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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 강좌 제3강-3
- 교육원 불교전문강당 2009. 09. 01 -
제四 신해품(信解品)
목차 한번 잠깐 살펴볼까요? 성문대중의 환희. 그 다음에
궁자의 비유. 유명한 궁자비유가 있습니다. 궁자비유의 의미 있고 그 다음에 게송으로 거듭 설하다 신해품은 간단하네요.
一 사대성문의 환희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제자들을 등급 아닌 등급을 매겨놨어요.
爾時慧命須菩提(이시혜명수보리)와 摩訶迦旃延(마하가전연)과
摩訶迦葉(마하가섭)과 摩訶目犍連(마하목건련)이
從佛所聞未曾有法(종불소문미증유법)과
世尊(세존)이 授舍利弗(수사리불)의
阿耨多羅三藐三菩提記(아뇩다라삼먁삼보리기)하고
發希有心(발희유심)하야 歡喜踊躍(환희용약)하며
卽從座起(즉종좌기)하야 整衣服(정의복)하야
偏袒右肩(편단우견)하고 右膝著地(우슬착지)하며
一心合掌(일심합장)하고 曲躬恭敬(곡궁공경)하며
瞻仰尊顔(첨앙존안)하고 而白佛言(이백불언)하사대
我等居僧之首(아등거승지수)하야 年幷朽邁(연병후매)하며
自謂已得涅槃(자위이득열반)이라하야 無所堪任(무소감임)하고
不復進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불부진구아뇩다라삼먁삼보리)러이다
世尊往昔(세존왕석)에 說法旣久(설법기구)일새
我時在座(아시재좌)하대 身體疲懈(신체피해)하야
但念空無相無作(단념공무상무작)하고 於菩薩法(어보살법)인
遊戲神通(유희신통)과 淨佛國土(정불국토)와
成就衆生(성취중생)에 心不喜樂(심불희락)이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世尊令我等(세존영아등)으로
出於三界(출어삼계)하사 得涅槃證(득열반증)이라하며
又今我等(우금아등)이 年已朽邁(연이후매)할새
於佛敎化菩薩(어불교화보살)이신
阿耨多羅三藐三菩提(아뇩다라먁막삼보리)에는
不生一念好樂之心(불생일념호락지심)이니다
我等今於佛前(아등금어불전)에
聞授聲聞阿耨多羅三藐三菩提記(문수성문아뇩다라삼먁삼보리기)
하사옵고 心甚歡喜(심심환희)하야 得未曾有(득미증유)니다
不謂於今(불위어금)에 忽然得聞希有之法(홀연득문희유지법)하
옵고 深自慶幸(심자경행)하야 獲大善利(획대선리)니다
제일등급을 사리불. 상근기라고 해서 사리불을 앞에서 혼자 다뤘고, 그 다음에 중근기라고 해서 爾時에 혜명수보리ㆍ마하가전연ㆍ마하가섭ㆍ마하목건련. 이렇게 네 사람을 “중근기”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선불교에서는 마하가섭을 대단한 인물로 칩니다만, 여기서는 사리불보다 밑에서... 사실 여러 경전을 다 종합해서 보면, 부처님제자 중에서는 사리불이 제일인자입니다. 이 법화경에서도 물론 그렇게 했지만 다른 경전에서도 보면 역시 사리불이... 한 사람만을 뽑아서 뭐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사실 사리불이 제자들 중에는 제일인자입니다.
법화경은 분명히 수보리ㆍ가전연ㆍ가섭ㆍ마하목건련. 이렇게 네 사람을 중근기로 사리불보다 딱 이렇게 한 급 낮춰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從佛所聞未曾有法(종불소문미증유법). 부처님으로부터 일찍이 있지 않던 그런 법과 그리고 또 世尊(세존)이 授舍利弗(수사리불), 사리불에게 阿耨多羅三藐三菩提記(아뇩다라삼먁삼보리기)하고,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수기 주는 것을 듣고 發希有心(발희유심)하야, 希有한 마음을 내가 지고서 歡喜踊躍(환희용약)하며 卽從座起(즉종좌기)해서 整衣服(정의복)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偏袒右肩(편단우견).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지요. 우리 袈裟도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지 않습니까?
偏袒右肩하고 右膝著地(우슬착지). 一心合掌(일심합장). 이것은 偏袒右肩이 첫 의미하는 바가 진실을 드러내는 인도의 예법입니다.
누구에게 말할 때 오른쪽 어깨를 밖으로 드러내고 말하는 것은 ‘나는 목숨을 걸고 진실만을 말하노라.’ 하는 뜻이랍니다. 혀를 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혀를 내는 것도 저~기 어디 더운 지방의 무슨 종족들도 혀를 내고 말할 때가 있지요. 그것도 진실만을 말한다는 뜻이랍니다.
右膝著地하고 一心合掌하고 曲躬恭敬(곡궁공경)하며 瞻仰尊顔(첨앙
존안)하고 而白佛言(이백불언)하사대 我等居僧之首(아등거승지수)
하야, 우리들은 스님들 중에서 우두머리에 居해서 年幷朽邁(연병후매)라.
