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스사노
출처 - 소망의 나무 http://www.wishtree.or.kr/
Manifiesto 선언 - Vitor Jara 빅토르 하라
권정생 선생님
일요일 아침 김장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후배가 전화를 받더니 말했다.
"언니, 어떤 할아버진데?"
처음엔 우리 친정아버지가? 하고 놀랐다. 결혼한지 14년이 되도록 우리 아버지가 내게 전화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전화를 받고 보니, 권정생 선생님이셨다. 그저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오는 선생님.
선생님이 전화하신 까닭은 박기범때문이었다.
"가서 말리세요. 또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요."
아마 기범이가 단식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많이 걱정을 하셨던가 보다. 선생님은 어린아이 같은 기범이가 세상에 휘둘릴까봐, 그 순수함이 사람들의 욕심에 상처받을까봐 걱정을 하셨다.
내가 그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사람들을 움직이고 묶는다니까 아니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선생님은 이 땅에서 단식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따로따로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다 같이 모여서 하지 않으면 부시를 비롯한 악의 무리를 이겨낼 방법이 없다고......
모두 맞는 말씀이었다.
선생님은 당신은 하루하루 사는 것만으로 힘드시다고,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그 모든 시간을 온 힘과 마음을 기울이며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단 하루의 생명이 소중한 건 몸이 아프신 선생님만은 아닐 것이다.
내게 주어진 하루, 그 하루의 생명을 감사하고 나누는 것. 내 삶은 내놓은 것.
그 걸 지금 박기범이 하고 있다.
어제 혜화동에서 만난 기범이는 잘 버티고 있었다. 오늘은 열하루째다. 기범아, 권정생선생님이 말씀하신 거 기억하고. 토요일 단식 끝내고 선생님한테 전화드려.
"선생님 이제 저 밥 먹을 거에요. 밥 먹고 싸울게요."
하고.
알았지? 꼭.
2003.12.2 '제비꽃'
우리반 아이들
저희반은요.
소망의 나무 앞에서 수화를 하려고 했어요.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희망을 보내요.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초등학교.
2003.12.1 '№큐㉬ㅣ트╋'
[만나본 사람] '파병반대' 단식하는 동화 작가 박기범 씨
[만나본 사람] '파병반대' 단식하는 동화 작가 박기범 씨
비전투병은 없습니다”
지하철 혜화역 2번 출구 앞. 만남의 장소로 항상 붐비는 이곳에 작은 천막과 두 그루 나무가 들어섰다. 파병을 반대하는 시민단식 모임의 '소망의 나무'가 그것. 그리고 천막 안에는 '동화작가 박기범, 단식 5일째'라는 알림판과 함께 그가 있었다.
지난 2월 이라크 전쟁을 막기 위해 '반전 평화팀'으로 출국한 뒤 6개월여 동안을 이라크와 요르단 등지에서 인간방패로 활동한 박기범 씨는 "일상 속에서 평화를 실현하고 싶었지만 10월 18일 정부의 2차 파병 발표가 그럴 수 없게 만들었다"며 주먹을 꼭 쥐었다.
그는 파병 발표 이후 꼬박 한 달을 '소망의 나무'를 기획하며 보냈다.
시민단식 모임 '소망의 나무'는 박기범 씨가 이라크로 떠난 뒤 그의 주변 사람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 '박기범의 이라크 통신(바끼통)'에서 만난 이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운동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부, 학생, 직장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그는 거리 선전과 서명 받기에 분주한 이들을 가리키며 "저쪽 여자 분은 오늘 하루 회사에 월차 냈고, 그 옆 대학생은 오늘 수업을 뺐어요. 서명 받는 분은 초등학교 아이를 둔 어머니시죠" 하며 웃는다.
