삑-삑-하는 기계의 소리는 오히려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온팔에 바늘을 꽂고 있는 눈을 감고 누워있는 저게, 바보멍청이해삼멍게말미잘 이현암이다. 승희는 온기가 전혀 돌지 않는 왼손을 잡았다. 바늘을 꽂느라 들어난 그의 왼팔엔 승희의 왼팔손목의 시계자국처럼 선명한 월향의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 허전한 느낌에, 승희는 피식 웃었다.
“준후야.”
“예?”
“너 좀 나가있어라. 나 할 말 좀 하게.”
“..... 예.”
“그리고, 한국 갈 채비 좀 하고. 이 바보도 데려가야 하니까, 해밀튼씨한테. 염치없지만 부탁 좀 드리고.”
“예.”
“신부님 시신은?”
“.....화장했어요. 유골은, 제가 보관하고 있구요.”
“준후야...”
“예.”
“준후야.”
“예?”
“준후야.”
“....응, 누나.”
“우리, 한국가면, 그때 하루 종일 울자.”
“응.”
준후는 울음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문을 닫았다. 갈 곳 없어도 돌아가야지. 그래서, 할 말 못할 말 다 토해버리고 신부님이 하신 말처럼, 그렇게.... 오래오래 살아서. 그래서... 후에 내 할 일 다하고 돌아가면, 그땐 신부님한테 온갖 투정, 짜증 다 내야지. 내가 짜증낼 수 있게, 신부님이 주신 숙제는 다 하고서. 준후의 발걸음이 점차 멀어지자, 그제서야 승희는 한숨을 쉬었다.
“좋으니?”
“하긴, 쉬니까 좀 좋겠어. 벌써 월향 만났니? 그럼 너 그거 바람이다, 나쁜 놈아. 알어?”
“월향 그렇게 빨리 보고 싶었니? 아니면 너무 힘들어서 그렇게 훌훌 떠나가 버렸니?”
“준후 고게, 내가 제 마음 안 읽을 줄 알고, 온갖 걱정을 다 하더라. 하지만 넌 알자나, 내가 엄청나게 교활한 거. 깨어나자마자 읽었어, 아, 이현암 너 이 세상 떠나갔구나. 너 같은 바보 걱정해주는 건 준후하고 신부님뿐이었어, 알어? 아... 월향도 있구나. 그래도 셋이나 건졌으니 너 헛산건 아니네.”
“차라리, 오빠라고 부를걸 그랬지? 그냥 오빠동생으로 남았으면 좋았을걸.”
“처음 만났을 때 완전 너 깡패였던 거 알어? 눈빛으로 사람 죽일 사람이 너 였어.”
“꼬박 존대하라기에, 그게 재수 없어서 현암군 현암군 불렀는데, 그게 내 가슴에 남을 줄 알았으면 그렇게 안 부를걸.”
심전도의 삑, 삑 하는 소리는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그 모습. 하얗게 태워졌던 그 얼굴이, 이렇게 멀쩡한 것에 감사해야했다.
“내가 이렇게 니 욕하고 너한테 반말 찍찍까대도 너 아무말없이 들으니 좋다. 바보야....”
“있지, 현암군. 현암군 내세는 월향이랑 약속했고, 끔찍한 시스콤이니까 니 동생도 데려갈 거 알아. 그럼 너랑 나랑은 내세에는 만나지 말자...”
“아에 만나지 못하게, 우리 지구 정반대에서 태어날까? 아니면 서로 대화도 못하게 너는 귀머거리, 나는 벙어리하고. 아니, 나 혼자 벙어리 귀머거리 할게, 넌 멀쩡히 태어나도 돼. 아니면 내가 현암군 못 알아보게 눈이 멀어도 좋아. 그러니까, 우리 내세에서는 만나지 말자. 우리 둘이 만나서 원수밖에 더 지겠니.”
승희의 눈에선 폭포수같은 눈물이 방울져 현암의 왼팔에 떨어지고 있었다.
“너랑 나랑 같이 있은지 십년 되지? 지긋지긋하잖아. 난 원래 프리소울이라 한 남자한테 묶이기 싫어..... 사실..... 사실, 니가 내 맘 알고도 모른척하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치만, 난 교활하거든. 못됐잖아. 나. 현암군 나쁜 놈으로 만들고 싶어서, 여자 울리는 나쁜 놈으로 만들려고 했었. ........미안해.”
