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대략 보시면 아시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수구 골통들의 계보 정도는 알아두는게 좋다고 생각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오류는 즉시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맨 마지막 문장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라지만 구라는 아닙니다. _-_
한국 민주당: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은 한반도 지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한국인들의 독립을 돕기 위해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고 조선인들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좌익들의 세력확장이 두려웠던 우익들은 좌익들의 세력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동아일보를 통해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고 3상회의 결과를 왜곡 보도하였다. 나중에 3상회의 내용이 알려져 3상회의 내용에 따라 미군정과 협력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하지만 우익들의 반대와 냉전의 시작으로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이 된다.
자유당: 이승만이 만든 자유당은 정권연장을 위해 많은 계획을 세웠었다. 이에 보수주의자들이 뭉쳐 창당한 민주당이 신익희, 장면 등의 인사를 대통령, 정통령 후보로 내세워 자유당의 독재에 저항하려 했지만 자유당은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된 1948년 부터 1960년 4월까지 약 10여년간 장기집권을 하게 된다. 1960년 3월 15일 선거 당시에는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벌여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려 하였으며, 이에 분노한 민주당과 시민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게 된다. 마산과 부산에서 시작된 이 시위는 후에 4.19 혁명으로 발전. 이승만이 몰락하고 이기붕 일가가 자살하고, 아시아 최초의 민주혁명이 벌어지게 되는 큰 역할을 하게 된다.
5.16 구舊군부: 4.19 이후 허정 과도내각의 헌법개정을 통해 의원내각제 정부형태로 수립된 제2 공화국은 민주당의 구파인 윤보선 대통령과 민주당의 신파인 총리 장면의 다툼으로 많은 혼란이 있었다. (땅나라당 수구 골통 같은) 혹자는 이를 보고 박통이 집권한 이유가 대한민국의 사회 혼란의 수습과 경제발전을 위해 집권했다고 하겠지만, 박통이 혁명 후 사회혼란이라고 규정한 것은 민중들의 통일운동이었고(고로 이건 사회혼란이 아니라는거다) , 2공화국 정부는 당시 경제 5개년 개발계획을 세워놓았었다.
하여간. 박통은 대한민국의 사회혼란을 보고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함께 군사쿠데타를 감행한다.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이후 소위 혁명정부가 수립되고, 혁명정부는 각종 비리로 얼룩져 국민들을 고통에 빠트린다.
민주공화당: 5.16 군사반란 이후 박통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빠칭코 사건과 삼분폭리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을 통해 정치자금을 모아 민주공화당을 창당한다. 그리고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 윤보선에 맞서 국민들의 엄청난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대통령이 된 박통은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배상금이 아닌 독립축하금이라는 명복 하에 약 6억의 돈을 받아 경제발전에 쓰고(대략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들 생각은 안했다는 것이다), 1967년에는 경제발전의 지속과 국가 안정을 구실로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을 개정, 장기집권의 토대를 닦았다.
1972년 10월. 박통은 7.4 남북선언 이후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을 위한다는 구실로 유신을 선포하였다. 그 내면에는 1971년 대선 당시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과의 경쟁에서 박통과 김대중의 표차이가 95만표라는 것에 정권 찬탈의 위협을 느껴 장기집권을 획책하게 된 것이다.
12.12 신新군부: 10월 26일. 박통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된 이후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이 된다. 박통의 죽음 이후 많은 사람들은 대한민국 땅에 민주화의 꽃이 피워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2월 12일.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대장의 군내 사조직 하나회 제거에 불안을 느낀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과 9사단장 노태우 소장은 자신들의 세력을 이끌고 쿠데타를 감행! 정승화 대장을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하게 된다.
군부를 장악한 그들은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있었던 민주화 운동 물결에 불안을 느끼고, 1980년 5월 17일. 전국으로 비상계엄령을 확대하게 되었다. 비상계엄 확대 이후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전라남도 광주에 공수부대를 보내 많은 대학생과 시민들을 상대로 잔인한 유혈진압을 벌이게 되고, 이에 시민들은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 이후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계엄군에 맞서 싸우게 된다. 시민들의 무장으로 광주시내 밖으로 쫓겨난 계엄군은 전력을 재정비해 5월 27일 새벽. 광주시내를 공격해 도청에 있던 시민군들고 전투를 벌여 열흘간의 광주민주항쟁을 진압하게 된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전두환은 부랑배들과 조직폭력배들을 순화시킨다는 목적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조직폭력배나 부랑배가 아니었던 많은 사람들을 고통속으로 내몰고, 이 가운데 국가보위입법회의를 통해 7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5공화국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민주정의당: 1981년 3월 3일. 대한민국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은 집권 초기. 민주세력에 대한 강경한 정책을 펼친다. 그러다가 대다수 민중들이 정치에 대한 관심을 멀게 하기 위해 3S 정책, 프로야구, 프로축구 창설을 통해 국민들을 우민화 하였다. 그리고 1981년에 있었던 국풍81을 통해 사상 최대의 잔치판을 벌여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멀어지게 하였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위기가 있었지만 1987년 대선 당시 전두환 세력의 사전 공작으로 민주세력을 분열시켜 12.12 군사반란 당시 9사단장이었던 노태우를 대통령에 당선시킨다. 노태우는 집권 이후 여소야대 현상으로 위기를 겪게 되지만 1990년에 있었던 3당합당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 하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사이 미국의 광주진압 개입과 관련해 수많은 반미운동이 벌어지고, 학원의 민주화, 직장의 민주화, 생존권 투쟁을 위한 시위와 파업이 많이 벌어졌었다. 그리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분신자살이 끊이지 않았고, 1987년 1월에 있었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전두환의 호헌 주장으로 분노해 있던 민중들을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었다.
그 이후: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이후 하나회 해체와 금융실명제라는 엄청난 태풍으로 한국사회가 많이 변화한다. 그런 가운데에도 한국민주당-군사반란세력-민주공화당-민주정의당의 계보를 잇는 골통 세력은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암약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지랄발광을 하였다(;;;). 1997년 대선에서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이 맞붙어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 정권교체를 이루어내 2008년 1월 현재까지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군사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지난 2007년 12월 19일에 있었던 대선으로 수구골통 정당 한나라당의 사기꾼 출신 후보 이명박은 "경제를 살리겠습니다!"라는 공약으로 61%라는 낮은 투표율에 48%라는 엄청난 지지율(이라지만 다른 대선과 비교하면 대략 쓰레기 같은 결과;;;;)로 당선이 된다.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명박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조직하게 되면서 과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전 숙명여대 총장 이경숙을 대통력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으로 발탁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시와 대운하 건설 공약, 복지비 국방비의 감액, 대북정책에 대한 변화등으로 노통장이 대통령으로 버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당선자 주제에 지가 벌써부터 대통령이 된냥 깝치고 있다.
수구골통 계보를 쓰면서 대략 대한민국 미래를 생각하면 미쳐 돌겠다. -_-
첫댓글 제일 먼저 좃중동 부터 까부셔야하오..
한민당이 매국 친일 비호의 원조 맞습니다,,그 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 처럼 지금의 한나라 까지...대를 물려가며 악질 친일의 잔재를 비호하는 세력입니다, 그들이 이번에 명박이를 대통령으로 내세은 거대 세력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