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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비 약 도
최 헌 식
<소설가/ 본회 운영이사>
관광 버스는 미처 잠에서 깨기 전인 도시를 슬그머니 벗어났다. 게으른 새벽의 여명이 무겁게 내려앉은 구름과 관악산 정상을 투박해 보이는 수묵화 한 폭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좌석표를 나누어 주며 승차를 돕던 사내는 관광객 전원의 승차를 알렸고, 잠시 파트너와의 개별적 미팅을 갖도록 권유한 다음 운전석 옆 안내석에 앉아 졸고 있었다. 실내등을 소등하고 감광등 만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는 관광버스 안은 야릇한 생경함과 어색함으로 정숙했고, 신선한 페르몬 향으로 가득했다. 옆 좌석에 동석한 사람이 여행기간 동안의 파트너라는 사내의 안내를 받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픽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짙은 갈색의 헤어 칼라에 이어폰을 한 소녀는 주위에는 무관심한 듯 좌석에 등을 깊숙이 묻고는 눈을 감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스무 살이 않 되게 앳되어보였다. 당초부터 이 묻지 마 관광버스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여정에 비약도가 끼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작심을 했었다. 자신의 취향과는 전혀 맞지 않는 평소에 해괴하게 여기고 있던 묻지 마 관광을 선택한 것은 그 만큼 비약도를 가기가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장거리 기차와 두 번의 버스 그리고 보름 만에 한 번 있는 배편을 이용해야 하는 비약도를 가기 위해서는 시간과 여러 가지 여건이 불편했었다. 도심을 벗어난 버스가 이제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비약도를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수 천 마일의 둥지를 향해 비행하는 철새의 귀향 비행의 감격이 바로 이런 것일까! 이제 그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내 고향 비약도.
세 시간을 달린 버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휴게소에 정차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관광객들이 내렸다. 창가에서 졸고 있던 소녀도 관광객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내 고즈넉함이 버스 안을 가득 채웠고, 비약도의 싸한 해풍을 몰고 왔다. 얼마나 변했을까? 등매산 아래 오두막과 조상들의 묘소는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을까? 개발이라는 명분아래 거친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고 있는 난개발에 비약도는 난자당하지 않았을까? 보름 만에 한 번 여객선이 거쳐 간다는 사실에 비약도는 이미 무인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었다. 잠시 그런 상념을 깨운 것은 소녀였다.
“커피 한 잔 하세요.”
어색함이 역역해 보이지만 미소만은 해맑아 보이는 소녀가 테이크 아웃해온 커피를 내 밀었다. 별로 즐겨 마시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마실만한 차가 커피였다.
“저는 하은…. 아니 그냥 소녀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요. 저도 할아버지… 아니 아직 그렇게는 안 보이고, 아저씨라고 부를게요.“
눈가에 어린 짙은 우수만 아니면 깜찍하고 발랄해 보이는 소녀였다.
“여기 다른 여자들처럼 그런 파트너 역할 못할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에 커피를 대접하는 거예요.”
그런 의미라면 미안해 할 거 없다는 눈빛을 소녀가 본 듯 했다.
“다행이다. 이제 무거운 짐 하나 덜어내도 되겠어요.”
소녀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이어폰을 다시 꼭 눌러 끼었다. 어느새 버스 안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갔다. 정담과 화담이 진득해지고 뽕짝 멜로디가 한껏 흥을 돋우고 있었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돌고 욕망을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에 한껏 부풀어 있는 듯했다. 누구도 이런 자신들의 수치스러운 행위를 부끄러워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만의 비도덕적인 축제는 R시의 도래산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안내원 사내는 다시 일어서서 마이크로 안내 방송을 시작했다. '도래산 정상 전망대까진 왕복 세 시간 소요됩니다. 정상 정복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세 시간 안에 돌아오셔야 합니다. 1분이라도 늦은 팀은 버려두고 출발합니다.’라는 안내원의 멘트에 야릇한 탄성과 비아냥거림이 화답을 했다. 서둘러 관광객들이 차에서 내리자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파트너 끼리 짝을 이룬 남녀들은 삽시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딱히 작정한 바는 아니었지만 세 시간이 주는 지루한 무료함 때문에 정상의 전망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문 좁고 험한 산길에는 숲의 고즈넉한 정적과 향기와 청량한 공기가 물씬 배어있었다. 이 고즈녁한 정적은 자신의 인생에 배어있는 외로움과 고독이기도 했으며, 마치 필연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질긴 운명 같은 것이기도 했다. 치유할 수 없는 상처처럼 모든 것을 체념한 이 순간에도 고통을 주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운명으로 치부한 터였지만 아리기는 여전했다. 깊은 상념에 빠져 걷는 동안 등 뒤에서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갖지 못했다. 가파른 층계를 올라 전망대의 난간에 기대어 섰을 때 옆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먼 시야로 병풍의 담채화처럼 풍경이 펼쳐 보였다. 엷은 구름 띠를 두르고 끝없이 이어지는 산자락은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내는 비경이었다.
“바다가 너무 아름다워요.”