나이도 아울러서 늙어서, 朽邁는 늙음입니다.
나이도 늙었으며 自謂已得涅槃(자위이득열반)이라. 그리고 스스로 말하기를 “이미 열반을 얻었습니다.” 라고,
이미 얻어서 無所堪任(무소감임)이라.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다.’ 이렇게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不復進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불부진구아뇩다라삼먁삼보리). 더 이상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進求하지를 않아요.
世尊이 往昔(세존왕석)에 說法旣久(설법기구)일새. 설법 하신 지가 예날 벌써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니까요. 오래 되었을 세.
我時在座(아시재좌)하야, 우리들이 그 때마다 자리에 있어서
身體疲懈(신체피해)하야, 몸은 피곤하고 게을러서
但念空無相無作(단념공무상무작). 다만 생각하는 것이(중요합니다.) 空ㆍ無相ㆍ無作. 이것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동안 소위 소승불교라고 할까? 일반불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이치입니다.
모든 것은 공하다. 반야심경의 전체가 그 얘기 아닙니까? 또
凡所有相 皆是虛妄 그러잖아요. 無相. 범소유상 개시허망이 무상입니다. 형상은 무상. 형상이 없다고 보는 겁니다. 다 공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것이 없다.’ ‘지을 것이 없다.’ 이 말입니다. 여기다 하나 더 보태면 無願이 있어요. 그러니까 空ㆍ無相ㆍ無作ㆍ無願. 솔직하게 아주 소극적이지요. 불교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 게으름도 나고, 나이도 들었고, 솔직하게 한 40년 동안 공부도 했고 그래서 늘 생각하기를 空도리ㆍ無相한 도리ㆍ無作의 도리ㆍ이런 것만 생각을 하고, 於菩薩法(어보살법)인 遊戲神通(유희신통)ㆍ淨佛國土(정불국토)ㆍ成就衆生(성취중생). 이 세 구절 줄그어야 돼요.
遊戲神通ㆍ淨佛國土ㆍ成就衆生. 이것이 말하자면 우리 불교가 세상에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보살법이라고 했지요.
菩薩法인 遊戲神通. 遊戲神通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 역시 불법을 홍포하는 일입니다. 불법을 홍포하는 일. 무슨 신통을 부린다는 뜻이 아니고, 불법을 홍포하고 그래서 淨佛國土. 세상을 정화하는 것. 세상에 회향하는 것. 그래서 불교가 이 땅에 있어서 세상이 뭔가 좀 달라지는 것. 도덕이 달라지고 질서가 달라지고 정직성이 달라지고 성실성이 달라지는 것. 이것이 淨佛國土입니다.
그리고 또 궁극적으로는 모든 중생들을 전부 성취시키는 것.
솔직하게 그런 보살행에 있어서는 心不喜樂(심불희락)이니다.
별로 제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불교의 승려들의 대다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자기만을 위한 자기공부는 30년 40년 50년 60년 잘합니다. 그런데 정말 성취중생이라든지 淨佛國土. 세상에 어떻게 회향할 것인가? 내가 세상에 어떤 보탬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데 대해서는 별 관심 없어요. 그러니까 기독교에 계속 밀리는 겁니다. 종교편향, 종교편향하고 떠들어 봤자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 동안 成就衆生ㆍ淨佛國土ㆍ遊戲神通에 대해서 아주 열심히 했어요. 불과 200년 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6ㆍ25때 전쟁고아들 그 사람들이 다 거뒀어요.
불교에서 거둬들인 고아들, 불과 몇 명 안 된다고요. 100분의 1도 될까 말까입니다. 나머지는 기독교 단체에서 전부 거둬들인 겁니다.
의료사업ㆍ교육사업 이런 것, 초기에 전부 그 사람들이 다 한 겁니다.
불교논리 대로 이야기하면 그 사람들이 복을 많이 지었어요.
우리 손 발 묶고 空ㆍ無相ㆍ無作. 자기 공부, 소승적인 자기 공부만 하고 있는 동안에 그 사람들은 아주 야트막한 교리, 정말 교리라고 할 것도 없는 그런 천박한 교리들 가지고 대사회적인 활동을 그렇게 크게 한 겁니다. 솔직하게 복을 많이 지었어요. 교리는 형편없지만 복을 많이 지은 겁니다.
전쟁 고아들. 먹고 살기도 힘든데 그 사람들 고아원 차려가지고, 새치기도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이 전쟁고아를 다 거둬들인 것 아닙니까? 우리불교는 솔직하게 몇 명이나 거둬들였어요? 그것 얼마나 복이 됐겠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날 큰 소리 치는 겁니다. 저 위에서부터 저 말단 직원에 이르기 까지 전부 기독교인입니다. 복을 많이 지었으니까요. 이것이 불교논리입니다. 저는 순전히 불교논리입니다. 복을 많이 지었으니까 그 사람들의 천국이 된 겁니다. 교리야 뭐 별것 없지요. 교리야 그것이 무슨 교리입니까? 솔직하게...