"곡기를 끊은 내 비장함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던 그의 바람 때문일까. 천막 주위에는 소망나무 사람들이 나눠주는 평화 꽃다발을 받고 수줍게 서명하는 아이, 수능 끝난 학생들, 애인을 기다리던 남자가 굳이 손을 잡아끌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전투병이 아니라면 민간인이지요. 비전투병은 없습니다. 어차피 이라크에서는 이들 모두 총을 메게 될 테니까요. 베트남에도 처음에는 비전투병이 갔죠. 그리고 가장 악랄하게 죽였습니다."
파병을 이야기할 때면 바그다드 거리에서 구두를 닦던 소년을 비롯해 반 년 동안 만났던 이라크 아이들이 한꺼번에 떠오른다는 그는 "우리나라 군인들이 그 아이들을 다치게 하는 것은 내가 죽이는 것과 같다"며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교육희망] 신문 강성란 기자 2003.12.2 '뚱띵'
[소망의 나무 단식일지]
아흐레 째 - 목숨
(줄임)
2.
그리고 어젯밤 염창근에게 급하게 온 전화. 바그다드 티그리트에서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죽었다는데 그것 좀 확인해 달라는 전화였어요.
염창근이 이리 저리 알아보다가 같이 있을 때는 확인을 못했는데
새벽 한 시쯤 문자가 왔어요.
확인 되었습니다. 한국인 2명 사망, 2명 중상.
그리고 오늘 아침, 야학 대문 앞으로 온 신문을 보니
1면 기사로 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해요. 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못됐다 싶습니다.
한국인이 죽고 다쳤다는 소식, 그리고 그것이 커다란 이슈가 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아, 이쯤이면 정부나 국회가 정신을 차리려나,
그래도 파병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되려나,
하는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요사이 정치권 싸움에 가려 뒷전으로 밀린 듯한 파병 이야기가
국민들 사이에서 크게 일게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국민들의 여론으로 파병을 하지 않는,
정부의 입장을 철회케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참 못됐지요? 지금 당장 빼앗긴 두 사람의 목숨,
그 목숨 앞에서 나는 이 일이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앞으로 파병과 관련한 정국이 어떻게 돌아가게 될까 하는 것부터 생각했으니 말이지요.
아니, 그것만 생각했다는 게 더욱 솔직한 거예요.
어처구니 없이 한 생을 마치게 된 그 분들의 목숨은
어떻게 해서도 되돌릴 수 없는 건데......
(줄임)
2003.12.1 박기범 단식일지 중 일부 따옴
열흘 째 - 거듭 살아나려는 몸부림
열흘 째
아침
농성을 들어가기 전에는 과연 평일에도 종일 함께 해줄 도우미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거였지만 막상 지난 열흘 가까이 그런 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나와 단식장을 갖추었고, 늘 손이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천막에 사람들이 찾아왔다. 아, 그런데 오늘 아침. 오늘 아침에는 천막을 치러 갈 사람이 ㅅ꼬미 님과 배준이 밖에 없었다. 걱정이 되어 나도 걸음을 서둘러 농성장으로 나갔는데 걱정은 웬 걸. 전에는 천막 하나를 치는 것도 네다섯 사람이 붙어도 낑낑거렸지만 이제는 ㅅ꼬미 님과 배준이 둘만 있어도 가뿐하게 치는 거였다. 천막을 다쳤고, 둘레 농성장 선전물들도 다 갖추어 놓고, 벌써 시민들을 보며 선전하는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기차길옆 작은학교의 하루씩 이어 굶기
작은학교 이모 삼촌들이 하루씩 이어가면서 지지 단식을 하기로 했다. 오늘이 그 첫날. 큰이모와 큰삼촌이 왔다. 내가 천막에 갔을 때 벌써 국화를 다듬어 색 띠를 매고 있었다. 이모 삼촌은 아침에 단비 솔비를 학교에 보내고 바로 나왔다고 한다.
기차길옆 아이들, 그리고 이모 삼촌들. 내가 여기에 얼마나 기대는지 그런 얘기는 이제 그만 해야지. 너무 많이 했어.
