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白頭] 준령[峻嶺]의 철령[鐵領]과 관서[關西]와 관동[關東]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四時]의 순환[循環]과 법칙[法則]은, 만물[萬物]의 융성[隆盛]을 돕고, 차면 기울고 기울면 다시 차는, 천지[天地] 운행[運行]의 법칙[法則]에 어긋남이 없으며, 성인[聖人]은, 이를 본받아 만[萬] 백성[百姓]에게 미치게 하고, 천지[天地] 만물[萬物]의 화육[化育]을 돕는다고 하였다.
만물[萬物]도 차면 기울고, 달도 차면 이지러지는 법[法], 천하[天下]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천하[天下]의 기수[氣數]를 따라 움직이며, 국가[國家]의 흥망[興亡]도 이를 따른다고 하였는가 ?
유구[悠久]한 역사[歷史]와 찬란[燦爛]한 문명[文明]을 꽃 피우며, 천하[天下]를 제어하고, 천하[天下]를 태평[太平]으로 이끌던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역사[歷史]는, 반도[半島]의 틀에 갇혀 헤어날 줄을 모르고 있으니, 자기 자신의 조상[祖上]이 살아온 길도 모르는, 우매[愚昧]하고 부끄러운 후손[後孫]으로, 오늘도 곡학아세[曲學阿世]의 난세[亂世]속에, 우리의 역사[歷史]와 마주하고 있다.
장백산[長白山]에서 수[數] 천리[千里]를 뻗어 내려와 관동[關東]과 관서[關西]를 나누고, 천험[天險]의 요해처[要害處]라고 일컬어지는 철령[鐵嶺]은,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주장대로 반도[半島]의 한국[韓國]에 있는 것일까 ? 아니면 오염[汚染]되지 않은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대로, 만리[萬里] 저편의 서{西]쪽에 있는 것일까 ?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따라가면서 발길을 옮겨 보기로 한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
교주[交州]
本高句麗各連城郡 各一作客. 一云加兮牙 新羅景德王, 改爲連城郡, 高麗初, 稱伊勿城. 成宗十四年, 更今名, 爲團練使. 顯宗九年, 改爲防禦使 [중략]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각련성[各連城] 각[各]은 ‘객[客]으로도 쓰며 혹은 가혜아[加兮牙]라고도 한다. 으로,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때 연성군[連城郡]으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초에 이물성[伊勿城]이라고 칭하였다. 성종[成宗] 14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 현종[顯宗] 9년에 방어사[防禦使]로 고쳤다. [중략]
忠烈王三十四年, 以鐵嶺口子, 把截有功, 陞淮州牧. 忠宣王二年, 汰諸牧, 降爲淮陽府. 要害處二, 鐵嶺, 楸池嶺. 又義館嶺, 德津溟所 載祀典 屬郡二, 縣四 [중략]
충렬왕[忠烈王] 34년에 철령구자[鐵嶺口子]가 외적[外敵]의 공격을 막은데 공[功]을 세웠으므로 회주목[淮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목[牧]들을 정리하면서 회양부[淮陽府)로 강등시켰다. 요해처[要害處]가 두 곳으로 철령[鐵嶺]과 추지령[楸池嶺]있다. 또 의관령[義館嶺]과 덕진명소[德津溟所]가 사전[祀典]에 등재되어 있다. 속군[屬郡]이 2개, 속현[屬縣]이 4개이다. [중략]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地]
강원도[江原道] 회양 도호부[淮陽都護府]
忠宣王二年庚戌, 降爲淮陽府, 本朝因之 太宗十三年癸巳, 例爲都護府 別號蓮城, 或連城 [중략]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에 회양부(淮陽府)로 강등하였다. 본조에서 그대로 따르다가,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다. 별호(別號)는 연성(蓮城), 혹은 연성(連城)이라 한다. [중략]
四境, 東距通川五十二里, 西距平康七十一里, 南距金城三十八里, 北距咸吉道 安邊三十里 [중략]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통천(通川)에 이르기 52리, 서쪽으로 평강(平康)에 이르기 71리, 남쪽으로 금성(金城)에 이르기 38리, 북[北]쪽으로 함길도(咸吉道) 안변(安邊)에 이르기 30리이다. [중략]
厥土塉, 風氣寒, 墾田四千五百八十六結 水田止七結 土宜, 黍、稷、粟、豆、蕎麥、桑、麻、栗 [중략]
땅이 메마르며, 기후[氣候]가 차다. 간전[墾田]이 4천5백[四千五百] 86결[八十六結]이요, 논이 7결[七結] 뿐이다. 토의[土宜]는 기장[黍], 피[稷], 조[粟], 콩[豆], 메밀[蕎麥], 뽕나무[桑], 삼[麻], 밤[栗]이다. [중략]
要害, 鐵嶺在府北三十里, 楸池嶺在和川東十四里, 洒嶺峴在長楊北三十里 [중략]
요해[要害]는 철령[鐵嶺]이 부[府]의 북[北]쪽 30리에 있고, 추지령[楸池嶺]이 화천 동[東]쪽에 14리에 있으며, 주령현[酒嶺峴]이 장양[長楊] 북[北]쪽 30리에 있다. [중략]
烽火六處, 个呑在府南, 南準金城任內歧城城山, 東準任內和川 餘伊破 餘伊破、 東準楸池 楸池 東準通川 金蘭 所山在府西, 北準咸吉道 安邊 鐵嶺 [중략]
봉화[烽火]가 6곳이니, 개탄[个呑]이 부[府]의 남[南]쪽에 있고, 남[南]쪽으로 금성[金城], 임내[任內], 기성[岐城]의 성산[城山]에, 동[東]쪽으로 임내[任內] 화천[和川]의 여이파[餘伊破]에 응한다. 여이파[餘伊破] 동[東]쪽으로 추지[楸池]에 응한다. 추지[楸池] 동[東]쪽으로 통천[通川], 금란[金蘭]에 응한다. 소산[所山]이 부[府]의 서[西]쪽에 있고, 북[北]쪽으로 함길도[咸吉道] 안변[安邊] 철령[鐵嶺]에 응한다.[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철령[鐵嶺], 부[府]의 북[北]쪽 39리에 있다. 돌성[石城]의 남은 터가 있다.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끝없이 높고 높아서 거대한 형세가 관동[關東]을 진압하네. 산정은 하늘끝까지 치솟고, 뿌리의 깊이는 땅의 마지막까지 통했네. 겨울의 위세[威勢]는 봄까지 춥고, 어두운 빛은 낮에도 어슴푸레하네. [중략]
이달충[李達衷]의 시[시]에, 은계[銀溪]에 길이 머니 그늘이 빠르고, 철령[鐵嶺]의 관문[關門]이 높으니 가을 기운이 많구나.” 하였다. [중략]
근재선생집권지일[謹齋先生集卷之一]
시일과철령[是日過鐵嶺]관동와주[關東瓦注]
거령[巨嶺]이 공중의 절반을 가로지르니[巨嶺橫空半], 동[東]쪽과 서[西]쪽의 길이 여기에서 나뉘어진다.[東西路此分], 높은 곳에 올라서 관[關] 버리고 달아난 옛날의 장수를 비웃노니[登高笑前將], 험난[險難]한 관[關]을 등지고 있으면서 외로운 군대를 겁내었네[負險怯孤軍], 깎아지른 계곡에는 얼음과 눈이 섞여 있고[絶澗氷和雪], 위태로운 봉우리 바위에는 구름이 얹혀 있다.[危峯石戴雲], 옛 보루[堡壘]를 수리하는 사람 없고 [無人修古壘], 천하[天下]는 문[文]만을 숭상하네.[天下但崇文] [중략]
동파령[東坡嶺] 수입현[水入縣]에 있다. 부[府]와의 거리는 88리이다. 고개 밑에서 물이 나와 남[南]쪽으로 흘러가 현[縣] 북[北]쪽 10리에 이르러서 다시 땅속으로 들어갔다가 현 남쪽에서 다시 나온다. 그런 까닭으로 이름을 수입현[水入縣] 이라고 하였다. 본부[本府]와의 거리는 90리이다. 추지령[楸池嶺] 화천현[和川縣] 동[東]쪽 19리에 있다. 부[府]와의 거리는 69리인데, 아주 높고 험하다. [중략]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험난[險難]한 산길을 걸어 철령[鐵嶺]을 내려와서 아늑하고 조용한 은계를 찾네. 맑은 물 동구로 흘러나와, 한 가닥 푸른 수정[水晶]을 둘렀네. [중략]
대동지지[大東地志]
성지[城址], 철령관[鐵嶺關], 고려[高麗] 고종[高宗] 9년 철령[鐵嶺]에 성[城]을 쌓고 관문[關門]을 만들었는데, 좌우로 산등성이를 따를 성[城]을 쌓아 동북[東北]의 웅관[雄關]이 되었는데 옛터가 남아 있다. [중략]
대동지지[大東地志]
철령[鐵嶺]은 나제[羅濟] 때부터 북[北]쪽 말갈족[靺鞨族]들이 모두 이곳을 지나왔었다. 고려[高麗]에 이르러 비록 관성[關城]을 세워 거란[契丹] 여진[女眞]의 충돌이 동북로[東北路]에는 거의 없어 편안하였다. [중략]
아득한 태고[太古]의 시대로부터, 대대로 같은 땅, 같은 곳에서 이어져온 우리의 역사[歷史]를, 사서[史書]와 지도[地圖]를 통하여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이해[理解]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현재[現在]의 역사서[歷史書]는, 대신[大臣]들의 문집[文集]을 포함하여, 왜곡[歪曲]되고 변조[變造] 되었으며, 삭제[削除]되고 조작[造作]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학자[學者]라는 사람들이, 이를 여과 없이 그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문자[文字]가 생긴 이래로, 이러한 예가 어느 시대[時代]에 있었단 말인가 ?
