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장(京僑莊)을 아시나요?
<1947년5월 경교장 앞뜰에서 백범과 조완구선생님> 경교장을 처음 찾던 날 2012년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던 길이었습니다. 버스가 서대문 로터리를 지나 정동4거리로 가던 중 정거장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는데 “이번 정류소는 서울역사박물관, 삼성병원, 경교장입니다”라는 안내멘트가 나왔는데 이전에 없던 경교장안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옛 궁궐의 귀속 정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2012년 7월 경희궁 앞에서 경교장을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평동으로 들어서 골목을 따라 적십자 병원 후문까지 헤맸지만 찾을 수가 없었는데 지나가는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보아도 경교장의 위치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병원 근처 골목을 청소하는 청소부에게 물어보니 병원 안에 있다고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을 뒤져 보았는데도 찾지 못해 결국은 병원 정문관리인에게 물어보고서야 바로 앞에 있는 경교장을 알 수 있었습니다.
<2012년7월 처음경교장을 찾던날---복원 공사가 진행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경교장은 정자가 아닌 일본식 집이었는데 2005년6월13일 사적465호로 지정된 대한만국 임시정부의 청사로 쓰이던 곳으로 주석이던 김구선생님께서 해방 후 생활 하시던 곳 안두희의 총탄에 맞고 생을 마감했던 곳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서울시에서 경교장 복원공사를 하는 중으로 관람이 불허된 상태였습니다.
경교장은 어떤 곳인가? 이러한 역사의 현장인 경교장을 다시 찾는 데는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흐른 2014년1월말이었습니다. 다시 강북 삼성병원으로 들어서며 처음 경교장을 찾던 날을 떠 올리며 병원 안에 그것도 전에는 병원으로 쓰이던 건물이 유명한 역사가 담겨 있는 경교장인 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새롭게 단장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았으니 경교장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현재 경교장의 건물은 1938년 친일파인 최창학은 광산업계 1인자로 금광으로 돈을 벌어 이곳에 별장을 짓고 죽첨장(竹添莊)이라 이름 지었다고 하는데 최창학은 오산 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으로 학교를 유지해 오다가 1959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광복 후 친일파라서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암튼 무상으로 임대해주어 임시정부 청사로 쓰이며 서대문 로타리 근처 다리인 경교의 이름을 따 경교장이라 김구선생님께서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김구선생님은 광복 후 3년7개월을 이곳에서 살면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이다 1949년 6월26일 안두희에게 저격당해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합니다. <위 사진은 월남대사관 당시의 사진으로 싸이월드에서 퍼왔습니다.> 김구선생님이 서거한 후 이곳은 자유중국 대사관저로 사용되었고 한국전쟁 때는 미군 특수부대 시설로 사용되었고 휴전 후 월남대사관으로 사용하다가 1967년 고려병원에서 인수하였습니다.
<위 사진은 고려병원에서 인수하여 개원을 위한 공사를 하는 사진으로 싸이월드에서 퍼왔습니다.> 2층 김구선생님의 서재로 사용하던 곳 유리창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옛날 그 상태로 총알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경교장 역사의 현장으로 1층
1층 로비 중앙에는 경교장의 옛 모형이 있습니다.
<임시정부 당시 소응접실> 옛 모형 뒤로는 임시정부 당시 소응접실이 있습니다. 거실 모형도 우측 남쪽 방향으로는 임시정부 당시 선전부 활동공간이 있습니다. 가운데 원탁과 의자 그리고 동편으로 소파가 놓여 있으며 작은 액자가 2개있는데 며느리 안미생의 2명과 함께 직은 사진과 경교장 밖에서 젊은 사람들의 사진이었습니다.