소녀는 마치 갯냄새를 음미라도 하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다? 혹시나 하는 염려로 다시 한 번 확인해도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아마 시선 밖의 바다를 상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소녀의 이상한 징후는 버스로 돌아가기 위해 산을 내려오는 도중에 여러 번 노출 되었다. 층계의 끝부분을 잘못 디뎌 비틀거리기를 반복 했고, 소나무 군락지를 보고 자작나무가 너무 아름답다고 하는 가하면 돌다리를 건너다 헛디뎌 개울물에 빠지기도 했다.
버스가 다시 출발을 하자 소녀는 깊은 침묵 속으로 숨어버린 듯 했다. 드러난 자신의 치부가 민망했는지도 몰랐다. 소녀는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그래요. 언제부턴가 시야가 흐려지면서 잘 볼 수가 없어요. 그게 흉이 될 수가 있나요? 세상에 완전한 인간이 어디 있다고.”
자괴적인 어투에는 분노가 절절이 배어있었다.
“자기의 치부를 잘 포장하고 위장하고 화장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 많드라고요.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단 말예요.”
어린 가슴에 한이 옹골차게 들어앉은 것 같았다.
“정말 맘먹은 대로 안되는 게 세상일 인가요?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나이의 자신이 돌아와 있는 듯 했다. 그때는 그랬었다. 분노로 광분했었고, 비관으로 좌절하고 절망했었다. 미래는 암울했고, 행운을 저주했고, 팔자타령이 유일한 위안일 뿐이었다. 늦은 해거름으로 가로등의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할 즘에 분지에 암팡지게 내려앉은 소도시에서 여정이 멈추었다. 저녁으로 나온 맵싸한 메기 매운탕이 제법 먹을 만 했다. 식사 내내 살펴봤지만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 방에 다섯 명이 배정되었지만 동숙해야할 관광객들은 가방만을 던져 놓고 외출해 버렸다. 낡은 TV를 벗 삼아 벌렁 누었다. 아름다운 미모의 아나운서가 청아한 목소리로 혼탁한 사회악을 줄줄이 쏟아내고 있었는 데, 주로 암암리에 거래된 공천 헌금, 여아 성추행과 성폭행, 주폭과 강간, 살인.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의 단상들이었다. 욕망의 양면성 중 왜 유독 추악한 면만을 발췌해 떠들어 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순간적인 욕망으로 치유하기 어려운 자해를 해대는 인간이 아둔하고 처연해 보일 뿐이었다. 아름다운 세상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 세상을 찾아 채널을 돌리고 말았다. 이마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나니 허허롭고 자유로웠다. 그런 자신의 세상에 아직 존재하고 있었다. 까무룩 든 잠이 셀폰 소리에 깨어났다. 알 수 없는 번호가 액정 화면에 떠올랐지만 망설임 없이 받았다.
“소녀가 등대 밑에 있어요. 막상… 무섭고 외로워요. 아는 번호가 아저씨 밖에 없어요.”
소녀는 의식을 잃은 듯 등대 아래에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안주로 먹은 듯한 땅콩 부스러기와 마른 오징어 주위에 찌그러진 맥주 캔과 소주병이 흩어져 있었다. 밤별이 어두운 하늘에 총총했고, 찰싹이는 파도소리와 슬픈 인어의 숨결이 감미롭고 와 닿는 듯 했다.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소녀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해 보였다. 아무 말 없이 소녀의 옆에 앉았다. 무섭고 외로워서 의지하고 싶은 존재가 아니드라도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그런 버팀목으로. 그래야 될 것 같았고 그럴 작정이었다.
“세상에 없어도 좋을 존재,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이다 난. 그런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무거운 침묵 속에서 소녀가 겨우 말했다. ‘소녀야 내가 바로 그런 인간이란다.’ 아마 그렇게 대답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낼 아침에 내가 저 해변 가에 시체로 떠 밀려와도, 슬퍼 해 줄 사람 아무도 없을 거란 생 각해 본 적 있어요?”
그건 내 가슴 속에 깊이 박힌 심이란다.
“영원한 이별은 슬프고 참기 어려운 고통이겠죠? 이 거지 같은 운명, 죽어서도 저주할 것 같아요.”
잠이 든 소녀는 가끔 밭은 숨소리를 토해 냈다. 분노처럼. 별빛과 달빛이 내려앉은 먼 바다위에서 절망과 분노와 좌절의 절규가 밀려 왔다. 소녀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버림받은 두 영혼의 절규 일지도 몰랐다. 동이 터 오를 무렵까지 소녀의 영혼은 세상 밖에서 배회하고 있는 듯 했다.
이른 아침 식사가 끝나자 서둘러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관광객들은 파트너 위주였든 어제의 관계가 이제 다양한 관계로 변질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유분방하게 자리를 옮겨 앉았고, 커피와 소주를 돌려가며 마시기도 했다. 익숙해진 분위기 탓에 무절제한 행위들이 자행되기도 했다. 소녀도 어제 밤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생글생글 입가에 번진 미소와 매화 문양의 뿔 머리띠로 올백한 머리와 비주얼한 빈티지 차림과 스니커즈는 명동이나 홍익대 앞을 활보하는 소녀들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커피 마시러 가요. 어서요.”
