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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사와 방한암스님 경허, 만공, 수월과 함께 근세에 크게 선풍을 이룬 방한암스님(1876~1951)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 전쟁이 치열한 즈음 산속의 절이 군사 거점이 된다하여 월정사와 상원사의 소각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에 이르니 노스님혼자서 절을 지키고 있었다. 불을 놓을 터이니 비키시라 하자 방한암스님이, “그렇다면 이 법당과 함께 불에 타서 소신(燒身)공양하겠노라.” 라며 움직이지 않았다. 스님의 굳은 의지에 군인들도 감화를 받고 한걸음 물러났지만, 상부의 명령이었기에 불복종할 수는 없어 절의 문짝만 떼어내 불살라 절이 불에 타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을 때에는 스님을 존경하던 조선 총독이 찾아와 전쟁의 승패를 물었는데 “정의로운 자가 이길 것”이라 의연히 답하기도 하였다.
방한암스님은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중원(重遠), 스물 둘 되던 해 금강산 유람 중에 출가를 결심하였다. 기암절벽(奇巖絶壁)의 경승과 운치 속에서 강렬한 종교적 감흥을 받고 입산한 뒤, 보조국사 수심결 (修心訣)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자성(自性)밖에 법이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티끌처럼 많은 겁을 몸을 태워 기도하는 고행을 하고 팔만대장경을 모조리 독송한다 하더라도, 이는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이 오히려 수고로움만 더 할 뿐이다.” 스물넷 되던 해에는 경북 청암사 수도암에서 우리나라 불교계의 중흥조(中興祖)라고 불리는 경허스님을 만났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일 형상이 있는 것이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볼지라.”하는 경허 스님의 말씀을 듣고 방한암스님은 다시 깨우침을 얻어, 듣는 것이나 보는 것이 모두 자기 자신이 아님이 없었다. 쉰 살이 되던 해 봉은사 주지를 지낼 때에는 “차라리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상춘(常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을 찾았다. 그 뒤 76세의 나이로 입적 할 때 까지 27년 동안 오대산 동구 밖을 떠나지 않았다. 이렇듯 이 땅의 뛰어난 선사였던 방한암스님이 야마가와 주켄(山川重遠)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 명을 하였던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41년 총독부가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설립을 공식 인가한 뒤 초대 종정으로 취임하였는데, [산불교] 제 31집에 사진과 함께 그 이름이 대외적으로 공포된 것이다. 27년 동안이나 동구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던 그가 직접 창씨개명을 했다든가 또는 친일성의 글을 직접 발표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비록 그것이 휘하의 인물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 할지라도 그 오명은 지울 수 는 없는 것이다. 오대산 중대 사자암에는 방한암스님이 꽃아 놓은 지팡이가 있다. “이 지팡이가 사는 날 내가 다시 살아 오리라.” 하였는데, 지금은 그 지팡이에 가지가 돋고 잎이 피어 훌륭한 단풍나무로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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