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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가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하곤 현관문을 닫았다. 8시가 되었다는 알람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소녀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지금 거실에는 재건과 연비, 그리고 소녀가 원을 그리며 앉아 있었다.
재건은 목이 뻐근한지 계속해서 목을 이리 저리 움직였다.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연비는 괜히 소녀에게 미안해졌다. 자신의 이야기를 덤덤히 말하던 소녀는 어색해진 분위기에 아래로 귀엽게 묶인 머리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차가운 공기가 다시 한 번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살까지 파고드는 12월의 공기가 멍하니 있던 셋을 정신 차리게 했다. 재건은 자신이 들고 있던 종이를 적당히 접어서 다시 소녀에게 건냈다. 소녀는 자신의 과거를 남한테 말했다는 게 부끄러웠는지 약간은 쑥스러워 하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소녀는 종이를 받아선 적당히 자신의 옆에 두었다. 계속 불어 들어오는 바람 때문인지 종이는 살며시 펄럭였다.
“뭐랄까, 듣고 나니까 괜히 찝집하네….”
재건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괜히 들춰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냥 어제 석방시켰어야 했는데. 정확이 이 생각을 연비도 함께 하고 있었다. 재건은 일단 문제의 ‘또 다른 스토커’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이어나가자 생각했다.
“그럼, 이 한태형이라는 녀석이 연비를 이때까지 스토킹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야?”
“그렇게 되네요.”
한심하다. 거의 한달 동안 스토킹을 당하면서 아무런 낌새도 눈치체지 못 했다는 것은 연비도 자신도 그만큼 일상에 찌들어있다는 뜻이리라. 그는 조금은 긴장을 하고 살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재건이 다음 질문을 생각하는 사이 연비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 한태형씨랑 저는 그 공연 이외에는 다른 접점이 없었다는 뜻이군요?”
연비도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뭔가 생각에 잠겨있는지 미간에 주름이 조금 생겨있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적어도 자신이 아는 선에서는 그 이외의 접점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약간은 애매모호한 답이었지만 어조만큼은 단호했다. 아마 그녀도 이리저리 조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재건이 몸을 반쯤 일으켜 벽에 기댔다.
자 생각을 해보자. 이 골치 아픈 사랑 이야기를 들었다. 문제는 이 사랑이야기에 연비가 얼떨결에 끼어버려선 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면 이대로 무시 하고 살다가 그 한태형이라는 녀석이 또 다시 스토킹을 하는 것을 발견하면 잡아 족치거나, 한태형을 갱생시켜서 덤으로 소녀와 이어줘야 이 이야기는 끝이 난다. 물론 전자의 경우 한 번 잡아 족치는 것으로는 부족 할 수도 있고, 또한 잘못하면 폭행죄로 철창행이니 아무래도 리스크가 크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매우, 아주 매우 귀찮아 질 것이다. 그리고 실패 할 확률도 아주 높다.
그럼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재건은 연비를 살짝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뭔가를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게 적어도 한태형을 반쯤 죽여서 자신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재건이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의 창문을 닫았다. 그러자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차가운 공기는 보일러의 난방에 빠르게 달궈져 갔다.
“그래서, 지금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야?”
재건이 tv를 틀며 말했다. tv를 틀자 그 안에서 한 부부가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네?”
재건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소녀는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였다. 재건은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소녀를 향해 양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너의 고민을 해결해 주지. 정확히 100만원에.”
그런 이유로, 현재 연비와 리아는 거리에 서 있었다. 왜 재건과 연비가 같이 다니지 않느냐면, 만약 자신이 연비와 함께 다니면 한태형도 스토킹을 하는 데에 소극적으로 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연비 혼자서 거리를 돌아다니면 오히려 자신을 유인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쩍게 생각 할 확률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저녁에 유라 자신이 검거됐지 않은가. 이번엔 분명히 자신의 존재가 들켰거나 아니면 들킬 수도 있다는 경우의 수도 충분히 머릿속에 존재하겠지. 유라는 재건도 분명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그런 연비와 리아를 재건이 유라와 함께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올까요?”