휴게소에 닿자 소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뜨며 이끌었다. 흔히 볼 수 있는 휴게소의 노점상에서 흘러나오는 뽕짝 메들리를 들으며, 휴게소의 벤치에 앉아 소녀가 사온 신세대 커피를 마셨다. 복작대는 관광객들의 생동감 넘치는 삶속으로 소녀는 훌쩍 뛰어들어 그 즐거움을 맘껏 향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뽕짝의 멜로디를 흥얼흥얼 거리기도 하고, 작은 몸짓으로 리듬을 타기도 하고, 감자 스낵을 아삭거리기도 했다. 해맑은 소녀의 미소 뒤에 도사린 처연한 아픔은 무엇일까? 이런 작위적인 행위를 서슴거리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일까? 시력을 잃어가는 것이 문제라면 안구 기증이나 간단한 각막이식 수술로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요즘은 어려운 안구 기증을 받지 않드라도 수입 각막이식으로 어렵지 않게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또 다른 더 깊은 상처가 있기라도 한 건가. 관광버스에 돌아와서도 소녀는 여전히 생동감 넘치며 앙증맞은 토끼처럼 살갑게 굴었다.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누어 귀에 꽂고 음악을 들었고, 소녀가 마련해온 감자스낵을 아싹거리다가 목이라도 마르면 생수를 마시기도 했다. 마치 다정한 연인들처럼. 죽음을 앞둔 극락조가 생에 마지막으로 화려한 비상을 시도 하는 것처럼 소녀는 축제를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차창에는 제법 굵은 빗방울이 부서지기 시작했고, 차 안의 여흥은 절정을 이루듯이 뜨거운 도가니처럼 들끓었다. 어느듯 소녀는 잠이 들었다. 풀잎처럼 가벼운 머리가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형언할 수 없는 신선함과 향긋한 향기가 감미로웠다. 새근새근 잠든 소녀의 모습은 천사처럼 편안 해 보였다. 관광버스가 잠시 휴게소에 정차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관광객들이 우르르 내렸다. 뒤 따라 버스에서 내리자 빗방울은 여전히 스콜처럼 쏟아졌다. 알 수 없는 소녀의 아픔이 하나의 상념이 되어 머릿속을 헤집었다. 자신의 그 저주스러웠던 운명의 고리가 저 소녀에게도 엮여있는 것 같아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관광버스가 출발하기 직전 승차했다. 버스 안은 여전히 도가니처럼 들끓었다. 뜻밖에도 소녀의 옆자리에는 건장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여긴 내 자립니다.”
그냥 빈 좌석에 앉을 수도 있었지만 소녀가 염려되어서 주저 했다.
“이 버스에 지정석이라도 있었든 가. 저 앞 빈자리에 가 앉아요.”
취한 사내는 빈정거리며 강압적으로 말했다. 사내의 완강한 태도를 저지할 방법이 없어 보여 사내의 좌석에 앉았다. 버스 좌석 사이의 긴 통로에 취한 관광객들 남녀가 어우러져 뽕짝 멜로디를 타고 춤을 추었다. 서로 손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끌어안고 하는 본능적 쾌락이 최소한의 윤리적인 가치를 무색하게 했다. 참 부러웠다. 언제부턴가 이런 인간들의 일상적인 삶을 카테고리 밖에서, 무대가 아닌 객석에서 관망하고 있었다. 체념은 자유롭기 그지없었고, 욕망을 버리자 그렇게 허허로울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외마디의 비명 소리와 함께 뽕짝이 멎고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불안한 예감대로 소녀와 사내였다. 통로로 피해 나온 소녀의 손에는 날이 선 과도가 들려있었고, 사내는 여유를 피우며 능글거리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사태를 파악하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디다 함부로 손을 대. 나쁜 사람.”
하얗게 질린 소녀의 블라우스는 앞 단추가 풀어져 가슴이 반쯤 드러나 보였다.
“여기 다 그러구 즐겨. 그까짓 게 뭐 대수라고. 그럴라치면 이 묻지 마 관광버스는 왜 타. 이게 어디다 대고 내숭이야. 내숭이.”
사내는 아주 당당하게 굴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논리가 이치에 맞지 않느냐는 듯 관광객들을 바라보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동조를 구하기도 했다.
“아직 어려서 그럽니다.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그만 자리로 돌아가시죠.”
“내 참 더러워서. 지가 무슨 요조숙녀라고.”
이죽거리며 사내는 자기의 자리로 돌아갔다. 소녀는 쉽게 분을 삭이지 못해 얼굴을 묻고 흐느끼자 가녀린 어깨가 들썩 거렸다.
“아저씨도 미워요. 그래도 아저씨만은 날 지켜 줄 거라 믿었는데.”
실망과 원망을 퍼부었다. 우려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설마 했었다.
“이게 다 아직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야. 내가 저들과 다르다고 업신여기고 우습게 본거야.”
소녀의 구시렁거림을 그런 의미로 들렸다. 위험한 발상이었지만 달리 위로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소녀의 운명은 온전히 소녀의 몫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극복할 수 없었던 절망의 순간에 모든 욕망을 버려 버렸던 자신을 떠 올리며 소녀를 더 이상 도울 수 없음을 단정하고 말았다.
