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에서 바라보는 인왕산?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선생님의 말씀대로 경복궁 경회루에서 또는 푸른 기와집에서 바라보이는 인왕산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원래 산은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고 했는데....
꼭 경희궁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혹시 필요한 분을 위해 인왕산과 경희궁에 대해 이곳 저곳의 글을 정리해 올립니다.
▲ 인왕산에 대하여
서울은 크게 바깥쪽 4개 산과 안쪽 4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사산(바깥쪽 4개)은 동쪽의
용마산, 남쪽의 관악산, 서쪽 덕양산(행주산성), 북쪽 북한산(삼각산)을 말하고 내사산(안쪽
4개)은 북쪽 백악산(북악), 동쪽 타락산(낙산), 남쪽 목멱산(남산), 서쪽 인왕산을 일컫는다.
이 내사산이 서울 분지를 이루고 있어 이 산들을 연결해 도성을 쌓았다.
경복궁 서쪽에 아름다운 암골미를 드러내고 있는 인왕산은 68년 1.21사태 이후 입산이 전면
금지돼 있다가 93년 3월 문민정부의 첫 선물로 25년만에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산이다. 우리
나라의 암벽등반 태동기에 많이 찾던 등반 대상지로서 지금의 치마바위 등은 초보자 훈련장
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인왕산은 산의 높이에 비해 약수터가 많아 어지간한 등산로는 십중
팔구 약수터를 경유하게 된다. 또한 바위산이기 때문에 조망도 좋고 곳곳에 기암들이 산재
해 있다. 기차바위, 치마바위, 매바위, 범바위, 이슬바위, 모자바위, 선바위, 지렁이바위 등이
저마다 신기한 모습들을 뽐내고 있다.
인왕산은 서궐과 함께 사직단이 들어설 만큼 권위적인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나아가 인왕
의 산기슭은 큼직큼직한 바위 계곡과 맑은 개울, 송림이 어우러져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살
림터와 풍류처로도 각광을 받았다. 백운동(白雲洞), 세심대(洗心臺), 청풍계(淸風溪), 옥류동
(玉流洞), 송석원(松石園), 취병암(翠屛岩) 등 계곡과 동네의 이름만 보아도 도학(道學)의 터
전이 형성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이름난 곳은 안평대군이 살던 수성동(水聲洞), 현재 경기상고가 들어선 조광조의
제자 성수침(成守琛)의 청송당(聽松堂), 배화여고가 들어선 이항복(李恒福)의 필운대(弼雲
臺), 조선 후기 서인(西人)-노론(老論)계의 중심을 이룬 안동 김씨가의 청풍계와 옥류동 일
대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겸재 정선이나 풍속화의 선
구인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示石) 같은 선비화가들이 배출된 터이고, 천수경(千壽慶)
등이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구성하여 조선후기 서민문학을 부흥시킨 곳이기도 하다. 이
들 외에도 뛰어난 사상가와 시인 묵객이 많이 배출되었고, 따라서 인왕산 동편은 명실공히
사림(士林) 문예(文藝)의 명소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처럼 사림의 문화가 터를 잡기 이전부터, 인왕산은 한양의 불교성지였다. 인왕산이라는 이
름을 갖게 한 인왕사를 비롯해서, 선승들의 수도처인 금강굴(金剛窟), 세조 때 지은 복세암
(福世菴), 궁중의 내불당(內佛堂) 등 도성의 네 산 가운데 가장 많은 사찰이 있었다. 특히
인왕사의 인왕은 금강역사상으로 사찰의 입구에 배치되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인왕산은 한양땅을 지켜주는 수문장역할까지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인왕산, 암석 바위정령 숭배로 민간신앙의 중심터가 된 한양에서 인왕산은 그같이 컸던 사
회적 문화적 역할 이상으로 민간신앙의 중심 터였다. 특히 암석 숭배 혹은 바위 정령을 믿
는 우리나라 민속신앙의 성향으로 보아, 인왕산의 형세는 그만한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
다. 화강암 거암이 넓직하고 듬직하게 솟아 둥그스레한 주봉의 암반은 당당한 위풍을 뽐내
고, 그 주변과 계곡에 박힌 크고 작은 바위 형상들은 모두 개성적이다. 모양새에 따라 불리
우는 말바위, 매바위, 삿갓바위, 부처바위, 맷돌바위, 치마바위와 조바위 등 그 이름도 재미
있고 다양하다.
