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형식
강영은
한 입 베어 먹혀 옆구리가 오목한 사과, 모니터 속에 들어 있네
둥글지도 않고 떨기나무처럼 타오르지도 않지만 불꽃같은 사과를 품고 있는
모니터가 사과나무네
사과나무 아래서 잘 익은 사과를 묵독하네
사과나무 아래선 과수원지기처럼 사과의 형식을 추수하네
한 알의 형식 때문에
아담은 낙원을 잃었다 하네 떨어지는 사과를 맛본 뉴턴과 스피노자는 시들지 않는 사과나무를 심었다 하네 화살처럼 사과를 겨냥한 빌헬름 텔과 백설 공주는 죽지 않는 미래를 남겼다 하네
한 알의 둥근 형식이 사과의 과거를 진화시켰다는 말, 한 알의 둥근 과녁이 사과의 미래를 남겼다는 말, 한 알의 과거가 한 알의 미래를 이끈다는 말이어서 과육의 중심에 가닿는 동안
온 세상 햇빛과 빗방울을 다 만난 사과벌레와 나는 잃을 게 없네
잃을 게 없으니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도 없네*
다르게 보면 사과는 사과가 아니네
세상을 바꾼 한 알의 미래, 한 알의 우주일 뿐
우주율이 준동하는 사과는 둥근 문장이어서 당신도 나도 현재가 아니네
오래전에 잊혀진, 혹은 미발견된 사과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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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 연설(2005년)에서 차용.
—《시와 사람》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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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 제주 출생. 200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녹색비단구렁이』『최초의 그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