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위로 (고린도후서 1장 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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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독서의 계절 이라고 합니다. 김신미 작가의 『나도 가끔은 위로 받고 싶다』라는 책을 소개해 드립니다. 위로라는 말 자체가 참 부드럽고 다정스런 느낌입니다. 이 책 뒷면에 쓰여 있기를, ‘남편들이 먼저 읽고, 아내에게 선물하는 책, 일과 사랑, 인생의 중간에 서서 몸과 마음이 고달픈 아내들을 위한 위로와 공감’이라는 글이 쓰여져 있습니다. 남편 분들이 한 권씩 구입하셔서 속독하시고, 아내에게 선물로 주셔도 좋을 듯합니다. 커피 한잔 마시면서 책 한권 읽는 가운데서도 여유를 찾고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책 제목 그대로 우리 모두에게는 가끔씩, 누군가로부터든지, 무엇으로부터든지 위로 받는, 힐링(Healing, 치유)의 시간이 꼭 필요 합니다.
오늘 짧은 본문에는 ‘위로’라는 단어가 9번이나 나옵니다. ‘위로’라는 단어(헬, 파라클레시스)의 문자적인 뜻은 “가까이에서 부른다”라는 의미입니다. 누가 누구를 부릅니까?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이, 위로 받고 싶은 사람 가까이에서(곁에서) 불러 주신다는 뜻입니다. ‘위로’는 하나님 안에 있는 내적인 특성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위로의 은혜가 외적으로 발산되어 우리들에게 전해 질 때, 우리는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 가까이에서 불러 주시는 위로의 음성을 들으시고, 참 평안과 회복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3절에서 바울은 “찬송 하리로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세 가지 찬송의 이유를 붙입니다. 첫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둘째는 “자비의 아버지”, 셋째는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를 풀어서 설명 한다면,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주셔서 찬송합니다”, “둘째는 우리에게 자비(긍휼-compassion, 은총- mercy)하신 마음으로 변함없이 사랑해 주셔서 찬송합니다”, “셋째는 용서해주시고 회복시키시고 마음의 평안을 주셔서 찬송합니다”라는 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구원과 사랑, 그리고 평안의 은혜에 대한 찬송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가장 기본적인 찬양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바울이 했다고 하는데 무게감이 남다릅니다. 단순하게 정해진 틀 안에서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감사하고, 정말로 영광 돌리는 진심이라고 느껴집니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사도 바울의 외침이 유난히 더 크게 들리는 듯합니다. 그만큼 바울이 지나온 믿음과 삶의 발자취는 엄청난 감동을 주고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마커스 찬양 중에 “주님의 뜻대로 살아낸 만큼 자유를 얻으리 살아낸 만큼 / 예수의 맘으로 사랑한 만큼 평안을 얻으리 사랑한 만큼”이라는 가사가 기억나실 겁니다. 정말로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으로 세상 속에서 처절하게 살아낸 만큼, 전심을 다해 주님을 사랑한 만큼, “찬송하리로다” 힘차고 당당한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고백은 우리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오랫동안 기억하시는 참 고백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세 가지 찬송 중에서 특별히 ‘위로’에 대해서 길게 말합니다. 4-6절 사이에 ‘위로’라는 단어를 8번이나 사용했습니다. 먼저 4절을 읽어 드립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아멘.
4절 말씀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 하시는 참 좋으신 분입니다. 앞서서 ‘위로’라는 단어가 가까이에서 부른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있는 모든 현장 곁에서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여러분들 속상하고, 눈물 나고, 기운 빠질 때 누구를 불러야 합니까? 육신의 부모님을 부르며 “아이고 아버지, 아이고 어머니, 속 터져 죽겠어요”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 영의 아버지, 위로의 아버지”를 수시로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로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내 곁을 떠나지 않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내가 입을 열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위로를 듬뿍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또한 진짜 믿음입니다. 우리는 다 위로 받을 자격이 있고, 위로 받을 상황도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다만 내 스스로가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심을 인식하지 못하여서, 그리고 위로의 하나님을 부르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된 위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위로해 주기를 바라지도 마시고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으려고 기대하지도 마세요. 정말 위로가 필요할 때 숨 한번 크게 들이 쉬시고 이렇게 외쳐 보세요.
