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아침 편지]
한국 가곡
<들길을 걸으며>
(나태주 시/ 김정철 곡)
세상에 와 그대를 만난 건
그 얼마나 행운이었나
그대 생각 내게 머물러
나의 세상은 빛나는 세상
어제도 들길을 걸으며
당신 생각했어요
오늘도 들길을 걸으며
당신 생각합니다
어제 내 발에 밟힌 풀잎이
오늘 새롭게 일어나
바람에 떨고 있는 걸
나는 봅니다
나는 봅니다
많고 많은 세상 사람 중에 서
오직 그대 그대 한 사람
그대 생각 내게 머물러
나의 세상은 따뜻한 세상
어제도 들길을 걸으며
당신 생각했어요
오늘도 들길을 걸으며
당신 생각합니다
나도 당신 발에 밟히는
새로운 풀잎이면 합니다
당신 앞에 여리게 떨리는
풀잎이면 합니다
풀잎이면 합니다 🎶
<영어 명언>
Everyone thinks of changing the world, but no one thinks of changing himself.
- Leo Tolstoy -
A man can fail many times, but he isn't a failure until he begins to blame somebody else.
- John Burroughs -
(American naturalist and nature essayist)
<화발다풍우(花發多風雨)>
봄은 성큼 다가오고 있지만 만만하게 겨울이 물러서지 않는 요즘입니다.
당나라 때 시인이었던 우무릉의 유명한 詩 구절 "花發多風雨"라, 꽃이
필 때는 그만큼 비바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어떤 좋은 일 뒤에는 반드시 나쁜 일이 수반 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세상사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좋은 일만 또한
나쁜 일만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무릉은 또 사람의 인생도 풍족해지면 주변 사람과 이별도 겪게 된다고 읊고 있습니다.
인생족별리(人生足別離)라, 사람이 출세하면 이별이 뒤따른다.
지위가 높아지고 부를 쌓으면 그만큼 주변 관계가 멀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유명한 시 구절은 상대방에게 술을 권하면서 사양하지 말고, 마시라는 권주라고 하는 시에서 나온
구절입니다 .
세상이 봄이 되어 꽃이 피면 그 꽃을 시기하는 비바람이 불기 마련이고,
사람도 출세하고 성공하면 주변 사람들의 시기와 갈등으로 이별을 맞게 될 것이니.
그저 사양하지 말고 지금
술 한 잔하자는 권주가의 내용입니다.
세상사라는 것이 얻는 것이 있으면 그만큼 잃는 것도 있고, 잘되는 것이 있으면 그만큼 안 되는 것도 있는 것이랍니다.
(교육지원청 교육장을 역임하신 이제환 님께서 추천해 주셨습니다)
<진시황릉>
진시황릉(秦始皇陵)은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제의 묘지이다. 2,000여 년의 고도인 중국 산시성 시안시(西安市) 린퉁구에 있다.
기원 전 246년에서 208년까지 38년간 공사를 했으며, 무덤 안에 수은으로 여러 개울, 강과 바다를 만들어 누구도 침범하지 못 하도록 하였다.
높이 76m, 동서 485m,
남북 515m의 지하 궁전인 무덤이다.
지금의 황릉은 피라미드형으로,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어 있다. 외성의 둘레는 6.3km, 내성의 둘레는 2.5km로 어마어마하다.
사마천 사기 진시황 본기 편에 따르면 기원전 246년, 그가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진시황릉의 공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관이 안치되어 있는 매장실과 기타 부장품들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발굴되지 못하고, 1km 가량 떨어진 동쪽에 있는 병마용갱 또한 워낙 그 규모가 방대하기에 이 유물들을 조사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한다.
진시황릉이 완공되기 전, 진나라 말기 들어 사회가 흔들리며 많은 반란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진시황릉에서 일하고 있던 70만 인력을 빼내어 모두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이용했고, 이로 인해 공사는 잠시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항우가 함양으로 들어왔을 때, 무려 30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동원하여 이 곳을 도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항우가 무덤을 도굴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거대한 구멍에 양이 빠지자, 어느 양치기가 횃불을 들고 양을 구하러 갔다가 실수로 그 안에 있던 목조 건축물에 불을 내 건물들이 전소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1987년, 진시황릉은 병마용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74년 3월, 한 마을의 주민들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진흙으로 만들어진 토용과 청동 화살촉을 발견하게 되었다. 약 2m 정도 파내려가던 도중, 그들은 유난히 딱딱한 흙과 붉은색 가루, 청동 화살촉 등을 발견하게 된다. 그 후 병마용 1호갱이라고 불리게 된 곳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2호갱, 3호갱이 발견되었다. 20,000평방 미터에 달하는 면적을 발굴하였는데, 이 곳에서 약 7,000개에 달하는 병마용과 말들이 발견되었고 수 백개에 달하는 목제 전차와 가마들도 함께 출토되었다.
진시황은 사상통제 정책의 일환으로 각종 서적들을 불태우고 수백명의 유생을 생매장한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켜 수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불로장생의 불로초를 구하려고 온갖 노력을 하였으나,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