이들에는 각각의 설화와 의미가 서려 있으며, 특히 치마바위는 중종과 폐위된 신씨(愼氏)와
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신씨는 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공신들의 압력으로 폐
위되었다가 영조때 복위된 단경왕후이다. 중종은 신씨를 보고 싶을 때면 누각에 올라 신씨
의 집 쪽을 바라보곤 했는데, 신씨가 그 사실을 전해듣고 집안 위쪽에 있는 큰 바위에 자신
이 궁중에서 입던 분홍색 치마를 눈에 띄게 펼쳐 놓았다고 한다. 중종은 그 치마를 보며 신
씨를 향한 애절한 감정을 삭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선바위를 비롯해서 서울 여인들이 성신앙이나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인왕
산의 주요 바위는 모두 성곽 밖으로 밀려나 있다. 한양에 조선의 도성이 들어서고 유교사회
의 기틀이 확고히 잡히면서 그리 되었을 것이다. 또 도성이 인왕산 정상을 동서로 가르는
위치에 세워진 탓으로 민간신앙의 터는 자연히 성밖 신세로 전락하였다. 여기에도 무학대사
의 패배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온다.
도성의 안팎 서울 사람들이 치성드리러 찾은 가장 영험스런 곳은 서성(西城)의 서대문 밖,
홍제동 고개를 넘어가기 전 인왕산 중턱에 우뚝 솟은 선바위이다. 지금의 소재지는 서대문
구 현저동이고, 서울시 민속자료 제 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바위가 있는 주변의 바위들과
땅은 대부분 신령이 깃든 장소라고 전해진다.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천황의 신사를 세우면서 목멱신사인 국사당을 철거하고, 그 사당을
바로 선바위 아래에 옮겨 지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중요민속자료 제 29호인 국사당에 오르
다 보면 주변이 온통 무속촌을 이루고 있다. 현재 국사당에는 태조와 왕비 강씨부인상을 비
롯해서 무학대사, 나옹, 최영장군, 민중전상과 산신, 용왕신, 칠성신, 삼불제석도 등 중요민속
자료 제 17호로 지정된 무신도들이 모셔져 있다.
선바위는 두 덩어리의 거석으로 구성된 모양이 마치 인물상을 연상케 하는데, 특이하게도
바위에 수직으로 홈이 패이고 구멍들이 나 있다. 고깔을 쓴 장삼 차림의 승려를 닮은 오른
쪽 바위가 승려의 화신이 돌부처로 변한 모습이라 하여 ‘선암(禪岩)’으로 불리우게 되었
다고 전해온다. 그런데 이곳에 암자를 짓고 신도들의 기원을 염불해주는 만혁스님의 얘기를
들으니, 기존에 정리된 내용과 사뭇 다른 점도 있었다. 만혁스님이 구술한 이곳 선바위에 얽
힌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바위 형상을 장삼차림의 스님 상으로 보아 참선하는 의미의 ‘선(禪)’바위라 하는 명
칭은 잘못이며, 원래 제사터라는 뜻의 ‘선(土單)’바위가 옳다. 이곳은 무학대사가 이성계
를 위해서 기도한 장소에서 연유했기 때문에 선암으로 이름되었다는 것이다. 무학대사의 1
백일 기도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이은 성공적인 조선 건국과 잘 맞아떨어졌다 하여, 선
바위는 한 가지 소원만을 지성을 다하여 빌면 성취되는 장소로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그래
서 두 거암의 선바위는 무학대사와 이성계상이라고도 하며, 이성계 부부상이라 전해오기도
한다.
또한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도성을 쌓을 때, 그 장소를 놓고 무학대사와 관료들의 주장
이 대립되어 태조가 고민하던 중에 인왕산에 눈이 내렸다고 한다. 산 정상의 능선을 따라
눈이 한 쪽만 녹으면서 선이 그려졌는데, 하늘의 계시로 믿고 그 눈자국을 따라 성을 쌓았
다는 것이다. 그러는 바람에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도록 성을 쌓아야 된다’고 주장
했던 무학대사의 뜻이 좌절된 셈이다. 그때 무학대사는 통탄하며 조선시대에 불교가 쇠퇴하
고 유학자들에 의해 억압이 지속되리라 예견했다는 것이다.
