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이현우
학번 199943289
나이 26
주민등록번호 801027-*******
주소 30-28
나는 이런 숫자의 조합일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이런 번호 매김에 의해 관리 감독 검열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숫자들로 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숫자들이 부여함으로서 이 숫자로 나를 대하는 사람은 나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결코 숫자로 증명될 수 없으므로. 사과를 한개 두개 구분하는 사람에게 사과는 스스로의 본질을 결코 보여주지 않는 것 처럼.....
나는 나의 기억 속을 더듬어 갈 예정이다. 나는 그 때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의 추억 속에는 내가 그 때 기억했던 느낌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나는 객관적이 될 수 없다. 무수히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균열하고 있으며 가끔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에 대해 간섭하려고 하고 그 속에서 또 다른 균열이 생긴다. 그 균열 속에서 나에게 나란 존재는 직시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과거-미래를 잇는 하나의 지점에 나란 존재는 위태롭게 존재하고 있다. 순간의 나는 존재하나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삽화 1-어린 시절의 기억
하늘이 푸른 날이었다. 나비 한 두 마리가 한가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나비의 존재가 너무 신기해 나비를 잡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숨 막힘 속에서 그 나비를 잡기 위해 얼마를 뛰어 다녔는지 모른다. 나의 이미엔 이미 땀이 맺혀 눈물처럼 떨어졌다. 똑. 혹은 뚝.
나비는 내게 오지 않았다. 나비와 나는 멀리 있는 것일까? 나는 신경통처럼 욱씬 거리는 가슴을 어떻게 할지 몰라 부여잡고 있었다.
그 순간 나비가 갑자기 나에게 왔다. 어떤 통증과도 같이 나에게 왔다. 나는 나비를 재빨리 잡았다. 그 순간 더 이상 나비는 나비가 아니었다. 나비 꽁지에 시침실을 묶는 순간 그 나비는 나에게 다른 의미가 되어 버렸다. 그 나비는 나의 소유물이 되었고 나비는 다시 푸른 하늘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나비는 온 전력을 다해 나에게서 날아가 버렸다. 자신의 꽁지만을 남겨둔 채......
나는 나비를 잃은 참담함과 그 죄의식이 뒤섞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그 처연한 기억은 나를 얽어 매어서 다시 나비를 쫓지도 나비를 갈망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나의 목마름은 사라졌다.
삽화 2-고등학교의 기억
며칠째 장마가 계속되고 있었다. 장마철 특유의 퀘퀘한 냄새가 베어 형광등마저 뿌옇게 해버리던 날이었다. 창문을 넘어 산비탈을 바라보면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방울을 온몸으로 받는 나무들이 위태롭게 서 있었다. 고등학교 야자 시간은 다 그렇듯이 너무나 조용하고 복도에 감독하는 교사의 규칙적인 발걸음만 들린다. 친구 하나(내 기억 속에 그는 영화감독이 되고파 했으며 난폭한 선생들의 매질 후에 묘한 웃음을 짓는 감히 특별했다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수채화 물감을 사용한 아름다운 곳을 그리고 있었다. 내 친구하나가 사물함에 있는 자습서를 가지러 가려고 일어섰다. 옆 아이의 그림을 지나가는 순간 물통이 그림에 엎어져 버렸다. 그림이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온통 본래의 색으로 반짝이던 명암들어간 아름다운 풍경들이 금세 폐허로 변해버렸다. 물을 엎은 친구는 당황하여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이미 일어난 후의 그 말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말은 허공에서 정체되어 있고 풍경들은 퇴락해져만 갔다. 더 이상 볼 수 없었던지 그림을 그리던 친구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려버렸다. 서러운 울음이 교실의 눅눅한 벽에 스며들었다. 하염없이 책상에 엎어져 산비탈이 빗물에 쓸려내려가는 것만 보고 있었다. 커다란 골을 만들어내는......
삽화 3- 투명한...