이튿날 정오쯤에 소형여객선이 비약도에 관광객들을 하선시켰다. 무인도에 상륙했다는 신비감에 매료되어 관광객들은 신천지에 상륙하기라도 한 것처럼 기념 촬영하며 설쳤다. 안내자는 묵약대로 서둘러 비약도를 떠났다. 비로소 자신이 그토록 그리던 비약도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겼다. 꾸럭거리며 비상하고 있는 갈매기와 기암절벽을 덮은 동백과 알이 굵은 하얀 모래의 백사장, 그리고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고요함, 이 모든 정경이 마치 엄마의 품처럼 포근하고 편했다. ‘고향이란 이런 것이다.’ 행복한 상념에 사로잡혀 등매산 기슭을 오른다. 선친이 겨우 사물을 구분할 정도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왜 이 무인도인 비약도에 정착하게 됐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낚시를 즐기던 병색이 완연한 늙은 아버지, 야산을 일군 채마밭, 쓰러질 것 같았던 오두막, 밤 풀벌레 소리, 거친 풍랑과 비바람, 해무로 덮인 해안 그리고 늘 요원하기만 했던 또 다른 세상. 기억 속에 각인 되어 있던 것들이 낡은 필름처럼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다녔던 토끼 길은 이미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풀밭이 되고 말았다. 자주 멱 감았던 하늘 폭포와 선녀탕이 온전해 보여 다행이었다. 하늘이 내려앉은 비취빛 선녀탕에 발을 담그자 온 다리가 시려 왔다. 어린 아들과 아버지가 물장구를 치며 선녀탕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일생에서 행복했던 순간으로 각인된 기억 중 하나였다. 폭포를 에돌아 비탈길을 올라 작은 분지처럼 내려앉은 오두막집 마당에 들어섰다. 어린 잡목과 억새와 풀이 무성하게 덮고 있어 설핏 보기에 오두막이 거기에 있나 싶을 정도였다. 선친 묘소의 벌초를 시작으로 마당과 오두막집 주변을 정리하기로 했다. 해거름 무렵까지 땀을 흘렸지만 겨우 억새와 풀을 조금 걷어냈을 뿐이었다. 방안의 먼지와 거미줄을 걷어내고, 가지고 온 비닐 자리를 깔고, 창호지로 방문을 가린 후 촛불을 밝히자 비로소 방의 안온함이 감돌았다. 나른한 심신을 눕히자, 아련히 낯익은 무인도의 고요와 해풍, 그리고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생을 비약도에서 마무리하기로 작정을 하자 아버지와의 숙명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허무와 좌절, 고통으로 점철된 것이 자신의 생이었다면 아버지의 생 역시 다를 바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했다. 엇비슷한 이유 때문에 아버지는 무인도인 비약도로 도피 정착했을 지도 몰랐다. 우리 부자에 내린 운명의 고리가 너무 저주스러웠다.
무인도의 아침은 상그럽기 그지없었다. 부족한 생필품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방치해두었던 녹슨 연장으로 잡목을 잘라내고, 토벽에 회를 치고, 마당가 샘터를 정지하고, 화장실을 수리하느라 온 종일을 보냈다. 늦은 저녁으로 라면 한 그릇을 마주 하지만 이렇게 편안할 수가 있었나 싶은 정도였다. 그때 ‘똑, 똑.’노크 소리에 흠짓 놀랐다. 귀를 종긋하고 신경을 곤두 세웠다. 이 시각 무인도에 인기척이라니 환청인가 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노크 소리에 현실임을 확인했다. 방문을 열고는 소스라쳐 놀랐다. 소녀가 거기에 서 있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서 있는 소녀는 지쳐 기진해 보였다.
“사람 이렇게 세워 둘 거예요.”
냉큼 방안으로 들어와 라면 그릇을 당겨 후루룩 거리며 게걸스레 먹었다.
“배가 고파 죽는 줄 알았어요.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거든요. 그렇게 놀란 토끼 얼굴을 할 필요 없어요. 처음부터 내 목적지는 이 무인도 였거든요. 어제 해변 가에 상륙했을 때 몰래 숨었어요. 그런데 기막히게도 아저씨도 무인도에 남았어요. 난 실망스러웠지만 아저씨와 상관없이 이 무인도에서 내가 하기로 한 일을 하기로 했어요. 내가 이 무인도에서 할 일은 자살하는 것이었어요.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받지않고 이 세상을 떠나기에는 무인도가 안성맞춤이었거든요. 뒷산 해벽으로 올라갔어요. 기암절벽의 정상에서 바다를 내려다보았어요. 투신이 가장 짧은 임종일거라 생각했거든요. 작심을 하고 벼랑 끝으로 나섰는데 바닷물이 자꾸 움직이잖아요. 출렁이지 않으면 쉽게 뛰어내린 수 있을 텐데. 벼랑 끝에 섰다 내려왔다 온종일 그랬어요. 그러다 밤이면 출렁이는 바닷물이 안 보일테니 그 때 결행하자 했어요. 밤에 다시 벼랑 끝으로 갔는데 이번에는 까마득한 아래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깜깜하니 너무 무서웠어요. 철썩이는 파도소리는 마치 악마의 혓바닥처럼 유혹했어요. 내일 다시 하자 그러구는 토굴에서 하룻밤을 보냈어요. 오늘 하루 종일 시도했지만 난 결국 나 자신에 졌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아저씨가 생각났어요. 아저씨는 왜 기분 나쁘게 이 무인도 내렸을까. 아저씨도 나랑 같은 생각이었을까 그게 궁금했어요.”