있지도 않은 하나님이야기나 하고...
지금도 기독교방송 틀어보면 끊임없이 하나님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저것이 통하다니, 저것이 통하다니 통탄할 일입니다.
이런 대명천지 밝은 이 시대에 어떻게 저런 이이야기가 통할까? 불가사의입니다. 불가사의. 그런데 왜 거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우리보다 10배, 100배 1000배로 모이거든요. 조계사 법당에 불과 몇 명모여요? 여의도 순 복음 교회하고 숫자 한 번 대보세요. 몇 분의 1이나 되는가? 게임이 안 되잖아요. 게임이... 왜 그러냐? 그 사람들은 복을 많이 지어요. 곳곳에 복을 지어요. 어린이들, 학생들, 우리학생포교 합니까? 학생포교하면 돈 안준다고, 귀찮다고 내보내거든요. 안 한다고...
돈 가져오는 사람들이나 상대하지 돈 안 되는 학생포교 어린이포교 안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전부 돈 다 대가지고, 어른들이 내놓은 들어온 돈 가지고 전부 어린이포교 학생포교, 그냥 무한정 투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자라가지고 오늘 날 정부 요직에 싹 다 깔려있는 것이지요. 언론계 무슨 공무원계 싹 다 깔려가지고 그 사람들이 전부 좌지우지하잖아요. 우리는 어린이포교 하나도 안 했잖아요. 거기에 돈 얼마나 댔어요? 그 사람들은요. 들어온 돈 전부 어린이, 학생, 청년들에게 투자다 합니다. 종교편향, 저 라도 편향하게 되어있어요. 한 것이 있어야지요. 게임이 안 됩니다. 복을 못 지었으니까요. 복을 안 지었는데 어떻게 해요?
복 지은대로 가는 겁니다. 복 지은대로... 세상은, 물은 낮은 데로 흐르게 되어있어요. 이것이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종교편향 한다고 자꾸 아등바등 떠들어봐야 ‘되개 지랄하네.’ 속으로 그런다고요. ‘네가 뭐 한 것이 있어서...’ ‘네가 뭐가 한 것이 있어서 그렇게 떠들어 대느냐?’고 속으로는 그래요. 겉으로는 할 수 없이 그냥 대해주지 속으로는 그래요. 떠들어봐야 대접 더 못 받습니다.
더 못 받아... 그나마 가만히 있는 것이 차라리 나아요. 사실 솔직하니... 저도 작년 이때 기념행사 한다고, 세미나 한다고 야단해서 작년 이때 그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 광장에 와서 참석 했어요.
현장을 목격해놔야 되겠다고 아이고 억지로, 억지로 올라와서 참석을 하긴 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떠들어 될 일이 아닌 겁니다. 지금이라도 복을 지어야 돼요. 지금이라도 세상에 복을 지어야 돼요. 불자의 이름으로 복을 많이 지어야 돼요. 이것이 불교논리 아닙니까? 무슨 딴 논리 아닙니다. 이것은 불교논리입니다. 복 지은 데로 가는 겁니다. 사실은 교리야 게임이 됩니까? 그것 이야기가 안 되는 것이지요.
기독교 T V네 개. 천주교 T V하나. 불교 T V하나 그렇거든요. 틀어보면 전부 계속 사람들 T V 나오는 것 아닙니까? 불교 T V는 광고 T V이고, 그 사람들은 설교 T V 라. 그럼 들으면 들을 것이 있다고요. 뭔 이야기하는가? 저는 참 많이 듣거든요.
많이 들어보면 정말 말도 아닌 이야기인데 통해요. 왜냐? 복을 지으니까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전부 배려하고 복을 지으니까 그것이 통하는 것이지요. 교리 좋아서 그렇게 오는 것 아닙니다. 교리 밥 먹여 주는 것 아닙니다. 밥이 밥 먹여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도 소승적인 그런 어떤 불교를 비판하는 이야기입니다.
空이니ㆍ無相이니ㆍ無作이니 하는 것, 공 도리만이야기 해요. 眞空妙有가 어떻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어떻고, 그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어쨌다는 겁니까?
그래서 이 사람들도 솔직하게 보살이 행하는 법인 遊戲神通과 淨佛國土. 세상을 정화하는 겁니다. 세상에 보탬이 되는 것을 淨佛國土라고 그래요. 成就衆生이나 心不喜樂(심불희락)이니다. 마음에 즐거워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까닭이 무엇인가?
世尊令我等(세존영아등)으로, 世尊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出於三界(출어삼계)하사, 삼계에서 벗어나서
得涅槃證(득열반증)이라하며, 열반의 깨달음을 얻었다하며
又今我等(우금아등)이, 또 지금 我等이 年已朽邁(연이후매)여, 나이가 이미 들었어요.
於佛敎化菩薩(어불교화보살)이신, 그래서 부처님이 보살들을 교화하는데 있어서 阿耨多羅三藐三菩提(아뇩다라먁막삼보리)에는
不生一念好樂之心(불생일념호락지심). 최상의 깨달음. 부처의 삶으로 살아가는 거기에 대해서는 一念好樂之心도 내지를 않았다. 한 생각도 좋아하고 즐겨하는 마음을 내지 않았습니다. 보살행은 말할 것도 없고, 부처의 경지는 더 말할 것도 없이 一念도, 한 순간도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않았다.