이모 삼촌은 꽃을 다듬어 색 띠를 매다가 소망 나뭇잎을 파일에 정리하다가 (두 그루 소망 나무에 나뭇잎이 너무 넘쳐나서 우선 한 그루에 있는 나뭇잎은 모두 떼었어요. 새 나뭇잎을 달 수 있게끔. 그 떼어낸 나뭇잎들 지금은 비닐 파일에 담아 놓고 있거든요.) 새로 나뭇잎을 오리고 실을 맬 자리 펀치로 구멍을 뚫었다. 앉아서 그런 일들을 하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이모 삼촌은 아침 신문을 못 보고 나와 지난 밤 이라크에서 한국인 둘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과연 이 일로 정부나 국회가 파병 결정에 어떤 영향을 받게 될까 그런 이야기도 하고..... 아, 그러던 중에 내가 화장실을 쓰러 파파이쓰라는 가게에 들어갔다가 공짜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해 보았는데, 아! 오히려 국방부 쪽은 이 일을 계기로 아예 특전사를 보내야 한다는 둥, 전투병력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둥 더욱 설친다는 거였다. 정부 또한 파병을 하겠다는 뜻은 바뀌지 않았다면서. 정말 내가 바보 같고 순진한 건가, 어떻게 실제로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해석하는 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설마 그런 식으로 생각할지는 차마 상상치 못했다. 이모 또한 내가 보고 온 뉴스 얘기를 들으며 아니, 그럼 그건 아주 전쟁을 벌이자는 얘기잖아 하면서 답답해했다.
권정생 할아버지가
천막에 앉아 손으로는 일을 하며 이모와 얘기를 나누었다. 어제 권정생 선생님이 이모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걱정을 하셨다면서, 그만두라고 말리라고 하셨다면서. 일부러 선생님께 따로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혹 신문을 보셨을까. 아직은 연락을 드리지 못하겠다. 끝나고, 이 일 끝나고 나서 찾아뵈어야지.
오늘은 자꾸만 할아버지 모습 눈에 어렸다. 천천히 걷는, 아니 힘들게 걷는 할아버지, 느릿느릿 말씀하시는, 아니 말씀하시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하며 얘기하던 그 모습. 아, 할아버지. 할아버지, 나 잘 있어요. 사람들 걱정 많이 하지만 이상하게 이렇게도 몸이 좋아요. 한 번도 아픈 적 없고, 특별히 힘이 없다 느끼지도 않아요. 아마 천막 안을 가득 채우는 사람들의 따뜻한 기운, 함께 모으는 작은 소망 그것들이 보태어져 이렇게 끄덕 없나 보아요. 잘 할 게요, 할아버지. 이 일은 결코 내 몸 해치게 하는 그런 거 아닐 거예요. 거듭 살아나려는 몸부림, 그런 거라 생각했고 그런 거였으면 하고 바라고 있어요.
할아버지, 자꾸 보였다.
조금 추워졌어
추워졌다. 오늘따라 발전기 기름이 떨어진데다 그걸 또 기름을 넣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다 보니 더 추웠다.
처음 뵙는 선생님 한 분 천막으로 들어오셨는데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물으니 당당이 님이라 한다. 요즘 게시판에서 더 자주 뵙고 있는 분. 선생님은 광주에서부터 올라왔다. 어휴, 일부러 이 먼 길을. 당당이 님은 꽃에 색 띠를 매거나 하는 천막 안 일들부터 서명대 앞에서 시민들에게 소망 이름을 잇자는 얘기, 소망을 모으자는 얘기 들을 했다. 서울 사는 당당이 님의 동생 분도 함께 와서 저녁까지 내내 함께 했다. 저녁에는 도서연구회의 선생님들과 짝을 지어 ‘겨울 물오리’며 ‘해님은 고와요’ 같은 노래를 입맞추어 불렀다. 그래, 이런 선생님들이 있어 나는 기운이 처지지 않고 덩달아 흥이 나고 밝게 버티는 거, 밝게 싸우고 있는 거다.
