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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이자 라이벌인 황선홍(왼쪽)과 홍명보.(사진 김동욱) |
황선홍과 홍명보, 현역시절 이들에겐 ‘한국축구의 두 거목’ ‘한국축구의 버팀목’ 등 많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두 거목’ 또는‘버팀목’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 만큼 1990년부터 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날 때까지 이들이 한국축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2002년 11월 20일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브라질전에서 이들은 팬들에게 큰절을 올렸다.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많은 축구팬들은 한국축구를 지탱해 주던 공수의 대들보가 동시에 빠져버린 이날, 무언의 허탈감을 느꼈다. 앞날의 희망보다는 불안감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또 한 번의 월드컵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새롭게 등장한 많은 스타들이 그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시험대에 올랐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은퇴식 날 붉은 악마가 내걸었던 ‘NEVER ENDING STORY’가 되고 말았다. 여전히 한국축구는 제2의 황선홍과 홍명보를 찾고 있다. 도하아시아경기대회에서 약체 팀들의 밀집 수비에 고전하며 골을 넣지 못하는 대표팀을 바라보며 축구팬들은 과거 아시아경기대회 네팔 전에서 혼자 8골을 몰아친 황선홍을 그리워하고 있다.
수비진 역시 4년째 제2의 홍명보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지도자로서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고 있다. 20여 년간의 선수생활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와의 싸움 앞에 그들은 자만하지 않았다. 도전과 겸손, 그것이 또다시 그들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 놓을 토양분인 셈이다.
나의 우상과 역할 모델
한 시대의 축구 스타는 후배들에게 꿈이자 운동을 시작하는 동기를 제공한다. 유럽의 많은 축구 스타들 또한 과거 자신들이 좋아하는 선수와 클럽을 쫓아 유소년 클럽에 가입한 후 축구에 입문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웨인 루니의 우상은 1990년대 중반 고향인 에버튼에서 맹활약했던 스웨덴 출신의 공격형 윙어 안데르스 림팔이었고 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는 마케도니아 출신 일리조스키는 자신의 우상인 이탈리아의 스타 로베르토 바조의 이름을 따 ‘바조’라는 애칭으로 K리그에 입문했다. 그러나 연고지조차 없었던 1980년대 한국프로축구에선 루니와 같은 선수가 나올 리 만무했고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경기를 제외하곤 해외축구를 볼 수 없었던 상황에서 해외 스타를 우상으로 삼기에도 무리였다. 그렇다고 황선홍과 홍명보에게 꿈을 준 스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 자신의 역할 모델이 있었나?
황선홍(이하 ‘황’)│ 유럽처럼 눈앞에 보이는 우상들이 있었던 시절은 아니었다. 처음 축구를 시작할 때 TV에서 가장 멋있게 본 선수는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던 차범근(현 수원 삼성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 를 닮고 싶어 플레이를 따라 한적은 없다. 나와는 스타일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가 유럽축구문화를 접했던 것은 아마도 1988년 유럽선수권대회부터였던 것 같다. 네덜란드의 공격수 마르코 반 바스텐(현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이 사각에서 발리 슈팅을 성공시키는 것을 봤다. 그 한 장면에서 여러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홍명보(이하 ‘홍’)│ 나도 선홍이처럼 대학교 때 와서 역할 모델이 생겼다. 어려서부터 계속 미드필더만 맡다가 본격적으로 수비를 본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인 1989년부터였는데, 이탈리아 리그의 AC 밀란 경기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서 꾸준히 봤다. AC 밀란에는 프랑코 바레시라는 수비수가 있었다. 그가 내 최초의 역할 모델 선수였다.
해외 축구 문화가 개방돼 어린 후배들에겐 기회의 폭이 넓어진 것으로 봐야 하나?
황│ 그렇다. 자신의 스타일과 비슷한 선수들을 모델로 삼고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내가 요즘에 축구를 하고 있었다면 반 니스텔로이(레알 마드리드)의 움직임과 경기 스타일을 연구했을 것 같다.