유라가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의 당당함은 어딜 갔는지 지금은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았다. 진짜 미행이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모양이었다. 하긴, 실제로 처음이어야 정상이지만. 어쨌든 유라는 어제의 어설픈 미행과는 달리 이번에는 확실히 미행자의 폼이 났다. 어제의 빵모자로 머리카락을 숨기고 연비에게서 빌린 청바지와 스웨터를 적당히 차려 입었다. 그 위에는 두꺼운 패딩을 입어서 일부러 조금은 살이 찐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거기에 일부러 안하던 화장을 짙게 하곤 그 위에 안경을 꼈다. 꽤 튀는 모습이긴 했지만 역으로 좋은 선택 일 수 있다. 설마 저렇게 튀는 모습으로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흔히 말하는 당당한 악행이라는 것이다. 분명 재건은 그런 이야기를 건성건성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너무 틔는 복장 아닌가? 유라는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솔직히 재건도 잘 차려 입으면 꽤 눈에 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재건은 그저 안경만 끼고 눈만 크게 떴는데도 인상이 180도 달라 보였다. 평소의 만년 백수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만화에나 나오는 명탐정이나 엘리트 형사 같은 인상이 강해보였다. 그만큼 지적이고 날카로워 보였다.
“네 기억대로 연비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녀석이라면 말이야.”
유라는 역시 그만 둘까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돈을 써서까지 태형을 궁지에 몰아넣어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유라의 근심어린 얼굴을 차갑게 쳐다보면서 재건이 말했다.
“그런 식이니까 남자 하나 못 건지는 거야. 요즘 시대에 순애보는 무슨…. 드라마라도 찍냐? 그런 식으로 살아서 누가 네 사랑을 알아주디?”
재건은 일부러 유라에게 낮은 목소리로 독설을 퍼부었다. 이대로 흔들리면 결국은 또다시 제자리걸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재건이었다. 그런 식으로 자신과 연비도 서로 한참을 돌아왔지 않는가. 유라에게서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을 애써 부정하면서, 재건은 유라에게서 돈을 받은 이상은 확실히 처리해 줘야 한다는 식으로 자기합리화 시켰다.
어쨌든 유라는 재건의 독설을 듣곤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자신의 뺨을 스스로 후려 갈겼다. 짝, 하고 듣기만 해도 아플 것 같은 소리가 둘이 숨어있던 골목에 울려 퍼졌다. 유라는 새빨개진 뺨을 손으로 비비면서 재건에게 사과했다. 그 눈에는 꽤 독기가 들어 있었다.
“죄송해요. 다시는 약한 생각 안 할게요.”
재건이 다시 거리 쪽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알면 됐어.”
재건은 거리를 빠른 속도로 훑어보았다. 마치 글을 읽듯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눈이 빠르게, 하지만 거리의 한 사람 한 사람 빠트리지 않고 모두 체크한다. 하지만 벌써부터 한태형을 콕 집어 낼 필요는 없다. 일단은 머릿속에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대략적인 특징을 빠르게 새겨 놓는다. 천재와 같은 기억력이나 초능력 같은 대단한 능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직업병 같은 것이다. 에이전트 시절 하루에 두 세 번꼴로 지겹게 반복해 오던 작업이었으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학습해버린 것이다.
재건이 유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는 들고 있던 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착신음과 함께, 전화기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연비의 목소리였다. 연비에게 재건의 지시를 전달 할 생각이었다.
[누구세요?]
유라가 약간 뜸을 들였다. 재건은 조용히 거리에서 가장 큰 건물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다름 아닌 백화점이었다. 유라는 전화기에 속삭이듯이 백화점으로 가라는 지시를 연비에게 전달했다. 연비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말했다.