<임시정부 당시 선전부 활동공간> 북쪽 문 옆으로는 경교장과 함께한 사람들이라는 홍보입간판이 있습니다. 내용은 경교장은 환국 임시정부의 청사이자 김구와 임시정부 요원들의 숙소 그리고 비서진의 활동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김구를 비롯해 선전부장 엄항섭, 재무부장 조완구, 문화부장 김상덕 등이 경교장에 머물렀고 경위대장 윤경빈과 장준하 등 젊은 수행원들은 이들을 경호하고 보좌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중략--- 윤경빈, 백정갑, 이영길, 장준하는 학도병으로 중국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으로 활동하였다. 선우진은 광복군 출신으로 김구선생님이 북행할 때 수행하였으며 김구선생님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측근에서 보좌하였다. 안미생은 안중근의사의 조카딸이자 김구선생의 장남 김인의 처로 남편이 죽은 뒤 고국에 들어와 경교장에서 김구선생님의 비서로 일했다. (안미생은 중국에서 태어나 사천성 곤명서부연합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중칭 영국대사관에서 일하다가 김인과 결혼하여 단란한 결혼생활을 하다가 해방이 되던 해 해방되기 6개월 전 폐렴으로 죽었는데 이때 며느리 안미생은 시아버지인 김구에게 남편에게 페니실린을 주사해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김구선생님은 독립운동을 하는 동지들을 외면하고 아들에게 특혜를 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러한 연유로 영어에 능통하여 김구선생님과 미군정과 회담 시 통역을 하였으며 반탁 및 여성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48년 촬영---좌로부터 안우생, 안미생, 김구, 장우식> 그러나 이들은 한 울타리에 사는 최창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최창학의 가족들은 수시로 경교장을 드나들며 짐이 잘 있는지 확인하기도 했으며 반탁 운동과 김구선생님 서거 당시 경교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큰 불만을 가졌다. 경교장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원할치 못해 겨울에는 난방도 하지 못했고 임정요원들은 월급이 끊기자 하나둘 경교장을 떠나기도 하였다.
응접실 맞은편에는 귀빈식당이 있습니다.
<임시정부 당시 식당을 재현한 모습> <임시정부 당시 식당> 식당에는 산뜻하게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모습이었고 작은 나무 액자 속에는 색 바랜 옛날 식당의 모습과 식당에서 가족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의 사진과 김구선생님서거 때 빈소로 사용했던 사진과 1945년12월3일자 자유신문 기사가 있었는데 기사내용은 옛 동지들과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었다는 기사내용이었습니다.
<귀빈식당에서의 가족끼리의 만찬>
<저격 사망 후 빈소로 이용했을 때의 모습>
다시 로비로 나와 현관 옆 경교장 방문 메시지 코너 위에는 영상사진이 슬라이드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1946년 경교장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 <서재에서의 김구선생님> <저격 사망 후 애도의 물결> <장례행렬>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로비에서 서쪽방향 남쪽으로 응접실이 있는데 이곳은 임시정부의 각료회의가 열리던 곳이며 김구선생님이 국내외 여러 손님들을 맞이하던 곳입니다.
<신축 당시응접실> <새로 단장한 응접실> 응접실 내부에는 옛날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원탁과 의자 바닥의 매트까지 옛날과 같이 꾸몄습니다.
<1947년3월13일 미군정청 월버장군과 환담을 나누는 모습> <1947년 5월 김구선생님과 조완구 선생님과의 환담 모습> <조완구선생님은 김구선생님과 정치노선을 같이 했으며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고 합니다.> 작은 사진첩에서는 계속 슬라이드로 사진안내를 하였고 탁자위에는 3장의 사진이 있었는데 1947년3월13일 미군정청 월버장군과 환담하는 사진과 지인들과 함께 기념으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사진과 또 다른 사진은 동지로 보이는 분과 환담하는 사진이었습니다.
옆에 세워져 있는 입간판에는 환국이후 첫 번째 국무회의가 개최되다“라는 제목으로 내용은 1945년 12월 3일에 있었던 첫 번째 국무회의로 임시정부 주석 김구,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비롯한 임시정부 각료들은 그간 수집된 국내 동향과 임시정부가 앞으로의 활동방향과 과제에 대해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방식이었으며 신탁통치 반대와 남과 북이 단결하여 자주통일을 이루자는 내용이었습니다.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중앙계단>
1층 응접실을 나와 2층으로 올라가는 중앙 계단에는 1938년 신축당시의 계단 타일이 금이 간 채 보존되고 있는 견본을 설치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 우측(서쪽방향)에는 김구선생님의 거실 겸 접견실로 쓰던 곳으로 우리민족의 한이 맺힌 현장이기도 합니다.