숨도 고르지 않고 소녀는 변명처럼 자신의 의중을 줄줄이 쏟아냈다. 그리고 자신의 의문을 풀어줄 대답을 듣기도 전에 하품을 몇 번 하고는 이내 잠이 들었다. 잠든 얼굴이 천진난만하고 편해 보였다. 저토록 어린 나이에 세상살이가 얼마나 모졌으면 죽음을 시도 했을까? 소녀를 옭아매고 있는 저주스러운 운명의 고리를 풀어줄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아침 해가 등매산을 넘은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소녀가 일어났다. 작은 상을 마주하고 조반을 같이 먹었다.
“아저씨하고 같이 먹으니 마치 가족 같다. 그치.”했다가
“나 안보이면 먼저 갔구나. 그리 생각해요.”하기도 했다.
마당의 가장자리에 무성한 잡목과 억새를 자르고 베 내는 작업을 몇 시간 동안 계속했다. 정오가 되어 갈 무렵 ‘아저씨 커피.’ 하며 두 잔을 소녀가 가져왔다. 작은 반석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셨다. 커피 향인지 소녀의 향인지 아무튼 향긋하기 그지없었다. 말렸지만 소녀는 막무가내로 톱질을 돕더니, 녹슨 낫으로 억새를 베어냈다. 억새를 베어내는지 자신의 질긴 운명의 고리를 잘라내는지 소녀의 낫질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 여름처럼 초가을 볕이 혹독했다. 먼 수평선에 해가 걸릴 무렵이 되자 온통 땀범벅이 됐다. 얇은 티셔츠와 반바지는 땀에 젖어 소녀의 몸을 칭칭 감았다. 소녀를 데리고 선녀탕으로 갔다. 아버지와 그랬던 것처럼. 맑은 소를 보자 소녀는 첨벙 뛰어들었다. 깔깔 그리며 물장구를 치며 수영하다가, 잠수하기도 했다. 천진난만한 어린 사슴이 따로 없었다. 극구 사양 했지만 아저씨 등목해요하며 살갑게 하는 독촉에 못 이겨 등을 맡겼다. 찰랑찰랑 시원하게 물을 끼얹고 때를 미는 손길이 보드랍고 따뜻했다. 순간 울컥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이 가여운 영혼에 그토록 저주스러운 운명이라니. 저녁식사를 하고 차를 마실 동안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 어떤 의문이라도 되뇌는 것이 너무 아려서 일까. 애써 서로 회피하고 있었다. 지친 탓에 언제 잠이 든지도 몰랐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옆에서 새근거리며 자고 있는 소녀를 보고 안도감이 들었다. 소녀는 앞장서 묵밭에서 더덕과 도라지를 캤다. 그리고 농익은 머루를 한 웅큼 입에 넣어 새큼달큼한 육즙을 마시고는 까매진 치아를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칡을 캐고 땔감을 하는 데도 소녀는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날도 두 사람은 일상적인 대화 외에는 아무런 말을 나누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금기시 하듯이.
불현듯 생각나 토담 밑을 팠더니 묵은 머루주가 있어 가져왔다. 향긋한 머루주를 소녀는 아주 맛있게 마셨다. 어느새 취한 소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가난했지만 세상에 불행은 그저 존재하는 줄만 알았지 내게 다가 올 줄은 몰랐어요. 어느날 눈이 흐리기 시작했고, 각막이식을 하지 않으면 실명한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그 이후 내 삶은 완전히 추락하고 말았어요. 사람들의 멸시가 시작되었고 멀어졌어요. 그때만 해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어요. 요즘은 각막이식 그리 어렵지는 않은 것 같았어요. 어려운 가정 형편에 치료비 마련이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요. 설상가상이 이럴 때 어울리는 말인 줄 몰랐어요. 몸이 부석부석 붓는가 하면 피부가 창백해지고, 가려움증과 불면증이 찾아왔어요. 검진을 받았더니 만성신부전증이래요. 더 늦기 전에 신장이식을 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다른 사람의 혈액을 투석 받지 않거나 신장이식을 받지 않으면 복수가 차올라 얼마 살지 못하다고 했어요. 천정벼락이었고 그 순간 내 인생은 몰락하고 만거죠. 이렇게 박복한 인간이 이 세상 어디 또 있을까요? 아저씨.”
소녀의 자살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정말로 악독한 운명이었다.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머루주를 있는 대로 나누어 마셨고, 절망 같은 잠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이튿날 아침 소녀는 일어나지 못했다. 미음을 끓여 주었지만 입에도 대지 않았다. 부석해진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있었다. 한나절이 되어서야 소녀는 일어나 겨우 미음 몇 술을 떴다. 아저씨는 또 어디론가 일을 나간 모양이었다. 몸을 추수려 미음 그릇을 설거지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지만 현기증은 여전했다. 시야는 점점 더 흐려지고 몸이 부석 붓는 증상으로 보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싶었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모해 보였다. 언제든지 결행을 하기에는 어렵지 않아 조바심을 갖지 않기로 했다. 소녀는 얼룩진 방바닥을 훔치기 위해 구석진데 놓여있는 걸레를 집어 들면서 낡은 노트 묶음을 발견했다. 얇은 노트가 여러권 묶여있는 아저씨의 비망록 같아보였다. 표지는 닳아 헤져 누더기처럼 누덕누덕했다. 홀로 무인도에 정착하려는 아저씨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에 비망록 앞장을 넘겼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청백 크레파스로 비틀 비틀 적혀 있었다. 막 글을 깨우치면서 쓴 모양이었다. 엄마가 아닌 아버지로 보아 이미 그때 엄마의 존재를 몰랐든 모양이었다. 연도와 월, 일이 명시되어있어 일기 형식을 빌려 쓴 것 같은 데 일주일 혹은 한 달, 몇 달을 건너뛰기도 했다.