늘 든든한 어린이도서연구회 선생님들
이모 삼촌이랑 당당이 님, 당당이 님의 동생 분에 저까지 다섯이 천막 안에서 일을 할 때 도서연구회 선생님들이 같이 왔다. 타라 님, 코알라 님, 배현영 선생님, 이임숙 선생님. 어떻게 다들 같이 만나 오셨는지 물으니 오늘 출판문화위원회 모임을 마치고 함께 오는 길이라 했다.
오전에는 사람이 없어 어떻게 하나, 이제 열흘 가까이 되면서 찾는 걸음도 주나 보다 싶었는데 그건 정말 헛된 걱정이었다. 이렇게 든든한 도서연구회 선생님들. 어제던가 잠깐 인터넷으로 도서연구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더니 누군가 게시판에 도서연구회는 뭐하냐며 비튼 목소리로 트집 아닌 트집을 잡아 놓은 걸 보았다. 인터넷 게시판에야 별별 사람들이 온갖 말을 함부로 해대기는 하지만 그걸 보면서 도서연구회 선생님들보다 내가 더 화가 났다. 도서연구회 선생님들이 얼마나 정성으로, 얼마나 마음을 기울여 소망의 나무를 함께 가꾸고 있는데 그 따위로 말을 할까. 그런 식으로 뱉고 가는 말 누구도 크게 신경은 쓰지 않겠지만 그래도 한쪽 마음이 꼬집어 놓은 것처럼 안 좋았다.
당장 필요한 선전물이 하나 있어 그것을 코알라 님께 부탁했다. 오늘부터 기차길옆 작은학교 하루씩 이어 굶기를 할 텐데 그것을 알릴만한 판이 있었으면 해서이다. 날마다 이모 삼촌들 이름을 바꾸어 가면서 크게 알려 놓을 수 있는 그런 선전판. 보통 그런 일은 아멜리에나 ‘길위에 있다’ 가 하곤 했는데 아멜리에는 오늘 인도로 갔고 (아멜리에는 민주노총 여성연맹에서 일하며 지하철 청소 용역 아줌마들 조합 일을 하는데, 인도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운동에 대한 대회가 열린다 해서 그리 갔다.) ‘길위에 있다’는 영화 작업으로 많이 바빠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걸 어떻게 만드나 하고 있었는데 마침 도서연구회 선생님들이 온 거였고.
도서연구회 선생님들은 점심이 지나 다시 몇 분이 또 오셨다. 김영미 선생님이랑 이기영 선생님, 그리고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지난 번 서현교회 강연 때 슬라이드에 글을 읽어주시던 선생님이다. 그렇게 선생님 세 분이 왔을 때는 벌써 천막 안이 비좁아 안으로는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조금 뒤에는 엉겅퀴 선생님이 왔고, 더 늦은 시간이 되어서는 장선주 선생님이 와서 함께 했다.
따뜻한 사람들.
동치미 선생님. 이제는 마치 소망의 나무 운영진 이상으로 일을 함께 하고 계신 동치미 선생님이 왔다. 지난번에는 커다란 사탕을 한 봉지 갖고 오시며 아이들은 꽃보다 이게 좋을지 몰라 하시며 나누어 주라 하더니 오늘은 풍선을 가져왔다. 풍선을 불어 천막 둘레에 걸어두면 좋을 것 같다며. 이것들 모두 운영진들은 생각지 못하던 것들이다. 정말 선생님 말처럼 아이들은 사탕을 무척 좋아했고, 곳곳에 맨 풍선은 우리 소망을 한껏 풍성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 뿐 아니라 동치미 님은 첫날부터 담요에 양말, 장갑을 챙겨 오시더니 saba도 계속 집에 못들어가는 걸 보더니 saba 양말까지 챙겨 오시고, 토요일에는 한지로 된 공책을 가져와 방명록으로 쓰라 내어 주셨다. 정말 엄마 손길로 천막 안에 필요한 것, 있어야 할 것을 살펴 챙겨주시고 있다. 아, 단식장 뿐 아니라 인터넷에서도 아침마다 마음 환해지는 그림이랑 음악으로.