홍│ 한국축구는 앞으로 전술적으로 더욱 성숙해야 한다. 정신력을 논하는 시대는 지났다. 감독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어린 선수들이 해외축구를 많이 보면서 전술적인 움직임과 자신의 역할을 잘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은 보고 배울 기회도 많지 않은가.
A매치 데뷔 그리고 나의 재발견
두 선수처럼 동시대 같은 공간에서 서로 호흡을 맞춘 인물도 드물 것이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부터 학원축구를 경험했고 1987년 건국대와 고려대에 나란히 입학한 학번 동기다.
황선홍은 건국대 2학년 시절인 1988년 12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아시안 컵 일본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작렬하며 화끈한 데뷔무대 신고식을 가졌다. 2002년 11월 은퇴할 때까지 103경기에서 50골을 뽑아냈다. 124경기에서 55골을 기록한 차범근에 이어 A매치 최다 골 기록이다. 치명적인 무릎 십자인대 부상으로 장기간 대표팀에서 활약하지 못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실로 대단한 업적인 셈. 황선홍보다 1년 정도 뒤늦은 1990년 2월 A매치에 데뷔한 홍명보 또한 2002년까지 12년 동안 A매치 135회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축구팬들에게 최악의 졸전으로 회자되던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서도 그는 상대 공격수의 슈팅을 믿기 어려운 슬라이딩으로 걷어내는 등 수차례의 인상적인 수비를 펼쳐 국민들에게 유일한 희망을 안겨준 선수가 됐다.
A매치 데뷔를 회상해 본다면
황│ 데뷔전에서 골을 기록하긴 했지만 사실 그때만 해도 파워가 많이 부족했다. 드리블을 하면 몸싸움에 밀려 볼을 쉽게 뺏겼다. 그래서 일단 볼을 잡으면 빨리 동료한테 주고 문전 앞으로 자리를 잡으러 가는 식이었다. 나름대로 헤딩슈팅과 위치 선정에는 자신이 있었다.
부족했던 파워는 어떻게 보강했나?
황│ 대학 졸업하고 독일 2부 리그 클럽인 부퍼탈에서 뛴 적이 있다. 그때 부상을 당해 수술을 하고 재활을 하게 됐는데 그것이 웨이트트레이닝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됐다. 부상한 무릎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 시작했고 근력이 생기니까 확실히 힘을 받는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꾸준히 전체적인 웨이트트레이닝을 병행했고 나의 플레이 스타일도 조금씩 바뀌게 됐다. 몸싸움에 자신이 생기면서 드리블을 하기 시작했고 측면으로 돌아나가서 플레이 할 때도 자신감이 생겼다.
홍코치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때 혜성처럼 등장했는데, 갑자기 중용 받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홍│ 1990년 2월 노르웨이와의 A매치 데뷔전에서 활약을 했다. 매일 맨땅에서 축구하다가 대표팀에 가서 좋은 잔디를 밟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이 났다. 선배들에 비해 큰 부담이 없다 보니 현지 적응훈련을 하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었다. 코칭스태프가 나를 중용하기 시작했고 본선에서 3경기를 모두 뛸 수 있었다.
1990년 월드컵 때 홍코치의 경기 모습을 보면 전쟁에 임하는 투사와 같은 모습이었는데
홍│ (웃음) 겉으로는 표정이 없는 편이라 그래 보였겠지만 사실 속으로는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 편하게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지금도 드래프트 제도는 반대합니다
프로팀들이 대학생의 신분으로 90년 월드컵에서 맹활약한 이들을 노리고 있었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1990년 말 황선홍과 홍명보는 나란히 드래프트를 거부했다. 황선홍은 독일행을 택했고 홍명보는 상무행을 택했다.
드래프트를 거부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나?
황│ 드래프트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내가 원하는 팀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지금 드래프트를 거부하는 많은 선수들의 공통적인 문제일 것이다.
홍│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팀은 포항을 포함해 2팀이 있었는데 당시는 드래프트 역순제도였기 때문에 최하위 팀이 우선 지명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선홍이와 내가 1,2순위일 가능성이 컸다.
작년 시즌부터 드래프트가 부활됐다.