1970년 6월 5일
나도 이제 열한 살이라고 했다. 거지와 왕자를 다 읽었다. 나는 왕자가 되고 싶l다. 왕자가 너무 좋다. 아버지는 기침을 많이 한다. 겁이 난다.
1970년 8월 30일
아버지가 죽었다. 무섭지만 안 운다. 자꾸 눈물이 난다.
1970년 8월 31일
아저씨 두 사람이 왔다. 뒷산에다 아버지를 묻었다. 내일 아저씨를 따라 간다.
1970년 9월 1일
배를 많이 탔다. 항구에 내렸는데 사람들이 많다. 내일 아저씨가 좋은 데 데려다 준다 했다.
1970년 9월 2일
아저씨는 선장한테 나를 맡겼다. 다시 배를 타고 바다로 왔다. 과자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비망록은 삼년 동안 쓰이지 않았다.
1973년 7월 2일
왼쪽 팔이 부러진 것처럼 아프다. 선장이 각목으로 때렸다. 선원 아저씨들도 툭하면 나를 때린다. 짐승 같은 사람이다. 삼년 동안 멸치 잡는 이 배에서 내려 보지 못했다. 아버지와 비약도가 보고 싶다.
1973년 12월 5일
나는 짐승보다 못하다. 죽도록 두들겨 맞고, 이틀을 굶었다. 내 몸은 상처투성이다. 자꾸 바다에 뛰어 들고 싶다.
그리고 다시 사년 동안의 기록은 적혀 있지 않았다.
1977년 12월 31일
올해 마지막 날에 항구로 들어왔다. 선원들은 모두 집으로 갔다. 나는 다시 배안의 감옥에 갇혔다. 쇠창살 사이로 도시의 불빛이 보인다. 탈출은 불가능하다. 그동안 몇 번을 시도했다가 죽도록 맞았다. 여긴 지옥이다. 분명 누군가가 이 배안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선장의 노예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짐승이지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 사람들을 저주한다. 내 운명을 저주한다.
사년 후의 비망록에는 그가 이미 성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1979년 4월 7일
9년 동안 멸치잡이 머구리배의 노예생활에 나는 이미 죽은 인간이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멸치잡이 기계다. 지긋지긋하다. 기회가 나면 나는 선장을 죽일지도 모른다.
1979년 7월 3일
항구에서 경찰이 들이닥쳤다. 선장과 나는 파출소에 잡혀 갔다. 이틀을 경찰서에서 지냈다. 갈 곳이 없는 나를 경찰은 유흥업소에 취직 시켜주었다. 나는 무엇을 어찌할 줄 몰랐다. 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일을 했다. 그래도 머구리배의 생활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도 이제 사람답게 살지도 몰랐다. 열심히 일해 돈을 모을 생각이다.
1981년 6월 5일
나는 다시 감옥에 갇혔다. 사람답게 살고 싶은 내 꿈은 산산 조각이 났다. 나이트클럽 싸움에서 사방파 한 명이 칼에 맞아 죽었다. 형님들은 나에게 죄를 뒤집어 씨웠다. 삼년만 살고 나오면 원하는 만큼 돈을 주겠다고 했다. 난 형님들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1987년 1월 2일
육년을 감옥에서 살고 출옥했다. 교도관이 소개해 준 건설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곳에서 서 씨를 만났고, 서 씨는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서 씨의 가정은 두 딸과 아들 그리고 부인과 함께 다복한 가정이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살인 전과자인 나를 가족처럼 대해 주었다. 반년을 나는 그들과 행복하게 지냈다. 돈도 좀 모아졌고 나는 다시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서 씨 같은 가정을 나도 갖고 싶다.
1987년 7월 2일
난 저주 받은 인간이다. 이것이 내 운명이란 말인가? 일을 마치고 과부집인 반포 주점에서 술을 마셨다. 그 날 따라 서 씨는 유독 술을 많이 마셨다. 손님이 없자 반포댁도 합석해서 마셨다. 서 씨와 반포 댁은 평소에도 죽이 잘 맞았지만 그날은 유독 더했다. 자정 무렵까지 마시다가 서 씨는 반포 댁을 끌고 안방으로 갔다. 앙탈 부리는 것처럼 반포 댁은 끌려갔다. 방안에서 한동안 실갱이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여자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반나의 반포 댁은 피를 흘리며 죽어있었고, 서 씨는 피 묻은 과도를 들고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서 씨는 잠시 귀신이 씨었다고 했다. 딸들과 아들, 부인은 어찌나 하고 통곡했다. 서 씨의 간절한 애원보다는 질그릇처럼 깨지는 다복한 가정이 안타까웠다. 서 씨는 피 묻은 과도를 내 손에 들려주고는 도망치듯 달아났다. 나는 다복한 가정을 살리고 싶었다. 천진난만한 딸과 아들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었다. 나는 다시 십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
1995년 9월 5일
목사님이 다녀갔다. 하느님을 믿고 희망을 버리지 말라 하셨다. 내게는 이미 희망이 없다. 내 운명은 이미 저주 받았고 난 악마의 자식일 뿐이다 그런 생각이 자꾸든다. 두 사람의 살인을 내가 하지 않았지만 난 이미 살인자가 되어있다. 이것이 내 운명이다.
