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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십이령 바지게꾼이라 하면 먼저 이의 발상지가 부구시장이요, 바지게꾼이 내왕하던 곳이 북면이었기 때문에 북면 주민에게는 누구보다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바지게꾼이란 바지게라는 지게에 바다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해산물을 싣고, 흥부에서 출발하여 십이령을 넘어 소천, 춘양, 내성 등지를 다니며 팔고, 그 곳에서 곡물, 담배 등을 사서 짊어지고 돌아 오는 즉, 물물 교환하는 행상으로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에는 영동과 영서를 잇는 생산물 유통 수단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바지게꾼들의 모습은 일제말기까지 볼 수 있었으나 차츰 사라지고, 이제는 50년 전의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바지게꾼들의 활동 양상을 보면, 옛날 흥부 장날은 3. 8일 장으로, 당시 주변엔 장날이 없던 시대여서 울진장 다음 가는 큰 장이다. 울진, 삼척 등 각처에서 많은 행상들이 모여 들어 장이 크게 섰는데 바지게꾼들도 한몫을 하였다. 이렇게 흥부장에서 해산물을 구입하여 짐을 챙긴 바지게꾼들은 그날밤을 주막에서, 날이 새면 장도에 오르는 행운을 축원하여 막걸리를 나누며 하룻밤을 지내며, 때로는 노름도 하고, 정든 주모와 석별의 정을 속삭이기도 했다.
흥부장을 떠나 소천, 춘양까지 십이령을 넘게 되는데 그 고개 이름은 쇠칫개재→세고개재→바릿재→샛재→너삼밭재→젖은텃재→작은넓재→큰넓재→꼬치비재→맷재→배나들재→노룻재인데 이 열두 고개를 넘어 일백오십 여리를 3~4일 걸려 걷게 된다.
걷다가 날이 저물면 길옆 외딴 주막집에서 숙박하며 솥단지 밥을 지어 먹으며 다녔다. 걷다가 잠깐 쉴때는 지게를 내려 놓지 않고, 물미작대기라는 짤막한 작대기를 지게의 맨아래 등태에 받치고, 서서 쉬기 때문에 선길꾼이라고도 하는데 선길꾼이라는 이름은 먼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같다. 바지게꾼의 복장과 모습은 땀이 잘 베이지 않은 질긴 삼베옷을 입었으며 머리는 길게 땋은 머리를 감아 올려서 돌려메고, 신발은 가벼운 짚신을 신었으며 그 인원이 많을 때는 10~20명씩 무리를 지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들의 성격은 활달하고, 기질은 진취적이어서 길 옆의 주민들과 대화를 할때는 항상 자기네 의지를 굽히려고 하지 않고 거센 말투로 자기네 신분을 격하시키지 않으려고 했던 나그네 생활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들의 행상은 살기 위한 고된 선길꾼 생활이었지만 그 반면에 낭만적이고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애피소드도 많이 내려오고 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생활을 하다 보니 그 가운데서 우두머리 될 만한 사람을 뽑아서 통솔자로 정하고, 그의 지시 감독을 받아가며 단체 생활을 하였다. 현재, 두천리 바릿재 밑에 가면 그 당시 접장 정한조와 반수인 권재만이 그들의 상행위를 도와준데 대한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철비 2기가 협소한 사당 안에 있다. 이런 점을 보아 그들의 생활 규범도 꽤 엄했던 것같다. 이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를 소개하면, 행상 도중에 산골 주막집에서 남의 집 아낙네와 불미스런 소문이 날때는 몰매질 처벌로 멍석말이를 당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애환이 서린 바지게꾼 생활을 하노라면 때로는 신세타령과 비슷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당시 불렀던 노래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1.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은 언제가노 2. 대마 담배 콩을 지고 울진장을 언제가노 3. 반 평생을 넘던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4. 서울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5. 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자고 넘네 6. 꼬불꼬불 열두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후렴 : 가노 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고개를 언제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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