홍│ 제도가 조금 바뀌었지만 근본적으론 계속 같은 역순환 현상이 생긴다고 본다. 과연 올해 드래프트제를 통해서 몇 명이 프로에 들어갔는지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시민구단들의 재정확충을 위해 대안이 불투명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연맹이나 구단이 진정으로 머리를 맞대고 자신들의 이익이 아니라 축구 발전을 위해서 무슨 역할을 했느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축구계는 각각의 이기주의가 팽배되어 있다. 구단, 선수, 팬, 그리고 연맹 모두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는 찾아보기 어렵다. 축구계 스스로 내부적인 신뢰회복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황│ 동의한다. 지금의 변형된 드래프트제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몸에 염증이 생길 때는 그 부분을 수술해야 하는 것처럼 지금 K리그의 문제는 드래프트제를 시행하지 않아서 생긴 것보다는 다른 곳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축구 1,2년 할 것도 아닌데 항생제를 계속 투입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중간에 힘든 과정이 있더라도 문제점을 치유할 수 있는 장기적인 플랜을 갖춰서 실행에 옮기는 용기가 필요하다.
선수들의 몸값이 치솟은 것도 큰 이유 아닌가?
황│ 내가 1996년 포항에서 연봉 1억 4천만 원을 받았다. 그게 당시 프로 통틀어 최고 연봉이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인가. 거품을 빼야 한다. 자신들이 진정한 프로클럽이라면 각자 독립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마인드를 가지고 각 선수들에 대한 경제적 가치를 정확히 산출해 내야 한다. 그러나 일부 돈 많은 구단은 경쟁 기업에게 좋은 선수를 뺏기지 않기 위해서 엄청난 액수를 서슴지 않고 지불하고 있다. 그것은 유럽 빅리그 클럽들이 투자하는 것과는 다른 성격이다. 이젠 선수들 스스로도 거품을 빼야 한다. 그것이 리그와 선수, 그리고 팬들이 공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이다.
홍│ 선홍이가 정답을 얘기해서 달리 할 말이 없다.
희비가 교차된 1994년, 언론의 역할은?
유난히 무더웠던 1994년 여름, 대한민국에서 가장 욕먹은 사람과 칭찬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황선홍과 홍명보다. 1992년과 1993년 나란히 포항제철에 입단해 더욱 돈독한 친분을 나누었지만 1994년 미국월드컵은 그들의 우정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축구 내셔널리즘이 뿌리깊던 당시 대표선수들은 국내리그인 아디다스컵을 포기한 채 타워호텔을 거점으로 장기간 합숙훈련에 돌입했다. 두 선수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했다. 그러나 미국월드컵이 끝난 후 상황은 180도로 변해있었다. 스페인전과 독일전에서 2골을 성공시킨 홍명보는 영웅이 됐다. 그러나 볼리비아 전에서 몇 차례 득점 찬스를 놓친 황선홍은 축구팬들에게 마녀사냥 희생양으로 낙인찍혔다.
만약 그때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 됐었다면?
황│ (웃음)포털 검색순위 1위를 질주하고 있었을 거다. 거의 매장당하지 않았겠나? 정말 힘들었다. 모든 연락을 끊고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했으니까. 타워호텔에서 매일 남산까지 뛰어오르며 정말 열심히 훈련했다. 물론 억울하긴 했다. 사람들은 경기 내용보단 골을 넣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으니까. 내 능력이 이렇게 폄하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홍 당시 월드컵 나가면 누가 골을 넣겠냐는 설문조사를 하면 선홍이가 항상 1등이었다. 난 솔직히 수비를 어떻게 할까 생각을 했었지 골 넣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다 보니 2골을 넣게 됐지만. 당시 선홍이랑 같은 방을 썼는데 시달림 받는 것 보고 너무 미안했다.
요즘 인터넷 때문에 고충을 겪었던 후배선수들도 많이 보았을 것 같다.
