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일에 묻혀 살다
열흘 전 내가 사는 아파트를 전면 개보수하려는 업자가 다녀갔다. 이삿짐을 싸서 세간을 옮기지 않고 집에 머물면서 리모델링하려니 일의 절차가 간단하지 않았다. 주택지 공실 원룸에 한 달 세를 들어 머물까도 싶었으나 그것도 번거로울 듯했다. 병약한 아내는 공사기간 중 도심의 번듯한 호텔로 나가 머물고자 한다. 이럴 때는 내 뜻보다 아내가 하려는 대로 맡겨둠이 상책이다.
일단 일주일 뒤 인부들이 들이닥쳐 베란다 창틀과 방문의 설주와 문짝을 철거 교체하고 붙박이 옷장을 설치하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진다. 이후 주방 싱크대와 욕실 베란다 타일과 도색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벽면 도배와 바닥 장판을 깖으로써 리모델링이 마쳐진다. 이렇게 단계별 공정을 거치는데 걸리는 시일이 보름 남짓이라 했다. 이 기간 생활에 불편을 감수함은 불가피하다.
오월 첫째 월요일은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에서 생활쓰레기 분리배출을 하는 날이었다. 지난번 분리배출 때도 여러 잡동사니를 내렸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창틀을 철거할 때 낡은 장롱과 서가를 비롯한 덩치 큰 세간들은 시공업자가 고가사다리로 내려주기로 했다. 그밖에도 생활의 때가 묻은 소소한 물건들은 폐기해야 하는데 분리배출을 하는 날에 일단 밖으로 내려놓기로 했다.
일전 상당한 분량의 책은 끈으로 묶어두었는데 시공업자가 가져가기로 했다. 이밖에 생활쓰레기는 폐기물 처리 비용을 지불하고 내리는 것들이다. 앞뒤 베란다에 있는 시렁과 식탁의 유리와 쓰지 않는 경대 등 골동품급의 여러 물품이 그 대상이다. 이 일 말고도 주방 기기나 각종 살림 도구들은 후일 박스에 담아 포장해서 현관 바깥 계단 통로로 내어 놓았다가 다시 들일 예정이다.
일주일 전 하루 종일 서가에 꽂힌 책을 정리했는데도 못다 하고 남은 책을 마저 묶었다. 이번에는 폐휴지 수거 업자가 가져갈 책보다 서가를 새로 마련하면 꽂아둘 책이 더 많았다. 서울로 떠난 아들 녀석이 봤던 책들도 다수였다. 보존용 책은 노끈으로 묶은 뒤 비닐을 씌워 먼지가 끼지 않도록 감싸놓았다. 열흘 남짓 현관 바깥 계단 통로에 쌓아두면 먼지가 낄 염려가 있어서였다.
오월 첫째 월요일 아침나절은 현장학습을 쉬면서 집안일에 몰입했다. 베란다 창고를 정리하면서 폐기 대상은 현관 밖으로 꺼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아파트 뜰로 내렸다. 물품이 많고 무겁기도 했지만 혼자서 하나씩 내렸다. 식탁에 깔았던 유리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했다. 장롱이나 신발장처럼 혼자 움직이기 힘든 것들은 공사 첫날 고가사다리로 내리기로 되어 있어 남겨 놓았다.
이후 폐휴지 묶음을 내리고 이어 낡은 경대와 베란다의 녹슨 시렁을 처리했다. 식탁도 교체해야 해서 바닥에 깔린 유리를 내리고 경비한테 폐기물 처리 비용을 정산해 주었다. 일주일 뒤 공사 첫날에는 폐기물이 더 많이 쏟아져 나오지 싶다. 폐기물과 생활쓰레기를 내리고 주방의 그릇을 비롯한 살림 도구들은 이삿짐처럼 포장해 운반이 쉽도록 정리할 일은 내일모레로 미뤄 놓았다.
지나칠 정도로 위생과 청결에 신경 쓰는 아내는 내가 하는 일이 마음 들어 하지 않아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어 유감이다. 이사를 가지 않고 세간을 둔 채 사는 집을 리모델링함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포장이사라면 용역에 위임한 일꾼들이 손발을 척척 맞춰 수월하게 진행되겠지만 이 정도 일을 이삿짐센터에 맡길 처지가 못 되어 묵묵히 혼자 바삐 보낸 날이다.
점심 식후에도 서가와 서랍 속의 잡동사니들을 내리고 꺼내어 종이 박스에 묶는다고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날이 저물어 오기 전 아직 현직인 대학 벗이 퇴근하는 길에 같이 한군데 들렸다. 창원축구센터 인근 벗이 가꾸는 텃밭 이웃에 고령의 할아버지가 짓는 터를 인수 받았는데 나보고 그곳을 경작하라고 소개시켜주었다. 나는 길을 나서면 어디나 내 남새밭이나 마찬가지인데 … 22.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