세상[世上]이 어지럽고 혼란[混亂]스러운 난세[亂世]가 되면, 이를 바로잡는 마지막 보루[堡壘]는 학문[學文]이다. 옛 선현[先賢]들이 학문[學文]을 닦으며, 수신[修身]을 병행한 이유는, 성품[性品]이 바르지 못하면, 그러한 학문[學文]은, 학문[學文]이 지양하는 근본[根本]에서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학문[學文]을 올바로 통달[通達] 할 수도 없고, 세상[世上]을 어지럽히는 근본[根本] 원인[原因]이 되기 때문에, 학문[學文]을 하면서, 수신[修身]을 근본[根本]으로 삼은 것이다. 학문[學文]의 근원[根源]이 되는 성현[聖賢]의 가르침은, 천하[天下]에 인간[人間]의 바른길을 닦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하[天下]에 대도[大道]를 행하여, 인간[人間]의 밝은 길을 밝히고, 세상[世上]을 태평[太平]으로 이끌어, 천하[天下]에 어두운 구석이 없이, 사해[四海]의 만[萬] 백성[百姓]들이 모두 인간[人間]의 존엄[尊嚴]을 지니고, 각자 능력에 맞게, 아름다운 세상[世上]을 이루어 나가는데, 그 뜻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옛 글에, 격물치지[格物致知]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 [治國] 평천하[平天下]를, 학문[學文]의 요체[要諦]로 삼은 것은, 실로 그 막중한 책무[責務]가 배우는 자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나라의 국사[國史]를 가르치는 학자[學者]들이, 자기 나라를 멸망[滅亡]시키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더러운 식민사학[植民史學]을, 역사[歷史]라고 가르친다면, 그 것은 이미 역사[歷史]가 아니고, 잡설[雜說]에도 들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역사서[歷史書]를 보면, 변조[變造]되고, 조작[造作]된 부분들이 그대로 들어나고, 역사서[歷史書]가 참화[慘禍]를 겪으면서, 일그러진 데가 한두 곳이 아니다. 역사서[歷史書]의 허실[虛實]과 진실[眞實]을 가려, 이를 학계[學界]에서 바로잡고자 한다면, 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지 못하겠는가 ?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유감[遺憾]이며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서 백두산[白頭山]을 거론 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철령[鐵嶺]은, 산이 높고 험준하며, 한사람이 창을 짚고 서서 관문[關門]을 지키면, 만인[萬人]의 적[敵]을 막아 낼수 있는 천혜[天惠]의 요해지[要害地]로 알려져 왔다. 철령[鐵嶺]은,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남[南]쪽으로 수[數] 천리[千里]를 뻗어 내린 곳에 위치[位置] 하고 있다고, 역사서[歷史書]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그렇다면 철령[鐵嶺]의 북[北]쪽에 백두산[白頭山]이 있고, 백두산[白頭山]의 남[南]쪽에 철령[鐵嶺] 있으며, 철령[鐵嶺]을 기준으로 관동[關東]과 관서[關西]가 나누어진다고 하였으니, 철령[鐵嶺]의 서[西]쪽에 평안도[平安道]와 평양[平壤]이 있을 것이고, 철령[鐵嶺]의 동[東]쪽에 강원도[江原道]와 강릉[江陵]이 있을 것이다. 또한 철령[鐵嶺]의 북[北]쪽으로 광활[廣闊]한 함경도[咸鏡道] 가 있을 것이며, 조선[朝鮮]을 건국[建國]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왕업[王業]을 일으킨 터전이 있게 되는 것이다.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많은 대신[大臣]과 문신[文臣]들이, 철령[鐵嶺]을 넘으면서, 느낀 감회[感懷]를, 시[詩]를 통하여 노래하고 있으며, 보고, 듣고, 겪은 것에 대한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역사서[歷史書] 또한 다르지 않으니, 철령[鐵嶺]은, 서북[西北] 방면에 있는 국가[國家]의 중요[重要]한 요해처[要害處]로서, 그 막중한 비중[比重]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리라.
강원도[江原道] 회양 도호부[淮陽都護府]의 북[北]쪽에 철령[鐵嶺]이 있어, 철령[鐵嶺]을 넘으면, 함경도[咸鏡道]의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로 이어진다. 회양[淮陽] 도호부[都護府]는, 교주[交州]이다. 이곳은 지금, 중국[中國]의 합밀[哈密] 지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합밀[哈密]에서 북[北]쪽으로, 천산[天山] 준령[峻嶺]을 넘어, 파리곤[巴里坤]지역의 바리쿤자치현[哈薩克自治县]으로 가는 길에는, 두 개의 령[嶺]이 있는데, 이 중의 하나가, 조선사[朝鮮史]에서 말하는, 추지령[楸池嶺]이고, 동[東]쪽 있는 령[嶺]이 바로 철령[鐵嶺]이다.
이곳에서 서[西]쪽으로 가면, 트루판으로 이어지고, 동남[東南]쪽으로 내려오면, 지금의 주천[酒泉]에 있는 가욕관[嘉峪關]으로 이어진다.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대신[大臣]들이, 교주[交州]와 회양부[淮陽府]를 지나며, 만리타향[萬里他鄕]의 먼 곳을, 시[詩]를 통하여 노래하고 있는 것은, 이 지역이 조선[朝鮮]의 도성[都城]인 한양[漢陽]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가정집[稼亭集]
숙회양부[宿淮陽府] 차벽상허집의운[次壁上許執義韻]
토지[土地]가 척박[瘠薄]하니 권세가의 손에 들어가랴 [田薄何曾入勢家], 추수도 올해는 기후[氣候]가 더욱 알맞구나 [西成今歲氣尤和], 땅이 외지니 과객[過客]이 적게 와야 할 터인데 [地偏過客應來少], 산[山]이 좋아 많이들 오니 주민은 짜증을 내는구나 山好居人却厭多], 철쇄[鐵鎖]로 굳게 닫힌 북령[北嶺]의 중요한 관문이요 [北嶺重關牢鐵鎖], 푸른 비단 하나의 띠로 굽이도는 남강[南江]이라 [南江一帶漾靑羅] [중략]
가정집[稼亭集]
등철령[登鐵嶺]
짐승이 궁지[窮地]에 몰리면 더욱 날뛰며 덤비는 법 [獸窮則搏更猖狂], 그런 범[虎]과 늑대[狼]를 문 열고 맞다니 개탄 스럽도다 [可歎開門納虎狼], 허리에 찬 황금 부절[符節]은 또 어디에 쓸 것인고 [腰下金符亦安用], 장부 한 명이 지킬 수 있는 험한 관문[關門]인데 [險關只合一夫當], 나라에 본래 사람이 없어서 적[賊]이 마음을 먹었나니 [國本無人賊有心], 직선으로 몇천 길이나 높이 솟은 관문[關門]을 버렸다오 [關門直下幾千尋] [중략]
삼봉집[三峯集]
철령(鐵嶺)
철령[鐵嶺]이라 산은 높아 칼끝과 같고 [鐵嶺山高似劒鋩], 해천[海天]의 동[東]쪽을 바라보니 망망 하구나 [海天東望正茫茫],가을[秋風]바람 두 귀밑에 불어오는데 [秋風特地吹雙鬢], 말 몰고 오늘 아침 삭방[朔方]에 왔네 [驅馬今朝到朔方] [중략]
삼봉집[三峯集]
과철관문[過鐵關門]
외길이라 구름 연기 큰 바다 가득하고 [雲煙一道滄溟近], 천년 풍기[風氣]는 지리[地理]를 나뉘었네 [風氣千年地理分], 구구한 경국[經國]의 뜻 스스로 웃어 본다 [自笑區區經國志], 군[軍]을 따라 오늘 또 철관문[鐵關門]을 지나가네 [從戎又過鐵關門] [중략]
구름도 쉬어 넘는다는 철령[鐵嶺]의 높고 험한 길은, 자동차 도로[道路]가 뚤리고, 포장이 되어 있어, 지금은, 고생을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도로[道路]를 따라가다 보면, 그 험난[險難]한 지세[地勢]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장부[丈夫] 한명이 만명의 적[敵]을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
장백산[長白山]에서 수[數] 천리[千里]를 남[南]쪽으로 뻗어내려, 철령[鐵嶺]의 준령[峻嶺]을 경계[境界]로, 천리[千里]를 달려, 서[西]쪽으로는, 우르무치[烏魯木齊] 에 이르고, 동남[東南]쪽으로는, 주천[酒泉]의 가욕관[嘉峪關]에 이르니, 철령[鐵嶺]의 동[東]쪽 지역을 관동[關東]이라고 칭[稱]한다는 말은, 지세[地勢]를 보더라도 그럴 듯한 표현이다. 또한 강원도[江原道]의 크기를 가늠하게 하고 있는데, 반도[半島]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을 교육[敎育] 받은 세대[世代]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크기에 이른다.