1996년 3월 2일
모든 욕심을 버린다. 희망도, 사람답게 살려는 것도 다 욕망이다. 난 그 일체의 것들을 버릴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니 자유롭다. 편안할 뿐이다.
1997년 2월 1일
출옥하여 인력개발을 통해 일용근로자로 살아간다. 하루하루를 일해 벌어 생명을 연장할 뿐이다. 끼니를 외우는 외에 남는 돈이 조금씩 모아지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제 간암 판정을 받은 노동자 강 씨에게 가진 돈을 모두 주어버렸다. 그에게는 다소 위안이 됐을 것이다.
1998년 3월 9일
우연히 어떤 사람을 통해 신의 손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신의 손이 말했다. 아주 가난한 노동자가 만성신부전증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가난해서 투석도 신장이식도 받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기꺼이 그에게 내 신장을 주겠다고 했다. 신의 손은 어디론가 나를 데려갔고, 그는 내 몸에서 신장 하나를 떼내 그 노동자에게 이식해 주었다. 난 두려웠지만 신의 손을 믿었고, 그는 그의 명성대로 신의 손이었다. 내게 신장 이식을 받은 노동자의 이름조차 난 모른다.
2000년 5월 5일
더 이상 삶에는 의미가 없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고 싶다. 비약도로 돌아가고 싶다. 그 것이 가혹한 내 운명에 복수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난 이제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소녀는 비망록을 덮고 울었다. 펑펑 울었다. 자신보다도 더 처연한 운명에 통곡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저씨가 너무 가여워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었다. 땀에 흠뻑 젖은 아저씨가 돌아왔다. 선녀탕에 데려가 등목을 시켜드리고, 라면을 삶아 같이 먹었다. 자꾸 목이 메여 라면이 넘어가지 않았다.
“아저씨 비망록을 다 읽었어요.”
소녀는 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팅팅 불은 라면을 젓가락으로 휘저으며 기어들어 가듯 말했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라면을 먹었다. 소녀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가혹한 운명에 짠한 연민을 보였고, 어떤 위로를 하려고 전전긍긍 했다.
아주 길고 지루하고 힘든 밤을 지냈다. 새벽녘에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었지만 깨운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소녀를 데리고 낚시터로 갔다. 기암절벽을 위태롭게 내려가서 물개 바위에 자리 잡았다. 발아래서 파도가 부서지면서 물방울이 튀어 올랐지만 먼 바다는 잔잔해 보였고, 갈매기들이 평화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감미로운 해풍이 비단결처럼 피부를 어루만졌다. 어렵지 않게 씨알이 굵은 흑돔을 세 마리나 건져 올렸다. 소녀도 운 좋게 씨알은 작지만 황돔 한 마리를 낚아 들고는 깔깔 거리며 조사의 포즈를 어설프게 흉내 냈다. 비늘을 쳐 내고 흑돔을 회로 쳤다. 소녀는 쫄깃하고 달콤한 흑돔이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고 했다. 처음 먹어보지만 비린내가 나거나 거북하지가 않고 맛있다고 하며. 게걸스레 많이 먹었다. 팔을 베고 물개바위에 나란히 누웠다. 파란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오묘한 형태의 동물 형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소녀는 ‘저건 사자고 그 옆엔 독수리, 얼룩말, 코끼리.’ 하고는 박장대소 했다. 소녀에게 또 다른 맛을 주고 싶어 물속으로 잠수 했다. 어제 밤 내내 소녀는 많은 생각을 했다. 혼란한 상념은 어느 한곳으로 귀결됐다. ‘난 언제 죽어도 좋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느 순간 바다로 뛰어들면 그만이다. 허지만 당장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무언가가 자신의 의지를 짓누르고 있었는데 그건 아저씨의 존재 같았다. 얼마간은 당분간은 아저씨의 기구한 삶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해삼과 멍게 전복, 성게를 망태기에 가득 담아 수면 위로 올라왔다. 소녀는 흑돔과는 맛과 향이 다른 해산물을 맘껏 즐겼다. 선녀탕에서 아저씨의 등목을 도우면서 등에 얼룩진 상흔을 보고는 소녀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다음 날 아침 망태기를 짊어지고 소녀를 데리고 산으로 올랐다. 험한 돌산과 잡목으로 우거진 무인도의 산은 생각보다 깊었다. 약초를 캔다며 이름 모를 풀의 잎과 줄기, 뿌리를 캐 망태기에 담았다. 해풍이 스며들어 숲 속에 짭짤한 내음이 물씬 배어있었다. 주먹밥과 황돔 구이, 복숭아 통조림, 사과를 내놓았다. ‘와 성찬이네.’ 하며 소녀는 해롱거렸다. 이럴 때일수록 소녀를 잘 먹여야 될 것 같았다. 원기를 돋우고 기력을 길러 소녀의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야 될 것 같았다.
