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런 날이다. 그냥 바람이 소산하게 불고 그 끝에 물기가 적당히 묻어 있어 따끈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는 그런 날. 가을인지, 봄인지 알 수 없는 꽃가게들의 사시사철 예쁜 꽃들을 지나쳐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을 묻어버리고 아주 예전에 자주 갔었던 칵테일 바로 들어갔다. 바의 오픈 시간은 오후 4시부터지만
실질적으로 바에서 은색의 셰이커에 몇 온스씩의 진과 버번들이 흔들리는 건 오후 9시부터였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그랬었던 것 같다.
“어서 오세요.”
고개를 까딱하는 사이 습기를 머금은 목 언저리까지 오는 아무렇게 길러진 머리가 뺨을 간질였다. 그 뺨
에 손가락을 대고 톡, 톡 건드려 간지러움의 여운을 사라지게 하고는 예전의 습관처럼 자리에 앉았다.
“……. 오랜만이네요? 한 2년 만인가…….”
아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구나. 그녀는 그제야 굳었던 얼굴을 살짝 풀었다. 원체 사나워보였던 인상
이라 참 차갑구나 싶던 그녀가 얼굴에 긴장을 해소하자마자 그 미모가 눈에 띄었다. 예쁘구나 싶다.
“승희씨 그간 왜 안 왔어요?”
이 곳 사장이 그래, 그녀보다 나이가 딱 일곱 많았다. 사장은 메뉴가 적힌 자그마한 수첩 같은 걸 ‘승희’라
고 불린 그녀 앞에 내려놓고는 말했다. 그렇게, 한잔씩, 두 잔씩 시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장사가 잘되는 바는 아닌 것이 일하는 사람도 사장 혼자였다. 벌써 5잔째의 블랙 러시안, 그 깊
고도 우울한 향기에 빠져버린 승희는 차가운 테이블에 아까 간질여졌었던 그 뺨을 가져다 대었다. 술을
좋아하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그냥 평범한 여자에서 어느새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여자가 되어버렸
다. 그녀는 장난삼아 글라스 안에 있는 얼음을 술 안으로 가라앉혔다가 올렸다가를 반복했다. 날이 그렇
게 더운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 작은 상처 큰 상처들로 검정색 카디건은 필수였다. 그녀가 눈을 깜빡일 때
마다 글라스 속의 얼음은 가라앉았다가, 올랐다가를 반복한다.
“합석해도 되죠?”
“…….예.”
사장이었다. 승희가 이 장소를 좋아하는 이유는 칵테일이 유달리 맛있어서도 인테리어가 그렇게 멋져서
도 아니었다. 노래. 그래, 노래 때문이다. 사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만을 골라 틀어주고 있었다. 묘하
게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만 골라서 틀어주었다는 생각에 사장에게 ‘언니’라고 부르며 아양도 떨었었지.
승희는 쓰게 웃었다.
“승희씨 예전에도 이렇게 과묵했었어요?”
“오늘은 왜 노래 안 틀어요? .…….사장님.”
“오늘은 비(雨)가 초대가수라서요. 조용히 들어보면 비도 노래를 썩 잘하거든요.”
사장은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지 않은 것이 그저 2년 만에 만나 어색해서 그런 줄 알고 무던히 넘겼다. 승
희는 눈을 감았다. 아스팔트를 때리는 비의 목소리는 그저 눈물처럼 흩어지고 흩어지고 있었다. 가끔 걸
리는 구둣발에 떨어지는 소리, 우산에 토로로로로 하고 떨어지는 소리. 가로수에 받히는 소리.
“잘하죠?”
“그러네...... 한잔 더 주세요. 오랜만에 마시니 좀 받네.”
“술에 대한 취향이 바뀌었나봐요, 예전엔 알록달록한 것 좋아했잖아.”
사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셰이커를 가져왔다. 확실히 지금의 승희는 예전의 승희와는 달랐다. 언젠가 미
국인 남자친구와 헤어져서 가게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불렀던 정말 말괄량이같이, 그치만
귀엽고도 예뻣던, 빨간색 에나멜 하이힐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고 살색 2호 스타킹이 멋들어졌던 그 아가
씨가 지금의 이 아가씨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승희 맞아요...”
자신의 의구심에 대한 대답을 하면서 얼음이 든 글라스를 한손에 쥐고선 뱅글, 시계방향으로 돌린다. 딸
그랑, 하는 얼음이 부대끼는 소리.
“그리고 전 지금도 예뻐요, 뭐... 예뻣던이 아니라 예쁜, 승희라구요.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녀, 승희는 또 몇 마디를 웅얼웅얼거렸다. 진한 보드카와 커피의 향이 그녀의 목에 맛있게 넘어갔다. 그
녀의 핸드백에서 우웅- 하는 진동소리가 몇 번인가 들렸다가 뚝, 끊겼다. 그녀는 그냥, 핸드백을 바라보
고만 있었다. 한 10g의 집중력만 있으면 핸드폰의 전원은 그냥 끊어지니까. 승희는 유유하게 반쯤 남은
칵테일을 바라보았다.