강원도[江原道]의 회양[淮陽] 도호부[都護府]에서, 철령[鐵嶺]을 넘어 북[北]쪽으로 올라가면, 함경도[咸鏡道]의 안변[安邊] 도호부[都護府]에 닿는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해[海]라고 기록[記錄]한 파리곤호[巴里坤湖]가 파리곤[巴里坤] 바리쿤자치현[哈薩克自治县]과 인접해 있고, 동[東]쪽으로는 염호[鹽湖]가 있어, 지금도 그 지역의 인근[隣近]에는, 흙과 섞인 소금들이 널려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함경도[咸鏡道]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동[東]쪽으로 강원도[江原道] 흡곡현[歙谷縣] 경계[境界]까지 95리이며 남[南]쪽으로는 동도[同道] 이천현[伊川縣] 경계[境界]까지 88리요, 동도[東都] 회양부[淮陽府] 경계[境界]까지 85리다. [중략]
건치연혁[乾置沿革]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비열홀군[比列忽郡]이었는데 일명 천성[淺城]이라고도 했다.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17년에 비열주[比列州]로 하고는 군주[軍主]를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 때에 삭정군[朔庭郡]으로 고쳤다. 고려[高麗]에 이르러 등주[登州]로 고쳐 성종[成宗] 14년에는 단련사[團練使]를 두었고, 현종[顯宗] 9년에는 등주[登州]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라 고쳤다. [중략]
군명[郡名] 비열홀[比列忽], 천성[淺城], 삭정[朔庭], 등주[登州], 삭방[朔方], 학성[鶴城]
철령[鐵嶺], 본부[本府] 남[南]쪽 83리에 있다. 고려[高麗] 때에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철관[鐵關]이라 불렀다. [중략]
남곤[南袞]이 절도사[節度使] 이장곤[李長坤]을 보내는 부[賦]에, 등주[登州] 남쪽[南]과 연성[連城] 북[北]녘에 큰 산들이 깎아지른 듯 하늘로 치솟으니, 그 산세[山勢]가 국토[國土]를 가로질렀다. 장백산[長白山]에 뿌리를 박고 뻗어나가 남[南]으로 수천리[數千里]를 달려와서 넓게 모였다. [중략]
인마[人馬]가 이미 통하게 됨에 따라 평탄한 큰 길을 개척하였고, 고려[高麗] 때엔 이곳에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철관[鐵關]이라 불렀다네. [중략]
아, 슬프다, 백이[百二]의 험한 요새지[要塞地]에서 몇 왕대[王代]의 분쟁을 겪었던고, 나는 상상하건대, 윤관[尹瓘]이 북정[北征]할 때, 예왕[睿王] 같은 영명한 임금을 만나, 누대[累代]에 쌓였던 분한[憤恨]을 일거에 소탕[掃蕩] 숙청[肅淸]하려고 생각하였다네. [중략]
국세[局勢]가 쇠퇴함에 미쳐서 조휘[趙暉], 탁청[卓靑]의 역적이 있어 나라를 배반하고, 오랑캐 원[元]나라에 붙어 화령[和寧] 땅을 훔쳐서 웅거[雄據]하니, 의관[衣冠]이 관문[關門]을 경계[境界]로 한계를 그었고, 반쪽 변방[邊方]의 초목이 오랑캐에게 더럽힘을 받게 되었다. [중략]
내안[乃顔]의 잔당이 흉악하게 침입하여 개원령[開元嶺]을 넘어 화주[和州], 등주[登州]를 노략하여 사람을 죽여 양식을 삼으니 어린아이들이 남지 않았다. 관군[官軍]이 적의 그림자만 보아도 뿔뿔이 달아나 주력이 무너지고, 추악한 그들은 북을 울리며 관문[關門]으로 들어왔다. 정수기[鄭守琪]와 나유[羅裕]는 또한 어떤 사람이드냐. 무슨 낯으로 밝은 해를 보았던가. ? [중략]
비록 생명[生命]을 보전코저 나라를 저버렸다지만 어찌 나라가 멸망[滅亡]하고도 몸이 온전할 수 있다던가. 천험[天險]의 성곽[城郭]을 버리고 지키지 않아서 백만의 병력이 흉악한 적의 손에 섬멸되고 말았네. [중략]
철관[鐵關] 서[西]쪽에 살기[殺氣]가 가득한지라 잔악[殘惡]한 무리들을 제거하여 동한[東韓]의 안녕을 되찾았으며, 땅의 경계[境界]를 정하고 산하를 다 차지하였으니, 옛날의 외적[外敵]들 있던 곳이, 이제는 지경[地境] 안에 있게 되었다. [중략]
내가 그대의 가는 것을 전송[餞送]하려 울퉁불퉁한 높은 고갯길을 올라가니, 돌아가는 구름은 빽빽하게 응결[凝結]하여 찬 비를 재촉해 좔좔 퍼붓는구나. 긴 칼 빼어들고 휘파람 불어, 이별에 어지러운 이 마음을 끊었노라. [중략]
어찌하면 그대와 더불어 꽁무니를 수레로 삼아 신마[神馬]를 몰아서 큰 사막[沙漠]을 넘고, 푸른 연하[煙霞]를 헤치며, 백두산[白頭山]의 정상에 올라 윤관[尹瓘]의 공적비[功績碑]를 어루만지고, 바다에 임하여 푸른 물결을 잔질하여 가슴 가운데에 불평을 씻고, 군신[君臣]이 같이 즐기는 징초[徵招]의 악장[樂章]을 연주하며 돌아와 호월일가[胡越一家]의 가사[歌詞]를 임에게 바쳐볼까. 하였다. [중략]
안축[安軸]의 시[詩]에, 푸른 바다의 한 가닥 물이 거울 같은 호수[湖水]를 이루었는데, 푸른 봉우리가 사면[四面]을 둘러싸고 물은 평평하게 깔렸네, [중략]
봉수[烽燧], 사현봉수[沙峴烽燧] 남[南]쪽으로는 철령[鐵嶺]과 응하고, 북[北]쪽으로는 학성[鶴城]과 응한다. 학성봉수[鶴城烽燧] 북[北]쪽으로는 덕원부[德源府]의 견산[見山]과 응하고, 남[南]쪽으로는 사현[沙峴]과 응한다. 철령봉수[鐵嶺烽燧] 북[北]쪽으로는 사현[沙峴]과 응하고, 남[南]쪽으로는 강원도[江原道] 회양부[淮陽府]의 소산[所山]과 응한다.
객관 동헌[客館東軒]
이주[李冑]의 시[詩]에, 철령[鐵嶺]의 천연 요새[要塞] 진중[秦中]과도 같은데, 옛 변성[邊城]에서 부는 슬픈 피리소리가 먼 공중에 퍼지네, 찬 비는 무수한 산봉우리 눈[雪]에 연했고, 굶주린 갈가마귀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에 놀래어 부르짖는다. 인생[人生] 백년[百年] 가고 머무르는 가운데 몸이 먼저 늙었고, 반평생의 슬픈 일 기쁨 속에 당당했던 호기[豪氣] 꺾이었다. 만리[萬里] 타향[他鄕]의 나그네 시름으로 말이 없는데, 관하[關河]는 멀고멀어 오랑캐의 땅과 가깝다네. 하였다. [중략]
북루[北樓]
정몽주(鄭夢周)의 시[詩]에, 묻노니, 올라와서 머문 이 누각[樓閣]을 어떤 사람이 처음에 세웠던고. 10년간 길에 분주하여 본뜻을 저버렸고 백 번이나 싸웠던 산하[山河]는 눈물 흐를 만하네. 원님의 정치[政治] 물같이 맑은데, 서생[書生]의 초라한 행색은 가을보다 쓸쓸하다. 시중[侍中]이 이곳을 지나며 써서 남긴 시구[詩句]를 우러러보고 읊조리며 그치지 못하노라. 하였다. [중략]
정도전[鄭道傳]의 시[詩]에, 수상[首相]이 가학루[駕鶴樓]에 올라, 눈앞의 경개를 시구[詩句]에 담아 벽 사이에 머물게 하였구나. 강산[江山]은 참으로 아름다워도 나의 고향이 아닌데, 세월은 덧없이 물을 따라 흐른다. 저 멀리 바라보니 별은 북극[北極]에 높았고, 안장에 몸을 붙여 멀리 노니던 지난 가을이 기억된다. 이 한 몸 만리[萬里] 행역[行役의 피곤함 속에서, 난간에 의지하여 잠시의 휴식을 얻었노라. 하였다. [중략]
박원형[朴元亨]이 시[詩]에, 절부[節符]를 가지고 순행[巡行]하다가 옛 고을 누대[樓臺]에 올라, 감회로 술 마시며 시 짓고 잠시 머물렀다. 구름은 패택[沛澤] 으로 뻗친 길 가운데서 일어나고, 강[江]물은 기산[岐山] 골짜기로 흘러 들어가는구나. 요동[遼東]의 학[鶴]이 간 후에도 성곽[城郭]은 예와 같은데, 순[舜] 임금이 갈던 밭에는 보리가 가을을 이루었네. 이 몸 이미 황하[黃河]를 두고 맹세[盟誓]하는 공신[功臣]되려고 결심했는데, 누가 임천[林泉]으로 물러나는 것을 배울 것이랴. 하였다. [중략]
이곡[李穀]의 시[詩]에, 백경[百頃]의 호수[湖水] 가운데에 외로운 섬이 푸른데, 시인[詩人]이 개척하여 새 정자[亭子]를 지었다네. 다시 올 때에는 모름지기 술 천곡[千斛]을 싣고 오리니, 바람이 부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도 뼛속까지 시원히 깨리. 하였다. [중략]
이주(李冑)의 사(辭)에, 철관[鐵關]을 향하여 남[南]녘을 바라보고, 이 몸이 나그네 길에 있음을 깨달았건만, 흰 구름 겹겹이 싸고 있어 아득하기만 하고, 종남산[終南山]은 한 치의 푸른 빛도 보이지 않는구나. 충[忠]과 효[孝]가 두 길이 아니라 하지만, 어찌 사은[私恩]과 공의[公義]의 구별이 없으리오. 배를 머물고 언덕에 올라 배회하니, 하늘은 아득히 멀고 강물은 빨리 흘러간다.” 하였다. [중략]
정추[鄭樞]의 시[詩]에, 등주[登州], 화주[和州]의 지난 일은 화각[畫角] 소리 속에 흘러갔는데, 멀리 높은 봉우리 위에 올라 푸른 하늘을 굽어보니 땅이 금원과 연접했다. 산[山]은 창인 양 솟아 있고, 하늘은 부상[扶桑] 쪽으로 나지막한데 바다엔 바람이 없구나. [중략]
대동지지[大東地志]
태봉주[泰封主] 궁예묘[弓裔墓], 서남[西南]쪽으로 1백 20리이며 삼방로[三防路] 왼쪽이며 석축[石築]이 수십 길이나 되고, 높다란 형대[炯臺]가 있는데, 지금은 절반이나 허물어졌다. [중략]
철관 도중[鐵關途中]
변중량[卞仲良]철관성[鐡關城] 밑의 길은 먼데 [鐡關城下路岐賖], 눈에 가득한 연파[煙波]에 해마저 기우나니 [滿目煙波日又斜], 남[南]으로 가고 북[北]으로 오는 동안 봄도 다하려 하여 [南去北來春欲盡], 말 머리에 해당화[海棠花]가 간 곳마다 피었네 [馬頭開遍海棠花] [중략]
상촌집[象村集]
송선원부안변[送仙源赴安邊]
수염과 귀밑머리 반백이 늘 더해가는데 [向來鬚鬢日添斑], 쓰라린 이별 때문에 덜 나게도 못하겠네 [端爲離愁不可刪], 꽃다운 풀 지는 꽃에 봄도 다 가려는데 [芳草落花春欲老], 그대마저 또 철문관[鐵門關]을 나가야만 하네 그려 [君行又出鐵門關] [중략]
상촌집[象村集]
상촌집[象村集]
송지봉부안변[送芝峯赴安邊]
철령[鐵嶺]은 높이 솟아 끝이 없는데 [鐵嶺高無極], 그대는 거길 향해 떠나가누나 [君行向此中], 양장[羊膓] 길 백겹으로 꺾어져 있고 [羊膓百重折], 삭방[朔方] 날씨 사철이 비슷하다네 [朔氣四時同], 먼 변방[邊方]에 그 어찌 떠나보내리 [絶塞那宜別] [중략]
고산유고[孤山遺稿]
왕안변도중우음[往安邊途中偶吟]
모래 먼지 자욱한 석양의 역로[驛路] [夕陽官路暗沙塵], 비 갠 뒤 한결 산뜻한 남천[南川]의 물빛 [雨霽南川水色新], 관북[關北]의 경계에 어느새 다 왔구나 [始覺關山風土近], 사람들 말소리가 남[南]쪽과 판이하니 人人音語異南人] [중략]
함경도[咸鏡道], 안변[安邊] 도호부[都護府]는, 등주[登州]라고도 불렀다. 대신[大臣]들의 문집[文集]에서는, 안변[安邊]이라고 하지 않고, 등주[登州]라고 시[詩]를 지어 노래하는 시편[詩篇]들이 많이 남아 있다. 안변[安邊] 도호부[都護府]는, 지금 중국[中國]에서, 파리곤[巴里坤] 바리쿤자치현[哈薩克自治县]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곳에서 서남[西南]쪽으로, 태봉주[泰封主] 궁예묘[弓裔墓]가 있다는, 대동지지[大東地志]의 기록[記錄]은, 비록 성곽[城郭]이 있는 곳과 거리의 차는 있으나, 맞는 기록[記錄]이다.