또 선생님이 챙겨주신 것 - 선생님이 쓴 동화책들, 천막 안에서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 이것 끝나면 나중에 따뜻한 아랫목 이불 덮고 앉아 읽어야지. 선생님 떠올리며 읽어야지.
숭실대 후배라며, 이름을 기억했는데 잊었다. 후배가 왔다. 더 어린 후배들도 와서 일을 하고 하는데 이제야 와서 미안하다며 어떤 일을 하면 좋겠느냐고. 그 후배는 이곳에 아는 사람 하나도 없이, 그래서 마땅히 말 나눌 사람도 없었지만 저녁에 돌아갈 때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했다. 그냥 책상 앞에서 서명해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꽃과 유인물, 서명판을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꽃과 유인물을 주며 인사드리고 서명에 함께 해 달라고.... 저녁 즈음이 되어서는 서명한 사람들 이름을 엑셀 프로그램에 치는 일을 했다. 나머지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 프로그램을 쓸 줄 아는 이가 없던 거였다. 그래서 그 때까지 후배가 하던 일은 기차길옆 큰 삼촌이 이어받았다. 큰삼촌, 쑥스러워하지도 않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꽃과 유인물을 나누어주면서 서명을 받았는데 그 모습이 꼭 대학생 새내기 같았다. 사실 그런 거 하다보면 외면 받을 때도 많고, 무시당할 때도 많을 텐데 웃음 잃지 않고 계속 사람들 앞으로 다가서는 삼촌 모습, 참 아름다웠다.
느티나무 까페 식구였는데, 아 이름은 생각이 잘 안나. 지난 번 천막에 와서 함께 일도 했는데. 그 선생님이 집에서 나뭇잎사귀를 만들어왔다. 화가 분이라 그런지 아주 멋진 나뭇잎.
저녁 시간 상빼가 왔다. 지금 학원에 갈 시간 아닌가? 집도, 학원도 분당인데 평일 저녁에 어떻게 왔나? 그래서 나는 오늘 쉬는 날인가 보다 싶었는데 여덟 시 쯤 인사도 없이 갔다. 그리곤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는데, 인사도 못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오늘은 한 시간 강의 밖에 없어서 들렀다고. 상빼는 소국을 가득 안고 오면서 가방에서 나뭇잎들을 꺼내었는데 학원에서 가르치는 아이들과 함께 쓴 나뭇잎이라고 했다. 중학생, 고등학생들이어서 그런지 소망들, 사연들이 참 푸릇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봉투를 내어밀면서 학원 아이들하고 같이 모은 돈이라고.
또 어느 선생님. 우리가 천막을 칠 때쯤이었을 거다. saba가 나를 불러 아는 분이 온 것 같다 했는데 모르는 분이다. 그래서 어떻게 알고... 하고 물으니 친구가 기차길옆 공부방 이모라 하신다. 듣고 보니 세나 이모를 얘기하는 거다. 만석 초등학교 교사이기도 한. 선생님은 세나 이모의 친구라면서,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반 아이들과 함께 나뭇잎을 만들어서 소망을 적었다고, 이거 아이들에게 꼭 나무에 매달아주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모금함에 얼마를 넣고는 달아나듯이 금세 가버렸다.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 쫓아 나갔지만 어느새 갔는지 찾지 못했다. 나중에 세나 이모에게 물어봐야지.
