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만의 결혼식...
아니 한 사람이 더 있군.
혜린은 여기저기 풍선을 달고, 낡은 피아노 위며, 탁자위에싱싱한 장미 한 아름씩을 꽂아둔 다음 마지막 정리를 다 끝내고 집안을 구석구석 살펴 보았다. 이정도면 문제없군. 환상적인 결혼식이 되겠어.
혜정과 민우는 지난 삼개월동안 정말 행복한 나날들을 보낸것 같았다. 적어도 그의 아내가 다시 시작하자고 울며 매달린 두달전의 한 일주일 정도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민우가 다니던 성당에서 간단히 결혼식을 올리고 오겠다던 그들을 기다리던 혜린은 케잌과 와인, 그리고 결혼선물을 탁자위에 올려논 다음 외투를 입고 일어섰다.
어제 백화점에서 산 샹제리제 촛대와 거기에 꽂힌 다섯개의 초를 바라보다가 이내 아쉬운 발걸음을 옮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오자마자 혜린을 반긴 것은 하얀 눈이었다. 첫눈...유난히도 올해는 첫눈이 늦게 내리는 것 같았다. 두 손을 벌리고 소담히 내리는 첫눈을 맞고 있는데 순찰을 막 돌고 오던 경비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 아, 이거 1507호 아가씨 아닌가? 첫눈이 오네. 참 이쁘게도 오죠?
- 네. 그렇네요.
벌리고 있던 두 손을 얼른 내리며 쑥쓰럽게 목례를 하며 벌써 하얗게 흰 눈을 뒤집어 쓰고 있는 차를 향해 걸어갔다. 경비 아저씨는 사춘기 소녀처럼 하늘을 향해 눈을 감고 첫눈을 맞던 혜린을 정겨운듯 쳐다보며 가끔 추울때마다 군고구마며 호빵을 사다주던 혜린이 참 맑고 순수하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몇달전만 해도 그렇게도 차갑고 냉랭했던 아가씨였는데 말이다.
차에 시동을 걸었지만 막상 갈만한 곳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긴 해야겠지. 지금은 민우가 상하이로 출장을 가고 없었다. 하필 이런 날에...
낯익은 번호를 눌렀다. 반가워하는 준서의 목소리를 듣고 새삼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너무 무심했었구나, 그동안.
'시베리아'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30분후...그동안 무엇을 하지? 머릿속이 하얗다.
- 누나가 먼저 전화를 하고 왠일이야?
- 첫눈이 오잖아.
- 하하하. 늘 첫눈이 오면은 내가 먼저 전화해서 만나달라고 졸라도 잘 안 나오던 누나 아니었어? 이제야 겨우 이 동생의 애틋한 마음을 알아주기로 했나보지?
- 자식. 너스레떨기는. 그런데 넌 늘 한가한가봐.
- 아니야. 누나니까 겨우 시간을 내준거지.
준서는 그동안 많이 수척해진 혜린을 보며 더욱 밝은 분위기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사랑했던 과거의 한 남자를 위해 결혼식을 준비한 한 여자가 여기 있었다. 그 무엇이 혜린으로 하여금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게 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준서였다. 대학 3학년 학교축제때 술이 곤드레망드레 취해서 횡설수설 아픔을 이야기하던 선배 혜린을 아직도 준서는 사랑했다. 사랑은 본질은 하나지만 여러가지 방식으로 한다. 융통성 있는 사람만이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다. 준서는 혜린의 마음을 진정으로 열어준 민우에게 질투를 느끼면서도 어느 한편으로는 감사함을 느꼈다. 비록 민우를 대신해 자신이 이 시간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으로도 충분히 혜린에게 고마웠다.
- 그 잘난 민우란 사람은 언제 돌아온대요?
- 준서야. 정말 넌 고마운 놈이야.
- 놈이란 말 말고 좀 이쁜 말 좀 써요. 내가 어딜 봐서 놈이에요?
- 후후후. 넌 내 어디가 그리 좋니?
- 누나,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 사람만의 독특한 향기와 분위기가 있어요. 근데 나는 누나의 애련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이 좋아요.
- 그거 너무 재미없잖니.
- 하하하.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나요? 여자들은 이상하더라. 꼭 좋아한다면은 이유를 묻더라구요. 사람 좋은데는 이유가 없는게 정상이에요. 굳이 이유를 찾아내는 사람은 그만큼 그 사랑에 푹 빠져있지 못한 것이죠.
- 하여간...고마웠다. 준서야.
- 뭐 우리가 영영 이별하나? 난 그 민우란 사람에게 기회를 한번 줘보는 거에요. 누나 아프게 하거나 눈물 나게 하면 다시 내게 돌아와야 할걸요? 그때는 누구한테도 양보못해. 내가 싫대도 상관없어. 하하하
- 너, '마리아와 여인숙'이란 영화 봤니?