남자 몇이 들어왔다. 그 남자들도 어디 구석의 자리를 잡고는 갓 파더니, 맨해튼이니 하는 칵테일을 시
키곤 그 시간까지 혼자 있는 승희를 힐끗거린다. 그리고는 셔츠에서 무언갈 꺼내들었다. 하얗고 네모반
듯한 그것은 담배와 지포라이터. 남자는 그 것의 허리를 잡고 깊게 빨아들인다. 하얗게, 연기가 뿜어져 나
와 순식간 좁은 공간에 알싸하고도 매캐한, 한없이 미운 연기가 가득 찬다. 사장도 인상을 찡그리더니 말
했다.
“승희씨, 혹시 담배연기 싫어해?”
“아니요. 상관없어요, 피세요.”
승희는 사장이 금연중이라는 것과 벌써 그것이 3주째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금연결심을
포기했다는 것도. 사장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승희씨 눈치가 빠르네. 승희씨 예전에 왔을 때는 나 담배 피는 거 못봤을 텐데.”
분명, 지금 나사가 하나 빠진 거야. 승희는 생각했다. 평소에 같으면 사람의 생각을 읽어도 내색을 하지
않았을 텐데. 단단히 빗장을 잠그고 있었을 텐데, 지금은 나는 당신의 생각을 훤히 알고 있어, 라고 온갖
티를 내고 싶어 안달이나 죽겠다. 저 뒤쪽의 던힐을 피고 있는 남자가 자신의 다리를 보고 군침을 흘리는
것도, 이곳 사장을 상태로 음탕한 상상을 하는 것도 다 까발리고 싶어졌다.
“사장님, 저 뒤에 남자가요, 사장님이랑 자고 싶데요.”
“뭐?”
“그 옆에 남자는요, 집에 마누라가 있는데도 다른 여자랑도 살아요.”
“승희씨, 취했어?”
“아뇨, 안취했어요! 저 남자가, 그랬다니까요!”
빽, 하고 소리 지르고는 고개를 떨군다. 다시 그 목까지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카락이 뺨을 두드린다. 사장
은 승희씨 뭐 힘든 거 있어? 라고 조용히 물었다. 힘든 거. 많다. 너무나도 많아서 이 작은 몸에 담기에는
힘이 든다. 바보같이 자기 맘도 몰라주는 일곱 살 많은 멍청한 이현암도, 승희에게 들러붙은 이 빌어먹을
능력도, 이제 살날이 몇 년 안남은 가엾은 준후도, 이유 없이 보면 눈물이 나는 신부님도. 아버지도, 언니
도, 월향도. 다 힘들다. 너무나도 힘들어죽겠는데,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다. 문제는 원래 그렇게
성격도 좋지 않은 내가 승질 부리며 말할 수 있는 상대는 없다는 것도. 거기다가 그 세 명은 이미 자신의
운명에 너무나도 맞게 변해버리지 않았는가? 준후도, 신부님도, 이현암 그 바보도... 하지만 승희 자신은
아직도 사람이고 싶었다. 그럼 그 세 명은 인간이 아닌 거야? 킥, 승희는 웃었다. 하기사, 나처럼 예쁜 여
자 두고 딴 년 생각하는 놈이나 어린놈이 건방지게 카르마니 다르마니 하는 거나... 사람이라고 하기엔 우
습잖아.......응? 우습잖아.
승희는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엉엉 울었다. 머리 속은 뒤죽박죽. 사장은 한숨을 쉬었다. 2년 전처럼 울
고 들어온 건 아니지만 이건 와서 우니, 꼭 자기가 죄인이 된 기분이다. 울리지도 않았는데 울린 기분. 뭐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승희를 부축했다. 두 남자는 울고 있는 승희를 힐끗거리
면서 계산을 하고 나간 뒤였다.
“승희씨, 집이 어디야? 응? 연락처 좀 줘. 누구 데려올 사람 없어?”
승희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장은 실례, 라고 조그맣게 말하면서 핸드백을 열었다. 핸드폰이 있었다. 파워
가 꺼진체로. 혹시 배터리가 다 나갔으면 어쩌나 하고 종료버튼을 2초간 누르고 있는데 일순간 손이 뜨끔
하더니 손가락이 벌려지면서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켜지 마세요. 도망쳐 온 거에요, 나.”
승희는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하고는 핸드백 깊숙이 집어넣었다. 더 이상 웃을 수 없을까봐 무서워져
서. 더 이상 그 바보를 지켜보기만 하기가 힘들까봐서, 그래서 여기까지 도망쳐 온 거라고. 승희는 그렇
게 웅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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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원래 히로인의 뒤치닥거리는 히어로가 해야죠.
그래야져.... 재미있네요... 단지 단픽이라는게 아쉽지만...
감사합니다.(__)
아아...오죽 답답했으면...ㅉㅉ
그쵸, 우리의 승희로인님은 오죽 답답했으면~ 읽어주셔서 감사해요.(__)
하긴...제가 생각해도 승희는 4명 중 가장 정상의 가깝죠...보통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승희는 자신의 능력을 혐오하니까요. 견디기 힘들죠, 사람 좋아하고 발랄한 사람이 사람을 가까이 못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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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