안변[安邊]의 성곽[城郭]이 있는 곳에서, 서남[西南]쪽으로, 고대[古代]의 유적[遺跡]이 하나 자리 잡고 있다. 궁전[宮殿]도 아니고, 제단[祭壇]도 아니고, 석축[石築]으로 둥글게 쌍아 올린 대[臺]가 하나 서 있고, 뒤편으로는, 고분[古墳]이 하나 있다. 고분[古墳]의 모양은, 피라미드 형식이고, 오래된 무덤이다. 지금은 이곳을 대월씨[大月氏] 난주만자[兰州弯子]라고 하고 있으나, 이것은 근래에 각색한 것일 뿐이다. 석축[石築]으로 된 높다란 형대[炯臺]라는 것은, 석축[石築]으로 둥글게 쌓아 올린, 이 대[臺]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안변[安邊]에서 서[西]쪽으로는 우르무치[烏魯木齊]에 이르고, 동남[東南]으로 철령[鐵嶺]을 넘으면, 회양[淮陽]에 이르고, 회양[淮陽] 도호부[都護府]에서, 철령[鐵嶺]을 넘어 안변[安邊]을 지나, 북[北]쪽으로, 2000리[二千里]를 올라가면, 알타이산맥의 최고봉인 벨루하산에 이르게 된다. 벨루하산이 백두산[白頭山]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현재 전하고 있는 여러편의 백두산기[白頭山記]와 벨루하산은 일치하고 있으며, 조선[朝鮮] 왕조실록[王朝實錄]의 함경도[咸鏡道]에 대한 기록[記錄]과, 여러 대신[大臣]들의 문집[文集]에 실린 기록[記錄]과도 모두 일치하고,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등주[登州] 남쪽[南]과 연성[連城] 북[北]녘에 큰 산들이 깎아지른 듯 하늘로 치솟으니, 그 산세[山勢]가 국토[國土]를 가로질렀다. 장백산[長白山]에 뿌리를 박고 뻗어나가 남[南]으로 수천리[數千里]를 달려와서 넓게 모였다......... 이것이 바로 안변[安邊] 도호부[都護府]의 실체[實體]이다. 여기서 더 자세하게 부연[敷衍]한다면, 연성[連城]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곽[城郭]이 직사각형으로 길게 이어져 있으며, 이를 방어하기 위한 성곽[城郭]이, 장성[長城]의 형태[形態]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연성[連城]]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성곽[城郭]의 형식[形式]은, 오직 이곳에만 있는 특이한 구조[構造]이다.
또한, 시[詩]에서 노래하고 있듯이, 서[西]쪽으로는 호수[湖水]가 바다같이 펼쳐지고, 동[東]쪽으로는, 염호[鹽湖]가 있어서 바다와 호수[湖水]를 아울러 갖추고, 남[南]쪽으로는, 철령[鐵嶺]의 높은 산맥[山脈]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고, 동북[東北]과 서북[西北]쪽으로도, 대령[大嶺]의 산맥[山脈]이 둘러싸고 있어서, 선현[先賢]들의 시[詩]와 문집[文集]의 기록[記錄]들과, 그림과 같이 일치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따라서, 그 기록[記錄]이 가리키는 지역을 찾아서, 이를 고증[考證]하고 명확[明確]히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歷史]의 패륜아들은, 변조[變造]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들고 나와, 그것이 사실[事實]이라고 우기면서, 오만방자[傲慢放恣]한 행태[行態]를 보이는데, 이러한 자들에게, 그러한 기록[記錄]이 가리키는 지역을, 한번이라도 가서 조사해 보고, 그 기록[記錄]이 맞는 것인지, 확인[確認]해 본적이 있는가 ? 라는 질문을 하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변조[變造]된 기록[記錄]과 왜곡[歪曲]된 지도[地圖]로, 어찌 역사[歷史]의 본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
또한,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과 지형[地形], 지리[地理]가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지명[地名]과 유적[遺跡]과 유물[遺物], 자연[自然]의 환경[環境]등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다시 미궁[迷宮]에 빠지고 만다. 우리가, 우리 역사[歷史]의 길을 따라가면서 열거한 모든 것이 일치하고, 한 점 의혹이 없을 때, 이곳이, 바로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된 강역[疆域]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역사[歷史]는, 비록 역사서[歷史書]는, 일부 남아 있지만, 나라가 바뀌고, 지명[地名]과 지도[地圖]가 바뀌면서, 광대[廣大]했던 역사[歷史]의 강역[疆域]과, 그 역사[歷史]의 본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이러한 우리 역사[歷史]의 현실[現實]에서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찾는 일은, 백지[白紙]의 상태에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발길을 옮겨야 하는, 난관[難關]중의 난관[難關]의 어려움 속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歷史]의 현실[現實]이 이러한데도,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고자하는 사람들이, 허[虛]와 실[實]을 구분하지 못하고, 왜곡[歪曲]된 지도[地圖]와, 교묘[巧妙]히 변조[變造]된 기록[記錄]들을 가지고 우기면서, 주장을 굽히지 않고, 추정[推定]과 가설[假說]로, 그 것이 역사[歷史]의 사실[事實]인 것처럼, 그러한 설[說]들을 퍼트리고 있는데, 그러한 일에 대한 의문[疑問]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많은 기록[記錄]들이 전하고 있음에도, 반도[半島]의 북[北]쪽에, 백두산[白頭山]을 박아 놓고,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는다. ? 의무려산[醫巫閭山]을 지금의 동북[東北] 삼성[三省]에 붙여놓고,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는다. ? 음산[陰山]을 지금의 대동[大同] 북[北]쪽에 있다고 하면서,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는다. ?
음산[陰山]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어디인지도 모르며, 백두산[白頭山]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평양[平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는다는 것은, 그 것은, 이미 우리의 역사[歷史]를 포기 한 것과 같은 것이다.
파리곤[巴里坤] 바리쿤자치현[哈薩克自治县]에서 국경[國境]을 넘어, 북[北]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알타이 산맥[山脈]이 남[南]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남[南]쪽으로 흘러내리는, 강[江]의 지류[支流]들과 만나게 된다. 이 지류[支流]들 중에, 강[江]을 따라서 북[北]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이곳은, 몽고[蒙古]인데, 파리곤[巴里坤]에서 중국[中國] 국경[國境]을 넘어 올라가는 지역은, 반은 사막[沙漠]지대다. 기록[記錄]을 남긴 사람들이 해[海]라고 표현을 했듯이, 대령[大嶺]이 뻗어내린 높은 산과 준령[峻嶺]을 제외하고는, 모래바람과 흙먼지가 날리는 황량[荒凉]한 곳이 대부분이다.
알타이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흐르는 곳은, 꼭 오아시스와 같다. 흘러내리는 작은 강[江]들은, 반사막[半沙漠]지대의 광활[廣闊]한 곳으로 스며든다. 지금은 사막[沙漠]화가 심하지만, 물이 고여 있던 흔적[痕迹]을 살펴보면, 바다와 같은 넓은 면적이 호수[湖水]를 이루고 있었음을 확인[確認] 할수 있다.
이 길을 따라 북[北]쪽으로 올라가게 되면, 벨루하산을 산을 만나게 된다. 옛 사람들도 이 길을 통하여 다녔다고 하는데, 도로[道路]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다니기가 쉬운 길이 아니다.
이 계곡은, 수[數] 백리[百里]가 북[北]쪽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 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入口]쪽으로 흐르고 있는 강[江]의 중심[中心]에, 북정록[北征錄]의 기록[記錄]에 나오는, 암석[巖石]으로 된 기둥과 같은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강의 중심[中心]에 뿌리를 박고 강 옆의 암석[巖石]으로 이루어진 산[山]을 떠 바치고 있는 형국[形局]이다. 이곳에서 남[南]쪽으로,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에 이르고, 또 남[南]쪽으로, 철령[鐵嶺]을 넘으면, 강원도[江原道] 회양도호부[淮陽都護府]에 이른다.
북정록[北征錄]의 저자[著者]가 표현한대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으니, 당시[當時]에, 백두산[白頭山]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기 위하여, 역관[譯官]인 아들 김경문[金慶門]과 함께, 이곳을 통과하여 백두산[白頭山]을 오르던 험난[險難]한 여정을 가회 깊이 공감[共感]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도 자연[自然]의 지세[地勢]와 형상[形象]은,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니,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역사[歷史]의 본래 모습은, 위대[偉大]한 자연[自然]의 조화[造化]속에, 우리 역사[歷史]의 장엄[莊嚴]함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었다.
