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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陰山)과 한해(瀚海)가 뒤섞여 있다? 함경도에!
○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나의 조국(祖國)이다.
나의 부모(父母), 증조(曾祖)등이, 이 땅에서 살았으니, 분명(分明)한 것이다. 다만 고조(高祖)로부터 그 이전(以前)의 선조(先祖)분들에 대한 간접적(間接的)인 증거(證據)는 있으나, 직접적(直接的)인 증거(證據)가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반도(半島)의 토착민(土着民)이었는지, 아니면 외부(外部)로부터, 어느 땐가, 어떤 이유(理由)로 이주(移住)를 한 것인지 여부(與否)는 알 수 없다는 뜻이며, 본관(本貫)이 “남 평(南平)”이니, ‘남 평(南平)’은 ‘남원(南原)’과 같고, ‘남원(南原)’은 ‘장사(長沙)’와 같으니 동정호(洞庭湖) 남쪽의 호남(湖南)성 ‘장사(長沙)’일 것이다.
○ 나의 조국(祖國)을 인정(認定)치 않으려는 분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이러한 일은 정권(政權)에게도 일정(一定) 부분(部分) 책임(責任)이 있다. 공교육(公敎育)! 얼마나 설레는 말인가! 그럼에도 공교육이란 말은 “미 사 려 구(美辭麗句)”로 치장(治粧)되고, 상급학교(上級學校)에 진학(進學)하는 입시(入試)학원(學院)으로 전락(轉落)해버린 지금 무슨 말로 위로(慰勞)할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공교육(公敎育) 형태(形態)는 대 변혁(變革)이 필히 요구(要求)되는 시점(始點)이란 것에 이의(異議)를 제기(提起)할 분은 없을 것이다.
○ 병역(兵役)! 병역(兵役)이란, “일정(一定)한 기간(其間)을 군(軍)에 복무(服務)하는 것으로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의 병역(兵役)은 남아(男兒)로써 의무(義務)이다.” 너무도 당연(當然)한 것을 부정(不正)하거나, 인정(認定)치 않으려 하는 분들이 있다.
병역(兵役)은, 나 스스로 내 가족(家族)을 지키는 것이다. 내 가족(家族)조차 지키지 않으려하는 행동(行動)은, 남아(男兒)로써 비난(非難)받아 마땅한 것이며, 우리들의 옛 선조(先祖)들 역시(亦是), 아버지와 아들이, 형제가 나란히, 수년(數年)씩 그 전쟁(戰爭)이 끝나는 그때까지 전장(戰場)을 누볐다. 본인(本人)도 두 살 아래의 동생과 한 달 차이로, 입대(入隊)해, 신병(新兵)교육(敎育) 6주, 특기(特技)교육(敎育) 16 주(기억이 가물가물), 자대 특별교육 4 주, 수료 후 자대(自隊)로 배속되어 34개월을 마치고 육군(陸軍) 병장(兵長)으로 전역(轉役)하였다.
우리들 선조(先祖)들 역시(亦是) 똑같은 삶을 이었으며, 때론 온 가족이 피눈물을 흘리며, 때론 온 가족(家族)이 강제(强制)로 이주(移住)당하는 설움을 당하며, 남편(男便)과 장성(長成)한 아들이 적(敵)들의 칼에 목이 베이는 모습을 보며, 사막(沙漠)의 모래밭에 백골(白骨)이 되어 이름 모를 곳에서 쳐 박혀 있는지도 모른 채,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는 아내와 어머니들! 규방(閨房)에서 한 숨을 쉬며, 전장(戰場)터에 나간 지아비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기다리던 지아비는 소식조차 없이, 유복자(遺腹子)는 태어났다. 우리들의 선대(先代)들, 그렇게 살아왔다.
병역(兵役)을 기피(忌避)한다거나, 병역(兵役)을 비판(批判)하는 것은 각자(各自)의 자유이겠으나, 변함없는 것은, 어떤 경우(境遇)라 하더라도, 병역(兵役)은 필요(必要)하며, 그것은 신성(神聖)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事實)이다. 자신(自身)의 가족(家族)과 자신(自身)의 종족(種族)과 자신(自身)의 조국(祖國)을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기꺼이 산화(散花)했다는 사실은 이것을 증명(證明)하고 있다.
