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기 한 권 읽기에 동시집을 넣고 싶어서 김개미 시인의 시집 세 권을 주르륵 읽었다.
최종 결론은 이 시집 땅땅땅! 말이 필요 없다. 다른 선생님들도 읽어보면 좋겠다.
특히 책머리에 나오는 작가의 할아버지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저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 볼게요. 인제군 지명 유래 사전에도 등장하는 '좌절한 동굴 탐험가 김순봉 씨'가 제 할아버지예요. 할아버지를 동굴 탐험가로 만든 것은 호기심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길을 가다 구멍을 발견하면 손도 넣어 보고 머리도 넣어 보고 또 어떤 때는 지겟작대기로 쑤셔 보기도 했습니다. 온몸에 검불을 뒤집어쓰는 건 물론 벌에 쏘이거나 상처를 입는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간 앞에서는 할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지요. 언제까지나 동굴을 들락거릴 수는 없었습니다. 눈이 침침해지자 할아버지는 제게 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손녀딸 좀 봐라,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 신문을 줄줄 읽지 않느냐, 윗집 귀머거리 영감을 불러다 앉혀 놓고서 자랑을 했지요.
신문은 도무지 재미가 없었고 저는 슬슬 꾀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제게 솔깃한 제안을 했습니다. 책을 다섯 장 읽어 줄 때마다 편지지를 주겠다고 말이지요. 고민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책도 공책도 없어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려면 가위로 문풍지를 오려내야 했으니까요.
할아버지와 저는 착실한 계약 이행자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사랑방에 누워 있으면 저는 할아버지 머리맡에 앉아 <장길산>과 <임꺽정>을 읽었습니다. 뜻도 모르면서 말이지요. 입이 바짝 마를 즈음, 할아버지는 마루로 나가 커다란 송판 하나를 들어냈습니다. 그 아래 할아버지의 비밀 창고가 있었거든요. 할아버지는 온몸에 주렁주렁 거미줄을 달고 한참 만에야 올라와 편지지를 내밀었습니다.
저는 그 편지지에 그림도 그리고 글씨도 썼습니다. 그 계약은 3년 동안이나 잘 지켜졌습니다. 계약을 파기한 건 저였어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엄마가 공책과 종합장, 스케치북을 사주더라고요. 넘 오래된 일이라 잊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등단이란 걸 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때의 일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힘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쓰는 순간마다 저는 엄마였고 아빠였고 친구였고 선생님이었고 세계였던 할아버지를 만납니다. 돌아가신 지 30년도 더 된 할아버지가 제 가슴속 계단에서 걸어 올라와 제게 편지지를 내밉니다. (4-6쪽)
아직 집에 있으면
따뜻하게 입고 학교 가거라
여긴,
암탉의 눈동자가
공깃돌처럼 달그락거리고
개밥그릇의 물은
시멘트처럼 딴딴해서
거꾸로 들어도 안 쏟아진단다
지겟작대기 같이 키 큰 고드름이
지붕을 꽉 붙들고
차돌 같은 할미 이빨은 딱딱
북을 치고 야단이란다
그러니 우리 강아지,
단단히 입고 학교 가거라
Joe Hisaishi - Merry_Go_Round (from 'Howl's Moving Cas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