[택배는 경비실에 맡겨주세요. 네, 네. 그럼 수고하세요.]
사무적인 말투로 그렇게 말하곤 연비는 전화를 끊었다. 스토커에게 괜한 의심을 사서 경계당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택배가 온 것처럼 연기를 한 것이다. 그 의도를 대충 눈치 채고 유라는 재건을 향해 얼굴을 돌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폰의 액정에 묻은 화장품을 소매로 한번 슥 닦았다.
재건은 다시 거리를 응시했다. 연비와 리아가 천천히 백화점으로 거리를 옮겼다. 그것을 확인하고 그 주변의 사람들을 감시한다. 분명 연비와 리아를 쫒고 있다면 태형 자신도 백화점을 향하겠지. 방금까지 거리에 연비와 리아의 반경 40m이내에 있던 사람들 72명 중에서 연비와 리아의 뒤를 따라서 백화점으로 향한 사람은 35명. 그 사람들을 다시 예의 주시한다.
유라는 왜 재건이 이런 번거로운 작업을 하는지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태형의 사진 몇 장을 보고 얼굴을 익혀 그 한명을 찾아내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재건의 생각은 달랐다. 사람들 중에는 무슨 옷을 입혀도 개성이 숨겨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장신구 하나만 착용해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자신이나 유라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자신은 안경 하나만 바꿔 껴도 주변에서 분위기가 달라 보인다고 한다. 반면 유라는 스웨터에 패딩을 두툼하게 껴입고 화장을 짙게 해도 그녀의 여자아이다운 청순한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지질 않는다. 이렇듯이 사람의 분위기는 차림새에 따라서 충분히 바뀌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단순히 사진만으로 그 사람에 대해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나 면식이 전혀 없다면 더욱 그렇다. 오히려 편견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그럼 우리도 움직여 볼까?”
연비와 리아가 백화점 입구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재건이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곤 유라에게 손짓을 했다. 그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거리를 나섰다. 그런 재건을 보며 유라는 정말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재건과 유라, 그리고 연비와 리아가 태형을 향한 몰이를 서서히 시작하는 동안에, 소희와 케이가 빈둥빈둥 놀고 있었느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전혀 아니었다. 그 대신에 현재 소희와 케이는 한태형이 살고 있는 한 가정집의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우웅…. 미행 하고 싶었는데. 거기서 거기잖아….”
“너무 낙심 하지 마시죠. 이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퐉! 하고 튀는 건 내가 전문인 걸?”
“기본적으로 미행은 그런 사람에겐 무리입니다.”
“하지만….”
“쉬잇. 이제 들어 갈 겁니다.”
케이는 깔끔한 검은 양복에 한 손에는 가벼운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반면 소희는 학교에서 입던 교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 온 듯 했다. 그녀는 오늘 배운 영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집 안에 누군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초인종을 한 번 눌러 보았다.
딩동, 딩동. 고전적인 초인종 소리와 함께 스피커에서 한 남성의 소리가 났다. 정중한 말투였지만 목소리는 꽤나 하이텐션이었다.
[누구십니까?]
“한태형 학생의 부담임입니다. 학생이 상담할 것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만….”
물론 거짓말이다. 담임이라 하지 않은 것은 당연히 외국인, 그것도 젊은 사람이 고3학생의 담임을 맡을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형식상 아무래도 좋은 부담임이라 둘러대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부담임의 얼굴 따위는 알 리도 없을뿐더러, 알고 있었다고 해도 어떤 사정에 의해서 바뀌었다고 대충 말을 돌리면 된다. 한국에서 부담임은 그저 반 아이들과 조금 더 친한 존재 일 뿐, 실제로 그렇게 중요한 직책은 아니니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
[그러십니까? 지금 태형이는 없습니다만…. 다음에 오시겠습니까?]