솔직하게 고백 하는 겁니다. 사대성문인 가전연ㆍ마하가섭ㆍ목건련ㆍ수보리 같은 이런 사람들이...
我等今於佛前(아등금어불전)에, 我等이 지금 부처님 앞에서
聞授聲聞阿耨多羅三藐三菩提記(문수성문아뇩다라삼먁삼보리기).
성문으로서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수기 주는 것을 듣고
心甚歡喜(심심환희)하야, 마음이 매우 환희해서
得未曾有(득미증유)니다. 未曾有를 얻었습니다.
不謂於今(불위어금)에, 지금에 있어서 忽然히 得聞希有之法(홀연득문희유지법)하사옵고, 希有한 法을 듣고는 深自慶幸(심자경행)하야,
깊이 스스로 아주 경사스럽고 다행하게 여겨서 獲大善利(획대선리)니다.
大善利를 얻은 것입니다.
얻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은 옛날에도 그런 법문을 했었는데 그것을 귀담아 듣지를 않았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살행. 부처의 삶. 처음 듣나요? 처음 듣는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마음 깊이 귀담아 들어지지가 않는 겁니다. 心不喜樂입니다.
관심 없어요. 뭐 어떻게 되든지, 종교편향이 왜 그리 되는 건지 전혀 그저...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만 계산하고 회재비 타령이나 하고, 대중공양 타령이나 하고 그저 그렇게 세월을 보내는 겁니다. 그 많고 많은 인력. 그 건강하고 혈기왕성하고 무슨 일이라도 나가서 아주 잘 할 수 있는 그 젊고 혈기왕성하고 건강한 힘과 체력을 그렇게 사장 시키는 겁니다. 참 너무 아깝지요. 차라리 어디 가서 땅이라도 파든지,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간혹 대만의 증엄 스님 얘기를 하는데요.
그 스님의 선지식은 수녀입니다. 수녀하고 교리문답을 하다가 “그 좋은 교리가지고 세상에 무슨 보탬이 됐습니까?”이러더라는 겁니다.
“세상에 무슨 보탬이 됐습니까?” 불교교리 들어보면 천주교에서는 듣지도 못했던 그런 교리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不殺生” 하면, 저 곤충 미물 파리모기 한 마리도 우리는 죽이지 않는 그런 大慈大悲를 부처님은 가르쳤다. 그리고 교리가 얼마나 심오하고 고준합니까?
그 수녀들이 마지막 일어나면서 “그 좋은 가르침가지고 세상에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러더래요.
그 사람들은 의료사업하고 복지사업하고 그 다음에 교육사업 하고 온갖 사회활동을 많이 벌이는 겁니다. 그야말로 천창으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그런 아픔을 느낀 겁니다. 그래서 원력을 세워가지고 오늘 날 최고, 이 시대에 제일 救苦救難. 그냥 이 세계에서 제일 큰 구호활동 단체를 만든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 동국대교 일산병원 같은 종합병원을 6개나 세워놓고, 저~기 인도네시아 거기는 회교국가 거든요. 거기다가 불교 T V를 세워줬어요. 대만에 그 단체에서 하는 불교 T V가 두 개나 있어요. 광고 하나도 안 받아요. 그리고 어느 정도 자비냐?
기독교인을 위해서 교회를 세워준 사람입니다.
어느 나라에 기독교인들이 교회가 없어서 보통 저런 공원에서, 그냥 밖에 모여서 예배를 보는 겁니다. 하도 가슴이 아파서 교회를 세워준 겁니다. 기독교인을 위해서 교회를 세워줄 수 있는 이것이 불교자비입니다. 그래서 그 스님이 그렇게까지 성인이 되어 있는 겁니다.
수녀들에게 그 말 한 마디 듣고는... “그 좋은 교리가지고 사회에 한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그 말 듣고는 창으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60개국에 500만 회원이 있어요. 자제공덕회. 다 알지요? 여러분 다 가 봤지요? 저는 못가 봐도 다 가 봤지요?
저는 인터넷을 통해서 거의 매일 한 번 증엄 스님 법문 듣고 있습니다. 그 스님 딱 10분간 법문하는데, 사람들 모아놓고 법문 안 해요, 혼자하지...
그 스님은 법회가 없어요. 대중 법회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지금은 방송을 통해서 하루에 딱 10분씩 하는데 꼭 혼자 합니다 혼자... 혼자하고 救苦救難하는 활동 보조만 사이사이에 내보내고, 당신은 10분 중에서 한 1~2분이 얼굴 나오고 나머지는 전부 그 회에서 활동하는 것만 보여줍니다. 大愛 T V입니다. 대자대비를 대애라고 하지요.
大愛電視라고 해서 쳐서 들어가면 인터넷으로 다 볼 수 있어요.
사실은 그것이 불교입니다. 불교가 할 일은 그런 일입니다.