북정록[北征錄]
김지남[金指南]
二十六日己酉. 朝兩午晴. 曉頭准發行四十里. 到鐵原出站豐田驛. 此是江原道界也. 府使李令頤晩出待站上. 而其所供饋懸勝於畿邑矣. [중략]
3월 26일 기유[己酉]일. 아침에 비 오다가 낮에 갬,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철원[鐵原]에서 관리하는[出站] 풍전역[豐田驛]에 이르렀다. 이 곳은 강원도[江原道] 땅이다. 부사[府使] 이이만[李頤晩]이 참[站]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공궤[供饋]하는 것이 경기 [京畿]지방의 고을보다 훨씬 나았다. [중략]
遞騎驛馬京刷馬回便修書以付. 中火後. 行四十里到金化縣. 縣監則李秉淵也. 又馬中火而發行五十里. 到金城縣止宿. 縣令則洪重福也. 是日行一百三十里. [중략]
역마[驛馬]를 갈아타고 서울로 돌아가는 쇄마[刷馬]편에 편지를 써서 부쳤다. 점심 식사 후 40리를 가서 김화현[金化縣]에 닿았다. 현감[縣監]은 이병연[李秉淵]이었다. 새참을 먹고 다시 출발하여 50리를 가서 금성현[金城縣]에 이르러 묵었다. 현령[縣令]은 홍중복[洪重福]이었다. 이날 130리를 갔다. [중략]
二十八日. 辛亥. 晴. 曉頭發行. 舟渡西津江. 輿踰鐵嶺. 嶺路頗險. 延遠三十餘里及抵嶺上. 此乃咸鏡道之界也. 安邊延逢及北關營吏來待矣.[중략]
3월 28일 신해[辛亥]일.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배로 서진강[西津江]을 건너 가마를 타고 철령[鐵嶺]을 넘었다. 상당히 험한 고갯길이 멀리 30여 리나 이어졌다. 고개 정상에 이르니 이 곳이 바로 함경도[咸鏡道]와의 경계[境界]였다. 안변[安邊]의 안내인들과 북관영리[北關營吏]의 아전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行到數里有懸門嶺. 左右岩石削立. 如框. 其間菫容二駄馬. 其下十五里之地. 則極爲險峻. 陟降甚艱. 若作門屛而閉之. 則有萬夫莫開之勢. 可謂第一關防也. [중략]
몇 리를 더 가니 현문령[懸門嶺]이 있는데, 좌우[左右]의 암석[岩石]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문테[框]를 세워 놓은 것 같았다. 그 사이가 매우 좁아서 두 바리를 실은 말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였다. 그 아래 15리쯤 더 내려간 곳은 너무나 험준하여 오르내리기가 지극히 어려웠다. 만일 문[門]을 만들어 닫으면, 만[萬]명의 사람이라도 열 수 없을 정도였다. 가히 제1 관방[關防]이라 말할 수 있겠다. [중략]
中火于安邊出站高山驛. 府使南迪明病未出待矣. 又行五十里. 抵釋王寺止宿. 是日行一百里. [중략]
안변[安邊]에서 관리하는 고산역[高山驛]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부사[府使] 남적명[南迪明]이 병으로 인하여 나와서 맞이하지 못하였다. 또 50리를 가서 석왕사[釋王寺]에 이르러 묵었다. 이 날 100리를 갔다. [중략]
釋王寺者. 安邊之巨刹也. 乃我太祖大王命建之寺. 殿宇壯. 僧徒亦多. 前有龍飛興福兩座傑樓. 西有五百羅漢之殿. 羅漢所被袈裟是當初所着之錦叚云. 而至今三百餘年. 叚色不甚傷亦可恠也. [중략]
석왕사[釋王寺]는 안변[安邊]의 큰 절인데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이 세운 절로서 건물들이 장려하고 승려 수도 많았다. 앞에는 용비루[龍飛樓], 흥복루[興福樓]가 우뚝하게 서 있었다. 서[西]쪽에는 오백[五百] 나한전[羅漢殿]이 있는데, 나한[羅漢]들이 걸친 가사[架裟]는 창건[創建] 당시에 입힌 금단[錦段]이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3백[三百]여년[餘年]이 지났는데도 비단 색깔이 거의 손상[損傷]되지 않았으니 이 또한 매우 놀라운 일이다. [중략]
初五日丁巳. 晴. 平明准發. 踰函關嶺. 嶺路之高峻視鉄嶺有加焉. 行四十五里. 到洪原出站函原驛. 縣監李震相來待. 中火後. 又行二十五里. 到洪原縣止宿. 是日行七十里. [중략]
4월 5일 정사[丁巳]일.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함관령[函關嶺]을 넘었다. 고갯길이 높고 가파른 것이 철령[鐵嶺]보다 갑절은 되어 보였다. 45리를 가서 홍원[洪原]에서 관리하는 함원역[函原驛]에 닿았다. 현감[縣監] 이진상[李震相]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 다시 25리를 가서 홍원현[洪原縣]에 이르러 묵었다 이 날 70리를 갔다. [중략]
初六日戊午. 晴. 平明准發行四十里. 到洪原出站平浦驛. 中火. 踰三關嶺. 又行五十五里. 到北靑止宿. 是日行九十五里. 巡相以採夏留於此. 慶兒出迎於城南五里許. 良慰. 此處乃南道兵營. 兵使尹慤. 卽藝洞尹大將之姪也. 來時有付簡之事卽爲傳致. 虞候閔震斗. 判官成任. 亦是曾有面分矣. 塞外相逢. 亦可忻慰. [중략]
4월 6일 무오[戊午]일.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홍원[洪原]에서 관리하는 평포역[平浦驛]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삼관령[三關嶺]을 넘어 다시 55리를 가서 북청[北靑]에 이르러 묵었다. 이 날 95리를 갔다. 관찰사[觀察使]가 몸이 불편하여 이 곳에 머물렀다. [중략]
慶兒出迎於城南五里許. 良慰. 此處乃南道兵營. 兵使尹慤. 卽藝洞尹大將之姪也. 來時有付簡之事卽爲傳致. 虞候閔震斗. 判官成任. 亦是曾有面分矣. 塞外相逢. 亦可忻慰. [중략]
아들 경문[慶門]이 북청[北靑]의 성[城] 남[南]쪽 5리 밖에 나와 맞이하니 매우 기뻤다. 이 곳은 바로 함경남도[咸鏡南道] 병영[兵營]이다.
병사[兵使] 윤각[尹慤]은, 예동[藝洞] 윤[尹] 대장[大將]의 조카이다. 올 때에 윤[尹] 대장[大將]이 부탁한 편지가 있어서 곧바로 건네주었다. 우후[虞候] 민진두[閔震斗]와 판관[判官] 성임[成任] 또한 예전부터 안면이 있었는데, 먼 변경[邊境] 땅에서 만나니 더없이 기쁘고 위로가 되었다. [중략]
十九日辛未. 兩. 留舊加乙坡知. 灣府以客行今月初六. 准自瀋陽直向頭道溝之意. 移文來到. 其間程道乃是半月程. 而尙無聲息未知其故也. [중략]
4월 19일 신미[辛未] 비, 구가을파지[舊加乙坡知]에 머물렀다. 만부[灣府]에서 총관[摠管] 일행이 이 달 초 6일에 심양[瀋陽]을 출발해서 곧바로 두도구[頭道溝]로 향한다는 내용의 공문이 도착했다. 그간의 일정이 보름길에 해당하는데 아직도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으니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중략]
新加乙坡知僉使. 李汝晦爲謁使相而來此. 乃前軍哭僉正李漢圭之子. 余曾爲武庫監官時與其父同苦. 又於丙戌赴燕時與其兄汝迪同行. 來此絶塞逢着故人子弟. 彼此欣慰奚. 但空谷之跫音而己哉. [중략]
신가을파지[新加乙坡知] 첨사[僉使] 이여회[李汝晦]가, 접반사[接伴使]에게 인사드리기 위해 여기에 왔다. 그는 전[前]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이한규[李漢圭]의 아들인데, 내가 일찍이 무고 감관[武庫監官]으로 있을 때 그의 부친[父親]과 함께 근무했고, 병술년[丙戌年], 연경[燕京]에 사신[使臣]으로 갈 때에는 그의 형[兄] 여적[汝迪]과 동행했었다. 이 외딴 변방[邊方]에서 친구의 자제[子弟]를 만났으니 피차의 즐거움이 어찌 쓸쓸한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와 같겠는가? [중략]
二十六日戊寅. 晴. 質明陪御帖先發. 踰衝天嶺. 嶺路之險峻. 過於厚峙函關. 昨年關西江邊之行. 日踰數三大嶺. 而其中碧潼之新里最爲峻急. 意以爲嶺隘之難豈有過此者. 玆嶺之險視諸新里不可同日而語. 延遠之勢首尾凡五十里. 蜀道井陉之險未知與此何如也. [중략]
4월 26일 무인[戊寅] 맑음, 새벽녘에 어첩[御帖]을 받들고 먼저 출발하여, 충천령[衝天嶺]을 넘었는데, 고갯길이 후치령[厚峙嶺]이나 함관령[函關嶺]보다 더 험했다. 작년에 평안도[平安道] 강변[江邊]에 행차하였을 때에는 하루에 몇 개의 큰 고개를 넘었는데, 그 중에서도 벽동[碧潼]의 신리[新里]가 가장 험했다. 그러나 고갯길이 험한 것이 이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 고개의 험하기는 신리[新里] 고개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멀리 뻗은 형세[形勢]의 시작과 끝이 모두 50리[五十里]이며, 촉[蜀]나라의 산[山]길이 지극히 험하다는 말이 있지만, 이와 같을지는 모르겠다. [중략]
到松田站. 中火後. 又緣崖以行至十餘里. 有巖石屹立於江中. 圍可數十抱高可數百丈. 望若擎天之柱. 而巓上有三株栢子樹. 矗矗撰霄天. 豈敎巧工琢成而然耶. 可謂奇觀也. 又行數里許. 金浩然曁慶兒來迎. [중략]
송전참[松田站]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은 후에 가파른 절벽을 따라 10여 리 정도를 나아가니 강[江] 속에 암석[巖石]이 우뚝 솟아 있는데, 둘레가 가히 수십 아름이나 되었고 높이는 수백[數百] 길이나 되어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柱]을 바라보는 듯했다. 산꼭대기 위에 잣나무 세 그루가 빽빽하게 하늘을 가리고 있으니, 하늘이 솜씨 좋은 장인[匠人]을 시켜 깎아 만든 듯하였다. 정말로 빼어난 경치라 하겠다. 또 몇 리쯤 가니 김호연[金浩然]과 아들 경문[慶門]이 마중나왔다. [중략]
북정록[北征錄]의 저자[著者]인 김지남[金指南]은, 조선조[朝鮮朝]에서,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중신[重臣]이며, 역관[譯官] 이었다. 이 분이 백두산[白頭山]으로 가기 위하여 거치는 여정[旅程]을 보면, 철원[鐵原]에서 관리하는[出站] 풍전역[豐田驛]에 이르고, 김화현[金化縣], 금성현[金城縣]에 이르고, 서진강[西津江]을 건너 가마를 타고 철령[鐵嶺]을 넘는다. 철령[鐵嶺]의 정상[頂上]이 함경도[咸鏡道]와의 경계[境界] 지점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광천[廣川]선생은, 여기서, 함경도[咸鏡道] 안변[安邊] 도호부[都護府]의 관리와, 북관영리[北關營吏]들의 영접을 받는다.