자신(自身)의 의지(意志)와는 관계없이, 아니면 스스로 원하였든 간에, 전장(戰場)에 내 몸이 와 있다는 것은, 때론 어쩔 수 없는 상황(狀況)이 될 수 있다. 적(敵)을 죽어야 내가 살 수 있으며, 내가 살아야 조국(祖國)이 살 수 있으며, 내 조국(祖國)이 살아야만, 사랑하는 내 가족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宗敎)나 국적(國籍), 또는 개인(個人)의 사상(思想), 신분(身分)의 차이(差異)들과는 관계(關係)없는 일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품을, 사랑하는 가족의 품을 버리고, 최전선(最前線)에서 적(敵)과 칼, 창을 맞대고 싶은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겠는가? 전장(戰場)에서 참혹(慘酷)한 하루하루를, 군량(軍糧)보급(補給)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풀뿌리를 씹어 먹으면서도, 고향(故鄕)의 처자식(妻子息)과 부모(父母)님을 그리며, 그렇게 우리들의 선배(先輩), 조상(祖上)들은 산화(散花)되어 조국(祖國)과 가족(家族)을 지켰다.
날아온 화살에 심장(心臟)을 관통(貫通)당하는 고통(苦痛)에 마지막 숨을 쉬려 하겠으며, 적(敵)이 휘두른 칼날에 팔이 잘리고, 목이 잘리는 고통(苦痛)을 당하고 싶겠는가? 총알이 관통(貫通)당하는 아픔을 누가 겪고 싶겠으며, 수류탄(手榴彈) 파편(破片)에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고통을 누가 겪고 싶겠는가? 그렇게 우리들의 동료(同僚), 선배(先輩), 조상(祖上)들은 산화(散花)되어 조국(祖國)과 가족(家族)을 지켰다. 신성(神聖)한 “병역(兵役)”에 대해서만은, 성숙(成熟)한 시민(市民)의 자세(仔細)가 필요(必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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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촌(象村)문집(文集)을 보면, 우리들이 갖고 있는 역사상식(歷史常識)과 배치【背馳 : 서로 어긋나거나 반대되는 것】되는 내용이 아주 많은데, 아래 것 역시(亦是) 이런 유형의 시(詩) 구절(句節)이다.
※ 함경도(咸鏡道)에 부임(赴任)하는 이 도사 “현영(顯 英)”을 보내며. <送 李 都 事 ‘顯 英’ 赴 咸 鏡 道> 【원문(原文)과 번역(飜譯)은 고전번역원의 것이나, 알아보기 쉽게 편집함】
《서울에는 서로 아는 이 적고 : 京 師 少 相 識 / 관문 밖에는 옛 친구 많은데 : 關 外 多 舊 遊 / 묻노니 그대 또한 어찌하여 : 問 君 夫 如 何 / 또 다시 북쪽 변방을 향하는고. : 又 復 向 北 陬 / 음산이며 고비사막이【본인(本人) 주(州) : 음산(陰山)이며, 한해(瀚海)가】 : 陰 山 與 瀚 海 / 뒤섞여 사람을 시름하게 하네. : 錯 莫 令 人 愁 / 새봄이 이미 칠일을 경과하여 : 新 春 已 涉 七 / 봄빛이 매화 버들을 감동시키나니 : 韶 光 動 梅 柳 / 계절의 경치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만 : 節 物 豈 不 佳 / 이별의 정이 도리어 심란하구려. : 離 情 轉 紛 糾 / 중략(中略) 》
○ 위 구절(句節) 중에서, <음산이며 고비사막이【본인(本人) 주(州) : 음산(陰山)이며, 한해(瀚海)가】 : 陰 山 與 瀚 海 / 뒤섞여 사람을 시름하게 하네. : 錯 莫 令 人 愁> 라는 내용은 설사 시(詩)라는 형식(形式)을 갖춰다는 것을 감안(勘案)하더라도, 분명(分明) 지리적(地理的)인 면으로 보면, “함경도(咸鏡道)”라는 곳의 지세(地勢) 특색(特色)을 나타낸 말이라 할 수 있다.