그런 것을 사대성문이 여기서 고백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궁자의 비유 이것이 유명한 비유입니다. 부자가 서로 헤어짐 이것도 제가 이야기로 하겠습니다.
二 궁자(窮子)의 비유
1 부자가 서로 헤어짐
無量珍寶(무량진보)를 不求自得(불구자득)이니 世尊(세존)하
我等今者(아등금자)에 樂說譬喩(요설비유)하야
以明斯義(이명사의)호리다 譬若有人(비약유인)이
年旣幼稚(연기유치)에 捨父逃逝(사부도서)하야
久住他國(구주타국)하대 或十二十(혹십이십)으로
至五十歲(지오십세)러니 年旣長大(연기장대)하야는
加復窮困(가부궁곤)하야 馳騁四方(치빙사방)하야
以求衣食(이구의식)할새 漸漸遊行(점점유행)하야
遇向本國(우향본국)이러이다 其父先來(기부선래)에
求子不得(구자부득)하고 中止一城(중지일성)이러니
其家大富(기가대부)라 財寶無量(재보무량)하며
金銀瑠璃珊瑚琥珀玻瓈珠等(금은류리산호호박파려주등)이
其諸倉庫(기제창고)에 悉皆盈溢(실개영일)하며
多有僮僕(다유동복)과 臣佐吏民(신좌리민)하며
象馬車乘(상마거승)과 牛羊無數(우양무수)하며
出入息利(출입식리)가 乃徧他國(내변타국)하고
商估賈客(상고고객)도 亦甚衆多(역심중다)러니
時貧窮子(시빈궁子)가 遊諸聚落(유제취락)하며
經歷國邑(경력국읍)하야
遂到其父所止之城(수도기부소지지성)이러이다
父每念子(부매념자)하대 與子離別(여자이별)이
五十餘年(오십여년)이로대 而未曾向人(이미증향인)하야
說如此事(설여차사)하고 但自思惟(단자사유)에
心懷悔恨(심회회한)하며 自念老朽(자념노후)하고
多有財物(다유재물)하야 金銀珍寶(금은진보)가
倉庫盈溢(창고영일)이나 無有子息(무유자식)하니
一旦終沒(일단종몰)이면 財物散失(재물산실)이라
無所委付(무소위부)라하야 是以慇懃(시이은근)히
每憶其子(매억기자)하며 復作是念(부작시념)하대
我若得子(아약득자)하야 委付財物(위부재물)하면
坦然快樂(탄연쾌락)하야 無復憂慮(무부우려)라하더이다
옛날에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하나 뒀는데, 아들이 아주 어릴 때 한 두 세 살 됐을 때 집을 나갔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 찾으러 돌아다니며 찾다, 찾다 못 찾고 어느 도시에 아버지는 정착을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거부장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거부장자가 되면 뭐합니까? 그 재산을 물려줄 아들이 없는데... 그래도 그 아들을 오늘이나 만날까 내일이나 만날까하고 곳곳에 소문을 내가지고 찾아도 못 찾은 겁니다.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렸어요. 그런데 이 아들은 노숙자가 돼가지고 이 거리 저 거리로 헤매면서 그저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또 혹 똥이나 거름이나 이런 날품팔이, 최하급 일을 하면서 일당을 받아서 겨우겨우 연명해가는 그런 삶을 살았더라.
그것이 뭡니까? 우리다 이 겁니다 우리...
공연히 우리의 본성. 정말 지극히 고귀한 그런 우리의 본성을 등져버리고 현상으로만 돌아다니는 그래서 거지생활을 하고 있다 이 뜻입니다.
그러다가 부자가 서로 만남 그랬어요. 아들이 아버지를 보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그렇게 아들을 뒀는데 아들은 도망가고, 그 다음에 아버지는 부자가 되서 ‘오늘이나 내일이나 아들을 찾을까’ 라고 하고 있었다. 거기까지입니다.
2 부자가 서로 만남
(1) 아들이 아버지를 보다
世尊(세존)하 爾時窮子(이시궁자)가 傭賃展轉(용임전전)하며
遇到父舍(우도부사)하야 住立門側(주립문측)이라가
遙見其父(요견기부)호니 踞師子牀(거사자상)에
寶几承足(보궤승족)하고 諸婆羅門(제바라문)과
刹利居士(찰리거사)가 皆恭敬圍繞(개공경위요)하며
以眞珠瓔珞(이진주영락)의 價値千萬(가치천만)으로
莊嚴其身(장엄기신)하며 吏民僮僕(이민동복)이
手執白拂(수집백불)하고 侍立左右(시립좌우)하며
覆以寶帳(부이보장)하고 垂諸華幡(수제화번)하며
香水灑地(향수쇄지)하고 散衆名華(산중명화)하며
羅列寶物(나열보물)하야 出內取與(출내취여)하며
有如是等種種嚴飾(유여시등종종엄식)하야
威德特尊(위덕특존)이라
窮子見父有大力勢(궁자견부유대력세)하고
卽懷恐怖(즉회공포)하야 悔來至此(회래지차)로다
竊作是念(절작시념)하대 此或是王(차혹시왕)이며
或是王等(혹시왕등)이니
非我傭力得物之處(비아용력득물지처)라
不如往至貧里(불여왕지빈리)하야 肆力有地(사력유지)하고
衣食易得(의식이득)이라 若久住此(약구주차)라가
或見逼迫(혹견핍박)하야 强使我作(강사아작)이로다
作是念已(작시념이)하고 疾走而去(질주이거)러이다
世尊(세존)하 爾時窮子(이시궁자)가, 그 때에 궁자가
傭賃展轉(용임전전)이라. 품팔이 하려고 展轉하고 있어요. 그래서
遇到父舍(우도부사)야, 우연히 아버지의 집에 이르게 됐다.