‘서울’이라는 이름이 눈의 선을 따라 도성의 울타리를 둘렀다는 의미의 ‘설울, 즉 설성
(雪城)에서 연유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 선바위는 신기(神氣)가 서린 곳으로 그같은
설화가 생기기 이전부터 서대문 안팎의 사람들, 특히 한양댁들의 소문난 신앙처였을 것이다.
이 선바위는 자식을 두지 못한 사람들에게 큰 영험을 내린 장소로 반가(班家)나 서민층 아
낙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바위에는 작은 돌을 가지고 표면을 문질
러서 붙이면 더욱 효험이 높다고 하여 ‘붙임바위’라 부르기도 한다(부암동의 유래). 그렇
게 치성을 드린 흔적이 바위의 몸체에 여기저기 보이고, 요즈음에도 참배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 경희궁에 대하여(홍순민 박사의 '우리 궁궐 이야기' 중 "경희궁"에서 발췌·요약)
서울에 있는 다섯 궁궐 가운데 가장 크게 망가진 궁궐은 경희궁이다. 지금 경희궁은 궁궐
이라는 이름조차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어 일반인들은 그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경희궁이 원래부터 그랬을 리는 없다. 경희궁은 조선왕조 인조 이후
에는 동궐에 버금 가는 이궁, 즉 서궐이었다.
'경희궁'은 경사진 야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지은 궁궐로 건축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그 아름다
움이 뛰어났던 궁으로 1905년, 고종이 경운궁(덕수궁)과 이어지는 구름다리를 만들 정도로
규모도 상당했다. 그러나 1908년 일제에 의해 경성중학교가 세워지면서 중심부 건물들이 헐
려 나갔다. 당시의 흥화문은 박문사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숭정전은 동국
대 구내로, 그 밖의 여러 전각들도 곳곳으로 이건 되어 지금의 복원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는 궁궐지 자체가 매몰되어 버릴 정도로 궁궐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
해방이후에는 그 터에 서울 중·고등학교가 들어섰다가 1978년에 서울 고등학교는 서초구
서초동으로 이전하였다. 그 터는 민간기업인 현대건설로 매각되었다가 1984년 서울시에서
공원을 조성하기 위하여 다시 매입하였다. 1984년 8월부터 정전인 숭정전터를 중심으로 발
굴조사를 하여 '숭정전'과 그 주위의 전각들이 복원되었다.
1995년부터 서울시에서 내전과 동궁, 생활기거공간, 내원 등 대부분의 구역에 걸쳐 서울 시
립박물관을 지어 사용하고 있다. 이런 행위는 일제에 이은 '문화파괴' 행위이며, 이런 행위로
인해 후손에게 물려 줄 궁궐 '경희궁'이란 위대한 유산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경희궁은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고 '순종'이 왕이 되는 융희 연간에 들어가면서 급속도로 훼손되
고 파괴되었다. 총독부 체제로 넘아가는 그 시점에 비어 있던 궁궐인 경복궁과 경희궁은 그
'대지와 건물'이 이른바 국유, 곧 총독부소유로 넘어가게 된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대에 들어서서 궁궐 중건 사업이 활발
히 추진되었다. 1608년(즉위 년) 5월말에는 종묘가 완공되었고, 8월에는 창덕궁의 주요전각
이 상당히 완성되었다. 광해군은 창덕궁 중건 공사를 진행하는 한 편 '창경궁' 중건 공사도
재개하여 1609년 가을 무렵에는 거의 완공 단계에 이르렀다.
1615년(광해군7) 봄에는 인왕산 아래에 새 궁궐을 짓자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법궁 하나만으
로는 "왕"이 정상적으로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므로 이궁으로서 궁궐을 하나 더 짓는 것
은 어찌 보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법궁'이었던 경복궁을 버려두고 새로운 궁궐을 짓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였음에도 이러한 사업이 추진된 것은 광해군이 술사들의 의견을 경청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짓게 된 궁궐이 인경궁이다.
