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관의 안경
사람은 제각각의 안경을 통해 세상을 보고 판단한다. 이 안경에는 각자의 인생관, 세계관, 이념, 정치관 등의 색깔과 도수가 들어 있는 렌즈가 있고, 그 색깔과 도수는 각자의 집안 환경·성장 환경·교육 환경과 사회 제도 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다. 시간이 갈수록, 다시 말해 안경 착용자의 나이가 들수록 렌즈의 도수나 시야가 고정되고 익숙해져서 바꿔쓰기는 사실상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된다.
물론 렌즈 도수나 색깔이 없는 투명한 안경을 쓰는 수도 있으나 흔치 않은 경우다. 왜냐하면 안경을 안 쓰면 봐야 하는 대상을 제대로 보기가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고, 봐야 하는 대상에 대해 일정하게 초점을 맞춰 식별하는 기능이 저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혹 지금까지 써 왔던 안경을 아예 바꾸거나 렌즈와 색깔을 갈아 끼우기도 하지만 그 대가가 만만치 않을 수도 있다. 이 안경은 ‘유유상종’이나 ‘상호부조’ 같은 사회 원리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는 역할도 수행하므로 안경을 벗거나 렌즈를 갈아 끼우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안경 착용자는 렌즈를 통해 보이는 대로 인식하고 평가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자기 눈에 사자로 보이는데도 고양이로 해석한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배척당하기도 한다. 이런 안경의 원리는 나라와 사회 전반에 적용될 때에도 마찬가지다. 법률 적용과 해석 및 판단의 최종 역할을 담당하는 법원과 법관마저도 예외가 아님이 이번 탄핵 사태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법관이나 법원도 현재 자기가 쓰고 있는 것 이외의 다른 렌즈나 색깔의 안경을 따로 갖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최근의 가장 극명한 예가 취임 이틀 만에 국회에 의해 소추된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다. 탄핵 인용과 기각에 대한 판단이 4:4로 갈린 것은 각각의 재판관이 쓰고 있는 안경 종류에 따른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해당 재판관이 자기 안경을 통해 들여다보니 국회의 탄핵 소추가 정당하게 보이거나 또는 부당하게 보였을 따름이다. 더 이상의 다른 예나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해당 재판관들은 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했다고 스스로 믿고 자위하고 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을 앞두고 여론이 들끓자 헌재가 대변인을 통해 “이번에도 바른 판단을 할 것”이라는 구차한 변명을 내놓는 모습이 너무 치사하고 어색하다. 직전의 예고편을 통해 보여 준 바와 같이 “이번에도 법관 모두가 이전과 같은 안경을 착용하고 있으니 변함없는 판단을 기대하시라”라고 했다면 적어도 일관성은 있는 솔직한 입장으로 비쳤을 것이다. 예외 없는 전례를 직전에 이미 제시한 터에 “이번에는 다른 안경도 기대해 보라. 즉, 안경을 쓰지 않거나 현재의 안경을 바꿀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라면 국민을 속이는 비열한 작태다.
이 자리에서 하나 더 지적할 것은 법관 자신의 윤리와 도덕의식이다. 남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자리는 매우 어렵고 불가피하게 고결해야 한다. 스스로가 흠결이 없고 지적받을 것이 없을 때에야 비로소 떳떳이 남을 판단하거나 벌하고 정죄할 수 있다. 법관마저 ‘내로남불’이면 완전히 막가는 사회다. ‘정의의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마저 이런 풍조와 관행에 빠지면 우리 사회는 끝장에 이를 수밖에 없다. 나아가 법원 내에 오랫동안 사조직을 만들어 법원 인사나 분위기, 렌즈 색깔과 도수에까지 영향을 미치려 했다면 범죄 행위에 가깝고 나라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자신이나 주변과 관련된 바람직하지 못한 사안이 밝혀지면 일반 공직자나 서민들도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거늘 남의 잘못을 꾸짖는 위치에 있는 법관이 아예 함구하거나 외면하고 버티는 꼴은 처량하고 불쌍하다. 최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인질 사태에서 촉발된 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되자 이스라엘군 최고 책임자들이 전쟁 발발 직후부터 미뤄 왔던 사퇴를 단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감동이 매우 진하다. 반대로 우리나라 문제 법관들의 엉뚱한 배짱과 용기에서 나오는 씁쓸함 역시 감출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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