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미의 멘탈 이코노미]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출처 매일경제 : https://www.mk.co.kr/news/contributors/11371550
생각 넘쳐나는 현대인 일상
보고 듣고 느낄 기회들 놓쳐
느낀 것을 내 주변과 나눌때
진짜 '사는 맛' 누릴 수 있어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이 문장이 좋아 곁에 두다 알게 된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 그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세상은 생각하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생각한다는 건 눈이 병든 것)/세상은 우리가 그것을 보라고, 받아들이고 반응하라고 만들어진 것이다."
이 구절은 바쁘지만 정작 생각에 갇혀 외롭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예리하게 비춘다.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이런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생각이 너무 없어 보이는 경우를 접하긴 하지만, 그런 때조차 '과연 생각이 없는 게 문제일까?'라는 의문을 가져본다. 문제는 생각이 아니라, 느껴야 할 것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양심이라든지 타인에 대한 공감 같은 것들 말이다. 겪어야 할 것을 겪지 못한 데서 오는 '감각과 경험의 부재'가 진짜 문제는 아닌지 짚어보게 된다. 어쩌면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일 것이다. 과잉 생각과 번민은 삶을 오히려 더 무겁게 하고 그 자신과 주변을 힘겹게 만든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대체로 외롭게 자란 사람이다. 실제로 지나친 분석과 경계는 우리를 세상, 타인, 자기 자신과 멀어지게 만든다. 생각만 하고 경계만 하다 보면 우리는 보고 듣고 느낄 기회를 놓친다. 요즘 우리는 어디에서든 '생각'한다. 퇴근길에도 온전히 쉬거나 풍경을 누리는 일은 쉽지 않다. 업무 메신저 알림을 확인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남의 일상을 보면서 '나는 왜 저만큼 못할까'라며 끊임없이 자책한다. 주말 산책 중에도 이어폰을 꽂고 뉴스나 경제 콘텐츠를 들으며 시간을 쪼갠다. 석양을 봐도 사진만 찍고 지나친다. '좋아요'를 위한 장면만 남고 감정은 없다.
감각보다 생각이 앞서면 삶은 점점 흐릿해지게 마련이다. 감정 역시 발산하기 전에 찬찬히 느껴줄 때, 내 것으로 소화할 때 제자리를 찾게 된다. 불안, 고독, 슬픔이 올라올 때도 우리는 그 감정을 붙잡아 느끼기보다 또 다른 생각으로 피해 간다. "왜 이렇게 예민하지?" "왜 이렇게 공허하지?" 하고 되묻다가 결국 스마트폰으로 도망친다. 그렇게 감정은 어딘가로 치워지고 관찰의 기회조차 사라진다. 이 불편한 느낌들을 벗어날 구멍을 찾기에 급급하다. 그러다 보면 연결은 끊기고 고독은 더 짙어진다. 직장 내 관계도 마찬가지다. 점심시간에 각자 휴대전화를 보며 말없이 밥을 먹고 회식 자리에서도 진심보다는 분위기를 살피느라 눈치를 본다. 다 마친 후에도 수많은 눈치를 이고 집에 돌아오게 된다.
SNS의 '좋아요'와 댓글은 진짜 공감을 대체하지 못하고, 인공지능 챗봇과의 신나는 수다로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마음'은 얻지 못한다. 감정을 숨기고 진심 어린 대화를 피하며 우리는 점점 타인도, 자기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삶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전에 느끼는 존재다. 진정한 삶은 나와 타인, 세상과의 연결 속에서 회복된다. 그래서 연인과의 갈등, 부모와의 대화, 친구와의 오해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손을 내미는 것,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내 입으로 한번 해보는 것, 그런 도전을 계속해 나가는 것은 자기만의 생각 속에 빠져 살다가 끝내는 것보다 분명 값지다.
나의 크기는 내가 바라보는 만큼의 크기라고 한다. 집 안의 천장만 보는 사람과 하늘을 보고 우주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의 마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이 어렵다면 자연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의외로 무언의 용기를 얻을지 모른다. 자연이 멀게 느껴진다면 '일상 그 자체'에 눈을 돌려보자. 어쨌든 우리는 내가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을 옆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찾아내서라도 이야기를 나눠야 비로소 "사는 맛"을 느끼는 게 사람이다.
