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 Empire 1419
노을은 붉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벽 너머 붉은 초승달이 나부낀 지도 30년이 흘렀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에게 남은 것은-
테살로니카와 모레아 그리고 영원한 도시뿐이었다.

1403년의 제국 영토(Wikipedia)
1396년 투르크의 검은 또다시 제국을 향했다.
밀라노와 런던 그리고 파리로 황제는 달려갔다.
흰 옷의 방랑자는 동정받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1402년 황제는 헬레나와의 사이에서 넷째 콘스탄티누스를 얻었다.

마누엘 II 팔라이올로구스(1350-1425)
1403년 황제는 메메드 1세와 조약을 맺고 테살로니카를 되찾았다.
그러나 누구도 투르크인들의 자비가 언제까지일지는 몰랐다.

요한네스 8세, 그는 황태자이자 트라키아의 행정관이며 엑스큐비토르의 지휘자였다.
또한 쇠락한 가문의 이름뿐인 계승자였다. 제국은 다시금 일어서야 했다.
불신자 투르크인들과 야만적인 프랑크인들 그리고 불충한 슬라브족들-
그들은 다시 한 번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이며
가장 참된 그리스도의 종인
모든 로마인의 지도자 앞에서 무릎 꿇으리라.
1204년 4차 십자군의 침입 이후, 제국의 영역은 프랑크인들과 라틴인 그리고 그리스 망명 정권들로 쪼개졌다.

(1300년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Wikipedia)
비잔틴 황제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구스(현 황제 마누엘 2세의 아버지)의 아들인
테오도루스 1세 팔라이올로구스(=현재 황제의 동생)는
미스트라(지금의 그리스 미스트라스)를 모레아의 수도로 정했다.
그는 이 지방에 대한 투르크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적이 투르크인이라는 사실마저도 잊지는 않았다.
테오도루스는 새로운 혈통과 노동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알바니아인을 이곳에 정착시켜 제국의 통치를 견고하게 했다.
모레아는 비잔틴 제국 쇠퇴기에 제국 세력의 요새가 되었다.
고대 스파르타 근처에 있던 미스트라에는 군주들의 주거지와 무덤이 있었으며, 성 안에는 주요한 문화 중심지가 형성되었다.
투르크의 위협을 피해 교육받은 그리스인들과 학자, 예술가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브리태니커 백과 인용)
요한네스 8세는 방어 시설이 갖추어진 모레아를 기반으로 삼아 이곳에 눌러앉은 라틴인들을 몰아내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아카이아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부)에는 나폴리 왕으로부터 임명받은 Centurione II Zaccaria(자카리아 공작)이 아카이아 공국의 지배자로서 자리잡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1417년 요한네스 8세에 의해 공격이 가해졌다.
요한네스 8세는 아카이아 공국 대부분을 점령했고 베네치아인들의 중재를 통해 아카이아 공국은 1430년까지 유지되었다.)
그는 8천의 트라키아 테마 보병과 2백 기의 프로노이애 기병, 아이딘으로부터 지원받은 1천 기의 투르크 경기병을 이끌고
아카이아로 진격하였다.

(http://www.eyefetch.com/image.aspx?ID=820947.
좌측의 붉은 건물이 모레아 공작의 궁전이며, 우측의 산 위의 건조물은 요새이다)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지형의 굴곡이 심하며 숲이 우거져 기병의 기동이 제한되고 매복의 효과가 컸다.
따라서 라틴인들이 장기로 삼는 기마 돌격은 큰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웠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프랑크인들과 라틴인들은 그리스어에 능숙하지 못했고, 정교회의 예배가 아닌 로마식 예배법을 따랐으므로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메시나 시 앞에서 벌어진 서전에서 제국군은 아카이아 공작 자카리아를 격파했다.
자카리아는 5천의 민병대와 3백 기의 이탈리아 경기병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민병대는 저항할 의지가 없었고, 자카리아의 입장에서도 어차피 이들은 신용할 수 없었다.
자카리아는 중앙 돌격으로 승부를 보기로 결심하였다.
20기의 중무장 기병이 선두에 서고, 경기병들을 쐐기형 진형으로 배치하였다.
요한네스 8세는 투창병(펠타스트)들과 투석병들을 동원하여 기병들을 견제하였지만, 그다지 큰 효과는 없었다.
아카이아 기병들의 돌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상급대장 칸탄젤로스는 이러한 상황을 위해 제노바인들로부터 얻어 둔 것이 있었다.
강철로 만들어져 50m 이내에서라면 밀라노제 판갑마저도 꿰뚫는 제노바제 철석궁(Avalest)은
앞장선 기사들을 고급 바늘꽂이로 탈바꿈시켰다.
철석궁의 공격은 1열에 타격을 입힌 것에 불과했지만,
공격의 여파로 중무장 기병 십여 기와 경무장 기병 수십 기가 중상을 입었다.
경기병들은 비잔틴 보병대의 방진으로 말을 몰았지만 진을 깨뜨리는 데 실패했다.
보병대의 앞에는 나무로 된 바리케이드가 촘촘히 놓여 있었고, 그것은 기병들에게 반가운 광경은 아니었다.
세 차례의 돌격이 이어졌지만 50여 기의 기병들이 무력화었을 뿐이었다.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한 자카리아는 코린트 성으로 후퇴했다.

(현재의 코린트 성 유적-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Acrocorinth_castle.jpg)


라틴 기병들이 후퇴하자 그리스 민병대는 무기를 내렸고, 그들의 정당한 통치자를 환영하였다.
제국군은 코린트와 메세니아(Messenia), 엘라이데(Elide), 파트라소(Patrasso)를 포위하였다.
빌라르두앵의 윌리엄 2세(William II of Villehardouin,~1278)에 의해 세워진 요새는 견고했고, 쉽게 함락될 성싶지 않았다.
그러나 칸탄젤로스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제노바인들에게서 얻은 또 다른 장난감을 준비해두었던 터였다.


첫댓글 다시일어서는 로마인가염 ㄲㄲ
동로마 제국은 위기에서 두 차례 부활하였습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 바실리우스 2세 ) 저는 4차 십자군이 없었다면 18세기까지 존속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두 위기순간에서 마치 피닉스처럼 다시금 불길을 토해며 살아났죠. 1204년의 분탕질만 없었더라면 재앙적인 투르크의 지배로 동유럽이 후진국들 나락으로 떨어지는것도 달라졌을것입니다.
오스만 빠돌이로썬 안좋은 연대기이내요ㅋㅋㅋㅋㅋㅋ
어억 본격'오빠'분 등장 (오스만 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토만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자처했답니다. ㅋㅋ
오스만 제국도 자신들을 제3의 로마제국이라 자처했었다죠..
비잔틴빠인 저로서는 아주 좋은연대기네요 ㅋㅋ
앞으로 기대해주세요~ ㅎㅎ
으아니! 발칸쪽 연대기라니 전 게임할때마다 발칸쪽과는 적대-200 ㄷㄷㄷ
ㅎㅎ 어떤 국가를 합병하면 그 국가와 동일한 종교를 가진 국가들과의 관계가 큰 폭으로 감소합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같은 종교 국가들과는 친밀도가 올라가고, 악명(badboy)이 높으면 다른 모든 국가와 친밀도가 감소합니다.
발칸은 정교국이 대부분이니까 악명이나 정교국 합병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명작의 기운이 ㅋ 뭔 모드죠 이건?
ExtraWatk입니다. Watk 맵에 Ageccp를 합친 것입니다. 파란 클럽 자료실에 들어가면 EU2 메뉴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