안변[安邊]에 도착한 광천[廣川]선생은, 고산역[高山驛]과 석왕사[釋王寺]에 들리고, 안변[安邊]에서 출발하여, 북[北]쪽으로 함관령[函關嶺]을 넘는다. 함관령[函關嶺]을 넘어, 홍원[洪原]의 함원역[函原驛]에 이르고, 평포역[平浦驛]을 지나, 삼관령[三關嶺]을 넘고, 북청[北靑]에 이르러 묵는다. 북청[北靑]에서 아들 김경문[金慶門]을 만나는데, 북청[北靑]은, 함경남도[咸鏡南道] 병영[兵營]이 설치된 곳이라고 한다.
북청[北靑]에서 출발하여, 구가을파지[舊加乙坡知]에 이르고, 충천령[衝天嶺]을 넘고, 송전참[松田站]에 도착한다. 광천[廣川]선생은, 충천령[衝天嶺]의 멀리 뻗은 형세[形勢]가, 시작과 끝이 모두 50리[五十餘里]여리에 이르는, 험난[險難]한 지세[地勢]와 지형[地形]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송전참[松田站]은, 지금 그 흔적[痕迹]을 찾을 수 없지만, 강[江]의 암석[巖石]이 있는 곳에서 10여리라고 하였으니, 이곳의 인근[隣近]에, 송전참[松田站]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강원도[江原道] 회양[淮陽] 도호부[都護府]의 북[北]쪽에, 철령[鐵嶺]이, 근접[近接]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광천[廣川]선생의 지명[地名]과는 다소 차이는 있으나, 철령[鐵嶺]을 넘으면, 함경도[咸鏡道]의 안변[安邊] 도호부[都護府]이니,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시[詩]와 문집[文集]들의 내용들과 일치 되고, 차이가 없다.
그리고 회양부[淮陽府]와 안변부[安邊府]의 도중에서, 노래하고 있는 시[詩]들을 보면, 모래 바람이 뿌옇게 날린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것은, 철령[鐵嶺]의 인근[隣近] 지역은, 반은 황량[荒凉]한 사막[沙漠]지대와 같은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도, 또한 다르지 않다, 거칠고 메마른 지역이라는 말은, 시[詩]들의 내용과 차이가 없으며, 저자[著者]들이 살던 당시[當時]와는, 자연환경[自然環境]의 변화[變化]로, 지금과는 자연환경[自然環境]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이곳 지역은, 시[詩]와 문집[文集]과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충족[充足]하고도 남는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역사서[歷史書]들의 기록[記錄]들이, 모두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간혹 오류[誤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것은, 다른 사서[史書]들을 보면서, 비교[比較]하고 검토해보면, 그 진위[眞僞]는 드러나게 된다. 개마대산[蓋馬大山]이 단단대령[單單大嶺]인가 ? 아닌가 ? 하는 문제는 이미 다 드러나 있다.
다만, 한서[漢書]에서 말하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이 고구려[高句麗] 평양[平壤]의 서[西]쪽에 있다는 기록[記錄]은, 잘못된 기록[記錄]이며, 후대[後代]의 사가[史家]들이 이를 인용[引用]하여 기록[記錄]을 함으로서, 잘못된 기록[記錄]이 계속 전해지게 된 것이라고, 조선조[朝鮮朝]의 선현[先賢]들이 이미, 지적하고 있으니, 이는 맞는 말이다.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한서[漢書]에서 말하는, 단단대령[單單大嶺]이 맞다. 장백산[長白山], 백두산[白頭山], 개마대산[蓋馬大山]은, 다 같은 산을 말하고 있으며, 단단대령[單單大嶺]은, 백두산[白頭山]에서, 남[南]쪽으로 내려오는 대령[大嶺]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단단대령[單單大嶺]의 동[東]쪽에, 동옥저[東沃沮]가 있다고 했으니, 이는 근세[近世]에, 조선조[朝鮮朝]의 기록[記錄]과도 일치 하고 있다.
강원도[江原道] 회양[淮陽] 도호부[都護府]의 서[西]쪽으로 투르판 분지에, 선선[鄯善]이 있다. 조선사[朝鮮史]에서는, 황해도[黃海道] 산산[蒜山]이라고 기록[記錄]을 하고 있다. 지금 중국[中國]에서, 선선[鄯善]이라고 말하는 것은, 산산[蒜山]의 전음이다. 황해도[黃海道]의 산산[蒜山]이 전음되어, 선선[鄯善]이라고 하는 것이다. 선선[鄯善]의 전음이 산산[蒜山]이고, 산산[蒜山]의 전음이 선선[鄯善]이 되어, 지금도 선선[鄯善]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대동지지[大東地志]의 기록[記錄]에는,...... 산산진[蒜山鎭]의 서북[西北]쪽으로 25리에 옛 극성진[棘城鎭]의 터가 있다. 숙종[肅宗] 4년에 진[鎭]을 설치하고, 8년에 흑교진[黑橋鎭]을 극성[棘城]에 옮겨 합치고, 첨사겸별중영장[僉使兼別中營將]으로 승격시켰다가 후에 별중영장[別中營將]은 감하였다. 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는데, 선선[鄯善]의 서북[西北]쪽에, 지금도 작은 고성[古城]이, 원형[原形]을 유지하고 굳건히 서 있다. 현지[現地]에서는, 가극아고보[柯克亞古堡]라고 부른다.
우리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일치하는 것을, 우연[偶然]의 일치[一致]라고 할수 있을까 ? 이는 우연[偶然]의 일치[一致]가 아니다. 여기에서, 서[西]쪽, 서북[西北]쪽으로 황주[黃州]와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에 나타나는, 역사[歷史]의 진실[眞實]들은, 우리의 잠들었던 웅혼[雄渾]한 기상[氣像]과, 혼[魂]과 얼을 일깨우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역사[歷史]가 어찌, 대륙[大陸]의 반쪽이며, 반도[半島]의 소국[小國]이었으랴 !
철령[鐵嶺]은, 알타이산맥이 남[南]쪽으로 2000리[二千里]를 뻗어내려, 지금의 합밀[哈密]의 북[北]쪽과, 파리곤합살극자치현[巴里坤哈薩克自治县]의 남[南]쪽에, 동[東]과 서[西]를 가로지르는, 현재의 천산[天山] 산맥[山脈] 줄기의, 동[東]쪽에 있는, 준령[峻嶺]을 말하는 것이다. 서[西]쪽에 있는 것이,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추지령[楸池嶺]이고, 동[東]쪽에 있는 것이 철령[鐵嶺]이다. 동[東]쪽에서 넘어가는 도로[道路]는, 포장이 되었는데, 서[西]쪽에 있는 도로[道路]는, 포장도 되어 있지 않고, 도로[道路]만 개통되어 있었다.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事實]이지만, 반도사관[半島史觀]에서 주장하는 대로, 반도[半島]에서 우리의 역사[歷史]가 반만년[半萬年]을 이어, 근세[近世]의 조선[朝鮮]까지 내려 왔다는 것은, 허무맹랑[虛無孟浪]한 거짓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한가지 예를 들어 본다면, 강원도[江原道]의 회양도호부[淮陽都護府] 산천[山川]편에, 금강산[金剛山]을 붙여 놓았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의 금강산[金剛山]에 대한 설명을 보기로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강원도[江原道] 회양도호부[淮陽都護府]
금강산[金剛山] 장양현[長楊縣]의 동[東]쪽 30리에 있다. 부[府]와의 거리는 1백 67리[一百六十七里]이다. 산[山]의 이름이 다섯 가지이니, 금강[金剛], 개골[皆骨], 열반[涅槃], 풍악[楓嶽], 지달[怾怛]로, 백두산[白頭山]의 남[南]쪽 줄기이다. 회령부[會寧府]의 우라한현[亐羅漢峴]으로부터 갑산[甲山]에 이르러 동[東]쪽은 두리산[頭里山]이 되고, 영흥[永興]의 서북[西北]쪽은 검산[劒山]이 되었으며, 부[府]의 서남[西南]쪽은 분수령[分水嶺]이 된다. [중략]
서북[西北]쪽으로는 철령[鐵嶺]이 되며, 통천[通川]의 서남[西南]쪽은 추지령[楸池嶺]이 되고, 장양[長楊]의 동[東]쪽과 고성[高城]의 서[西]쪽까지가 이 산[山]이 되었다. 분수령[分水嶺]에서 여기까지는 8백 30여[八百三十餘里] 리이다. 산[山]은 모두 1만[一萬] 2천봉[二千峰]으로, 바위가 우뚝이 뼈처럼 서서 동[東]쪽으로 푸른 바다를 굽어보며, 삼나무와 전나무가 들어서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그림과 같다. [중략]
일출봉[日出峯], 월출봉[月出峯]의 두 봉우리가 있어서 해와 달이 뜨는 것을 볼 수 있다. 산 안팎에 모두 1백[一百] 여덟 [八]개의 절이 있는데, 표훈사[表訓寺], 정양사[正陽寺], 장안사[長安寺], 마하연[摩訶衍], 보덕굴[普德窟], 유점사[楡岾寺]가 가장 이름난 사찰[사찰]이라고 한다.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내용을 살펴보면, 철저히 반도[半島]에 맞추어져 설명이 되고 있다. 본래의 금강산[金剛山]은 반도[半島]에 없었다. 또한, 철령[鐵嶺]의 설명까지 하고 있는데, 너무 황당하여 할 말이 없다. 허목[許穆]선생은 문집[文集]에서, 강릉도호부[江陵都護府]를 설명하면서, 강릉도호부[江陵都護府]는, 회양[淮陽]의 철령[鐵嶺]에서부터, 1200여리[千二百餘里]를 관장 한다고 하였으며, 금강산[金剛山]은, 강릉부[江陵府]의 관동[關東]에 있다고, 자세하게 기록[記錄]하고 있다.
