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이명선
내려다볼 수 있는 미래는 더 먼 미래로 가야 볼 수 있을까 말린 과일을 접시에 담으며 먼저 늙겠다는 네가 어느 순간 늙어 시계가 걸린 벽을 바라보았다 너의 테 없는 안경을 쓰고 양 떼가 이동 중인 초원을 거닐 수 있다면 움트는 새벽을 맞게 될지도 몰라 그간의 일에 슬픔이 빠지고
사람의 손을 네가 먼저 덥석 잡아 줄 리 없으니 내가 아는 너와 지금의 너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다시 너에게 오는 사람이 지금의 너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나는 살갑게 네가 올려다볼 세상을 상상하면서 조금 더 늙어 버려 식탁에 앉아 말린 과일을 놓고 생애주기가 다른 바다생물 이야기에 벌써 눈부신 멸망을 본 듯 말하고 있다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을 우린 아직 버리지 못해서
시집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2022. 걷는사람 시인선
막역하던 사람이 막연해질 동안
이명선
당신의 추도식이 있는 성당 맞은편으로 주말이면 플리마켓이 열린다 자유로운 추모 속에 사이프러스 이파리가 반짝이고 어린 무법자의 양손에는 아침을 씻어낸 작은 고양이가 안겨 있다
철망을 넘어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이 생겨나 빗장에 걸어둔 오후가 여린 맥박처럼 몰려다녔다
막역하던 한 사람이 막연해지는 동안 우리는 언제나 호의적인 사람 곁에서 아름다운 착지와 희망을 이야기한다 어둠이 기거하던 철망 너머 불 꺼진 방과 저무는 도시의 창문을 장밋빛으로 물들일 수도 있다
당신의 날씨에서 빠져나온 오래된 종려나무 화석과 여러 지명이 찍힌 낙과들이 물들어 갈 때 고양이 앞에 웅크린 무당개구리의 점액질에서 치명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죽이 잘 맞던 애인과 둔덕이 많은 도시를 찾다 잠든 밤에도 네일숍 간판은 여전히 깜빡이고 곳에 따라 흩뿌리는 비
여긴 대체로 일조량이 적어 아침에 눈을 뜨면 확신이 들거나 수월한 일이 없었다
시집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2022. 걷는사람 시인선
이명선 시인
충남 홍성 출생
2017년 『시현실』, 2018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