홍│ 인터넷 댓글 문화도 그렇고 언론도 문제다. 가까운 예로 지난 9월에 있었던 아시안컵 예선 이란전도 그렇다. 그 경기에서 잘하다가 경기 막판에 상식(김상식)이가 실수를 해서 골을 허용했다. 그 다음날 신문들은 역시 상식이의 실수만 크게 부각시킨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정작 그 경기 내용을 제대로 분석해 놓은 언론은 단 한 군데도 보지 못했다. 그 경기는 내가 판단하기에 역대 이란전 중 가장 훌륭한 경기였다. 이란을 상대로 볼 점유율이 그토록 높았던 경기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상식이는 거의 MVP나 다름없는 활약을 펼쳤다. 그것은 베어벡 감독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물론 결과도 중요하다. 그러나 과정을 아예 무시한 채 결과만 논하는 보도행태는 바뀌어야 한다.
황│ 한국 언론은 너무 ‘까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웃음) 긍정적인 시각으로 썼으면 좋겠다. 일본에서 놀란 것은 미우라 가즈요시(요코하마 FC)가 1년 25경기 이상 나가서 2골밖에 못 넣은 시즌이 있었다. 그래도 골 넣으면 1면이다. 스타를 만들어 내고 예우해주는 측면이 강한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아마 ‘얘 뭐하는 애냐?’ 그랬을 것이다.
J리그는 그들에게 무엇을 남겼나
포항에서 한솥밥을 먹던 그들 중 먼저 J리그의 초대를 받은 것은 홍명보였다. 홍명보는 1997년 여름 당시 국내 축구 사상 최고 이적료인 11억 원에 J리그 벨마레 히라츠카로 이적했다. 이어 1998년 여름에는 황선홍이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했다. 홍명보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세 시즌 J리그 올스타로 선정되며 최고의 수비수로 각광받았고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한 1999년에는 J리그 사상 최초로 외국인 주장을 맡기도 했다.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한 황선홍 도 1999시즌 24골로 한국인 사상 최초의 J리그 득점왕에 등극했다. J리그 무대는 그들에게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와 공격수라는 영예를 재확인시켜준 무대였다. 또 J리그의 경험은 미래 한국축구를 이끌어 나가야 할 그들에게 많은 교훈을 일깨워 주었다.
지장(智將), 덕장(德將), 용장(勇將)…. 여기에 운장(運將)까지 들어가면 완벽한 지도자인가요?(사진 김동욱) |
한국과 비교해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었나?
황│ 역시 축구 인프라였다. 물론 한국도 지금은 월드컵 경기장을 활용할 수 있는 프로팀들이 많아서 인프라는 좋아진 편이다. 그러나 여전히 학원 축구 인프라는 과거와 큰 차이가 없다. 예를 들어 예전 동대문구장 같은 경우 태클을 하면서 먼지와 함께 싹 쓸어버리면(웃음) 티가 별로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은 잔디가 융단 같아서 티가 확 나버려 반칙하기가 겁났다.
그래서 한국선수들이 반칙을 잘한다는 얘긴가? (웃음)
황│ (웃음) 잔디가 좋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이 부득이하게 태클 이야기를 꺼내 미안하다. 결국 환경, 인프라가 기술적인 차이를 부른다는 얘기다. 어린 시절 맨땅이나 동대문구장 같은 곳에서 축구를 하다 보면 땅이 고르지 못하니까 잔기술 부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나라 공격수들은 기술 좋은 선수들보다 툭툭 쳐 놓고 뛰어가는 스타일의 선수들이 많다. 고정운 선수 같은 스타일이라고 할까. 개인기와 잔기술이 좋은 선수들은 크게 성장할 수 없는 환경이다. 반면 일본은 그 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축구 행정가로서의 꿈을 가지고 있는 홍코치는 어떤 점을 봤나?
홍│ 한국에 비해선 확실히 행정에 대한 부분이 잘 돼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축구문화의 차이다. 특히 각 프로구단의 선수들에 대한 배려가 뛰어나다. 유럽도 마찬가지이지만 기본적으로 구단들은 ‘선수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은 ‘우리 때문에 너희들이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기업구단의 한계에서 나오는 딜레마다.
요즘은 많이 개선되고 있지 않나?