“그러니까, 내세엔 우리 만나지 말자. 너도 나같이 못된 년 만나기 싫을 거 아냐. 이젠 나도 지쳤어. 만약, 내세에도 너랑 나랑 같은 곳에 있으면 난 그날로 죽어 버릴거야. 너도 힘든 거 이젠 싫잖아. 그래서 그렇게 가버린 거잖아. 그렇게 행복한 표정 지으면서.”
승희는 한동안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하얗게 남겨진 월향의 자국. 다른 남자들보다 살짝 마른 그을린 색의 팔.
“사실 너도 그렇게 킹카는 아니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근데, 잘 생각해보면 너 좋아하는 여자 꽤 됐어. 원래 여자는 위험에서 구해주는 백마 탄 왕자를 좋아하거든. 넌 딱 그 타이밍에 등장하잖아. 여자 여럿 후리고 다니는 현암군. 더 열받는건 자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지. 이렇게.”
“이제사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는, 이제 진짜 끝인걸 알기 때문이야. 여자는 원래 그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모든 걸 다 보여주기 싫어해. 이제 속 시원해. 한국 가서, 현암군 마지막 숨은 내가 거둬줄게.., 바보야... 멍충아. 이 미련퉁이야.”
“껍데기에 대고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진짜, 우리 내세엔 서로 만나지 말자. 우리, 그동안 너무 힘들었으니...까. 그러니까..”
바보야. 나 미칠 거 같으니까 좀 일어나. 아닌 척 하기 너무 힘들단 말이야. 날 원망해도 좋고, 까맣게 잊어도 좋으니까, 한번만 숨만 쉬어줘. 나 진짜, 돌아 버릴 거 같단 말이야... 응? 이렇게 차가운 손 말고, 그때 잡았던 따듯한 손을 나한테 주면 안 되니?
다음날, 승희는 준후에게 그때 그 장소로 가보고 싶다고 했다. 준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이젠 진짜 단 둘이란 생각해 승희를 데리고 갔다.
“여기지, 현암군이 월향을 집어던진 데가.”
“응. 근데 누나, 여기까지 와서 뭐하게.”
“그냥, 이제 돌아갈거니까,.”
“응.”
“이제 월향은 아주 간 거지?”
“응. 원한이야 예전에 사라진 거니까.”
“그럼, 너 월향검은 못 찾겠네?”
“애쓰면 못 찾을 거도 없는데... 왜, 누나?”
“좀 찾아봐줘. 현암군 왼팔이, 너무 허전해.... 거기만 하얗게 돼서, 얼마나 웃기던지.”
준후는 한숨을 쉬고는 가만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승희의 고른 숨소리, 그 당시의 격전지였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밀림. 준후는 그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최대한 감각을 살린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현실의 소리는 잊고, 또 다른 세계의 소리를 듣는다. 승희는 조용히 기다렸다. 해가 약 15도 기울였을 무렵, 준후는 눈을 떴다.
“절벽에 떨어져 있는 것 같아요. 못 내려갈 거 같은데.”
“안 내려 가도 돼.”
승희는 눈을 감았다. 준후가 말한 그 지점을 돋보기로 뒤지듯이, 그 익숙한 감촉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미친 듯이 피로해지는 정신과 달리, 점차 수색하는 힘은 그 속도를 빨리 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쥐었을 때, 이거다!
“찾았다.”
손을 향해 날아오는 그 익숙한 비수. 난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구나. 미안하다, 가슴아. 또 너덜너덜해져서. 승희는 반갑다는 듯, 그 작은 검을 손에 쥐었다.
“준후야, 이제 가자.”
“응.”
“한국으로.”
“응.”
첫댓글 재미있는데... 다음편도 기대
감사합니다(__)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__)
시..신부님.....ㅠㅠ
제가 죄인입니다, (같이 저도) 신부님.ㅠㅠ
현암군 살려주세요 ㅠ_ㅠ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__)
아아...슬퍼요...현암군 부디 깨어나길...ㅠ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