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하루의 시작이다. 어지러웠다. 아라는 으쌰, 하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조깅을 15km정도 하기로 했다. 천으로 둘둘 말아놓은 막대기를 메고 방을 나섰다. 같이 사는 친척언니는 아직도 도롱도롱 코를 골며 잔다.
“Good morning!"
어제 산 분홍색 조깅화는 가볍게 지면을 찬다. 서울 외각인지라 공기가 썩 나쁘지 않다. 어제 추천받은 ‘조깅할 때 들으면 좋은 가벼운 선율의 팝송’을 들으며 아라는 15km를 가볍게 뛰어 간다. 일주일전 한 파마는 마음에 든다. 조깅이 끝나는 15km지점에는 그들의 집이 있었다. 이제 모두가 함께 있는 그들의 집이.
“이모-”
“이모 왔다!”
아이들이 제일 먼저 반긴다. 언제나 이 아이들은 밝다. 아라는 숨에 턱이 받히도록 뛰었다. 머리가 조금 울렸지만 괜찮았다. 준호와 준후도 아침운동을 끝내고 이제 들어오는 듯 했다. 집에 들어서니 맛있는 냄새가 난다. 확실히 이집안 사람들은 동안이다. 그 나이처럼 안 보인다. 왔냐고 심드렁하게 인사하는 준호 녀석. 준후 오빠와는 글쎄, 나름대로의 happy ending이라고만 해주고 싶다. 아라는 조깅화를 벗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턱, 하고 벽에 그 막대기-청홍검-을 기대어 놓고는.
“아, 또 늦었네.”
“아라 왔네? 안 늦었는데?”
턱으로 가리키는 시계의 분침은 어제보다 10분 더 빠른 지점에 있었다. 처음 이 언니를 봤을 때 인상이 어땠더라. 예쁜 모자-지금 생각하면 꽤나 웃긴 디자인이지만-를 쓴 멋쟁이 언니. 지금처럼 이렇게 편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멋 부리는 여자는 요리를 못한다는 편견을 멋지게 깨뜨린 사람. 언젠가 같이 집에서 해먹었던 미국식 스테이크는 정말 맛있어서 2인분인가를 혼자 먹은 적도 있었다. 살림도 꽤나 꼼꼼하게 잘해서 완전 현대판 신사임당. 거기다가 영어는 좀 잘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상 차리는 것만 좀 도와주면 될 것 같애.”
“아, 와서 식사 준비하는 거 도와주려고 부러 20분 더 일찍 출발했는데.”
“안 그래도 된다니까. 장준후! 너 빨랑 들어가서 씻어, 준호 너도!”
여전히 목소리는 카랑카랑하다. 화를 내면 샐쭉 올라가는 눈썹도. 이크, 얼른 화장실로 들어가 버리는 두 남자. 남자를 잡으려면 역시 저 정도 카리스마는 있어야 돼. 나이가 마흔이 다됐는데도 여전히 예쁘고 섹시한 느낌이 난다. 대체 뭘 먹어야 저렇게 되는 거야.
“아라 너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여.”
“헷! 오늘 뭐 했어요?”
“오늘? 뭐 그냥 있는 거 이것저것 긁어서 대충. 선진이하고 선우 불러와. 지각할라.”
“예! 선진이 선우 밥 먹자!”
승희는 돌아와야만 했다. 선택에 여지는 없었다. 현재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행복한 결말을 바라지 않았던가. 내일의 일은 내일 생각하자. 승희는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편해졌다. 휠체어를 밀어주는 손이 있다. 그 손은 승희의 어깨를 잠시 쥐었다. 그때 그 손. 모든 것을 포기하게도, 모든 것을 포기못하게도 만든 그 따뜻한, 뜨거운 손. 현암이다.
“안마를 하려면 똑바로 해. 하나도 안 시원하잖아.”
“........그냥 좋으면 좋다고 해.”
