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이제 어느덧 2004년, 어제는 오산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찬바람이 불자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고 제 갈 길을 재촉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93년 봄, 처음 선생님을 뵈었던 그때를 떠올립니다. 소설 쓰겠다는 놈을 불러 놓고 “시를 써봐라” 말씀하시던 때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행복이라도 다 행복이 아니라며, 자신의 행복이 이웃에게 불행으로 다가간다면 그건 행복이 아니라며, 나의 행복을 이웃과 함께 할 수 있을 때야 그때야 진정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 거라며 아직 어린 제자에게 소줏잔을 건네며 미소 짓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94년 남도로 가는 기차를 함께 타고 갈 때, 당신의 대학시절을 이야기하며 학원 강사로 있던 자신의 이십대를 이야기하며 열심히 이 나라를 보고 이웃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라던, 치열하게 살라던 당신의 이야기를 듣던 저는 이제 이십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지금 2004년, 저는 오산에 있지만 함께 소줏잔을 기울이며 함께 시를 노래할 선생님은 계시지 않군요. 오늘 이 자리에는 선생님을 닮은 가족들과 그리고 함께 참교육을 몸으로 이야기하던, 선배·친구·후배 교사들과 선생님에게 실천하는 배움을 들었던 제자들이 왔습니다. 선생님이 우리들 곁을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합법화 되었고, 운암뜰이라 불리던 논밭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오산천변에서 김민기의 광야에서를 목놓아 부르며 자유여, 해방이여 이야기하던 시절도 이제 모두 옛이야기처럼 추억되고 있습니다. 많은 것이 변했고 또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우리 아이들은 자율학습이다, 보충수업이다 변하지 않는 입시지옥에서 몽정의 냄새를 솔솔 풍기고 있습니다. 어쩌면 국가보안법이 올해 안에 폐지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하고 또 많은 것을 그리워하게 합니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선생님이 그리운 건 아마도 선생님은 세월과 함께 변하지 않기 때문일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시비를 세우는 오늘, 반전과 평화 참교육을 이야기하던 선생님의 두 몸 강물 되어 하나로 흐르길 원했던 바램은 조금씩 천천히 눈에 보일 듯합니다.
2004년 11월 27일, 이규황 선생님의 시비 제막식이 고인의 선영인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에서 있었다. 진길장 시인의 사회로 전교조 경기지부 선생님들과 안민석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사람과 땅의 문학 동인들, 오산고등학교 선생님들, 전교조 오산지부 선생님들, 유가족, 제자들, 오산문인협회에서 이날 제막식을 함께 했다. 이규황 시인이 간경화로 세상을 뜬지 벌써 7년이라니, 세월이 무심하다.
첫댓글이규황님! 명복을 빕니다. 정말 시를 모르지만... 그렇게 애닳고 목숨을 생각하며 쓰는 것일까? 어느 분 처럼 손의 동맥을 그어가며...? 대문 밖을 나서다 똥개가 보일 때 그놈의 개새끼에게 잠시 시선과 감정을 주었는데, 밤에 생각 나, 보고 싶었다. 꼬리 흔드는 것이 좋았다 ... 이 건 시가 아닌가? 아직 1차원...
첫댓글 이규황님! 명복을 빕니다. 정말 시를 모르지만... 그렇게 애닳고 목숨을 생각하며 쓰는 것일까? 어느 분 처럼 손의 동맥을 그어가며...? 대문 밖을 나서다 똥개가 보일 때 그놈의 개새끼에게 잠시 시선과 감정을 주었는데, 밤에 생각 나, 보고 싶었다. 꼬리 흔드는 것이 좋았다 ... 이 건 시가 아닌가? 아직 1차원...
규모가 크네요. 문득 안양의 김대규 시인이 생각납니다. 내가 모시고 있는. 그분도 돌아가시면 이렇게 될까. 난 죽으면 화장하고 뿌릴래.
시비 있는 부분만 묘소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