수줍음이 유난히 많은 은조 님. 은조 님은 오늘 와서도 선뜻 천막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 앞에 서서 멈칫했다. 다섯 종류나 되는 소국을 한 단씩, 무겁게 들고 서서는 내가 이리 들어오세요 할 때까지 그냥 서 있는 거다. 그렇다고 이쪽으로 말을 걸지도 않으니 내가 보지 못했더라면 볼 때까지 그렇게 서 있기만 했을까? 은조 님은 혜화 역 가까운 곳이 직장이라 했는데 일하는 시간이 있으니 더 일찍 와서 함께 하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퇴근을 하고 난 뒤에야 올 수 있는데 무얼, 어떻게 돕거나 함께 해야 할지 몰라 하면서. 그 마음 다 안다. 그냥 말할 때 얼굴, 말씨 그런 것만 보아도 절로 느낀다. 은조 님은 천막을 거둘 때, 끝까지 다 거둘 때까지 함께 하고 갔다. 운영진들이 밥을 같이 먹자 해도 밥은 안 드시고 그냥 갔다. 아마 그것도 수줍어 그냥 간 것 갔다. 다음부터는 같이 저녁 드세요.
아버지 친구 분, 나는 아버지 환갑 잔치 때 한 번 밖에 뵙지 못한 것 같은데 그 어르신이 천막에 들러 가셨다. 아버지하고 같이 온 것도 아니고, 낮 시간에 일부러. 어르신도, 나도 특별히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는 몰랐다. 그냥 그렇게 걱정을 나누고, 그 걱정 속에서 뜻도 함께 나누어갈 수 있게 되는 거라면 이 또한 얼마나 좋은 걸까.
반전평화팀원들
전미선 씨 - 생각지도 않게 반전평화팀원들이 다녀갔다. 처음에는 전미선 씨, 10월에 이라크에 들어갔다 온, 어제 한국으로 나온 전미선 팀원이 왔다. 줄곧 일지로만 보다가 얼굴을 처음 보는 거였다. 전미선 씨는 이라크에서 이 일을 알았다면서, 다들 한국군의 파병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알고 있을 때 이렇게 소망의 나무 단식을 한다는 소식에 힘을 많이 얻었다면서 들렀다. 한국에 오면 꼭 들러야지 했다며 말이다. 내일이면 바로 원주에 올라가야 해서 바로 이곳부터 찾았다고.
미선 씨는 동화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동화가 한국군 파병 결정으로 굉장히 괴로워했다고, 그런 뒤 내 편지를 받고 많이 울었다면서. 이동화, ·12월 중순 안으로 돌아온다는데 흐흐, 오는구나. 어제 한국인 피살 이야기를 들을 때 설마, 혹시 동화는 아니겠지 걱정이 되기도 했었어.
하운이 - 하운이가 왔다. 하운이, 엽기 발랄. 하운이가 계속 떼를 쓰면서 밥 먹자, 밥 먹자 한다. 그 때 이라크에서 언제 와, 언제 와 하던 것처럼 밥 먹자, 밥 먹자 만 한다. 기굼, 기굼이 왜 굶어? 왜 굶고 난리야? 굶기려면 노무현을 굶겨야지 기굼이 왜 굶어? 밥 먹자, 엉? 얼른 밥 먹자. 왜 밥은 안 먹고 지랄이야? / 같이 있어야 솔직히 재미있는 자리는 아니니 곧 가지 않을까, 잠깐 들른 게 아닐까 했는데 하운이는 저녁이 되도록 함께 했다. 바람이 세서 꽤 추웠는데 계속 함께 했다. 하운이는 서명대 앞에서 마이크를 잡기도 했는데 그게 기가 막히다. 꼭 무슨 클럽이나 빠 같은 곳의 디제이처럼 예에~ 이곳은 파병을 막기위한 박기범의 단식 쑈우 쑈우 쑈를 하고 있습니다~~ 하면서 쥐어 짜는 창법으로 레이지본의 마리아를 불렀다. 또 내가 모르는 팝송도 하나 불렀다. 재미있었다. 신이 났다. 솔직히 말하면 맨날 와서 그렇게 놀아주면 좋을 텐데 싶었다. 이그 녀석. 하운이는 저녁이 되어 고대에서 있는 평화수감자의 날 행사에 간다고 갔다. 하운이 표현으로 군대가기 존나 실어 투쟁본부 애들(양심적 병역 거부자)이랑 뭐 하는 거라면서 말이다.