홍│ 실무진들의 마인드는 많이 좋아진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제일 위에 계신 분들이 계속 바뀐다는 점이다. 지난 시즌에도 K리그 경기를 자주 보러 다녔는데 한 번은 중앙 본부석에서 구단 관계자가 정말 옆에서 듣기 어려울 정도로 선수들에게 욕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화가 나 경기 중에 그냥 빠져 나와 버렸다. 축구와 상관 없는 다른 분야에서 오신 분들, 그런 분들이 문제다. 그러나 그런 분들도 몇 년 있으면 알 만한 시기가 되는데 꼭 그런 시기가 되면 다른 분으로 자리가 바뀌더라.
부상과 투혼
두 선수 모두 부상으로 시련을 겪은 시절이 있다. 여러 차례 무릎 십자인대를 다친 황선홍은 부상 악령에 시달려야 했다. 대표팀의 영원한 리베로일 것 같았던 홍명보 또한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부상으로 약 9개월 동안 태극마크를 달지 못한 채 초조한 마음으로 거스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기다린 적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부상이라는 시련 앞에는 언제나 또 한 번의 도약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선홍의 부상’을 생각하면 개인적으로는 비 오는 날 펼쳐졌던 한일전이 떠오른다.
황│ 1998년 4월 1일이다. 나도 그 경기를 잊지 못하고 있다. 1년 4개월 만에 복귀하는 경기가 마침 한일전이었다. 그때처럼 모든 언론의 관심이 나에게 쏟아진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 들어서는데 모든 관중이 나만 보는 것 같았다. 예전에 개그 프로그램에도 나오던데. ‘다 나만 봐(웃음)’ 그때 받은 부담감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도 멋지게 골을 넣지 않았나.
황│ 경기 전날 축구화를 닦으면서 긴장을 많이 했다. 긴 시간 실전을 치르지 않은 상태였는데 팬들의 기대는 상대적으로 높았다. 다른 경기에 비해 골을 넣겠다는 생각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행운도 찾아왔다. 비가 많이 와서 그라운드가 여기저기 파인 상태였는데 슈팅한 공이 머리 위로 다시 튀어 올랐다. 나도 모르게 뛰어오르며 발리슈팅을 시도했다. 아마 본능이었던 것 같다. 그 골은 A매치 골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골 가운데 하나다. 그 이후에 팬들도 잘 알다시피 중국전에서 공중제비를 한번 하고는 1998년 월드컵을 날려버렸지만 말이다.
홍코치는 정말 부상이 없을 줄 알았다. 2001년이 상당히 힘들었을 텐데
홍│ 2000년 가시와 레이솔에 있을 때 대표팀 경기까지 포함해 한 해 동안 50경기가 넘는 경기를 치렀다. 그리고 히딩크 감독이 취임한 이후인 2001년 1월 동계훈련에 합류했다. 사실은 그때 쉬었어야 했다. 점점 컨디션이 나빠졌다. 날이 갈수록 내 몸에서 회복이라는 말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계속 다리가 아파서 병원에 가보니 피로 골절이라고 했다. 정강이뼈 사이가 갈라지면서 벌어지는 증상이다. 그런 상태에서 계속 뛰다 보면 정강이뼈가 부러져 선수생활을 끝낼 수도 있다면서 무조건 3개월을 쉬라는 진단을 받았다.
부상으로 쉬는 동안 일부 언론에서는 홍명보 무용론 기사도 나왔다.
홍 솔직히 그 기사보고 상당히 불쾌했다. 그렇지만 반대로 그런 기사가 큰 자극도 됐다. 만약 부상 회복 시간이 없었다면 2002년의 나는 없었다. 부상과 심적 고통들이 2002년에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동료에서 라이벌로 진화하다
홍명보의 국가대표팀 코치 발탁 발표가 있던 날 황선홍은 홍명보에게 축하전화를 했다. 그리고 홍명보는 “미안하다”는 말로 황선홍을 위로했다. 홍명보는 자신의 꿈은 축구 행정가라고 말해왔다. 많은 언론은 대표팀 코치로 황선홍이 내정돼 있다는 추측기사를 썼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제 둘은 지도자로 새로운 경쟁관계에 들어갔다. 한국축구 발전을 위해 한 배를 탄 라이벌이 된 것이다.