케이는 순간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아, 아니요. 조금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들어오셔서 차나 한잔 하고 가시죠. 탈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인터폰에서 집의 방문을 허락하는 말이 들렸다. 한순간에 문전박대 당하고 끝날 뻔 했던 케이와 소희의 잠입수사는 어떻게 극적으로 더 이어진 모양이었다. 케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곤 소희를 바라보았다. 소희는 품 안에 가지고 있던 부채를 꺼내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부채의 안에서 쥐가 한 마리 튀어 나왔다.
“접속 - connection on.”
소희가 작게 중얼거리자 쥐가 찍찍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케이가 소희의 손을 잡았다.
“괜찮습니까?”
소희는 약간 현기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시선은 케이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응…. 오랜만에 하는 거라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쥐는 조용히 현관 앞으로 걸어가선 용케도 우유 투입구를 열고 재빠르게 들어갔다. 소희는 몸이 안 좋은지 식은땀을 흘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군요. 일단 제 손을 잡고 따라오십시오.”
약한 신음소리를 내며 소희가 애써 웃었다.
“으응…. 부탁할게요, 케이씨.”
소희의 몸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진 이유는 다름 아닌 쥐와의 신경 동화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소희와 쥐가 일심동체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소희는 지금 쥐의 감각의 일부분을 자신의 신경에 옮겨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신에 그녀는 지금 부채에서 나온 쥐에게 자신의 감각을 나누어 주었다. 감각을 공유 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교환 한 것이다. 즉, 두 대의 컴퓨터에 연결된 모니터와 키보드를 서로 바꿔 끼운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자녀분이 많이 아프신 모양이네요.”
“네, 원래 병약한 아이라….”
꽤 깔끔하게 정돈된 샤기컷의 머리카락에 조금은 금색을 띄는 갈색으로 머리카락을 염색한 한 청년이 있다. 날카로운 눈매와 호리호리한 체격, 적당히 차려입은 검은색 운동복 때문에 꽤나 불량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케이가 현관에 들어서자 청년은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서 논스톱으로 그것을 썼다. 그것을 쓴 모습을 다시 보니, 뭐랄까…. 공부하는 불량학생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극과 극의 패션이 한 몸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눈앞의 청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희를 바라보았다. 물론, 소희의 시선은 소년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한 없이 바닥에 내려 깔고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 눈앞의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지금 쥐가 올라가고 있는 계단 뿐 이었다. 어쨌든 그런 소희를 걱정하면서도 케이는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소희를 소파에 먼저 앉혔다.
“그건 그렇고 별난 일이네요. 외국인 선생님이 부담임이라니….”
“그렇게 별난 일인가요?”
“예. 그래도 정말 놀란 건 선생님의 능력입니다. 타국의 언어인데도 굉장히 능숙하시네요. 발음도 정확하시고….”
단순히 입에 발린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청년은 정말로 존경한다는 얼굴로 케이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케이는 칭찬에 조금은 들뜬 기분이 되었다. 그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칭찬하셔도 뭐가 나오는 건 아닙니다.”
“부인은 한국인이신가요?”
청년이 케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희를 보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케이는 당황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청년의 말에 대답했다.
“예…. 그렇죠.”
흐음, 청년이 바닥에 앉았다. 그 모습으로 보아선 예의범절은 잘 따지지 않는 자유로운 성격인 듯 했다. 그는 케이에게 편하게 앉으라는 듯 무엇인가를 권유하듯이 손을 내밀었다. 케이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소희의 옆에 앉았다. 케이가 소파에 앉자 청년은 바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아, 제 소개가 늦은 것 같네요. 저는 한태하, 20살 대학생입니다.”
“케이 렘프스입니다. 올해 9월부터 태하의 학교에서 교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현소희, 성은 어머니쪽 성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청년이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태하는 의외로 낮을 많이 가리는 아이인데 짧은 기간 동안 상담을 부탁 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셨다니, 사교가 뛰어나신 모양이시네요.”
“예….”
