고 증거합니다. -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처럼 사도 바울이 아덴 시에 가득한 우상을 보고 격분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아덴의 지식인들이 우상에게 무릎 꿇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아덴시에 가면 아레오바고 언덕에 자리 잡은 파르테논 신전을 위시한 수많은 사당과 신전, 제단의 자취들이 고스란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 곳에서 문화를 감동하지만 우상의 흔적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실 아테네라는 도시명 그 자체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 - 로마식으로는 미네르바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테네 혹은 미네르바는 지혜의 신이요, 학문의 신이었습니다. 지혜와 학문은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그 자체도 우상이 된다는 교훈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교회를 거부하고 신앙을 등진다면 우리는 결국 우리 자녀들을 지식의 우상, 세상 성공의 우상에 갔다 바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식의 우상, 세상 성공의 우상도시에서 사도 바울이 사람들에게 전한 복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오직 예수 부활복음이었습니다. 바울 당시 아덴에서 가장 인기를 얻었던 두개의 철학 사조가 바로 에피큐리안학파와 스토아학파습니다. 에피큐리안 학파의 시조 에피큐로스가 삶으로부터의 도피와 쾌락을 가르치고 있었음에 반하여, 스토아학파의 시조 제논이라는 사람은 숙명론과 복종, 고통의 감수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에피큐리안들은 죽음을 잊어버리고 살라고 가르치고 있었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운명으로 수용하라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과 논쟁하며 바울은 무엇을 증거했다고 했습니까? 한마다로 바울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철학이 아닌 예수님과 부활의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믿습니까? 부활의 소식이 복음입니다. 믿습니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의 죽으심으로 그는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예수의 부활로 인류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철학이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철학으로 우리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 부활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해 보장된 사건이기 때문에 성도인 우리의 죽음은 부활의 시간까지 잠자는 안식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소망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믿습니까? 아멘!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철학은 우리 인생의 해답이 아닙니다. 세상 지식도 우리 인생의 해답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만이 해답입니다. 예수님만이 해답입니다. 아덴시가 필요로 했던 것이 바로 이 복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 필요로 하는 것도, 바로 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덴에 필요한 것이 복음이었음을 알고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의 일터, 우리의 마을, 우리의 가정, 우리의 모든 이웃들의 필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을 알고, 오직 복음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예수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을 때, 세 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 오늘 본문 32-34절 봉독 - 첫째 반응은 조롱하고 야유하면서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둘째 반응은 좀 더 생각해 보고 좀 더 연구해 보고 좀 더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반응은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 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바로 이 몇 사람들이 아덴의 희망의 불씨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덴이 변화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처음 몇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한 나라의 변화, 한 지역사회의 변화, 한 가정과 직장의 변화는 언제나 몇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몇 사람이면 족합니다. 그 몇 사람이 확실히 변하고 그 몇 사람이 확실히 복음의 희망을 붙들고 살면 마침내 이 땅에도 복음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아레오바고 언덕인 이 땅에서 사도 바울처럼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복음전도가 우리에게 주는 위대한 교훈이요. 도전입니다. 이 교훈과 도전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놀라운 복음전도와 구원의 역사가 이 땅에서 불길같이 일어나, 날마다 믿는 사람들이 더하는 부흥의 역사가 우리 교회에서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간구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