住立門側(주립문측)이야, 저~기 대문 저~ 끄트머리에서, - 워낙 으리으리한 부잣집이 있으니까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고개만 삐죽이 내가지고 안으로 빠끔히 쳐다보는 겁니다. 遙見其父(요견기부)라. 멀리서 그 아버지를 보니 踞師子牀(거사자상)에, 師子牀같은 그런 데에 턱~ 의지하고 寶几로 承足(보궤승족)이여. 보배 책상으로써 떡~ 발을 받들고, - 그리고 거기에는 돈이 제일입니다.
인도에는 4성 계급 중에 바라문이 최고잖아요. 諸婆羅門(제바라문)과 刹利居士(찰리거사)가, 바라문과ㆍ찰제리ㆍ거사가
皆恭敬圍繞(개공경위요)여, 돈 많으면 그냥 바라문이고 뭐고 다 거기 와서 굽실거린다 하는, 그러니까 이것이 말하자면 법화경이 상업이 아주 왕성하게 일어나던 그런 도시. 그런 시대에 편집이 됐다, 결집이 됐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요. 이것 부처님당시 때는 어림도 없습니다.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부잣집 출신이 뭔데요? 바라문이 이렇게 와서 하지를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라문과 刹利居士. 刹利는 왕족이나 군인들 아닙니까? 이런 이들이 와가지고, 그 부자한테 와가지고 恭敬圍繞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以眞珠瓔珞(이진주영락)과 價値千萬(가치천만)이 나가는 그런 것으로서 莊嚴其身(장엄기신)하고, 그 몸을 장엄하고
吏民僮僕(이민동복)이 手執白拂(수집백불)하고, 거기 종들이라든지 사무보는 사람들이라든지 이런 이들이 흰 拂子를 척~ 들고는, 혹시 먼지가 낄 새라 혹시 벌레가 나비나 개미가 올새라 계속 옆에서 털어주고, 털어주고 부채질을 해주고 侍立左右(시립좌우)여. 좌우에 侍立하고있어요. 覆以寶帳(부이보장)으로써, 보배 장막으로써
垂諸華幡(수제화번)이여. 곳곳에다 화려한 꽃으로 놓여진 幡을 드리우고 香水로써 灑地(향수쇄지)여. 향수가 얼마나 많은지 땅에다 그냥 뿌리고 있어요.
散衆名華(산중명화)여. 그리고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들을 곳곳에다 뿌려놓고 있고 羅列寶物(나열보물)이여, 곳곳에 고려청자 이조백자 온갖 보물들을 다 羅列해 놨어요. 出內取與(출내취여). 이것은 돈을 빌려갔던 것. 무슨 땅을 부치고 세금 들어온 것들이 전부 주고받고 하는 이런 것을 계속 계산하고 있는 겁니다.
有如是等種種嚴飾(유여시등종종엄식)해서 威德이 特尊(위덕특존)이라. 위엄과 덕이 아주 특별히 높아 보여요.
窮子가 見父有大力勢(궁자견부유대력세). 窮子 = 못난 자식이 見 = 보았다. 父有大力勢 = 아버지가 큰 세력이 있는 것을 -아버지인줄 몰라요 아직은. 그런데 실지로 아버지니까요. 大力勢이 있는 것을 보고
卽懷恐怖(즉회공포)하야,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든 겁니다.
‘야 이거 잘못하다 큰일 나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悔來至此(회래지차). 여기 온 것을 후회해요. 그래서
竊作是念(절작시념)하대, 가만히 생각하기를 此或是王(차혹시왕)이며, 저 분은 왕이거나 아니면 或是王等(혹시왕등)이니, 왕하고 똑 같은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非我傭力得物之處(비아용력득물지처)라. 내가 여기와서 품팔이 할 곳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아이고 저 가난한 동네, 이 사람은 품팔이도 가난한 동네에 가서 품팔이 하는 겁니다. 그래 지질이 아주 못난 품팔이꾼입니다.
그야말로 불가촉천민 정도나 아마 된 모양입니다.
不如往至貧里(불여왕지빈리)하야 肆力有地(사력유지)하고,
‘거기에 가난한 동네에 가서 품팔이 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떠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衣食易得(의식이득)이라. 의식을 쉽게 얻는 것이 낫겠다.