당시[當時]에 강릉[江陵]을 오고 가면서, 삼척부사[三陟府使]까지 지낸 분이 기록[記錄]한 내용이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따라 서[西]쪽과 서북[西北]쪽으로 가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산천[山川]의 지형[地形]. 지세[地勢], 유적[遺跡], 유물[遺物], 자연[自然]의 형승[形勝], 자연환경[自然環境]등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없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소설도 되지 못하는, 부끄러운 자화상[自畵像]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우리의 국사[國史]인 역사서[歷史書]는, 철저회 반도[半島]에 맞추어져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것임을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
기언[記言]
남북도풍토지[南北道風土誌]
安邊 唐時靺鞨 旣幷沃沮 寘定理,安邊二州 定理州 後世因革無傳 安邊州 高麗改登州 誌曰 在宜州南 宜州今德源府 安邊之名 最舊遠 今爲安邊都護府 [중략]
안변[安邊]은, 당[唐]나라 때 말갈[靺鞨]이 옥저[沃沮]를 병합하고 나서 정리[定理]와 안변[安邊] 두주[二州를 두었다. 정리주[定理州]는 후세의 인혁[因革]이 전해지지 않고, 안변주[安邊州]는 高麗[高麗] 때 등주[登州]로 개칭[改稱]하였다. 지[誌]에 의주[宜州]의 남[南]쪽에 있는데, 의주[宜州]는, 지금의 덕원부[德源府]이다. 안변[安邊]이라는 이름이 가장 오래되었는데, 지금은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가 되었다. [중략]
北界之地 鐵嶺以北 至豆滿江千里 古沃沮之域 或曰置溝婁 東濱浡海 自挹婁南至獩貊 又有東沃沮 又南沃沮 在獩貊之外 漢之滄海郡也 挹婁 肅愼氏之別名 [중략]
북계[北界]의 땅은 철령[鐵嶺] 이북[以北]으로부터 두만강[豆滿江]까지 1000리[千里]인데 옛날 옥저[沃沮]의 지역이다. 혹자는 구루[溝婁]를 두었다고 한다. 동[東]쪽으로 발해[浡海]의 바닷가에 접하고, 읍루[挹婁]에서부터 남[南]쪽으로 예맥[獩貊]에 이른다. 또 동옥저[東沃沮]가 있고, 또 남옥저[南沃沮]가 예맥[獩貊]의 밖에 있는데 한[漢]나라의 창해군[滄海郡]이다. 읍루[挹婁]는 숙신씨[肅愼氏]의 별명[別名]이다. [중략]
靺鞨 本粟靺鞨 高句麗別種 其酋祚榮引弓數萬 幷扶餘,沃沮,弁韓,朝鮮地 唐開元中 去靺鞨 稱渤海 以肅愼古地置上京 獩貊古地置東京 沃沮古地寘南京 後渤海爲東契丹 [중략]
말갈[靺鞨]은 본래 속말갈[粟靺鞨]인데 고구려[高句麗]의 별종[別種]이다. 그 추장 대조영[大祚榮]이 궁수[弓手] 수만 명을 거느리고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의 땅을 병합하였다. 당[唐]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말갈[靺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발해[渤海]라고 칭[稱]하였는데, 숙신[肅愼]의 옛 땅에 상경[上京]을 두고, 예맥[獩貊]의 옛 땅에 동경[東京]을 두고, 옥저[沃沮]의 옛 땅에 남경[南京]을 두었다. 뒤에 발해[渤海]가 동거란[東契丹]이 되었다. [중략]
人事古今之殊 治亂興亡之故 其變無窮 而風氣俗尙 人物所善所好 大體無變 沃沮之質樸強悍 扶餘,靺鞨之喜勇強嗜欲 蓋北俗同然 [중략]
인사[人事]가 고금[古今]에 다른 것과,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원인은, 그 변화[變化]가 무궁하지만, 풍기[風氣]와 습속[習俗]은, 사람들이 선[善]하게 여기고 좋게 여기는 것과 대체로 변함이 없다. 옥저[沃沮]는 질박하면서 사납고 부여[扶餘]와 말갈[靺鞨]은 용맹하고 강하면서 탐욕[貪慾]이 있으니, 대개 북[北]쪽의 풍속[風俗]이 다 그렇다. [중략]
太祖七年 以斡木河 國祖王跡所基 置慶源府 後女眞寇邊 移府於蘇多老 女眞復入寇 又移府於富居 增置寧北鎭於石幕以爲塞 斡木河 後爲童孟哥帖木兒所據 兀狄哈擊滅之 [중략]
태조[太祖] 7년[七年]에, 알목하[斡木河]가 국조[國祖] 왕적[王跡]의 기반이 된 곳이라고 하여 경원부[慶源府]를 두었는데, 그 뒤에 여진[女眞]이 변경[邊境]을 침입하자 경원부[慶源府]를 소다로[蘇多老]로 옮겼고, 여진[女眞]이 다시 침입하자 또 부거[富居]로 옮기고 영북진[寧北鎭]을 석막[石幕]에 증설하여 변방[邊方]으로 삼았다. 알목하[斡木河]는 뒤에,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가 차지하였는데, 올적합[兀狄哈]이 쳐서 멸망시켰다. [중략]
世宗十六年 以金宗瑞爲都節制使 復孔,鏡古地 移寧北鎭於伯顏愁所斡木河西北 當賊路之衝 而斡朶里遺種所居 置大鎭以塞北門 復置慶源府於會叱家 增築孔州古邑城 以豆滿江爲界 [중략]
세종[世宗] 16년[十六年]에 김종서[金宗瑞]를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삼아, 공주[孔州]와 경주[鏡州]의 옛 땅을 회복하였고, 영북진[寧北鎭]을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기고, 알목하[斡木河]의 서북[西北]쪽이 외적[外賊]이 침입해 들어오는 길목이라고 하여 알타리[斡朶里]의 유민이 살고 있는 곳에 대진[大鎭]을 두어서 북[北]쪽의 새문[塞門]을 막았다. 다시 경원부[慶源府]를 회질가[會叱家]에 두고 공주[孔州]의 옛 읍성[邑城]을 증축하여 두만강[豆滿江]으로 경계[境界]를 삼았다. [중략]
우리의 역사[歷史]는, 우리 역사[歷史]의 마지막 왕조[王朝]인,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선[朝鮮]까지, 지금의 알타이산맥 전체에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이적[夷狄]들을 제어 하였다. 왕조실록[王朝實錄]과 대신[大臣]들의 문집[文集]에서 기록[記錄]하고 있는 대로, 이곳 함경도[咸鏡道]의 지역에, 백두산[白頭山]이 있으며, 이 백두산[白頭山]의 서북[西北]쪽이 바로, 역사[歷史]속의 음산[陰山]이다. 청[淸]나라와 백두산[白頭山]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두만강[豆滿江]이라고 부른 강[江]은, 본래의 두만강[豆滿江]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나서, 북[北]쪽으로 700리[七百里]의 땅을 잃었다고 한탄한 기록[記錄]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상촌집[象村集]
류길주[留吉州]
객지[客地]에 오래 있어 먼 길 시름겨운데 [久客愁長路], 그대로 머무른 채 해[歲]가 또 바뀌려 하네 [淹留歲欲更], 신명[身名]은 점차 쇠퇴해짐을 보겠고 [身名看歷落], 세도는 연횡[連衡]하는대로 맡겨두노라 [世道任連衡], 한해[瀚海]는 하늘에 닿게 용솟음치고 [瀚海兼天湧], 음산[陰山]의 눈은 띠를 이루어 밝게 빛나네 [陰山帶雪明], 창랑[滄浪]에 돌아갈 꿈이 있는지라 [滄浪有歸夢], 높은 벼슬은 진작부터 가벼이 여겼도다. [鐘鼎向來輕] [중략]
식민사관[植民史觀]의 교육[敎育]을 받으며 자라나는 세대[世代]들은, 어릴 때에 이미, 정신[精神]부터 무너지고 말 것이다. 세계의 대제국[大帝國]을 건설했다는 원[元]나라도, 고려[高麗]를 어쩌지 못했다. 원[元]나라를 북방[北方]으로 몰아내고, 천하[天下]의 황제국[皇帝國]이라고 칭[稱]하는 명[明]나라도, 조선[朝鮮]의 세조[世祖]에게는, 비웃음꺼리 밖에 되지 못했다.
명[明]을 멸망[滅亡]시키고 일어난 청[淸]나라는, 조선[朝鮮]을 굴복[屈服]시켰다고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으나, 조선[朝鮮]과 청[淸]나라의 관계는, 식민사관[植民史觀]이 가르치는 교육[敎育]과는, 전혀 다른 관계였다는 사실[事實]을 알아야 한다. 조선[朝鮮]을 침략[侵略]하고, 식민사관[植民史觀]을 만든 무리들은, 한두 나라가 아니다.