케이는 아까 전부터 계속되는 질문들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겉으로는 자신을 칭찬하는 것 같지만 진짜 의도는 따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순한 기우인가? 케이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이어지는 청년의 몇 가지 잡담에 이리저리 맞장구를 치거나 반응을 보이면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런 불안을 했던 자신이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뒤이어 청년이 하는 말들은 평범한 것들이었다. 동생의 성적이나 교우관계들 뿐이었다. 조금 특이한 소제라면 국제정세 같은 정도…. 케이는 청년이 약간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동생의 고민거리는 뭘까요?”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청년이 문제의 ‘고민거리’에 대해 물었다. 케이는 재건이 말해준 대로 그대로 말했다. 혹시나 가족이 물어보면 이렇게 말하라고 했다고 말하라고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뭔가 연예인와 관련된 이야기 같더군요.”
청년이 빙긋 웃으면서 케이에게 말했다.
“그래요? 그거 큰일이군요. 제 어릴 적 꿈은 송혜교랑 결혼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 마음 잘 압니다.”
정말 심각한 일이죠, 청년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표정이나 행동에서 당황한 것 같은 모습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마치 알고 있었다는 것 같이 아주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케이는 혹시 동생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물으려 입을 열다가, 바로 마음을 고쳐먹고 입을 꾹 닫았다. 경거망동 하지 말고 최소한의 정보만 잡아오라는 재건의 지시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케이는 자중하자고 생각하며 조금은 얼굴을 풀기 위해 미소를 지었다.
그 때였을까, 자신의 손에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소희가 자신의 손등을 꼬집은 것이다. 더 이상 이 집에서 있을 필요가 없다는 그녀의 사인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자그마하게 달싹였다. 그러더니 소희는 갑자기 말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청년도 케이도 놀라서 소희를 쳐다보았다.
“우아아아아아아아! 접속 해제 - connection off~!!!!!!!!!!!"
그 맹렬한 기세에 능글거리던 청년마저 깜짝 놀라 할 말을 일었다. 케이는 말 할 것도 없었다. 그는 반쯤 굳은 얼굴로 소희에게 말했다.
“뭐, 뭐하는 거니 소희야, 버르장머리 없게….”
“웅? 기합을 넣어라, 청년!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소희는 일부러 순진한 척을 하면서 다시 소파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말 그대로 순진한 꼬마아이 그 자체였다. 분명 일단 중학생인데도 하는 짓은 초등학교 1학년 같았다. 그녀는 양 발을 앞뒤로 흔들면서 케이에게 찰싹 붙었다.
“흔히 말하는 중2병인가요? 그래도 확실히 이런 말이 있긴 하죠. 큰소리를 내면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는 거였나?”
소희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당황한 표정을 짓던 청년이 호탕하게 웃었다. 유일하게 웃을 수 없는 케이였다. 그는 억지로, 정말 억지로 웃음을 짜내면서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전지전능한 주에게 빌었다.
“하, 하하하하….”
“저기, 언니….”
“응?”
연비가 평소와는 다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이라도 했는지 목소리 크기도 불안했다.
“재건씨는 잘 하고 있을까?”
연비가 평상시에 이야기 하는 크기의 목소리로 리아에게 물었다. 리아는 깜짝 놀라서 연비를 흘깃 쳐다보았다. 연비답지 않은 실수였다. 리아는 똑바로 하라는 신호로 찌릿 하고 연비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야, 목소리 낮춰!”
연비는 순간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챘는지 눈을 크게 뜨더니 의기소침한 얼굴로 바닥만 바라보았다.
“미안….”
백화점에 들어선 연비는 우선 1층의 화장품들을 쭉 살피다가 바로 4층으로 올라갔다. 물론 자신들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태형이 따라오기 수월하게 엘리베이터가 아닌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했다. 4층에 도착한 연비와 리아는 일단 화장실을 들렀다가 다시 나와서 여성의류가 많은 7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왜 중간에 4층을 들렀느냐면, 그렇게 하라는 재건의 문자가 왔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백화점에 있는 내내 자신들을 숨어서 지켜 볼 수 없기 때문이겠지. 4층 화장실에 들렸을 때 재건은 다시 한 번 용의자 목록을 갈무리 했을 것이다.