<2층 응접실의 모습> 일본식 다다미 방인 이곳은 동쪽에 태극기가 부착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김구선생님 흉상이 세워져 있으며 가운데는 칠기자기로 입힌 호랑이가 수놓인 탁자가 있으며 탁자위에는 작은 액자에 색 바랜 사진이 들어 있습니다, 태극기 아래쪽에도 작은 액자 5개가 있는데 아마도 가족들의 사진같이 보였습니다. <베란다의 탁자에서 총탄에 맞고 운명을 하였습니다> <당시 총알이 구멍을 낸 유리창> 남쪽 창가 베란다에는 작은 탁자가 놓여 있는데 이 탁자에 앉은 채 안두희가 쏜 총에 맞아 생을 마감한 곳이며 유리창은 그때를 대변하듯 아무 말은 없으나 총알이 뚫고 지나간 2개의 유리창 구멍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한 구멍은 김구선생님의 코를 지나 머리를 관통한 총알이 창문을 지나며 남긴 구멍이며 또 다른 구멍은 목을 관통하고 창문을 지나며 남긴 흔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슴을 관통한 총알은 거실에 박혔다고 하며 총알을 맞고도 일어나려 탁자에 손을 앉고 탁자에 엎드려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한이 서린 탁자 위 작은 사진첩에서 당시 여러 가지 사진이 반복해서 지나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조문행렬1---총알이 지나간 유리창밖으로 조문행렬이 이어집니다>
<조문행렬2>
<조문행렬3>
<조문행렬4>
<조문행렬5>
<현장검증1>
<현장검증2>
<현장검증3>
<오열하는 가족들>
<유해수습---위 5장의 사진은 싸이월드에서 퍼왔습니다.>
침실을 뒤로하고 복도 남측으로는 큰 방이 2개가 있는데 임정요원들이 사용하던 방이라고 합니다.
<임정요원들이 사용하던 방 >
방을 지나면 북쪽 방향으로 작은 방이 있는데 이곳에는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따라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재현>
이곳 맞은편 남쪽으로는 2층서재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임시정부의 국무회의 및 국내 정당 대표들이 회의를 갖던 곳으로 옛날 있던 책은 제자리에 없어도 옛날 역사가 숨 쉬는 곳이기에 뭉클함이 있습니다.
<신축 당시의 서재> <깔끔하게 복원한 서재> <벽난로가 있던 곳 타일과 마루바닥이 원형이 잘 보존되었다.> 옛날 사진 그대로 재현된 서재 책상 위 작은 액자 속에는 웃는 얼굴의 인자한 모습의 김구선생님이 들어 있으며 서쪽으로는 옛날 신축 당시 그대로 벽난로의 타일과 벽난로 주변 바닥의 마루가 옛 모습 그대로였고 벽난로 위에 사진첩은 시대별 김구선생님의 사진이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2층 응접실 동쪽으로는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 있습니다.
한 가지 애석한 것은 지하 전시관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1층과 2층만 답사하고 나왔는데 지하전시실이 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 수 있었는데 지하는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지하 전시실의 전시품입니다> 제1전시실에서는 경교장의 역사로 죽첨장 시기, 경교장 시기, 훼손 및 복원기로 나누어 건축애서 복원 그리고 전시까지의 과정이며 제2전시실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과 당시의 신문기사와 관련 자료인데 이며 제3전시실은 김구 선생님의 유품으로 안두희에게 암살당했을 당시 입었던 피 묻은 옷이 있다고 하는데 지하는 들리지 못했습니다. 조만간 다시 방문해 지하 전시장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효창공원 백범 김구선생님 묘소도 방문할 예정입니다.
2014년 2월 20일 김구선생님 묘역을 찾았습니다. 김구선생님 묘역은 효창공원안에 있습니다.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 역에서 효창운동장 방향으로 약5분여를 올라오면 효창운동장 뒤 효장공원이 있으며 효장공원 좌측으로 백범 김구 기념관이 있으며 그 우측으로 김구 선생님 묘역이 있습니다. 효창공원 배치 안내도입니다.
묘역전체 사진입니다.
좌측 석주입니다. 좌측 석주에는 아래 방향을 향하고 있는 세호가 양각되어 있습니다. 우측 석주입니다. 우측 석주에는 위 방향을 향하고 있는 세호가 양각되어 있습니다. 비석입니다. 뒷면에는 비문이 있습니다. 전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김구 지묘 라고 음각되어 있습니다. 묘 정 중앙 앞에 있는 장명등입니다. 묘 정 중앙 앞에 있는 혼유석이며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둥근 돌은 고석이라하는데 소석이란 북모양의 돌이라는 뜻으로 고섯에는 사악함을 물리친다는두깨비 모양의 도철문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백범 김구선생님의 묘 봉분입니다.
백범 김구 기념관은 동절기에는 4시까지 입장을 할 수 있으며 관람은 5시까지입니다. 필자는 시간을 모르고 갔으므로 입장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백범 김구 기념관 안내문입니다. 백범 김구 기념관입니다. 백범 김구 기념관 입구입니다. |
출처: 기억할만한 지나침 원문보기 글쓴이: 범솥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