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서는 재판장들이 공정하게 판단을 하되 악인에게 태형을 내릴 때에는 최대 40대까지만 때리도록 하라는 법을 줍니다. 그 이상으로 때리는 것은 형제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죄인으로 벌을 받지만 그들도 같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벌을 내리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벌을 내릴 때 긍휼과 사랑이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1-3). 곡식 떠는 소에게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은 소에게 일은 시키면서 먹지 못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4). 이 또한 동물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어서 만일 한 형제가 중에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나 형이 대신 죽은 자의 아내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대를 이을 수 있게 하는 제도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 형제가 그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경우에는 죽은 자의 아내가 성문 장로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리고그 형제의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고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지 아니하는 자에게 이같이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5-10). 이렇게 형제 중 죽은 자의 가문을 잇게 하는 것은 상속 재산을 죽은 자의 집에 머무르게 하고 과부가 빈곤하게 되지 않도록 하는 죽은 자의 가정 보호하는 긍휼의 법이었습니다.
이어서 이스라엘 두 사람이 싸우는데 그 중 한 사람의 아내가 다른 남자의 생식기를 손으로 잡을 경우에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11-12). 이 말씀은 아내가 남편들 간의 싸움에 간섭할 때 다른 남자의 생식 능력을 잃게 만들 만큼 피해를 입힌 경우를 가정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구절이 실제로 구약 성경 어디에도 실제로 일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을 하거나 상대에게 입힌 피해에 큰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상징적인 해석은 쉽게 말해 이스라엘을 아내로 보고 남편인 여호와가 영적 전쟁을 싸우는 상황을 가정합니다. 그럴 때 그 영적인 싸움은 하나님께 속한것으로 우리가 간섭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싸움에 우리가 무엇인가 도움을 준다는 것은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배우고 그 전쟁에서 우리의 이익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이 보일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여성의 팔을 자르는 것이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의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법에서도 다른 사람에 대한 긍휼을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느 해석도 나름의 근거가 있지만 후자의 해석이 전체 맥락과 더 잘 어울립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하나님은 공정하지 않은 추를 사용하는 것을 가증하게 여긴다고 합니다(13-16). 다른 사람을 속여 이익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긍휼을 베풀지 말아야 할 족속이 있는데, 바로 아멜렉 족속입니다(17-19). 이것은 정의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연약했던 이스라엘을 무참히 공격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민족으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말고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큰 주제는 긍휼과 정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의를 행하는 가운데서도 긍휼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의와 긍휼은 항상 같이 가야한다고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법의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에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의로우셨지만 항상 긍휼을 베푸는 분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저와 여러분의 죄 값을 치러 정의를 세우시고, 죄인들을 긍휼히 여겨 구원해 주셨습니다. 구원의 은혜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도 삶 속에서 항상 정의와 긍휼을 베풀며 살아갑시다. 단, 아말렉과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과는 긍휼을 베풀지말고 단호하게 지워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