[성유미 정신분석가·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빛명상
추천의 글5
빛과 어둠의 조화
장정옥 소설가
인간은 제 속에 수만 갈래의 길을 찾고 있다. 그 길은 어둠이 짙은 숲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신기루처럼 길 끝을 보여주다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j 길을 잃게도 한다. 길이 보이지 않는 것, 나아갈 길을 모른다는 것,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다는 자각이 인간을 당혹스럽게 한다. 태초에 생명이 태어나기 전까지 세상은 온통 어둠이었다. 어머니 뱃속도 어둠이었다. 어둠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라 다만 보이고 보이지 않는 차이일 뿐인데, 인간은 그 암막의 현상에 약하다.
예전에 불이 꺼진 성당에 오래 앉아 있었던 적이 있다. 성당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치던 화려한 빛이 어둠을 희석시킬 뿐, 성당은 어둡고 서늘하며 고요했다. 어둠을 희석시키는 데는 그리 많은 빛이 필요치 않았다. 어둑한 성당에 오래 앉아 있는 동안 어지럽게 떠돌던 상념이 가라앉고, 두근거리던 가슴과 불안하게 노닐던 심박동이 조용해졌다. 어둠이 있어서 스테인드글라스로 새어들던 빛이 더 귀했다고 할까. 그날 내가 본 것은 빛과 어둠이 섞이는 조화로움이었다. 그동안 봐 오던 어떤 빛보다 숭고했던 그날의 어둠을 나는 아직도 분명히 기억한다. 어둠과 빛이 1센티미터 거리보다 가깝다는 사실이 내게 커다란 신비였고 조화로움이었다.
빛터를 처음 방문한 것이 이른 봄이었다. 안내를 받고 들어간 사무실이 너무 환하지 않아서 참 좋았다. 얘기 도중에 정광호 회장님이 탁자에 작은 불을 밝혔던가? 확신할 수 없는 그 빛은 어쩌면 내 몽상이 만들어낸 조화일지도 모른다. 두 시간 동안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이상하게 그 온화한 불빛만 오래 마음에 남아있다. 그날 정광호 회장님이 『빛향기와 차명상이 있는 그림찻방』이라는 책을 한 권 주셨다. 이제 그 책의 제본이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아이들이 개천에서 뜰채로 고기를 건지는 수묵담채화가 그려진 삽화가 미소를 짓게 만든다. 따뜻하고 정겹다. 인간의 삶을 어둠과 빛의 시기로 나눈다면, 뜰채로 고기를 건지는 철부지의 어린 시절을 빛의 시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인간이 유일하게 온몸으로 빛을 내 뿜는 시기라고 할까? 빛명상을 체험한 사람들의 말을 듣노라니 사람의 몸으로 빛VIIT이 통과하면 피부로 내뿜은 빛VIIT의 흔적이 금빛 입자로 반짝인다던가? 실제로 그 금빛을 투명테이프에 붙여서 수첩에 보관하는 사람을 보았다. 금 부스러기가 반짝이듯이 투명 테이프에 남아있던 흔적을.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온 집안에 환한 빛이 떠돌면 상심에 젖어 있던 어른 들이 시름을 걷으며 다시 살아갈 힘을 낸다는 건 명백한 팩트다. 나는 그 팩트가 바로 긍정적인 에너지의 힘이고 빛VIIT의 힘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영원을 위한 그 무엇이라며 방정식의 힘을 믿었던 것처럼.
그리스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세상이 4원소인 물과 공기, 불, 흙의 사랑과 다툼 속에서 생겨났다고 했다. 하나의 물질은 다른 물질로 변화될 수 없다며, 세상 모든 물건의 기본이 되고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4원소의 뿌리가 서로를 당겨서 합쳐지거나 밀어내서 나눠지는 것을 ‘사랑’과 ‘미움’에 비유했다. 해가 기울면 달이 뜨고 어둠이 찾아오듯이 나무와 풀, 바람처럼 사람도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교차하지만 우주만물은 서로 내적 패턴으로 단단히 결속되어있고, 그 광대무변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끄떡없이 존재한다. 그게 바로 우주의 힘과의 조화가 아닐지?