이러한 무리들의 음모[陰謀]와 책략[策略]의 목적[目的]은, 지구상에서, 조선사[朝鮮史], 역대[歷代] 역사[歷史]의, 정신[精神]과 혼[魂]과 얼을 말살[抹殺]시켜, 자라나는 세대[世代]들에게 주입하고, 후대[後代]에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계략[計略]이 숨어 있으며, 그러한 음모[陰謀]와 책략[策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한국[韓國]사람이라면, 명심[銘心]해야 할 것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에서, 사대[事大]의 대명사[大名辭]로 꼽는 명[明]나라에 대하여, 당시[當時]를 살았던 분이 기록[記錄]한 내용을 한번 보기로 한다.
우서[迂書]에,........ 北虜 之爲中國患久矣 以明朝言之也 북[北]쪽 오랑캐가 중국[中國]의 근심거리가 된 지 오래되었다고 하는 것은 명[明] 나라를 두고 한 말이다. 先固勿論 俺答受封以前 明天子 殆不得 安枕而臥 그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수봉[受封]을 하기 전에는, 명[明] 나라의 천자[天子]는, 거의 베개를 편히 베고 눕지를 못하다가, 自封貢後至明末 終無事, 우리가 봉공[封貢]한 뒤부터 명[明] 나라 말기까지 무사하게 마칠 수 있었다. 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 것일까 ?
역사서[歷史書]에서 빠짐없이 등장하고, 식민사관[植民史觀]인 반도사관[半島史觀]에서 외쳐대는, 우리나라는, 삼면[三面]이 바다이고, 서북[西北]쪽으로만 육지[陸地]에 연결되어 있다는, 이러한 기록[記錄]을, 반도[半島]에 맞추고, 대대로 우리의 역사[歷史]는, 반도[半島]에서 이루어져 왔다고 주장하며 가르치는,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우리 역사[歷史]의 현실[現實]은, 한국[韓國] 사학계[史學界]의 본질을 그대로 들어내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가 삼면[三面]이 바다라는 말은, 상고시대[上古時代], 즉 은[殷], 주[周]시대[時代]에, 요동[遼東]에 있었던 고조선[古朝鮮]을 말하는 것이라고, 조선조[朝鮮朝]의 대신[大臣]이 역사서[歷史書]에서 기록[記錄]을 하고 있으며, 사방[四方] 천리[千里]니 이천리[二千里]니 하는 기록[記錄]들도, 요동[遼東]에 있었던 고조선[古朝鮮]의 지역을 말한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후대[後代]에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하고, 옛 조선[朝鮮]의 영역[領域]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 삼면[三面]이 바다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다고 말하고 있다. 삼면[三面]이 바다라는 말을 교묘[巧妙]히 악용하여, 이를 반도[半島]에 맞추는 자들은, 어떤 역사[歷史]를 배우고 연구[硏究]했는지, 참으로 알수 없는 자들이다.
아국[我國] 삼면조해[三面阻海]나, 유아해동[惟我海東] 삼면조해[三面阻海] 일우연륙[一隅連陸]이나 다 같은 말이다. 이러한 기록[記錄]에 대한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을 알지 못하고, 이를 무조건 반도[半島]에 맞추는 사람들은, 역사서[歷史書]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상고시대[上古時代]에, 요동[遼東]에 있던 고조선[古朝鮮]의 일부 영역[領域]에 대한 기록[記錄]을,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증거[證據]로 내세우면서, 무슨 역사[歷史]를 가르치고 논[論]한단 말인가 ?
평안도[平安道], 함경도[咸鏡道], 황해도[黃海道]에 사막[沙漠]이 있다는 기록[記錄]들은, 모두 맞는 말이며, 틀림이 없는 기록[記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현[先賢]들은, 이러한 지역[地域]들을, 나라의 명[命]을 받아 다스리고, 때로는 군병[軍兵]을 이끌고 적진[敵陣]을 쓸어버리고, 때로는 유람[遊覽]도 하며, 아득히 머나 먼 길을 오고 가면서, 보고 듣고 체험[體驗]한 것들을, 심성[心性]에서 일어나는 감흥[感興]을 담아, 시[詩]를 통하여, 산천[山川]을 노래하고, 바다[海]를 노래하고, 사막[沙漠]을 노래하고, 이적[夷狄]들을 노래하고, 나라의 형세[形勢]를 노래하고, 자연[自然]을 노래하며, 문집[文集]을 통하여 기록[記錄]들을 남겼던 것이다.
나라의 역사[歷史]는, 국가[國家]와 국민[國民]의 품성[品性]을 높이고, 국가[國家]와 국민[國民]의 기상[氣像]을 드높이며, 국가[國家]와 국민[國民]이 나아갈 길을 밝히고, 국가[國家]와 백성[百姓]들을 새로워지게 하며, 국가[國家]와 국민[國民]의 문명[文明]을 발전시키고, 미래[未來]의 후손[後孫]들에게,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경륜[經綸]을 심어주며, 국가[國家]와 국민[國民]의 천년[千年] 대계[大計]를 굳건히 하는, 뿌리와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다.
|
첫댓글 <조선사의 진실을 찾자>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숨이 가빠집니다. 이것은 '나'만의 현상은 아닐 것입니다. 좋은 글 감명깊게 봅니다. <백두산(장백산)=벨루하산=알타이산>이며, <철령은 알타이산맥과 천산산맥의 동쪽 산맥(령)>이란 주장을 하셨네요. <음산은 알타이산(벨루하산)의 북쪽에 있는 산>이란 주장도 하셨구요. 카페에서도 한 번 재배치를 해보겠습니다. 반도사관과 식민사관은 어찌 보면 다른 것 같으면서도 영토면으로 보면, 똑같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강단사학의 말장난으로 볼 수 있는데, 우리 카페에서는 "반도사관은 식민사관"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죄과는 백년이 지난다 해도 기필코 받아내야 합니다.
이들 "반도사관=식민사관"논자들은 언제까지 "수많은 국민들을 속이고, 망국의 죄업과 선대들에 대한 모욕"을 할 지 모릅니다. 이러한 일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조선사의 진실 찾기"입니다. "환국고려"님의 가슴을 울리는 글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팔이 아빠 더 이상은 곤란할 것 같군요.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댁내 평안하시고 늘 건강하시길 기원드리겠습니다.
철령은...꼭히 한군대라기 보단...변경의 제일 험난한 산맥에 위치한 골자기 방어진지를 이른다 봅니다.
삭방(서북)의 철령을 말할 땐 천산줄기나 고비알타이산맥, 거길 거란이나 청나라등에 빼앗겼을땐...
동남으로 물러선 기련산줄기의 방어진지...전 그렇게 보고...
조선 동북의 철령이라 했을땐...현 북경의 태행산맥 줄기와 대 흥안령 줄기 중 어디라고 전 봅니다.
철령은 서북방과 동북방으로...천지차로 위치가 나를수 있단 것이져...
감사합니다. 이전에 올려주신 글들에 지도 이미지들이 본 내용들을 머리속에 그려보는데 도움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선생님들 모두 올해도 건강하십쇼
합밀[哈密]의 북[北]쪽이 철령이다.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내용이군요. 임진왜란 당시, 왜장 청정(淸正)이 철령을 넘었는데 지금의 합밀 북쪽을 넘었다는것도 이해하기 어렵고, 송강 정철이 갔던 관동이라는 곳도 합밀 동쪽을 말함이니 그것도 이해하기 어렵고, 또 철령동쪽의 강릉도 현재의 산서성 대동시라 하시니 그것도 역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저만 그런건가요.....
여러 제현 선생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역사인 조선사의, 본 모습에는, 놀랄일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대륙사와 조선사, 그리고 대신들이 남긴 문집을 포함하여, 지금 세상에 전하는 모든 기록의 내용을 따라서, 발길을 옮기다 보면, 우리의 역사인 조선사가, 얼마나 철저히 짓밟히고 망가지고 있는가를 실감하게 됩니다. 합밀 북쪽의 두 준령 중에, 동쪽에 있는 준령이 철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서에서 말하는, 지형, 지리, 자연환경, 유적, 유물등이 모두 일치할뿐만 아니라, 벌루하산이 있는,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북정록에 기록된 아주 똑같은, 자연의 형승이 있습니다.
그건 사서에 나오는 음산(陰山)산맥이 아닐지 싶습니다...고비알타이산맥...
그 주변의 염호들이 있던 사막은 한해(瀚海)..전 그렇게 예상합니다.
그리고 조선사와 연행록에까지 기록이 되어 있는, 황해도 평산의 총수[蔥秀]를 혹시 아시는지요. 이 평산의 총수는 왕조실록에도 기록이 되어 있고, 평산의 대명사 처럼 거론되고 있음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이 평산의 총수가 있는 곳은, 지금 가욕관의 남쪽에 있는, 장액에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황해도의 평산입니다. 인조시에, 당시의 대신이 상소를 올려, 청군을 막으려면, 이곳에 반드시, 일만 이상의 대군을 주둔시키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평산부의 성은, 산을 의지하여 성곽을 축조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치악은, 이곳 평산부에도 기록이 되고 있음을 아실 것이라 사료됩니다.
거긴 청나라에 빼앗끼기 이전의 평안도 아질지요...?
그 밑의 기련산맥 남부 청해성 일대가 황해도나 해주,해서가 아닐지요?
고지도에도 거기에 삼위산이 표기되거든여...
이 글이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그럼 "강원도"는 조선팔도에서 가장 클것 같은데 대동이 강릉이고 합밀이 강원도 회양이면 정말 방대한 지리인데 군사적으로 관할할려면 요새화된 기지가 수십군대는 되어야 할터인데... 합밀에서 북쪽으로 가면 동천산이 하늘높이 솟아있는데 그곳이 바로 철령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서쪽으로 가서 투루판을 지나 오로목재를 갈 수 있는데 왜 굳이 높은 철령을 넘어야 되는지 아리송합니다. 구글맵스로 보아도 동천산 철령을 넘어도 고산준령의 산맥이 즐비한데 이곳을 넘어 함경도로 갔다는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구글로 살펴보셨나 봅니다 제기하신 문제도 매우 소중한 문제라고 생각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