이젠 서로를 라이벌이라고 불러도 되겠나.
황│ 라이벌이 되지 않겠나.(웃음) 그런 게 팬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그런 흥밋거리가 계속 만들어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홍│ 지금껏 (황)선홍이와는 포지션이 다르기 때문에 라이벌이라고 생각 해본 적이 없다. 만약 감독으로 만나면 우리끼린 그런 얘기 안 하겠지만 분명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런 단어를 붙일 것이다.(웃음)
그동안 수많은 지도자를 만났다. 어떤 지도자가 가장 인상 깊었나.
황│ 히딩크 감독이다. 다른 감독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고 선수들이 모두 그를 믿을 수 있게 만들었다. 감독으로서 갖춰야 할 것을 모두 갖춘 분이다.
홍│ 그렇다. 지도자는 전술적인 면에서나 훈련에서나 선수들이 ‘아, 정말 이 감독은 실력이 있구나’라고 느껴야 한다. 선수들이 자신을 따라올 수 있도록, 아무 소리 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장악력이 필요하다. 히딩크는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다.
지도자는 전술적으로 해박한 지장, 선수들을 잘 포용하고 이끌 수 있는 덕장, 카리스마와 과감한 결단력이 돋보이는 용장 등 여러 스타일이 있다. 본인은 스스로 어떤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나.
황│ 난 덕장인 것 같다. 합리적인 감독이 되고 싶다. 확실히 용장은 아닌 것 같고.(웃음) 감독으로서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역시 경기를 보는 눈인 것 같다. 냉철하게 판단하고 경기의 흐름을 짚어줄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고 본다. 그 다음이 선수들과 많은 얘기를 하고 선수들과 화합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 것이 감성적으로는 축구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이고 매력이다.
잉글랜드로 연수를 가는 목적도 그 때문인가?
황│ 그렇다. 난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선수시절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배우고 싶다. 지장으로서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한 길일 수도 있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홍코치는 용장 스타일에 가깝다.
홍│ 3가지를 다 갖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전술적인 면과 선수들 간의 융화, 그리고 경기에 나가서 최선을 다할 수 있게 정신력을 강화하는 카리스마까지. 하나라도 빠지면 좋은 감독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좋은 감독을 물어본 것이 아니고 홍코치가 어떤 스타일이냐고 물었다.(웃음)
홍│ 아직 감독 경험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알겠나.(웃음) 지난해 11월 올림픽대표팀을 이끌고 일본과 평가전을 치를 때 감독 아닌 감독 역할을 해야 했는데 상당히 힘들었다. 첫 번째는 내 옆에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힘들었고 두 번째는 상대가 일본이라서 힘들었다.(웃음)
제2의 황선홍, 홍명보가 되어라
2002년 월드컵 이후 밀집수비를 펴는 팀들에게 쉽게 골을 못 넣는 것 같다.
황 지난해 12월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정)조국이를 주의 깊게 봤다. 수비수들이 밀집돼 있는데 왜 측면으로 움직이는지 답답했다. 그런 팀과 경기할 때는 그냥 간단하게 플레이를 해야 한다. 어차피 측면에서 윙어들이 계속 공격 기회를 만들어 준다. 페널티 박스 앞에 있다가 크로스가 올라오거나 골 기회가 있을 때 해결할 준비만 잘 하면 된다. 뛰어다니는 것보다 크로스를 올려줄 때 한 발짝만 더 앞서자는 생각이 필요했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홍 맞다. 약팀과 경기할 때는 스트라이커들은 ‘타겟맨’ 역할만 하면 된다. 전술변화를 위해 무리하게 측면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다. 페널티 박스 안에 공격수가 많아야 한다. 코칭스태프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지적해 주고 있다.
홍코치는 중앙 수비수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주고 있나.
홍│ 이젠 과거처럼 맨투맨으로 붙어서 특정선수에게만 골을 허용하지 않으면 된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현대축구에서 가장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 포지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수비다. 볼을 걷어내는 것만이 수비가 아니다. 볼을 차는 방향과 방법을 재빨리 선택해 공격으로 전환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또 수비할 때는 상대 공격수의 성향을 분석해 어느 방향으로 공격할 확률이 높은지 순서를 정해 경우의 수에 대비한 예비동작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 뒤에 어떤 상대 공격수가 움직이는지 우리 수비수들과는 어느 정도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꾸준히 노력하는 선수만이 좋은 수비수로 성장할 수 있다.