함경도(咸鏡道)라는 곳을 표현(表現)했다면, 험산(險山)준령(峻嶺)이나 음산(陰山)과 같은 변경(邊境)지방을 표현(表現)한 것으로 이해(理解)할 수 있으나, “한해(瀚海)”라는 말은 결코 어울리지도, 비유적(比喩的)인 표현이지도 않으며, 지세(地勢)적으로도 결코 어울릴 수 없는 표현(表現)이다.
더구나 『“음산(陰山)이나 한해(瀚海)가 한데 어울려서 그곳으로 간 사람들이 시름에 젖게 한다.』는 말은 함경도(咸鏡道)의 지세(地勢)를 몇 마디로 적절(適切)하게 표현(表現)한 말로 이해(理解)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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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산(陰山)
음산(陰山)에 관해서는, 근대(近代)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이나 주석(註釋)등에서는, 중원(中原) 서북방(西北方)을 흐르는 하(河)의 남안(南岸)에 있다고 하지만, 이는 거짓이다. 이렇게 역사적(歷史的)으로 유명(有名)한 산(山)이 지도(地圖)에 표기(表記)되지 않는다는 이해(理解)될 수 없는 일이다.
양산(陽山)역시 마찬가지인데, 사기(史記) 시황제(始皇帝) 본기(本紀)나 몽 념(蒙恬)열전(列傳) 등에는 분명(奔命) 하(河)의 북안(北岸)에 있다고 하였으나, 지도(地圖)에는 존재(存在)하지 않으며, 주석(註釋)에도 『있다, 없다는 논쟁(論爭)이 있다』는 말은, 역사적(歷史的)으로 기록(記錄)되어있는 『음산(陰山)이나 양산(陽山)”은 현재의 섬서 성(陝西省) 서북방(西北方)과 북안(北岸)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중원(衆怨)서북방(西北方)에는 하란산맥(夏蘭山脈)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고, 북방(北方)에는 음산(陰山)산맥(山脈)이 서(西)쪽에서 동(東)쪽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음산 산맥(陰山山脈)서(西)쪽과 하란산맥(夏蘭山脈)의 북(北)쪽은 서로 연이어져 있다. 【천산산맥(天山山脈)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었고, 음산 산맥(陰山山脈) 역시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었다.】
위에서 말하는 『음산(陰山)』은 『한해(瀚海)주변에 함께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한해(瀚海)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質問)에 아주 적절(適切)한 답변(答辯)은 몇 종류(種類)의 원전(原典)에 근거(根據)해 답변(答辯)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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㈠ 당(唐) 시인(詩人)이 말하는 “한해(瀚海)” : 당(唐)나라 시인(詩人)이었던, 왕유(王維)의 “送 平 澹 然 判 官”에서 이르기를, ※ “한해(翰 海)”는 사주지로(絲綢之路)의 북(北)쪽 천산(天山)이북(以北)지방을 말하고 이다. 【아래의 시 내용 모두가 사주지로(絲綢之路)에 관한 것임】
㉠ 送 平 澹 然 判 官
不 識 陽 關 路, 新 從 定 遠 侯, /黃 雲 斷 春 色, 畫 角 起 (一 作 越) 邊 愁, / ‘瀚 海’ 經 年 到 (一 作 別), 交 河 出 塞 流, / 須 令 外 國 使, 知 (一 作 只) 飮 月 氏 頭.
㉡ 奉 和 聖 製 送 不 蒙 都 護 兼 鳴 矑 卿 歸 安 西 應 制.
上 卿 增 命 服. 都 護 揚 歸 旆 / 雜 盧 盡 朝 周. 諸 胡 皆 自 鄶 / 鳴 家 ‘瀚 海’ 曲. 按 節 陽 關 外. / 落 曰 下 河 源. 寒 山 靜 秋 塞. / 萬 方 氣 祲 息. 六 合 乾 坤 大 (一 作 泰). / 無 戰 是 天 心. 天 心 同 覆 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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㈡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한해(瀚海)”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기록된 “한해(瀚海)”의 위치(位置)에 대해 알아보자. 여기서 “한해(瀚海)”는《금산(金山). 牢 山. 흉노 하(匈奴 河). 업 엽 수(業葉水). 鹽水(염수). 한해(瀚海). 열해 【熱 海 : 이곳이 열하(熱河)지방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문제(問題)제기(提起)를 한다.】 하 라 령(賀 邏 嶺)》편에 순서(順序)대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며, 이곳은 서역(西域)과 그 서(西)쪽 지방을 설명(說明)이란 점을 명심(銘心)해야 한다.