"인경궁" 공사가 본격적인 단계에 이른 1617년(광해군9) 6월. 또 다른 술사가 새문동에 왕기
가 있으니 새 궁궐을 짓자는 주장을 하였다. 새문동이란 인왕산 자락이 내려와 운종가와 만
나는 지역이다. 그곳은 서북편으로 산을 등지고 동남향으로 평지를 안고 있어서 주거지로서
적합한 지역이다. 그곳에는 주택들이 밀집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광해군의 이복 동생 '정
원군' 의 집이 있었다. 정원군은 1615년(광해군7)에 죽임을 당하고, 그 집은 '관'에 몰수되었
다. 광해군은 그 터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술사'의 말을 받아들여 궁궐을 짓기 시작하였
으니 그것이 곧 "경덕궁", 즉 오늘날의 경희궁이다. '경덕궁'을 짓는 일은 명분이 취약한 일
이었다. 그런만큼 광해군은 더욱 집요하게 공사를 강행하였다. 그러나 공사는 '광해군'이 재
촉하는 만큼 그렇게 원활하게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규모를 창덕궁에 준하여 잡았던 인경궁에 비해서, 경덕궁은 정식 이궁이라기 보다는 일시적
인 피난처로 생각한 궁궐이기에 그 규모를 작게 잡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간소하게 짓는다
하더라도 왕이 이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규모와 제도를 구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창덕궁, 창경궁 중건 보수 공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인경궁과 경덕궁 영건
공사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었던 만큼 인력, 물력 동원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사는 초기에는 그런대로 진척되어 1619(광해군11) 8월 무렵에는 "경덕궁"의 각 처소가 거
의 다 조성되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광해군의 독려에도 불구하
고 지연을 거듭하여 4년이 더 걸린 1623년(광해군15)에야 완공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해 3월 12일 일어난 인조반정 탓에 새 궁궐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광해군은 쫓겨났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당시 인목대비가 기거하고 있던 경운궁에서 즉위하였지만, 창덕궁
과 창경궁 즉 동궐을 법궁으로 사용하였다. 인조가 왕이 된지 1년이 못된 1624년(인조2) 1
월, 함께 반정에 가담하였던 이괄이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인조는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와중에 창덕궁과 창경궁은 크게 불탔으므로 인
조는 경덕궁으로 임어하여 거기서 9년을 살았다. (이로써 '경덕궁'은 실질적으로 이궁의 지
위를 갖게 되었다)
경덕궁에 사는 동안인 1627년(인조5) 말에는 다시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는 1월 26일부터
4월 12일까지 강화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왔다. 인조는 경덕궁에서 지내다 1632년(인조10) 말
에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그 무렵 창덕궁과 이웃한 창경궁으로 이어하기 위해 그 건물들
을 수리하는데 인경궁의 건물들을 일부 헐어 그 자재들을 사용하였다. 그렇게 창덕궁과 창
경궁에서 지낸지 3년이 지난 1636년(인조14) 12월에는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는 이번
에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나라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듬해 1월, 청에 항복하고
창경궁으로 되돌아 왔다.
이렇듯 인조 연간의 내외 정세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으므로 인조 반정 때 불에 탄 이후로
제대로 수리하지 못한 채 버려두고 있던 법궁, 창덕궁을 본격적으로 수리하는 사업은 1647
년(인조 25)에 가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재차 '인경궁'의 전각들을 헐어다 수리공사를 진행
한 결과 창덕궁은 법궁으로서 옛 모습을 거의 되찾았다(인경궁은 창덕궁 수리공사로 말미암
아 완전히 그 모습을 잃어버린 데 비해 경덕궁은 그대로 남아 이궁으로 쓰였다).
그렇게 이궁이 된 경덕궁은 1760년(영조36) 2월에 인조의 아버지 원조의 시호 경덕과 음이
같다 하여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하여 인조 이후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칭하
여 '동궐'이라 한 데 대해 경희궁은 '서궐'로 불리며 새로운 양궐 체제의 한 축이 되었다.
인조 이후 왕들은 법궁인 동궐과 이궁인 서궐을 오가며 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