연비는 사람 하나 잡는데 너무 신중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어설픈 것보단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면서 비싼 명품 가죽 자켓을 만지작거렸다. 예쁘다. 최근엔 약간 보이시한 패션도 괜찮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는 중인지라 자켓이 꽤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격표를 보니 무려 798만원. 농담이 아니라 정말 비싸다. 무슨 가죽 자켓 하나가 이렇게 비싸. 연비는 무심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뭐랄까, 서민의 감각이랄까. 이런 것 하나 샀다간 앞으로 자신들의 식단은 쌀 다섯 톨과 고춧가루 한 손가락정도일 것이다.
그녀는 가격에 경악하는 한편 혹시나 이러고 있으면 나중에 소포로 이 가죽 코트가 자신의 집이나 사무실에 배달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조금은 달콤한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바로 한심하다는 듯이 미간에 손을 얹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비싸다.
“피곤 한 걸까….”
확실히 정신적으로 피곤하다. 약 한 달 동안 자신에게 스토커가 붙어 있었다는 것부터가 쇼크였던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아마추어의 미행에 그 낌새도 전혀 알아 체지 못했다는 점에서 꽤나 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연비의 두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다 보니 평소에는 하지 않는 무른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연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슨 10만원어치, 20만원어치 옷도 아니고 798만원어치 옷을 선물로 보내는 미치광이가 세상에 어디 있다는 말인가. 매장을 잘못 찾아 온 것 같다. 이곳은 서민의 감각으론 도저히 따라 올 수 없는 금액들만 있다. 그녀는 훨씬 싼 다른 매장으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 리아를 찾았다.
“리아 언니, 이제 슬슬….”
연비는 바로 옆에 있어야 할 터인 리아가 보이지 않자 순간 당황했다. 물론 혼자가 되었다는 두려움에서 당황한 것은 아니다. 리아의 충동구매가 시작되지 않았는지가 걱정되기 작한 것이다. 그녀는 얼굴에 짜증이 들어날 정도로 잔뜩 찡그리며 성큼성큼 매장 안쪽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1분정도 지났을까, 시착실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즐거운 듯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아무래도 리아의 목소리와 비슷하다. 거기냐, 눈에 잔뜩 불을 켜며 연비가 시착실의 커튼을 확 열어 재꼈다. 그곳에는 이 매장에서 가장 비싼 밍크코트를 몸에 두르고 흥얼거리며 있었던 것이다. 연비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리아를 노려보았다. 리아는 그런 연비의 표정에 뚱해져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렇게 연비가 리아에게 한참을 설교하려고 입을 열 때였다.
“예, 가격 798만원입니다. 6개월 할부로 사시는 거구요…. 네? 저분한테요?”
점원의 약간은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에 연비는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798만원이면 분명 자신이 보고 있던 자켓일 터였다. 그 옷에서 떨어져서 리아를 찾아내 실랑이를 벌이는 지금까지 고작해야 2~3분이다. 보통 저 정도 금액의 옷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사는것이 정상 아닌가? 어디 대단한 부자인가, 아니면….
연비와 눈이 마주친 점원은 가죽 자켓를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무엇인가’와 함께 고급스러운 쇼핑백에 집어넣더니, 머뭇거리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저, 방금 손님이 이 물건을 손님한테….”
연비가 고개를 돌려 마치 그 쇼핑백을 받기 싫다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마치 무엇인가 꺼림찍한 것을 보는 것 처럼 몸을 떨었다. 리아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이 연비를 대신해서 쇼핑백을 획 낚아챘다. 그러더니 몇 초정도 매서운 눈으로 그 쇼핑백의 안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리아의 표정은 더욱 굳어만 갔다.