《瀚海在柳陳城東北.皆沙磧,若大風,則行者人馬相失.宋史:沙深三丈,不育五穀.沙中生草,名登相,收之以食. : 한해(瀚海)는 유 진 성(柳 陳 城) 동북(東北)에 있다. 모두 사적【沙磧은 사막(沙漠)을 말한다.】이며, 만일 큰 바람이 불면, 가는 자의 사람이나 말은 서로 잃어버린다. 송사(宋史)에 : 모래의 깊이가 3 장【1장(丈)은 약 3m】이며, 오곡은 자랄 수 없다. 모래 가운데 풀이 자라는데, 이름이 ‘등상(登相)’이다. 거두어 먹을 수 있다.》하였다.
※ 이곳은 현 신강 성(新疆省) 사막지대(沙漠地帶)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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㈢ 통전(通典), 구당서(舊唐書), 자치통감(당기)등에서의 “한해(瀚海)” : 북정(北庭)절도사(節度使)관내에 한해(瀚海)군이 설치되었다. 이곳은 ‘견곤【堅昆 : 신강 성(新疆省) 북방 곧 현 러시아】과 참 철【斬啜 : 신강 성(新疆省) 동북방(東北方)으로 현 러시아 및 외몽골 최 서북(西北)지방】’등의 침입에 대비(對備)하기 위한 것이라 했으므로 천산산맥(天山山脈) 북쪽에 설치된 것이다. 특히 한해군(瀚海軍)는 천산(天山)의 서북방(西北方) 및 동북(東北)쪽 일부지방을 관내(管內)로 하였다.
※ 이곳은 신강 성(新疆省) 천산산맥(天山山脈) 북쪽지방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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㈣ 신당서(新唐書)에서의 “한해(瀚海)”는 : 北 庭 大 都 護 府 , 本 庭 州 , 貞 觀 十 四 年 平 高 昌 , 以 西 突 厥 泥 伏 沙 缽 羅 葉 護 阿 史 那 賀 魯 部 落 置 , 并 置 蒲 昌 縣, 尋 廢 , 顯 慶 三 年 復 置 , 長 安 二 年 為 北 庭 都 護 府 。 : 북정대도호부, 본시 정주【庭州 : 신강 성(新疆省) 토 노 번(吐魯番)】이다. 정관 14년 고창(高昌)을 평정하고, 서돌궐 ‘니복사발라엽호아사나하노’ 부락에 설치하였으며, 아울러 포창(蒲昌)현을 두었다가 폐하였다. 현경 3년에 다시 두었는데, 장안 2년에 북정도호부로 하였다. 【포창(蒲昌)현은 포창해(蒲昌海) 주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주석(註釋)> : 有 瀚 海 軍, 本 燭 龍 軍, 長 安 二 年 置, 三 年 更 名, 開 元 中 蓋 嘉 運 增 築. 西 七 百 里 有 清 海 軍, 本 清 海 鎮, 天 寶 中 為 軍. : 한해(瀚海)군이 있다. 본시 촉 룡(燭龍)군이며, 장안 2년에 두었다가, 3년에 이름을 고쳤으며, 개원(開元)중에 증축하였다. 서쪽 7백리에 청해(靑海)군이 있는데, 본시 청해(靑海)진이었는데, 천보(天寶) 중에 군(軍)으로 하였다.