매미가 유난히도 시끄러운 그런 날, 커다란 검은 탁자가 놓여진 술집에서 여자를 만났다. 둘 사이에는 탁자가 놓여있고 그 앞에는 몇 가지 음식이 놓여있었다. 갖가지 음식의 종류는 많았으나 그 맛이 구분되지 않았다. 술은 이미 가라앉아 버린 매실에서 우러난 짙은 향을 가지고 있어서 투명했다. 술과 매실은 더 이상 따로 존재하지 않고 그 투명함 속에서 하나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날개 잃은 나비들과 비의 비린내와 찬란함이 보였다. 그런것들이 뒤섞여 눈은 투명하고 맑았다. 이마는 유난히 뽀얗고 넓어서 가슴에 신경통처럼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나의 아픔과 서글픔과 고달픔과 죄의식과 설레임과 찬람함을 보았다. 그녀의 투영된 나의 모습엔 다시 나비를 쫓을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미 나비는 잡히었을 때 나비의 본질을 상실한다는 것을 망각시킬 만큼 강한 기대가 커다란 부메랑이 회귀하듯이 나의 마음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면서.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것들이 시작되고 소멸한다. 그 속에 나는 있었고 거기서 나는 아름다워지기 시작했다. 소멸하는 것, 부재하는 것, 죽어가고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멸해 가는 나 자신, 죽어가는 자신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이다. 그 소멸을 전제해서 나는 존재할 수 있고 아름다울 수 있다. 나비 또한 나에게 와서 나에게서 떠날 것이기에 그것을 갈망한다. 떠나지 않을거라면 갈망하지 않을 것이다.
삽화 4-당신의 누추함
반백의 머리가 엉성하게 빗질되어 누추한 느낌이 들어 화가 났다. 나를 호통치던 당신은 없고 이제 당신은 중늙은이로 나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장성한 아들과 늙어가는 당신...그 속에서 나는 당신의 키가 더 쪼그라들고 더 말라지고 더 불길하고 더 엉성한 느낌이 들어 위태롭다. 예전 너무 커서 반발심이 생기던 당신은 그 자리에 없고 내 속에 있을 뿐이다. 무엇이 이토록 서글프게 만들었을까?
군대가던 나를 잡고 울던 당신...이제 당신은 아들을 붙잡고 울 만큼 약해지고 의기소침해졌다. 그게 화가 났다. 어린 시절...당신의 억압적인 목소리에 화가 났는데 이제 그 모습에 화가 났다. 도대체 일관성이 없다.
당신은 그 동안 나를 따라 말없이 늙어 오고 있었다. 내 속에서 당신의 젊음을 소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활기차고 씩씩한 모습의 당신은 이제 없다. 그리고 당신은 어디론가로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소멸함...당신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도 얻지 못하고 돈을 많이 벌지도 못하고 처자식 호강 한 번 시켜주지 못했다. 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나의 속에서 나를 따라 다니며 나에게 상처가 되고 분노의 대상이 되고 아픔의 대상이 되고 서글픔의 대상이 되어 내가 되었다.
나의 삶은 그렇게 당신을 담보로 해서 살아왔고 머리 한올한올이 백색으로 빛을 얻어갈 때 당신의 족쇄가 되어 왔다. 이제 나의 역할이 당신의 족쇄였음을 깨닫는다. 당신은 내가 있어 자유롭지 못했고 당신은 내가 있어 당신의 어떤 길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런 당신은 나의 누추함에 너무 가까이 있어 당신에게 화가 난다. 그래서 너무나 인간적이다.
삽화 5 <알베르토 자코메티작 걸어가는 사람2>
나는 다시 누구인가? 나의 본질은 내가 이때까지 위청거리면서 살아온 나를 벗어나지 못하고 나를 둘러싼 사회의 실체를 벗어날 수 없으며 끊임없이 그 사회의 외압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내 속에는 언제나 나비를 꿈꾸고 있으며 (설사 그것이 나도 모르게 유보되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천천히 나의 뼈와 살을 소진시켜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소멸의 순간을 위한. 그리고 끊임없이 걸어가는 그 속에 처음 좌절을 맞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의 착찹함과, 다시 삶을 되돌릴 수 없음의 위태로움과, 열정으로 가득차 사회의 외압이 느끼지 못하는 뜰든 나의 가슴과, 내가 가야할 소멸과 늙음을 보았을 때의 분노와 아름다움은 나를 규정짓고 있다. 이 속에서는 나는
무수히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균열을 일으키고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에 대해 간섭하려고 하고 그 속에서 또 다른 균열이 생긴다. 그 균열 속에서 나에게 나란 존재는 명료해진다. 살아야 한다. 과거-미래를 잇는 하나의 점에 서 있는 나는 그래서 과거의 나도 아니고 미래의 나도 아니다. 나의 본질은 현재 속에서만 충실히 증명될 수 있다. 걸어가는 사람처럼 나는 걸어가는 것이다. 다리를 놀리고 숨을 조절하여...끊임없이 그 속에 나는 있다.