다들 의외라는 듯이 굳었다. 째깍, 째깍 초침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라는 풋, 하고 웃었다. 가끔 저렇게 의외의 닭살 돋는 소리를 한다. 아, 밥 먹는다며, 안 먹냐?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현암은 무뚝뚝하게-아까 그 말은 대체 누구의 말이었나 싶으리만치- 말하고는 국을 떠먹는다. 그제서야 다들 자기 밥그릇을 차지하고 앉았다. 선우와 선진이는, 월요일부터 수요일은 선진이가 좋아하는 것,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선우가 좋아하는 것을 먹기로 했나보다. 오늘은 선우가 좋아하는 참치가 나온 걸로 봐서 목요일이다.
“아, 나 참치 싫은데.”
“장준후, 그냥 먹지? 이선우님께서 먹고 싶데잖아, 참치.”
“그래도 누나, 나 비린 거 못먹는 거 알면서.”
“시끄러. 아, 그래 참치 먹으면 놀이동산 데려가줄게. 어때?”
“내가 애에요?!”
“밥상머리 앞에서 버릇없게시리. 알았어, 그럼 게임팩도 사줄게. 됐지? 그냥 먹어.”
“누나앗!”
따콩, 하고 준후의 잘생긴 머리통을 치는 건 승희가 아니라 현암이다. 그냥 먹어라, 나이안맞게 반찬투정이냐. 선진이는 참치를 헤집어놓다가 승희의 ‘이선진’하는 목소리에 이크, 젓가락에 참치를 쥐고 얼른 삼켰다. 켁, 켁 거리는 선진이의 등을 쓸어주는 것도 현암이다. 선우가 준후에게 물었다. 육류를 즐기는 ‘선우의 날들’이 오면 유달리 준후 삼촌이 반찬투정을 하는 걸 기억했다.
“에이, 바줬다. 금요일 준후삼촌주께.”
“어, 이모는 반대.”
“나도.”
“풀때기만 먹는 건 나도 반대.”
“아 뭐 그래요!”
승희는 웃었다. 가족이 아침식사를 함께하는 그런 나날. 가끔 따뜻한 품이 그리워서 가슴 한 구석이 찌르르 울리기도 하지만 18년을 참았는데 더 못 참겠어. happy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슬프지만 않아도, 힘들지만 않아도 happy니까. 승희는 밥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역시나 속이 메스꺼워서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걸 봤냐? 하여튼 눈썰미는 좋아요.
“괜찮니?”
“뭐가?”
“속. 오늘 병원가자. 어디 들릴 데도 있으니까 겸사겸사.”
“병원 가봐야 고치지도 못하는데 어딜 가. 혼자 다녀와.”
“내 입으로 낯간지럽게 데이트라고 말해야 가냐. 가자, 좀.”
“나이 쉰 마흔이 데이트 간다고 하면 욕해. 아 진짜 주책이야. 아라야 냅둬, 설거지 좀따가 하면 돼.”
“맨날 밥 얻어먹는 것도 눈치네요. 다녀오세요, 오늘 날씨도 좋던데. 그리고 누가 언닐 마흔으로 봐요. 20대까진 안보더라도 30대로는 보니까 걱정하지 마요. 나도 내공이나 키울까? 보톡스보다 효과 짱이야.”
아라의 장난같은 말에 현암은 피식, 웃었다. 아라는 그래도 부엌에서 밍기적거리는 승희가 마음에 안 드는 지 휠을 밀어 승희의 방으로 끌고 갔다. 현암은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켠다. 아이들은 서로서로 학교 갈 준비를 한다. 준후와 준호는 오후 수련을 위해 잠을 자는 듯도 하다. 남들에게는 무난한 일상이 감사한 요즘이다.
“현승희, 멀었어?! 애들 지각이다.”
“아, 혼자 가라니까!”
“아, 혼인 신고 하는데 나 혼자가?!”
“미치려면 곱게 미쳐!!”
뭐, 가끔 이런 해프닝도 좋지. 너랑 나랑 완전히 끝이 오면 그때, 그래 마지막으로 한번 입맞춤하는 것도 좋을 거 같기도 해. 이런 정도의 happy ending이면 좋지 않아?
