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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3년 8월 9일 밤 해시 초, 청녕궁
-오늘 밤 이 청녕궁에서 무슨 사단이 벌어져도 쥐새끼가 찍찍거리는 소리까지도 들릴 만큼 조용해야 할 것이야. 날이 밝기 전에 중궁 안에서 벌어진 일이 밖으로 새어나갔다가는 모두가 순장을 당해야 할 것이니라.
궁인이 허리를 굽히며 방 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 철철은 허리를 굽힌 채 뒷걸음질 쳐 나가는 궁인의 정수리를 쏘아보았다. 숨도 쉬지 않고 한 번에 급하게 명을 내린 다음, 가볍게 한숨을 쉬며 철철은 천천히 침상 옆에 놓인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 식은땀을 흘리는 황제의 이마를 손수건으로 가볍게 찍어 닦아내었다.
요 근래 황제의 상세는 계속 좋지 않았다. 한 번 쓰러졌다 깨어난 후로 겉으로 보기에 나아지는 것 같기는 했으나 어의의 진단은 별로 긍정적이지 않았다. 북방의 용, 초원의 황제 홍타이지에게도 끝이 오는가. 대복진(대부인, 즉 제 1부인 혹은 정실부인. 황실의 경우 황후. 복진은 만주어로 ‘아내’, ‘부인’이라는 뜻.) 철철은 황제의 상세를 생각하며 피부에 소름이 돋고 있음을 느꼈다. 관저궁 신비宸妃 해란주에게 쏟은 사랑이 그렇게 컸던가. 내가 지난 세월 지켜봐 온 이 남자의 어디에 그런 나약하고 감상적인 면이 숨겨져 있었던가. 그의 인생에서 나는 얼마의 무게를 갖는 사람이었는가.
조용히 올라왔다 내려가며 호흡에 따라 들썩이는 이불을 내려다보며 철철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미약한 호흡이 꺼질듯 꺼지지 않을 듯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가늘게 이어지는 황제의 들숨과 날숨을 오래도록 지켜보며 철철은 알 수 없는 혐오에 사로잡혔다. 황제와 황후로서, 아니 홍타이지가 사패륵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결혼생활에 남은 것이라고는 딸 하나와 알량한 황후자리 뿐이었는가, 회의가 들었다. 어쩌면 무슨 추억이 있고 무슨 애정이 남아있을 수 없는 사이였다. 철철은 살아있는 그의 앞에 앉아 그의 죽음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흐으으윽…….
홍타이지의 신음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에 가늘게 눈꺼풀을 경련하며 상념에 잠겨있던 철철이 눈을 감았다 뜨며 정신을 차렸다. 급히 그의 입술에 귀를 가까이 대었다. 밤중이었다. 며칠 사이 계속 잠들지 못해 쌓인 피로로 어깨와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러나 잠들 수가 없었다. 특히나 오늘처럼 예감이 불길한 밤에는. 그러나 홍타이지의 입에서는 더 이상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철철은 떨리는 차가운 손가락을 그의 경동맥에 가져다 대고 짚어보았다. 아직 숨 쉬고 있다. 옅은 안도가 철철의 등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비에게 사랑받아본 적 없는 황구자皇九子, 겨우 여섯 살에 불과한 복림福臨이 자신과 커얼친 부족이 쥔 유일한 패였다. 너무나 미약한 패였다. 호랑이 같은 친왕들이 버팅기고 서있는 사이에서 여섯 살 황자가, 더 정확히 말해 여섯 살 난 황자를 낳은 어미가 나설 수 있는 폭은 좁았다. 쟁쟁한 형과 숙부들 사이에서 어떻게 나설 수 있겠는가.
청의 권력구도는 8기를 거느린 각각의 친왕과 군왕들의 연합을 몽골 보르지기드 가문과 연합한 홍타이지의 강력한 힘과 권위로 내리눌러놓은 기묘한 구조였다. 이들 모두가 황제를 꿈꾸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늙은 너구리 다이샨이나 신중한 지르하랑 같은 인물은 잠재적인 우군으로 생각해도 좋다. 그러나 그 나머지는 문제가 달랐다.
황제를 넘볼 강력한 왕자. 우선 홍타이지의 14번째 동생 예친왕 도르곤이 있다. 본시 누르하치의 후계자였으며 청군의 총지휘관으로 몇 차례나 전공을 세웠고 정백, 양백 2기를 거느리고 있다. 애초에 홍타이지에게 자리를 빼앗겼으니 다음 번 황제의 보위는 응당 자기 것이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황장자 숙친왕 호격 역시 유력하다. 호격은 항렬로는 응당 도르곤의 조카였다. 그러나 나이는 오히려 도르곤보다도 두 살 많았다. 그 역시 도르곤에 못지않은 전공을 세웠고 정람기의 기주는 아닐지 모르나 ‘만주제일용사’라는 오배를 비롯하여 정람기의 여러 무장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황제가 죽었으니 황제가 직접 다스리던 정황, 양황기는 주인의 장자인 호격을 지지할 것이다.