인간이 끊임없이 갈구하는 빛을 ‘초월적인 우주의 힘’이라고 하던가. 일반적인 태양의 빛이나 초능력과는 다른 우주의 힘이라고 해야 할 초광력超光力에너지 같은 그런 것.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는 한꺼번에 너무나 큰 변화를 겪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있다. 불안이 증폭하고 외로움을 감당해야 할 시간이 늘어나며 인간은 끝없이 자신과 겨루고 다툰다. 이럴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이 에너지다. 코로나19가 물러갈 때까지 지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에너지. 그 애틋한 갈구 저편에 빛VIIT이 있다.
어떻게 하면 일상에 필요한 빛을 되찾을 수 있을까? 자기 속의 또다른 자신인 초자아를 불러내서 대화를 나누고,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또 다른 에너지를 찾아보면 어떨지. 정광호 회장님이 방식을 일러주신다. 인터넷으로도 빛명상이 가능하다고. 먼저 하늘을 향하게 손바닥을 펼치고 양쪽 무릎 위로 손을 올린다음 코끝을 바라보듯 두 눈을 천천히 감는다.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와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해주신 부모님과 선조들에 대한 감사를 시작으로 숨을 깊숙이 들이마시노라면 ‘경천애인敬天愛人’의 길이 보인다던가.
출처 : 甲辰年 그림찻방3
빛향기와 차명상이 있는 그림찻방 3
2024년 6월 22일 초판 1쇄 P. 144-146
초자아를 만나는 시간
"삶을 살아가는 동안
세속적인 욕심과 탐욕에 가려진
인간의 원초적인 마음의 빛을 찾아내고,
거기에 또 다른 빛을 더함으로서
인간 본연의 순수함을 찾아가게 도와주는 것이 명상이라고···"
우주의 순환에는 그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다. 사랑과 자비를 넘어선 순수 그 자체의 무한한 힘이 생명 근원의 빛VIIT이라 했다. 우주의 무한함이 바로 창조의 힘이고, 인간의 내면에 내재된 그 힘을 끌어내는 빛이자 초광력超光力이라고.
"선생님은 빛명상의 궁극적인 목적을 어디에 두십니까?"
"인간의 본질 속에 내재된 순수함을 회복하고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는 데 목적을 둡니다."
땅 속에 묻혀있는 다이아몬드를 캐듯이 영혼과 육체의 불순함을 걷어내고 태초의 순수함을 회복하며 초자적인 우주의 섭리를 찾아가는 행위라고 할까. 빛명상으로 건강을 잃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며, 우연히 받게 된 빛VIIT의 은혜를 통해 나눔을 실행한다는 그 겸허한 실천이 아름답다.
ㅡ 경북매일, 〈초자아를 만나는 시간〉 기사 내용 중
장정옥 소설가가 본 책의 저자를 인터뷰한 내용이 실린 기사 (2021. 03. 16. 〈경북매일〉의 일부이다. 『그림찻방 』에서 말하는
빛VIIT과 빛명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이 실렸다.
출처 : 甲辰年 그림찻방3
빛향기와 차명상이 있는 그림찻방 3
2024년 6월 22일 초판 1쇄 P. 147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간 본연의 순수성
사랑나눔의 실천
빛과 함께 하며
잊지말아야할 것들
명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초자아를 찾아가는 시간,
빛명상을 할 수 있음이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귀한문장 차분하게 살펴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운영진님 빛과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간 본연의 순수함을 찾게 도와주는 빛명상...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말씀 마음에 담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초자아를 만나는 시간
귀한빛글 마음에 새겨봅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초 자아를 만나는시간...빛책속의 귀한글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인간의 본질 속에 내재된순수함을 회복하고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는 빛명상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귀한 빛 의 글 볼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간의 본질 속에 내재된 순수함을 회복하고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는 데 목적을 둡니다."
귀한 빛글 마음에 담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빛과 어둠의 조화,초자아를 만나는 시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