첫댓글 걸어가는 사람2가 올릴 때는 있었는데 깨져서 다시 수정합니다 올린 날짜는 24일 일요일이었으며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은 수정 및 삭제하였습니다
[2] 간단한 명제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예를 들어 아쉬움을 줍니다. 또한, 3가지의 질문에 충족하는 답이 아닙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것에만 충족합니다.
[2] 자신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 좋지만 차라리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많은 것을 함축시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이해가 힘들수 도 있습니다.
[2] 좋은 예를 들어 주셨지만, 예의 과도함에 비해 답이 부족하군요. 수고하셨습니다.
[2] 열심히 하신것 같습니다. 자신의 생각에대한 표현을 추상적이기보다는 조금 더 명확하게 표현했더라면 더 좋은 글이 되었을것 같네요.. 수고하셨습니다.
[6] 그래도 고민한 흔적이 있어 좋다...
함축적이라고 해서 몇 가지 설명을 붙입니다. 우선 나비란 인간이 누구나 꿈꾸는 희망 혹은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꿈꾸지만 행복하다는 것은 순간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외압은 이런 꿈꾸기 조차 포기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삽화 1) 그속에서 인간은
꿈을 꾸게 되면 상처받고 고통스러워 하게 되지요. 예를 들면 이상적인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던 체처럼 말이죠. 그래서 누구나 포기를 경험합니다. 두번째 삽화에서 그걸 볼 수 있습니다. 현실의 누추함을 깨닫고 꿈을 잃은 서글픔이죠. 그리고 그것은 체화되어 이제 꿈을 잃어 버렸다는 것 조차 인식하게 되지 못합
니다. 그러나가 어떤 계기..다시 희망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합니다. 삽화 3은 어쩌면 사랑타령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여기서 궁극적으로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타인에 대한 사랑- 좀더 나아가 말하면 타인과 합일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이나 언제나 타인과의
교류와 사랑을 추구합니다.이 사랑조차 인간 추구하는 무엇이겠지요. 그래서 나비와 성격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매실과 술은 하나로 합쳐서 매실주를 만듭니다. 투명하게도...그것은 더이상 자아와 타자가 구분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걸 희망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대조시켜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열정은 살아나 그것을 포기 하지 않습니다. 이미 패배할 것을 전제한 끊임없는 추구(시지프스 신화처럼)를 시작합니다. 그걸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인간다운 것이고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삽화3)
삼화 4는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삶의 누추함을 보여줍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누추하고 끝임없이 죽음의 불안과 맞서 싸우는 자신의 뼈와 살을 소진해 가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또하나의 자신입니다. 즉 타자이기 보다는 자아의 다른 형태로 꿈과 자유를 현실적 외압에 견디면서
살아와서 지쳐 버렸고 늙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인간의 본질이며 견디면서 살아가는 속에서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모습--세상을 사회를 살아가면서 위태로워 보이지만 결코 쓰러지는 법이 없는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간단한 명제가 아닙니다. 인간은 꿈을 가진 존재이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증명될 수 있으며 타인과의 합입을 꿈꾸는 존재이며 죽음을 향해 뼈와 살을 소진시켜 나가는 위태로운 존재이며 끊임없이 누추해 질 수 있는 존재이며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며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결코 쓰러지는
법이 없는 강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어떤 명제 속에서라기 보다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공간적 시간적 실체를 지닌 사건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하여 이런 삽화를 이용하는 형식을 취하였습니다.
매실과 술은 하나로 합쳐서 매실주를 만듭니다. 그러나 이 거래는 상당히 불공평한 듯 합니다. 알코올은 약삭빠르게도 매실을 체취를 빨아들이고, 진액을 빨아들이고도 여전히 술인 상태입니다. 대신 진액을 빨린 매실은 버려지게 됩니다. 인간정신의 위대함도, 어쩌면 이 약삭빠름이 아닐까요... 의사소통하고 싶어하지만,
사실은 의사소통을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이 때문에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이 단독자라고 명명되는 것도, 위대한 신의 모상이라고 하는 것도 그다지 즐겨하지 않습니다. 타인과의 합일이 다만 꿈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허우적대는 죄의식이 전제되어야 할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