若久住此(약구주차). 만약에 오래 동안 여기에 머물다가는
或見逼迫(혹견핍박)하야 强使我作(강사아작)이로다. 아마 저 사람들한테 붙잡혀가지고서 강제로, 강제노동에 아마 사용될지도 모른다.
作是念已(작시념이)하고는 疾走而去(질주이거)라.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냅다 도망을 가는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보다.
(2) 아버지가 아들을 보다
時富長者(시부장자)가 於師子座(어사자좌)에서
見子便識(견자변식)하고 心大歡喜(심대환희)하야
卽作是念(즉작시념)하대 我財物庫藏(아재물고장)을
今有所付(금유소부)로다 我常思念此子(아상사념차자)하대
無由見之(무유견지)러니 而忽自來(이홀자래)하니
甚適我願(심적아원)이로다 我雖年朽(아수년후)나
猶故貪惜(유고탐석)이라하니라
時富長者(시부장자)가, 그 때 장자가 於師子座(어사자좌)에서, 돈 받고 내주고 이런 것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저~기 대문 밖에서 고개를 내밀고 엿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이 아들입니다.
見子便識(견자변식). 아버지는 50년이 되었어도 그 아들을 알아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心大歡喜(심대환희)하야, 마음이 크게 환희해서
卽作是念(즉작시념)하대 我財物庫藏(아재물고장).
내가 이렇게 평생 동안 쌓아놓은 재물과 창고들을 今有所付(금유소부)로다. 지금 줄 데가 생겼다. 아 그것을 누굴 주고 눈을 감나? 계속 그것 걱정만 했는데 이제 그것을 줄 사람이 생겼구나. 내 아들이 저기서 나타났으니 그 놈에게 주면 되겠다. 今有所付야. 지금 줄 때가 됐다.
我常思念此子(아상사념차자)하대, 내가 항상 이 아들을 생각했으되
無由見之(무유견지)러니, 볼 이유가 없더니, 볼 까닭이 없었어요. 찾아도 도대체 못 찾았다 이것이지요.
而忽自來(이홀자래)라. 그런데 홀연히 저절로 들어왔다, 저절로 들어왔다. 그래서 甚適我願(심적아원)이로다. 마침내 내 원에 딱 들어맞는다. 我雖年朽(아수년후)나, 내가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猶故貪惜(유고탐석)이라. 그동안 오히려 짐짓 아끼고 있었다.
나이는 들었어도 언제나 아들에게 물려줄까, 물려줄까하고 그 재산을 함부로 쓰지 않고 아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 아들에게 몽땅 다 물려줬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그동안 불교라고 해서 많은 가르침을 폈지만, 정작 다 물려주지는 않았다. 법화경에 와서 내가 다 물려주게 되었다. 그 뜻입니다. 그래서 전번에 써 줬지만, 아함경을 설할 때가 어느 때고, 이 비유, 궁자의 비유하고 부처님일대교설하고 딱 맞춰가지고 배대를 해 놨어요. 이제 넘어가면서 제가 말씀드리지요.
(3) 아들이 기절하다
卽遣傍人(즉견방인)하야 急追將還(급추장환)하고
爾時使者(이시사자)가 疾走往捉(질주왕착)한대
窮子驚愕(궁자경악)하야 稱怨大喚(칭원대환)하대
我不相犯(아불상범)이어늘 何爲見捉(하위견착)이어뇨
使者執之逾急(사자집지유급)하야 强牽將還(강견장환)이어늘
于時窮子(우시궁자)가 自念無罪(자념무죄)하대
而被囚執(이피수집)하니 此必定死(차필정사)라하고
轉更惶怖(전갱황포)하야 悶絶躄地(민절벽지)러라
父遙見之(부요견지)하고 而語使言(이어사언)하대
不須此人(불수차인)이니 勿强將來(물강장래)요
以冷水灑面(이냉수쇄면)하야 令得醒寤(영득성오)하고
莫復與語(막부여어)하라 所以者何(소이자하)오
父知其子志意下劣(부지기자지의하열)하고
自知豪貴(자지호귀)는 爲子所難(위자소난)이라하야
審知是子(심지시자)하고 而以方便(이이방편)으로
不語他人云是我子(불어타인운시아자)라하고
使者語之(사자어지)하대 我今放汝(아금방여)하노니
隨意所趣(수의소취)하라 窮子歡喜(궁자환희)하야
得未曾有(득미증유)하며 從地而起(종지이기)하야
往至貧里(왕지빈리)하야 以求衣食(이구의식)이러라
卽遣傍人(즉견방인)하야, 옆의 사람을 곧 보내가지고
急追將還(급추장환)하고, 그 사람을 데려 오너라.
爾時에 使者(이시사자)가 疾走往捉(질주왕착)이야, 빨리 달려 가가지고 그 놈을 딱 잡았어요. 窮子驚愕(궁자경악)하야, 아들이 驚愕이예요. 그리고 稱怨大喚(칭원대환)이여, 왜 나를 붙드느냐고,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하고 크게 부르짖는 겁니다.