※ 이곳에서 말하는 “한해(瀚海)” 역시 현 신강 성(新疆省) 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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㈤ 조선사(朝鮮史)에서 말하는 “한해(瀚海)” :
㉠ 조선(朝鮮) 유학자(儒學者)의 문집(文集) 『택 당 (澤 堂) 이 식【李植 1584년(선조 17)~1647년(인조 25)】』의 <문집(文集) 택 당 집(澤 堂 集)>에서,《 한해(瀚 海)는 항 원 산(杭 爰 山)에 대한 음역(音譯)이다.》라 하였다. “항원 산(杭爰山)”은 <항 애 산(杭愛山)>으로 <淸 統 志 以 爲 卽 古 之 燕 然 : ‘청 통지’에 의하면 곧 옛 연연 산(燕然山)이다.>라 하였는데, 주해(註解)를 보면 『연산(燕 山)은 연연 산(燕 然 山)의 준말이다.』하였다.
※ 위 글에서 “한해(瀚海)”는 외몽골 서쪽 ‘항 애 산맥(杭愛山脈)’의 ‘항 원 산(杭爰山)’ 지방이다.
㉡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천지(天地)문 / 대 유사(大流沙) 설명(說明)편을 보면,
《 우공(禹 貢)에, “나머지 물은 유사(流沙)로 들어간다.” 하였다. 황하(黃 河)의 한 갈래가 이를 서(西)쪽으로 흐르게 한다는 뜻이다. 삼재도회(三 才 圖 會)에, “대 유 사는 성숙해(星 宿 海)의 서북 한해(瀚海)의 서남(西南)에 있다. 한해(瀚海)는 사막(沙漠)이라고도 하는데, 가로 뻗어나서 서(西)쪽 끝까지에 이른다.” 》 하였다.
여기서 『한해(瀚海)』는, 『성숙해(星宿海)의 서북(西北)에 있다.』고 설명(說明)한다. 이러한 주장(主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저자(著者) “이익(李瀷)” 개인(個人)의 것이 아닌 『삼재도회(三才圖會)』편에 기록된 것을 인용(引用), 설명(說明)한 것이다. 여기서 『한해(瀚海)』는 『사막(沙漠)을 칭하는 것이며, 가로 뻗어(橫)서쪽 끝까지 이른다.』고 설명한다.
●《 한해(瀚海)는 성숙해(星宿海)의 서북(西北)에 있고, 한해(瀚海)는 사막(沙漠)을 말하는 것인데, 횡(橫)으로 뻗어, 서(西)쪽 끝까지 이른다.》고 정리(定理)가 된다.
➊ 성숙해(星宿海) : 청해 성(靑海省)의 청해(靑海)호 서남(西南)지방에 있으며, 오늘날 황하(黃河)의 근원지(根源地)이다.
➋ 이곳의 서북(西北)지방 “한해(瀚海)”라 하였으니, 곧 돈 황(燉煌)의 서쪽지방인 『현 신강 성(新疆省) 이오(伊吾), 타클라마칸사막, 토 노 번(吐魯番), 준갈이(準喝爾) 분지(盆地)』등이 『한해(瀚海)』지방이라 할 수 있다.
➌『발해(渤海)는 한해(瀚海)의 동(東)쪽』에 있어야 한다.
※ 위 글에서 말하는 “한해(瀚海)”는 『현 신강 성(新疆省) 이오(伊吾), 타클라마칸사막, 토 노 번(吐魯番), 준갈이(準喝爾) 분지(盆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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㈥ 산해 경(山海經)에서의 “한해(瀚海)” : 산해 경(山海經)을 주석(註釋)한 곽박(郭璞)은, 《해내서경(海內西經) 주석(註釋) / 한해(瀚海)는 고본(古本)에서“사막(沙漠)의 땅”을 가리키는데, 북방(北方)에 한해(瀚海=翰海)가 있고, 서북(西北)쪽에도 또 한해(瀚海=翰海)가 있다. : 翰 海 古 本 泛 指 沙 漠 之 地 ,北 方 有 翰 海, 西 北 亦 有 翰 海 》
※ “한해(瀚海)”는 사막(沙漠)의 땅을 말하며, 그곳은 북방(北方)과 서북방(西北方)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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㈦ 사기(史記)에서의 “한해(瀚海)”는 : 사기(史 記) 卷 111 / 衛 將 軍 驃 騎 列 傳 第 5 1 / 본문(本文) 주석(註釋)편에,