조병국, 조용형이 대표팀에서 중용되지 못하는 것 같다.
홍│ 포백의 중앙 수비수에게는 감독의 성향에 따라 서로 다른 특성을 원하게 된다. 사실 나도 포백에서는 완벽한 스타일의 선수가 아니었던 것 같다. 조병국과 조용형 모두 많은 장점을 가진 선수다. 현재 대표팀은 기술도 어느 정도 있으면서 공수 전환을 빠르게 할 수 있고 신체적인 능력도 갖추고 있어서 세트피스에 강점을 보이는 선수를 찾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 좀 더 가까운 선수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그 선수들이 중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재미있는 K리그를 위해
지난 시즌 수원이나 성남을 상대하는 팀들은 지나치게 수비적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황│ 당연하다. 전남도 수원 같은 팀에겐 무리하게 공격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그것은 해외리그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수원이 우리 같은 팀을 상대로 득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꽤 오래된 팬이다. 요즘 맨유 경기를 빠짐없이 보는데 맨유 선수들의 기량이 우수해서 많은 득점을 올린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밀집수비를 하는 팀에게 맨유가 어떤 전술로 나오는지 잘 연구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포항의 파리아스 감독은 웬만하면 백패스를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홍│ 난 그러한 생각에 반대다. K리그가 백패스를 많이 해서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특별한 목적없이 앞으로 뻥 차주는 게 많아서 문제다. K리그를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경기가 전반전에 체력이 좋을 때는 거의 골이 터지지 않는다. 수비에서 안전하게 걷어 내는 게 좋은 수비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다급한 상황에서는 멀리 차내는 게 필요하지 않나.
홍│ 물론이다. 내가 얘기하는 것은 수비수가 패스로 연결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뻥 차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것은 안정된 수비가 아니고 위험한 수비다. 수세에 몰려 있을 때에는 수비 조직이 잘 돼 있다. 그러나 공격을 전개하는 상황에서는 위치 변화가 이뤄지면서 수비 조직이 흐트러진다. 정확하지 않은 롱 킥을 했을 경우 상대 진영까지 가는 데에는 2,3초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상대팀이 부정확한 롱 킥을 가로챈 뒤 미드필더를 거쳐 역습으로 연결하면 수비조직은 단숨에 흔들리게 된다. 그런데 K리그에서는 이쪽에서 뻥 차주면 저쪽에서 세밀하게 연결해 역습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뻥 차 주는데 그게 문제다.
학원 축구와 유소년 축구문화, 바뀌어야 한다
브라질도 인프라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뛰어난 기술을 가진 선수들이 많이 나온다.
황 브라질에 가서도 느꼈고 한국에서도 느꼈는데 풋살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브라질은 풋살이 상당히 활성화돼 있다. 실제로 나도 지난해 1년 정도 풋살을 했다. 1년 사이에 선수 시절에 없었던 몇 가지 개인기가 생겼다. 깜짝 놀랐다. 개인기술을 늘리는 데 풋살을 적극 추천한다.
과거에 지적됐던 학원축구의 병폐들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는 것 같다.
홍│ 2002년 월드컵 때 우리가 했던 셔틀 런 훈련을 어느 초등학교 코치가 학교에서 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 코치도 그런 훈련이 아이들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눈앞에 성적을 위해, 진학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시대는 이제는 지났다. 여러 문제들은 제도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현장 지도자들이 해당 연령대에 어떤 훈련 프로그램이 좋은지 정확하게 알고 이를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선 유소년 축구 지도를 위한 지침 교육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SPORTS2.0 제 33호(발행일 1월 8일) 기사
장지현 기자
첫댓글 한국축구 미래에 대해 걱정해주는 두 레전드
쩝 우리나라 정말 환경부터가 고쳐져야함 ㅜㅜ
우리의 레젼드..
아졸라,,그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