我不相犯(아불상범)이어늘, 나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何爲見捉(하위견착)고? 무엇 때문에 나를 잡느냐?
使者가 執之逾急(사자집지유급)이야, 주인이 너를 잡아 오라고 했는데, - 놓치면 또 심부름꾼으로서 의무를 다 하지 못하는 것이니까 더 강하게 잡는 겁니다. 그래갖고 억지로
强牽將還(강견장환)이야, 억지로 끌고 오는 겁니다.
于時에 窮子(우시궁자)가 自念無罪(자념무죄)하야,
스스로 죄가 없는 것을 생각하고는 而被囚執(이피수집)하니, 내가 만약에 잡혀서 가두어 질것 같으면 此必定死(차필정사)라. 나는 죽었다 틀림없이 죽었다.
그리고는 더욱 더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겁니다. 아 이 놈들은 와서 끌고 가지, 나는 아무 죄가 없지 야 큰일났다 싶거든요. 그러니 생각할수록 겁이 나는 겁니다. 轉更惶怖(전갱황포)해서 悶絶躄地(민절벽지)야.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기절하고 말았다. 이것이 窮子驚愕華嚴時.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할 때. 말하자면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최초화엄 3ㆍ7일. 깨닫고 나서 부처님이 깨달음의 경지를 아무런 방편 없이 그대로 드러내 보인 것이 화엄경이다. 그러잖아요. 그럼 여기에 못난 아들이 말하자면 아버지의 심부름꾼이 데리러 왔을 때 놀래가지고 그만 기절해 버리는 것.
우리가 화엄경 같은 그런 높은 경전을 처음 대하면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린가?’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그와 똑 같은 것이다. 여기다 배대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할 수 없이,
父遙見之(부요견지)하고, 아버지가 멀리서 그 자식을 보고는
而語使言(이어사언)하대, 심부꾼에게 말하기를不須此人(불수차인)이니, 이 사람은 필요 없다. 잘못 알고 데려오라고 했는데 “그 사람은 필요 없다.”勿强將來(물강장래). 억지로 데려오려고 하지 말라. 그리고 以冷水灑面(이냉수쇄면). 냉수를 얼굴에 뿌려가지고 令得醒寤(영득성오)하라. 깨어나게 해라. 아예 기절해 쓰러졌으니까요.
이
莫復與語(막부여어)하라. 더 이상 그 한테 얘기하지 말라.
所以者何(소이자하)오? 父知其子志意下劣(부지기자지의하열)이라.
아버지는 안다 말입니다. 그 아들이 뜻과 생각이 下劣해. 너무 궁하게 살고, 거지 노릇만 평생을 했으니까 생각이 너무 쪼그라들었어요. 그래서 自知豪貴(자지호귀)는, 스스로 부호와 귀한 것은 爲子所難(위자소난)이라. 아들이 아주 어려워하는 바라. 저 부잣집에 한 번도 근처도 어르대지 않은 그 세상에 가난뱅이, 정말 못난 사람으로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審知是子(심지시자)하고, 이 아들의 사정을 알고는
而以方便(이이방편)으로써 不語他人云是我子(불어타인운시아자)라.
저 사람이 내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아들이라고 하면 문제가 생기니까요. 그 집 재산을 노리는 사람은 아들이 나타났다 하면 어떻게 해서 아들을 해쳐 버릴런지... 아직 그 아버지는 자식이 없다는 것을 세상이 다 알지요. 재산은 많지, 집사들이 여럿인데 자기에게 돌아올지 누구에게 돌아갈지 그것만 지금 눈이 벌겋게 해가지고 있는데, 아들이 문득 생겼다 하면 그것 큰일 나지요. 그래서 아들이라는 말 아니했어요.
使者語之(사자어지)하대, 심부름꾼에게 말하기를
我今放汝(아금방여). 내가 너를 놓아준다.(심부름꾼에게 시킨 것이지요.) 隨意所趣(수의소취)하라. 네 가고 싶은 데로 가라.
그러니까 窮子歡喜(궁자환희)하야, 궁자가 그 때야 깨어나 가지고서, 歡喜해가지고 得未曾有(득미증유)라. 아~ 기분 좋다고 해가지고서
從地而起(종지이기)라. 자리에서 일어나가지고서
往至貧里(왕지빈리)하야, 가난한 동네에 가서
以求衣食(이구의식)이러라. 의식을 구하는 겁니다. 그 전 처럼요.
세상에 참, 그 아버지, 천하에 제일가는 아버지를 만나고도 아버지를 보는 눈이 없어서 그렇게 됐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정이지요. 우리의 처음 불교에 대해서 정말 부처님의 법은 정말 훌륭한 법이 있는데, 어디 가서 저기, 대웅전에도 안 와요.
저~ 산신각에 가서 그저 겨우, 대웅전 겁이 나거든요. 산신각에 가서 겨우 절 석 자리하고는 그냥 가는 겁니다. 칠성각에나 가서 절 석 자리하고 그냥 가버려요. 지금 그와 같은 처지입니다.
첫댓글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
어서오세요
환영합니다.
원공법계 제 중생
자타일시 성불도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