- 네. 누나가 좋아하는 영화잖아요.
- 난 그 영화가 그렇게도 가슴에 팍 와닿는거 있지. 뭐랄까...모자란 형과 여자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동생이 단란하게 사는 어느 벽지 여인숙에 계획적인 한 매력있는 여인이 들어오면서 겪는 형제간의 갈등. 그리고 복수...예상을 뒤엎는 결말...마지막 장면에...신현준인가? 종이를 씹으며 방안을 빙빙 기며 울부짖던 장면이 ...
- 똑같은그림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가 보고 싶은 각도에서 보고 해석을 한대요. 이젠 누나에게도 사랑이 찾아들었고, 혜정이 누나에게도...참 행복하네요.
준서는 벌써부터 가슴 언저리를 뭔가에게 강하게 얻어맞은것처럼 아파왔다. 자그만치 6년이었다. 사랑을 키워온게..
사랑은 포기가 아니라 쟁취라고들 했다. 술자리에 흔히 안주로 씹어대는 '사랑'이란 정의에 대해 친구들은 그렇게들 이야기했다. 하지만 준서는 한발자국 물러서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이 진정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 자, 일어서자. 나, 오늘 너네 집 가서 자도 되지?
- 술취하면 자주 와서 자놓구서는 갑자기 허락은 무슨?
- 하하하. 토 좀 달지 않고 그냥 '당연하지요'라고 하면 얼마나 이쁠꼬?
- 일어나요. 누나.
가볍디 가벼운 혜린을 일으켜 세우고는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고, 저쪽 한편 건물옆에서 수그린채 휴대폰을 붙잡고 떠드는 혜린이 보였다. 누구냐고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민우라는 것을...쓴웃음을 지었다.
20평 남짓한 원룸에 들어오자마자 창문옆의 기다란 쇼파위에서 고양이처럼 웅크린채로 잠이 깊이 들어버린 혜린을 바라보던 준서는 살짝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만져보았다. 손가락 끝이 떨려와서 금방이라도 들켜버릴꺼 같았다. 혜린의 머리카락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 누나도 이제 행복해야죠.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으니까.
창밖으로는 여전히 소담스럽게 흰눈이 내리고 있었다. 금방 바깥 전체가 하얗게 변했다.
- 따르릉
- 여보세요.
- 준서구나? 혹시 혜린이 거기 있니?
- 혜정이 누나구나. 네. 방금 잠이 들었어요.
- 그래...
- 전화기가 꺼져 있었나보군요?
- 응. 그러게 말야.
- 일부러 꺼 놓은거 아닐거에요. 아까 밧데리가 다 되는거 같다고 하더라구요.
애써 변명을 하는 준서는 자신의 말을 믿을 혜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일부러라도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 그럴꺼야...
- 아참. 결혼 축하해요! 이거 너무 부러워서 배 아플 정도네요...나중에 집들이때는 부르는거 잊지마요. 알았죠?
- 당연하지. 그럼 나중에 전화할게.
- 네.
- 잠깐!
- ...
- 혜린이...잘 부탁한다. 내일 니가 우리집까지 데려다주는거 잊지 말고. 알았지? 저녁은 꼭 먹여라. 요즘 더 말라서 볼수가 없다.
- 하하하. 별걸 다 걱정해요. 내가 혜린이 누나 밥 먹이는 데는 누나보다도 더 선수인거 알면서...걱정말고 즐거운 시간이나 보내요. 그래도 오늘밤이 공식적인 첫날밤일텐데..
- 요즘 애들은 못하는 말이 없어요. 하여간.
- 하하하
혜정은 수화기를 내려 놓으며 촛불을 밝히는 현수를 바라보았다. 현수가 어서 오라는 손짓을 했고, 혜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 편으로 다가가 앉았다.
- 역시 혜린이는 달라. 이것까지 준비해놓고...
- 방금 잠들었대.
- 나중에 우리 잘 해주자. 곧 혜린이도 민우씨랑 결혼할텐데, 뭐
- 그래...
- 얼굴 좀 펴! 그 손가락에 낀 반지는 누가 사준건지 참 이쁘기도 하다.
- 현수씨...나 지금 너무 행복해서 기절할꺼 같애. 너무 너무 믿겨지지 않을만큼 행복해서 불안하기까지 한 거 있지?
- 날 믿어.
현수가 혜정의 손을 꼭 잡았다. 방안 공기가 따뜻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손가락은 차가웠다. 얼마나 힘든 결혼이었는가. 마음 한편으로는 뉴욕으로 떠난 영선에 대한 미안함으로 홀가분하지는 않았지만, 촛불을 사이에 두고 그림처럼 앉아 있는 혜정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미래에 대한 책임감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그래, 행복해야지,암...어떻게 만든 사랑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