유은하 씨 - 은하 씨도 소국을 한 아름 안고 왔다. 은하 씨가 함께 일하는 교회 분들도 두 분 같이 왔다. 참 오랜만이다. 그 폭격 속에서 한국 사람이라곤 딱 둘, 은하 씨와 지낸 적도 있는데. 그 때 은하 씨에게 참 많이 기대고 도움을 받았지. 나야 영어를 통 할 줄 모르니 늘 은하 씨를 거쳐야 했으니 말이다. 은하 씨는 이 천막에 다녀가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서도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며 같이 온 분과 함께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었다. 닿은 손끝으로 은하 씨 가지고 있는 평화의 기운 내가 배우게 될는지 모르겠다. 물처럼, 따스한 물 흐르는 것처럼.
워낙 10월에 결혼을 하려 준비하던 은하 씨는 파병 일로, 지금은 반전평화팀원들에게 들어오는 온갖 강연을 거의 혼자 떠맡다 시피 하고 있는데다가 벌써부터 준비해오던 이라크 일기 책을 내는 준비로 미루어지고, 미루어지고. 아마 많이 늦어지나 보다 했는데 12월 24일 할 거라며 중대 발표를 했다. 같이 온 분도 모르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오늘 책 표지 사진을 찍었다 하니 곧 책도 나올 테고, 결혼도 할 테고 좋은 얘기들 들으니 나 또한 좋았다.
(줄임)
2003.12.2 박기범 단식일지 중 일부 따옴
소망의 나무에 모이는 기운들
[소망나무 만나러가기] 소망의 나무에 다녀왔습니다
2시에 만나기로 한 안나씨가 30분이나 늦어 대학로를 배회하다가(예전에 가본 대학로의 분위기와는 얼마나 다르던지요? 이럴 때 보면 제가 낯가림이 많은 모양입니다.) 소망의 나무 행사장으로 갔습니다.
소국 3다발, 초 42개, 색지 17장, 초록색 리본 10개를 준비해가서 박기범 작가를 비롯한 일하는 분들과 눈인사를 나누곤 천막 안에 바로 앉아서 꽃을 자르고 리본을 묶어 시민들에게 나눠줄 평화의 꽃을 만들었습니다.
그 사이 사진을 찍어 소망나무 소식에 올리는 스사노씨와 그 아들을 보고 16기를 수강하는 작가지망생도 만나고, 나중엔 심명숙, 박숙경, 원종찬 선생님도 뵙고, 고구마를 삶아 오신 박기범 작가의 엄마도 뵈었지요.
"아, 맛있겠다." 하며 고구마를 주는 박작가에게 미안한 맘으로 목이 메어가면서 먹는데(물도 없었고,) 박작가가 디카로 우릴 찍더군요. 잘하면 단식농성장에서 잘만 먹어대는 우리 사진을 보게 될지도..(으악, 망신이다..)
어쨌든 한두 시간 안나씨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꽃을 다듬고 나서 파병반대 서명을 했습니다.(그러자 행사 진행하던 16기 친구가 제게도 꽃을 주더군요. 내동 뒤에서 작업하는 걸 보고서도 착각하고는..)
그래 이젠 뭘할까 하다 길바닥에 펼쳐놓은 행사장 천막을 꾸미는 그림이 눈에 들어와 간간히 참여하는 아이들, 어른들과 함께 소망의 나무 그림을 칠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랑, 초록, 갈색으로 열심히 칠하는 여자 분이 계셔서 누구신가 했더니 이상교 선생님이셨어요. 물론 문외한인 저는 잘 몰라서 직접 여쭤보고야 알았지만요.
나중에 원선생님이 부르셔서 여러 가지 15기에 대한 이야기를 물으시길래 답해드렸고, 창비에 이번 공모엔 당선작이 될만한 게 많더라는 얘기도 전해 들었답니다. 선생님께선 계속 동화 쓰느냐고, 부지런히 쓰라고 15기에 당부 말씀 전하셨어요.
