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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당신이 머문자리는 아름답습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커피 사랑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떠난 이별 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미아리 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단장의 미아리고개'란 옛노래다.
첫 음절만 들어도 노래에 한(恨)이 가득 서려 있다.
철사로 손을 묶이고 맨발로 다리를 절면서 뒤를 자꾸만 돌아보며 북쪽으로 끌려가는 남편과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부인의 애틋한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 있다.
이 노랫말을 지은 반야월(93)선생은 실제로 피란 중 맏딸이 공포에 질려 숨져
고갯길에 자신의 손으로 묻을 수밖에 없었던 슬픈 사연이 있다고 한다.
미아리고개는 성북구 동선동과 돈암동 사이에 있는 고개로
되넘이고개(되너미고개)라고도 불렸다.
병자호란 때 오랑캐, 즉 '되놈'이 한양을 침범할 때
고개를 넘었기 때문에 되너미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남쪽인 돈암동에서 길음동을 지나 의정부 방면으로 가는 길목에
이 고개가 마지막 고개여서 되너미고개라고 했다는 설도 있고,
미아7동에 있는 불당골 자리에 있던 '미아사'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 유래가 분분하다.
●한국전쟁 땐 최후의 방어지 역할
미아리고개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 북쪽의 유일한 외곽도로였기 때문에
최후의 방어지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진 곳이다. 경사가 어찌나 가파르던지
길음시장과 부근 주거지역보다 도로의 높이가 높아
4·19혁명 때에는 미아로 옆 길가로 버스가 굴러떨어지는 사고도 있었다 한다.
미아로는 돈암동로터리를 기점으로 돈암동, 길음동을
동북방향으로 뻗어 미아삼거리까지 폭 25m, 길이 1.5㎞에 달한다.
도성의 북쪽 방향에 위치해 의정부, 포천, 철원 등지에서 서울로 입성하는 유일한
관문이자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한 탓에 교통정체와 사고가 잦았다.
1964~1966년 대대적인 도로확장공사로 미아로 도로의 폭은
8m에서 구간에 따라 23~35m의 4차선도로로 확장되었다.
경사도 10도나 낮아졌다. 그러나 대대적인 확장공사에도 불구하고
미아로의 교통정체는 계속됐다.
결국 2007년 4월 603억여원(보상비 78.6% 차지)을 들여 성북우체국에서
창문여고에 이르는 구간을 폭 35m, 왕복 7~8차선으로 확장하는 공사에 들어가
1년 10개월만인 지난해 2월 개통해 숨통이 트였다.
●시각장애인들의 점성촌
고갯길이 시작되는 태극당 빵집 맞은편에 점성촌이 들어선 것도
미아로 확장공사를 벌이며 경사를 완만하게 만들기 위해 옹벽을 세우면서부터다.
남북 방향으로 옹벽을 만들면서 동서로 횡단하는 길을 그 밑으로 뚫어
자연스레 굴다리가 생겨났다. 중구에서 이주해온 시각장애 역술인들이
옹벽과 굴다리를 의지하며 하나 둘 점판을 깔면서 터를 잡았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00여곳이 성업하면서 외국인들도 찾는
관광코스가 될 정도였으나, 지금은 간신히 10여곳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미아리고개에 점집이 번성하게 된 이유는
고개 너머에 조성된 한국인 전용묘지 덕분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영혼은 북으로 드나든다고 믿었는데,
미아리고개가 바로 영혼이 다니는 길목이었던 셈이다.
●'미아리 텍사스촌'도 사라지고…
단장의 미아리고개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아리 텍사스촌'이다.
이곳은 고갯길을 넘자마자 시작된다.
예전에 월곡동은 미아로를 중심으로 길음동과 마주하고 있는 곳으로
미아시장이 형성되어 길음동 사람들이 자주 왕래했다.
지대가 모래땅이어서 물이 잘 나와 콩나물공장들이 즐비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지만
1960년 이후 염색공장, 피혁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쇠락했다.
이 지역이 성매매 집결지로 유명해진 것은
1968년 '종삼(종로3가 사창가)소탕작전'이 실시된 이후
포주와 성매매 여성들이 미아시장 근처 월곡동 88일대에 터를 잡으면서부터이다.
구 관계자는 "미아리 텍사스라는 지명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성매매 집결지 안에 있는 술집이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술집의 모습과 흡사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했다.
그는 "서부영화 속에 등장하는 술집이 1층은 술 마시며 포커를 치고
2층에서 잠을 자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탓에 붙여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창 호황을 누릴 적엔 400군데서 1000명이 넘는 여성들이 일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황량할 정도로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흉물스럽게 남겨진 몇몇 건물의 먼지 쌓인 유리문과 너덜너덜해진 커튼,
굳게 잠긴 오래된 문에선 호시절이 언제였는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이들이 이른바 '9·23 사태'라고 부르는
2004년 9월 성매매특별법 실시 이후 여성들이 하나둘 떠났기 때문이다.
●39층 주상복합 아파트로 탈바꿈
성매매 집결지라는 오명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반가운 것은 이곳이
신월곡 1·2·3구역으로 나뉘어 2003년 미아균형발전촉진지구로 지정된 것.
구 관계자는 "올해 토지보상문제가 해결되면
내년 5월쯤에는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지 않겠느냐."면서
"그래도 여전히 골목 업소들에선 간간이 영업을 하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특히 이 일대는 39층 높이의 주상복합 아파트 등 랜드마크 건물들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강북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실제 이 길을 지나가다 보면 곳곳에 초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잔뜩 들어서고 있다.
얼핏 보아도 금세 대기업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뉴타운사업과 관계자는 "성매매집결지에 달라붙은 미아시장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내년 6월이면 지하 6층, 지상 23층 198가구 규모의
주상복합 아파트로 재탄생한다."면서"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옛 추억이 서린 곳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이 한편으론 안타깝지만
주민들 대부분은 윤락가 동네라는 어두운 이미지를 벗을 수 있어 반기고 있다."고 말했다.
글ㆍ사진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kangto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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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 달동네 건너로 길음뉴타운 아파트단지가 엿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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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 가옥이 이사를 떠나고 철거만을 앞둔 미아리 달동네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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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 달동네에서 바라본 전경. 곳곳에 재개발 아파트들이 들어서 예전의 모습을 찾기가 쉽지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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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거를 앞두고 이사를 떠난 텅 빈 집사이로 보이는 새 아파트단지 |
ⓒ2006 유태웅 |
그리고~ ^^*
미아리 텍사스를 아십니까?
실제로는 하월곡동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미아리 텍사스라 불리워
미아동 주민들로 하여금 동네이름 고치기 운동까지 벌어졌었지요.
새봄을 맞아......아님, 정부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까요.
가림막을 새롭게 단장했네요.
밤에 오면 그야말로 휘황찬란할 터인데
낮에 보니 구질구질함 그자체군요. 물론 노무현 정부때 성매매가 불법이 되며
지하(?)로 숨은탓도 있겠지만요.
정부의 단속이 심해지자
포주들이 스스로 한터연합을 결성하여 권익찾기에 나섰지요.
영업을 하는지 안하는지 굳게닫힌 창문에 붙여진
몇장의 안내문을 담아봤네요.
누가 마신 요쿠르트통 일까요.
쇠락 해가는 미아리 텍사스를 대변하는듯 하네요.
오후햇살이 쓸쓸함을 더해주는 듯 하군요.
버스중앙차로제가 시행되고 있는 번듯한 미아로.
우측 중앙의 번듯한 길음환승주차장 건물 뒷편이
한때의 영화를 뒤로하고 재개발에 들어가는 미아리 텍사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