“하나님 제 곁에 게시죠. 듣고 계시죠. 저 힘들어요. 속상해요. 아파요. 미치겠어요. 저 위로 받고 싶어요. 사랑 받고 싶어요~”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신 주님은 즉시 응답하시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큰 위로로 우리의 마음을 평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린 우리 모두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한량없는 위로가 내려져서, 육체와 마음과 영혼이 온전하게 회복되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위로는 받기만 하고 끝나서는 안 됩니다. 4절 후반절에서 “위로 받은 우리는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방금 전에 아멘으로 우리가 위로 받았음을 고백했다면, 이제는 우리가 받은 그 위로의 감동을 고통 받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전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위로의 통로,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번 주는 00교회 “위로 축복 기간”으로 선포합니다. 내 주변에 위로해 주고 싶다고 마음 가시는 분이 있다면, 차나 식사를 대접해 드리든지, 같이 영화를 같이 보신 다든지, 산책하며 대화를 나눈 다든지, 책을 한권 선물 한다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대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 보세요. 우리가 마음을 갖고 몸이 움직이면, 감동 주시는 것은 성령님이 역사 하실 겁니다. 내 주변에 있는 한 사람에게라도 위로를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절에서는 우리가 받을 위로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대되고 풍성해 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을 읽어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아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홀몸이 아니라 예수님과 한 몸이 된 것입니다. 한 몸이라면 동일한 고통, 동일한 위로를 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5절 말씀대로 예수님이 받는 고난은 곧 우리의 고난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받는 위로도 예수님의 위로하심으로 풍성해 집니다. 위로 받고 싶으면 먼저 고난을 피해가려고 하지 마시고, 고난에 당당하게 맞서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으니 우리는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영광을 받았듯이, 우리도 고난을 주심으로 풍성한 위로에 이르게 됨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많이 위로 받고, 많이 사랑 받고, 많이 평안해지기를 원하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먼저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직접 십자가에 매달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아주 쉬운 방법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고백하고 감사하라, 구별되고 거룩하게 살아라, 교회 우선, 말씀 중심으로 살아라, 전도하기를 힘써라” 이런 방법들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정말 우리가 고난에 동참하는 방법은 “예수님을 외롭게 않게 대접해 드리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느껴 보시라는 것”입니다. 간단하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막힌 담을 헐기 위해서다”(엡 2:14),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화목 하게 하려 하심이다”(엡 2;16)라고 했습니다.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담이 무너지고 원수 끼리 화목(화해)를 이루었는데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냉랭하게 지낸다면 달라진 것이 없어 보입니다. 대화가 없는데 어떻게 그 속사정을 알겠습니까? 예수님이 왜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는지 궁금하시면 직접 물어 보세요. 예수님이 외롭지 않게 매일 같이 문안드리고 대화해 보세요. 그러면 고난을 받으신 동기와 이유와 목적과 결과를 자세히 알려 주실 겁니다. 고난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나도 고난을 이겨낼 힘이 생기게 되고, 그로 인해 상상하지 못했던 큰 위로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위로”,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고난이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온 것처럼, 위로도 그리스도로부터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아마 우리들에게 “애들아! 나도 가끔 위로 받고 싶다”라고 말씀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외로움을 느끼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만남의 시간을 그만큼 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외롭게 홀로 두지 마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충분히, 그리고 자주 가짐으로, 넘치는 위로를 받는 행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마지막 말씀인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아멘.
여기서 ‘우리’는 바울을 포함한 전도자들이고, ‘너희’는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을 말합니다. 6절은, 바울일행이 환난(고난) 받는 것, 혹은 위로 받는 것이 고린도 교회 공동체와 밀접하게 연결 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일행과 고린도 교회가 신앙 운명 공동체로 성령 안에서 유기적인 작동을 하면서 함께 고난 받고, 함께 위로 받으며 성장해 나간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은 분명히 개인적인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개인의 믿음은 고난과 위로를 받으며 성장해 나가면서, 공동체 전체의 믿음으로 뿌리 내리게 됩니다. 즉 개인이 고난을 잘 이겨내면 교회 공동체가 굳건해지고, 개인이 그리스도로부터 큰 위로를 받으면 공동체도 평안 가운데 하나로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에 소속된 성도는 “내가 잘하면 교회가 잘 된다, 내가 먼저 실천 하면 교회는 성장한다, 내가 모범으로 섬기면 교회는 위로를 받는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강한 체질로 성장해 가기를 바라면서 모진 환난(고난)을 감내해 나갔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수고하고 노력하는 성도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으로 우뚝 서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만 위로 받기를 원하기에 앞서, 사랑하는 00교회 모든 성도들이 큰 위로 받을 수 있도록, 내가 먼저 고난을 감내하겠다는 믿음의 결단과 행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고, 바울이 그렇게 했고,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고난 앞에서 당당히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고난들을 통한 위로의 열매들을 지금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00교회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큰 위로 가운데 평안과 기쁨 속에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가실 수 있도록 힘써 기도하겠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제가 질 수 있는 고난의 무게도 감당해 나가겠습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시 42:5) 10월 말씀 암송하면서 어떤 고난일지라도 넉넉히 감당하고,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되는 큰 위로를 받음으로 우리 주님께 감사와 영광 돌리며 당당하게 살아가시는 00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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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말씀으로 위로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더 큰 위로로 저희들을 붙잡아 주시고, 모든 고난을 이겨 낼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자녀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