5시 좀 넘어서 안나씨와 저는 박작가와 원선생님, 이상교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8만원의 성금(안나씨와 저는 여러 물품을 사갔으니 빼고, 나중에 성금이 8명보다 더 모이면 다시 전달하겠습니다.)을 15기 이름으로 모금함에 넣고 왔습니다.
잠시였지만 길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는 게 참 힘든 일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8일 째 밥을 굶어가면서 실제로 저지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파병반대 운동을 하다니 동화작가로서 양심을 지키는 일이 그만큼 무거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한겨레 아동문학 작가학교 15기 까페, http://cafe.daum.net/iyagikkot )에서 2003.11.30 김지영
[소망나무 만나러가기] 혜화동에 다녀와서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철을 오랫동안 타고(인천에서 혜혜동까진 너무 멀어요. T T) 토요일에 혜화동에 다녀왔습니다.
박기범씨가 단식하고 있는 그 혜화동이요.
얼굴 아는 몇 분도 오시려니 했는데 과연 미연이와 수연씨가 보였어요.
무척 반갑더라고요.
제가 도착했을 때는 생각보다 일하고 있는 분들이 많지 않아서 서명을 받게 되었는데 어찌나 목소리가 안나오고 민망하던지...
모기만한 소리로 " 서명하고 가세요~~"만 했더랬습니다. 그래도 저의 작은 목소리가 보탬이 된 듯 하여 무척 뿌듯했지요.
국화향기도 좋았고 소망나무 앞에서 쭈뼛대는 아이들도 참 보기 좋았습니다.
단식을 그렇게 오래동안 하면서도 오는 사람들 모두 챙기며
고구마(너무 맛났어요. *^^*)를 챙겨주는 박기범씨도 좋았고
저한테 고등학생 같다며 농담을 던진 아저씨도 좋았어요. ㅋㅋㅋ
좀 늦긴 했지만 종묘공원에서 있었던 집회에 참가하고 6시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저의 토요일 일정을 마쳤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참 많았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제가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참 행복했습니다.
햇살나무 정원에서 (한겨레 아동문학 작가학교 16기 까페, http://cafe.daum.net/haejungwon )에서 2003.12.1 '말랑이'
소망의 나무 기사, 성명서 링크
[오마이뉴스]파병반대 `밥굶기 저항'을 하는 동화작가 박기범, 2003.11.27
[한겨레신문] '아이들과 평소 한 약속 지키렵니다." 2003.11.28일
[한겨레신문] 동화작가 박기범씨 파병반대 단식농성 2003.11.22일
[참말로]파병저지는 보통사람들의 소망-이라크 반전평화팀 활동 박기범씨 단식농성장을 찾아서, 11.26
[성명서] 정부는 이라크 파병결정을 철회하라!-겨레아동문학연구회
[성명서] 우리 언니들을 침략전쟁의 희생자로 내몰지 마라!!-좋은 그림, 동화책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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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반대 이름 이어쓰기, 어린이 이름 이어쓰기,
박기범 이라크 통신 http://cafe.daum.net/gibumiraq
한 끼 소망 더하기, 하루 소망 더하기, 소망 나무 만나러 가기, 나무에게 편지 쓰기
홈페이지가 열렸습니다. 소망의 나무 http://wishtree.or.kr
첫댓글 그러게요. 이제 그만 끝내셔야죠. 단식하는 거 정말 몸 상하는 일이잖아요. 애쓴 노력만큼 모두의 소망만큼 뜻이 이뤄지길...
세상 어느 꽃 보다도 더 귀하고 아름다운게 온 들과 산 그리고 크고 작은 돌 귀퉁이의 야생초와 꽃일터인데... 그 귀함과 소중함이 무시되는 느낌입니다. 가슴이 멍울합니다... 지금은 고인이되신 이오덕 선생님과 따듯한 마음의 권정생 선생님이 가난함과 바꾸신 진실한 글 쓰기가 새삼 제 각오를 더 강하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