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이씨(京山李氏) 시조 고려때 이덕부
경산이씨(京山李氏)
경산(京山)은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에 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본피현(本彼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신안(新安)으로 개명하여 성산군(星山郡)의 속현(屬縣)이 되었으며, 후에 벽진군(碧珍郡)이라 개칭하였다. 940년(태조 23) 경산부라 하였다가 981년(경종 6) 광평군(廣平郡)으로 격하되었고, 995년(성종 14)에 대주(岱州)로 개칭하여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 1012년(현종 3)에 단련사 제도를 폐지하였고, 1018년(현종 9)에 경산으로 고쳐 지부사(知府事)를 두었다가, 1295년(충렬왕 21)에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승격하였다. 1308년(충렬왕 34)에 다시 성주목(星州牧) 으로 승격하였으며, 1311년(충선왕 3)에 격하되어 경산부가 되었다. 조선시대는 태종(太宗) 때 성주목으로 다시 승격, 그 후 1895년(고종 32) 성주군으로 개칭하고 군수를 두었다.
경산 이씨(京山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정종(定宗) 때 악거 부정(樂居副正)을 지낸 이덕부(李德富)이다. 그가 계림(鷄林)에서 경산(京山)으로 이거(移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경산(京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덕부(德富)의 5세손 호(祜)가 고려에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祜)의 손자 합이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성유(成裕)의 아들 감과 미도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는데 장남 감은 부윤(府尹)을 지냈다. 흥문(興門)은 조선조에서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으며, 엽(曄)은 중랑장(中郞將)을, 형천(亨天)은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이조 좌랑(吏曹佐郞) 병흠(秉欽)을 비롯하여 학자로 이름난 현창(鉉昌)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산 이씨(京山李氏)는 남한에 총 1,875가구, 7,90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경산이씨(京山李氏) 시조 고려때 이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