“이 새끼가 얕보고 있어….”
리아의 입에서 거친 말이 나왔다. 정말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농락이라도 당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에서는 거친 분노와 수치심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입고 있던 밍크코트를 시착실에 거칠게 벗어 던져놓고는 매장을 뛰쳐나갔다. 그 가운데에 덩그러니 남겨진 연비는 문제의 쇼핑백 안을 쳐다보았다. 그 곳에는 방금 포장한 가죽 자켓과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연비는 그것을 조심스레 집어 올렸다.
그 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언제나 멀리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H라고 합니다.
어제의 일도 있고 해서, 마음이 심란 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당신을 위해 한 가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제 지갑 걱정은 하지 마시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세요. 저를 위해 아름다움을 가꾸어 주시는 당신에 대한 저의 마음입니다. 만약 그래도 받기 꺼리신다면 연예인이 tv에 출연하고 받는 출연료라고 생각하세요.
아, 그러고 보니 그 수준 떨어지는 남자완 함께 안 계시는군요. 그렇군요! 사실은 그냥 귀찮게 쫓아다니는 건가요? 아니면 설마 그분이 절 뒤에서 찾고 계시는 건 아니겠죠? 어느 쪽이든 이참에 제가 그분을 깔끔하게 치워 드릴 테니 아주 잊고 사시는 건 어떤가요?
하하, 꽤 얼굴이 굳어있으시네요. 혹시 깜짝 놀랐나요? 제가 어떻게 당신들의 생각을 알 수 있었냐고요? 정말 알고 싶다면 가르쳐 드리죠.
저는 지금도 당신과 당신의 일행을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당신의 반응만 봐도 제 추측이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나요?
당신이 그 자켓을 입고 아름다움을 뽐내시는 모습을 보고 싶군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항상 당신을 응원하겠습니다.」
연비가 그 글을 다 읽고는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털썩 주저앉아서 바로 앞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매장의 바로 앞에….
밤색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한번 씨익 웃더니 그대로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연비는 그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곤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꺼내 재건에게 전화했다.
[연비냐, 무슨 일이야?]
연비는 한참을 뜸을 들였다. 바로 옆의 점원은 있는 호들갑 없는 호들갑을 다 떨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한 2~3분 정도 지났을까?
그 때였다. 연비의 입이 열렸다.
평소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생각보단 빨리 미끼를 물었습니다. 밤색 코트에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의 남자입니다. 이정도 말하면 대충 누구인지 아시겠죠?”
작가말
안녕하세요, 노크라입니다. 오늘은 본편을 올릴까 생각을 하다가, 조금 더 수정을 하고 올리자는 생각에 계속해서 외전을 올렸습니다. 그나저나 외전이 생각보다 길어지네요. 잘못하면 상, 하 총 4회 기획의 외전이 상 중 하 총 9회의 꽤 긴 소설이 될지도 모르겟습니다.
뭐랄까, 여러가지 떠오른게 많아서 그런건지도 모르겟습니다. 실제 크리스마스 당일날까지는 한 a4 30p정도면 이 이야기는 완결될거라고 대충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이번 크리스마스 외전은 별 다르게 하고싶은 이야기가 없는 즉흥적인 글이었으니까요. 그런 글이 한달 지나고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건 이 이야기를 통해 하고싶은 말이 생겨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어쨌든 얼마나 분량이 많아질지는 저도 예상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분량이 많아지는 만큼 더 노력해야겠죠.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노크라였습니다!
ps. 로맨스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ㅜ.ㅜ(가면 갈수록 이야기는 스릴러를 향하고 있습니다만.)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 연비의 모든 반응은 연기입니다. 그리고 재건이 왜 튀는 복장을 하고 당당하게 다녔는지, 연비가 왜 실수를 했는지는 다음편에 간단히 설명 드릴께요.
읽어주셔서 감사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