방 밖에는 영복궁의 장비 대옥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황후와 장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친고모와 조카이며 커얼친 패륵의 딸들이었다. 자신들이 커얼친 부족과 청 황실의 연합을 위해서 팔려온 운명공동체임을 둘 모두 잘 알았다. 장비는 커얼친 부족이 쥔 유일한 황자 복림의 생모였다. 또한 역시 홍타이지에게 사랑받아본 적 없는 불행한 복진 중의 하나였다. 열 셋에 시집 와서 그 후로 오랫동안 침묵 속에서 조용히 기다려 온 참을성 많은 여인이기도 했다.
문득 홍타이지가 처음 대옥아와 동침했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아마 장비가 열다섯 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대옥아는 홍타이지가 나가자마자 철철의 품으로 달려와 이마를 묻고 울었는데,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철철은 그저 두렵고 무서웠던 탓이라고만 여겼다. 그 날부터 며칠 정도 홍타이지는 계속 화가 나 있는 상태였고 철철은 홍타이지의 분노가 이상하게 오래 가고 또 쓸데없이 격하다고만 생각했다. 열다섯이면 특별하게 이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른이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게 벌써 거의 20년 전의 일이었다. 그 때 연부역강하던 홍타이지는 지금 풍증으로 누워있다. 그리고 순진하던 어린아이가 문밖에서 남편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 밖에 비치는 그림자가 생전 해란주의 그것과 닮았다.
-하기는, 친자매인데.
철철이 흐리게, 소리 없이 웃었다. 해란주와 대옥아, 그리고 도르곤의 처 소옥아 셋은 친자매였다.
-장비 밖에 들어 있느냐?
-예, 황후마마.
-황구자도 함께 와 있느냐?
-예.
-함께 들라.
장비의 낮은 발소리가 사박사박 울리고, 품에 안은 여섯 살 배기 황자가 눈을 비볐다. 철철은 미간을 약간 굳히며 홍타이지의 눈 감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미약하게 숨결이 흐르고 있었다. 철철은 날이 밝기 전에 무엇이라도 결정이 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후계자도 정해두지 않은 상황에서 언제 황제가 죽을지 모르는 안개 같은 정국은 거의 평생을 황태극과 함께 암투와 전쟁을 치러온 철철로서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긴장이었다. 모두가 제각기 칼날을 갈고 있다. 다만 소리를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황후.
아주 미약한 목소리가 공기를 긁듯 흘렀다. 홍타이지의 흐려진 동공이 허공을 향해 열렸다. 촛대의 뒷받침에서 반사된 빛이 퍼지고 있던 실내가 갑자기 환해졌다. 사람 얼굴을 겨우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던 빛이 이제 표정이 보일 정도로 밝아졌다. 그러나 잠시 후 촛불이 피시식 소리를 내며 꺼졌다. 장비가 조용히 발길을 옮겨 불 꺼진 등잔에 기름을 더 부었다. 발소리가 사박사박 울렸다. 평상시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자분자분한 움직임이었다. 속눈썹을 내리 깐 얼굴에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부싯돌을 딱딱 부딪쳐 새로 기름등잔에 불을 붙이는 장비의 손길도 한차례 바르르 떨렸다. 이어서 방 안에 등을 하나 더 찾아내어 불을 켰다.
-회광반조로군. 하늘이…… 이 홍타이지의 떠날 때를 알리는구나.
-말씀해주십시오. 후계를 어찌할까요?
-황위를……황위를…….
-누구에게 당신의 옥새를 넘기리까?
-누구에게 넘긴들 내가 넘긴 아들에게 가겠는가. ……그대는 내 평생을 지킨 아내였으니 어찌 해야 할지 알 것이야. 내 아들 중 누구도… 죽지 않게 해다오. 그 뿐이다.
장비는 아직까지도 등불을 켜고 있었다. 방 안에 사람의 표정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불이 밝혀졌다. 철철은 죽어가는 황제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홍타이지의 손이 차디찼다. 황후는 도르곤의 굳은 얼굴을 떠올렸고, 황제에게도 방법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사실이 그랬다. 누구도 어머니를 잃게 하고 나이 열넷에 사지로 내밀었으며 전장이 아닌 다른 삶의 자리를 내어준 적 없는 원수를 용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르곤이 황제의 자리마저 빼앗아간 이복형을 용서하기는 힘들 것이며, 그가 본디 자신의 것이었던 황제의 자리를 찾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말릴 수 있을 것인가.
-나를 믿으십니까, 폐하.
-일생에 누구를 그대만큼 믿었겠는가. 허나 모두가 헛된 일이야.
