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諜報員(첩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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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첩보 저술가 어니스트 볼크먼에 따르면 스파이는 세계에서 둘째로 오래된 직업이다. 5000년 전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정치체제와 밀착돼 있으나 은밀한 활동이라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다. 첩보의 역사란 곧 비공식의 세계사인 셈이다.
특히 20세기는 ‘첩보(諜報)의 르네상스’라 불린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냉전 체제, 테러와 국지전으로 첩보전쟁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볼크먼은 “첩보는 공인된 반칙”이라며 20세기 세계사의 주요 고비마다 첩보전의 힘이 주효했다고 썼다(『20세기 첩보전의 역사』).
그에 따르면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서머싯 몸은 아마추어 첩보원이었다. 헤밍웨이는 아시아 여행 때 일본의 진주만 침공 계획을 알고 이를 미국 정부에 알렸지만 무시당했다. ‘007’ 시리즈의 원작자 이언 플레밍이 한때 스파이였다는 설도 거듭 제기한다. 플레밍은 실제 소설가가 되기 전 영국 정보부에서 일한 적이 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 성공 비화 속 스파이들의 활약상도 파헤친다.
영화에서도 첩보는 주요한 소재다. 첩보영화라는 장르가 생겼다. 최첨단 무기, 변장술, 액션신 때문에 일정 수준의 시각효과·스펙터클이 가능해진 1960년대 들어 꽃을 피웠다. 44년간 21편이 나온, 최고·최장의 극장용 시리즈 ‘007’, ‘미션 임파서블’로 리메이크된 ‘제5전선’ 등 첩보영화·드라마·소설이 봇물을 이뤘다. 첩보원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도 이런 영화들에 의해 구축됐다.
첩보영화는 강력한 이념적 역할도 했다. 냉전체제 붕괴 후에는 아랍권·테러집단을 악의 축에 놓았다. 한때 마초 본드와 백치미인 본드걸이라는 성 이미지로 비판받기도 했다. 물론 최근 첩보영화들은 현실 변화를 따라 변화 중이다. 정보기관 내 갈등, 정보원들의 인간적 고뇌에 초점이 맞춰진다.
모든 첩보영화에는 빠지지 않는 공식이 있다. 첩보원들의 철저한 신분 보호, 혹은 신분 위장이다. 요원들은 가족에게도 신분을 숨기며 살아가고, 팀원들 역시 서로를 잘 모른다. 그들에게 신분 노출은 곧 미션 실패, 혹은 죽음과 동의어인 것이다.
최근 탈레반에 피랍된 젊은이들을 구출해내는 과정에서 우리 정보기관 수장의 ‘미디어 과잉 노출’이 도마에 올랐다. ‘선글라스맨’도 함께 카메라에 노출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21세기형 국정원의 모습”이라고 옹호했지만,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구호가 절로 무색해진다. 지금껏 어떤 첩보영화에서도 보지 못했던 민망한 장면이다.
출처:중앙일보 글.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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