《 집해 장안(張晏)이 이르기를, 바다가의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았다. 색은(索隱) 안(按), 최호(崔浩)가 이르기를, 북해(北海)의 이름이다. 새 무리가 털을 가는 곳이며, 옛 부터 전해오기를, 『한해(翰海)』라 한다. 광이지(廣異志)에 따르면, 『사막(沙漠)의 북쪽에 있다.』 정의(正義)에 따르면, 소위 오군(五郡)인 『롱서(隴 西), 북지(北地), 상군(上郡), 삭방(朔方), 운 중(雲中)군』은 나란히 새외(塞外)에 있으며, 또 『북해(北海) 서남(西南)에 있다.』 : 集 解 張 晏 曰 : 登 海 邊 山 以 望 海 也. 索 隱 按 : 崔 浩 云, 北 海 名 ,群 鳥 之 所 解 羽 ,故 云 翰 海. 廣 異 志 云 在 沙 漠 北. : 正 義 五 郡 謂 隴 西 、 北 地 、 上 郡 、 朔 方 、 雲 中 , 並 是 故 塞 外 , 又 在 北 海 西 南 》
※ 북해(北海)와 한해(瀚海)는 같은 곳을 말한다. 사막의 북(北)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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㈧ 자치통감(資治通鑑) 한기(漢紀)에서는 말하는 “한해(瀚海)”는 : 191) 卷 十 九 漢 紀 十 一 / 世 宗 孝 武 皇 帝 中 之 上 / 元 狩 四 年
票 騎 將 軍 騎 兵 車 重 與 大 將 軍 (軍) 等.而無裨將,悉以李敢等為大校,當裨將,出 代、右 北 平 二 千 餘 里, 絕 大 幕, 直 左 方 兵, 獲 屯 頭 王、韓 王 等 三 人, 將 軍、相 國、當 戶、都 尉 八 十 三 人, 封 狼 居 胥 山, 禪 於 姑 衍, 登 臨 翰 海 ,【張 晏 曰 :登 海 邊 山 以 望 海 也。有 大 幼 ,故 增 山 而 廣 地 也 。如 淳 曰 :翰 海 ,北 海 名 也 。崔 浩 曰 :鳥 之 所 解 羽 ,故 曰 翰 海 。廣 志 ,翰 海 在 沙 漠 北 。: 장안(張 晏)이 말하길, 바다(海, 河?)가의 변 산(邊 山)에 올라 해(海 또는 河, 大 澤)를 바라보니, 대유가 있는데, 옛 증산은 넓은 땅이다. 여순(如 淳)이 말하길, 한해(翰 海)는 북해(北海)의 이름이다. 최호(崔 浩)가 말하길, 이곳에서 새들이 털을 벗는다. 예전에 말하기를 한해(翰 海)이다. 광지(廣 志)에, 한해(翰 海)는 사막의 북쪽을 말한다. 】
※ 위에서 “한해(瀚海)”는, 랑 거 서산(狼 居 胥 山)이며, 이 역시 대막(大幕 : 大漠)의 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방향(方向)으로 보면 서북방(西北方)과 북방(北方)사이의 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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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두(序頭) 구절(句節) 중에서, <음산이며 고비사막이【본인(本人) 주(州) : 음산(陰山)이며, 한해(瀚海)가】 : 陰 山 與 瀚 海 / 뒤섞여 사람을 시름하게 하네. : 錯 莫 令 人 愁> 라는 내용은 설사 시(詩)라는 형식(形式)을 갖춰다는 것을 감안(勘案)하더라도, 분명(分明) 지리적(地理的)인 면으로 보면, “함경도(咸鏡道)”라는 곳의 지세(地勢) 특색(特色)을 나타낸 말이라 할 수 있다.
위 설명(說明) ㈠ - ㈧ 항에 소개(紹介)한 곳에 “한해(瀚海)”가 있었다고 한다면, 음산(陰山) 역시(亦是) 이곳 지방에 있어야 하며, 음산(陰山)은 천산(天山), 금산(金山)등지로 추정할 수 있다.
다양(多樣)한 방법으로 조선사(朝鮮史)를 재구성(再構成)해 보는 것은, 그 영역(領域)을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2012년 10월 05일 <글쓴이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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