홍타이지의 말은 점점 어눌해져서 더욱 알아듣기 힘들었다. 장비는 조용히 복림을 품에 끌어안아 눈을 가리며 아이를 재우려는 듯 등을 토닥였다. 아무 일이 없다는 듯 조용한 그 손길은 여전히 정갈하고 빠르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았고 계산된 것처럼 머뭇거림이 없었다. 철철은 자신의 손을 맞잡은 황제의 손에 점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간다고 느꼈다. 평생을 함께 한 남편이 죽어가고 있었다. 철철은 조금 전까지 눈을 감은 홍타이지의 푸른 얼굴에 토기를 느꼈던 것을 상기했다. 천천히 목구멍을 죄며 감정의 응어리가 올라왔다. 남편의 식어가는 손을 잡은 철철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눈물이, 흐를 것 같지 않았던 눈물이 조금씩 천천히 흘러내렸다.
홍타이지의 손이 다시 침상으로 떨어졌다. 청 황궁 후원의 오궁 중 가운데 자리 잡은 중궁中宮 청녕궁의 밤이 잠시 정적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 * *
+역사 속으로 01
1회에 등장하자마자 죽은 청태종 홍타이지는 '청'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부족국가 형태였던 청을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 형태로 다듬은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인조에게 삼전도에서 항복을 받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죠. 조선 백성들은 그를 '홍태시'라고 불렀는데, 뜻은 紅太豕, 즉 '커다란 빨간 돼지새끼'였다고 합니다. 조선 백성들의 증오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 하죠.
사실 홍타이지는 활달한 무장 기질의 인물이라기 보다는 권모술수에 능했던 인물로 보여집니다. 사실 그가 도르곤을 포함한 다른 패륵들을 제치고 황제에 즉위한 과정이나 만주족에 누르하치가 피를 토하고 죽을 만큼 충격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던 영원성의 명장 원숭환을 반간계를 써서 제거한 방법을 살펴보면 그런 느낌을 충분히 줍니다.
그러나 황제로서 그의 공적은 상당해서 태조 누르하치의 대를 이어 한족 출신 문관인 범문정을 중용, 그때까지 한족에 대한 무조건적 증오를 표방했던 만주족의 대외 정책을 한족과 융화하는 쪽으로 수정했습니다. 이는 이후 청나라 300년 한화정책의 근간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작가 한 마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우선 작가로서 이렇게 작품으로 만나뵙게 되어 기쁩니다.
말이 참 딱딱하게 나오네요,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하하.
제가 <유연>을 기획하게 된 건
중국 드라마 <대청풍운>을 너무 재미있게 보아서입니다!ㅋ
여기서 대옥아 역할 하셨던 분도 너무 아름다우시고ㅠㅠㅠㅠ
원래는 1월 중순에 완결을 낸 후에 연재 시작을 하려고 했는데
1월 중순 연재 시작하려던 계획은 지켰지만
완결을 낸 것은 아니네요. 하아-_-ㅋㅋㅋㅋ
앞으로도 더 열심히 써가면서 연재할 거니까 기대해주시구요ㅋ
열심히 연재해서
저도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익숙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업쪽을 원하시는 분은 '위알'이라고 남겨주세요.
'위알'은 여주인공 대옥아를 간편하게 '옥아'라고 부를 때의 중국어 발음이랍니다.
첫댓글 대청풍운! 장서희 나오는거죠? 그 장난스런 키스를 찍은 남자와ㅋㅋ 저도 몇번 본적있어요. 건필하세요!
악ㅋㅋ 그건 <경자풍운>이라구 정원창 장서희 주연이구요ㅋㅋ 그러고 보니 제목 비슷하네요ㅋㅋㅋ 리플 감사합니다!
설명도 잘 되어있고 깔끔하게 쓰셨네요ㅎㅎ 잘 읽었어요!
너무 딱딱하지 않나요ㅠ 리플 감사합니다!
와..매우 너답게 잘 쓰셨어요.. 잘 봤습니다,, 키위도 잘 먹었어요 이닦고 먹으니까 맛이 특이하던데요..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키위 한 개 먹고 잘 먹었대ㅋㅋㅋㅋㅋ 아 너 그 호텔 홍차 들고 오렴ㅋㅋ
물루야 ㅋㅋ 재밌게 읽은데다 중국역사까지 공부하고 간다 ㅋㅋㅋㅋㅋㅋ~!!!
읽어줘서 고마워요ㅠㅠㅠㅠㅠ 폭풍연재할 용기를 얻음ㅋㅋ
언니 왜이리 소설 잘써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믈루언니~ 재미있어요. 오호...역사공부를 소설 보면서~ㅎㅎ
오.... 물루야-0-....니가 언니해라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넘 잘썻다 ㅠㅠ 거기다 재밋고 ㅠㅠ 난....난....흑...
이얍... 누르하칰ㅋㅋ
쳇..너무잘쓰네...근데나무슨말인지못알아먹겟어;;내지식의한계야 엉엉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