이 글을 쓰면서 한동안 글을 안 쓴 것이 얼마나 문제가 되는지 알았습니다. 완전 손이 굳어서 머릿속의 분위기가 절반의 반의 반도 안나네요. 그나마 2편이 조금 마음에 들어요.(더 괴롭혀야 되는 데. 확 더 긁었어야.;;;) 훌쩍;ㅁ; 간만에 2차 저작물 창작욕구와 2년 만에 글을 쓰게 해주신 퇴마록에게 감사드립니다.(__) 슈퍼내추럴을 보면서 왜 퇴마록에 재버닝하게 되었는지는 저도 잘..;;; 그리고 제목 짓는 센스는 대체.. 막 쓰고 나서 제목을 나중에 정하려고(뭔가 순서 엉망) 했는데 차라리 전에 가제로 정했던 ‘happy ending'이 더 어울려요. 엉엉(난 언제나 제목이 어색해!) 나에게 제목 짓는 스킬을 내려주세요 이우혁님.(쿵짝쿵짝)
사실 승희라는 캐릭터를 제가 몹시 사랑합니다. (승희에 대한 애정 마구 보이시나요?) 그리고 이우혁님의 사랑을 100% 받는다고 확신하는 현암군은 애증의 관계.-_-;; 승희가 퇴마사에 합류한건 정말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라고 생각해요. 사실 이 아가씨는 초상화가 부르지만 않았어도 편하게 살았을 텐데. 제 생각으론 승희가 미국에서 자취를 했고, 어릴 때 어머니를 잃어서 오히려 살림을 잘 할 거라고 생각해요. 애들도 잘 돌보고.
분명 말세이후의 시계를 부정적으로 볼 수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역시 해피엔딩이 좋지 않을까 해서 써봤습니다. 정말 누가 새드엔딩이 필요할까요. (이현암 동자공 미워죽겠습니다.;ㅁ; 아 뭐 좀 하려고 해도 이건 이것 때문에..)
청학동이 준후가 간지미청년이 되면서 애정도 하락세.(전 준후가 깜찍하게 쪼르르 돌아다니던 때가 좋아요. 그리워요, 그리워요) 신부님 좋아하지만 뭔가 2차 저작물로 건들자니 어려운 캐릭터.;ㅁ; 신부님이 너무 완벽하셔서 그래요.(투덜투덜)
아 근데, 대체 남자 셋이 살았을 땐 누가 밥 했냐구요.(전 이게 가장 궁금했어요.)
첫댓글 아아...정말 좋네요...행복해 보여요...ㅠㅠ
감사합니다, 퇴마사들도 이제 행복해야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차 저작물 기대할께염...
재미있게 읽어주시는게 가장 좋지요. 더불어 제글 기다려주시면 더 좋구요.
...........끼야오;ㅁ;!!! 해피엔딩!해피엔딩!
감사합니다! 저도 해피엔딩이 좋아요
동자공 확 깨버리시지~ 안타깝다 ㅋㅋ 그래도 해피엔딩이라서 좋아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저게, 이현암님이 의지가 매우 강하지 않습니까.(저처럼 일희일비하지않으시고.) 그래서 그게 좀 힘들어요.
그리고 밥당번은 현암군이었을 것 같은데... 어린 준후가 했을리 없고 설마 신부님께서 밥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어요ㅋㅋ 하지만 현암군과 부엌은 왠지 어울리는 걸요 ㅋㅋ
아, 맞네요. 동생도 맥여살려야했었을테니까.. 의외로 부엌에 들락날락 했을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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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어딜 다녀오셨나요??
오랜만에 들어오니, 재미있는 소설이....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같이 현암편애모드인 사람한테는 이런소설도 좋죠...후훗...
전 승희님을 매우 사랑합니다.(고로 현암님과는 불타는 애증의 관계)
재밌습니다. 정말로....
역시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시는거야 말로 저같은 아마추어글쟁이가 가장 좋아하는 말중 하나에요.^^ 감사합니다.
끼약~~ 잘 봤어요 제가 좋아하는 내용!! ㅋㅋㅋ 전 현암 승희 커플이 너무 좋아요 ㅋㅋㅋ 그 다음 소설 기대할게요!! ^_^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고두고 동자공에 대한 원망은 커져갑니다...
퇴마사들도 행복하길
재밌게잘읽었어요.
우리 주인공들 마음의 갈등을 대사로 참 잘 표현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