휘영청 떠 있는 달이 보이는 툇마루에 나란히 앉았다. 월광에 비친 먼 바다위에는 은비늘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교교한 무인도의 정취에 취하기도 했고 이어폰을 나누어 음악을 듣기도 했다. 차를 내왔다. 마시기 역한 차였지만 소녀는 눈치를 살피며 싫은 내색을 내지 않고 마셨다. 더불어 사는 삶이 이런 것이구나. 그동안 홀로 살아온 삶이 더 처연해 보이며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소녀의 존재에 삶의 차원이 달라졌다. ‘이대로….’ 비워버렸던 가슴에 엉뚱한 욕심이 생기기도 했다. 다 부질없는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아침부터 주절주절 비가 내렸다. 편안한 하루를 상상하며 소녀는 누워 있었다.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산 속으로 갔다. 몇 군데 처 놓은 올무를 돌아볼 참이었다. 소녀의 보양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오후 늦게 죽은 산토끼 두 마리와 살아있는 산양 한 마리를 끌고 올 수 있었든 건 행운이었다. 올무에 걸린 놈들이었다. 늦은 저녁으로 산토끼 고기와 산양 젖을 마련했다. 산토끼 고기는 담백했고 따뜻한 산양 젖은 고소했다.
“이러다 못난이 뚱보 되겠다.”
환하게 웃는 소녀의 치아가 고르고 고왔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사이에 소녀는 살이 제법 통통하게 올라 건강해 보였다. 때가 왔다는 직감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다시는 사용할 일이 없을 거라 버려두었던 휴대폰을 찾아 밧데리를 끼워 집을 나섰다. 두 번의 시도 끝에 신의 손이 전화를 받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잔뜩 기대에 찬 목소리였다. 몇 가지의 제안에 신의 손은 난색을 표 했다. 그가 난감해 하는 그의 정직성에 신뢰가 갔다. 검토 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신의 손은 불법적으로 암암리에 인간의 장기를 적출하고 이식하는 의사였다. 풍문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고의 의대를 나와 한때는 대학병원에서 교수 겸 전문의로 명성이 대단했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폐인으로 타락해 의료계에서 버려졌다고 했다. 그는 의술이 매우 비범하여 장기 암거래 조직에서 신의 손이라 칭송 받고 있다고 했다. 노동자에게 신장을 이식해 줄 때도 신의 손이 집도를 했었다. 아버지의 산소 옆에다 허묘를 파기 시작 했다. 비온 뒤 끝이라 무른 마사토가 삽을 잘 받아들였다. 허리춤까지 파 들어갔을 때 셀폰이 울었다. 신의 손이였다. 각막과 신장 적출에서 이식까지, 그리고 조직 적합 판정의 가능성은 성공 확률이 1%도 안 될 거라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혀 불가능한 가라는 물음에 아니 겨우 1%정도의 성공확률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성공한다면 그건 기적일거라고 신의 손은 덧붙여 말했다. 기적이란 기이한 현상을 수긍하지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상황으로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미친 짓 해보는 거지 1%의 확률이 성공하지 말란 법도 없고, 기적이 찾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준비하는 데 1주일 정도 걸릴 거라는 말과 함께 신의 손은 전화를 끊었다. 확률보다는 기적에 신장이식이 안되면 각막이식이라도 하는 심정에 다소 위안이 되었다. 소녀가 가져온 점심을 먹고 인스턴트 커피도 마셨다.
“구덩이는 왜 파는 거죠? 누굴 묻을려고.”
밤에 자다가 내가 죽으면 여기 묻어줘 라고 하자, 소녀는 까르르 웃으며‘ 아저씨가 아니라 나 일수도 있겠어요.’했다. 만일 죽는 다면 그 전에 뭘 하고 싶은 가? 라는 물음에 ‘백화점에 들러 쇼핑하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식사도 해보고 싶고, 호텔에서 럭셔리하게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요.’했다. 아주 소박한 꿈이었다. 시한부 생명에 소녀와 같이 한 순간들은 꿈속 같았고 분에 넘치는 호사였다. 평생의 소망이 평범한 가정의 생활이었고, 짧은 순간이기는 했지만 소녀와의 생활이 바로 그런 것이었고 행운이었다. 신의 손과 약속한 날의 사흘 전에 소녀를 데리고 항구 도시로 나왔다. 약간은 의미 있고 선택의 날일 뿐 이라고 해도 소녀는 배안에서 생뚱맞은 표정을 지었고, 볼멘 투정도 부렸다. 그러던 소녀도 백화점에 들어서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명랑해 졌다. 흰 블라우스와 스니커즈, 액세서리도 몇 개 샀다. ‘아저씨 혹시 재벌이라도 되나요?’하며 수다를 떤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풀코스의 양식을 먹었고 와인도 마셨다.
“설마 마지막 만찬은 아니겠죠?”
소녀는 불안한 직감을 내 비쳤다. 그럴지도 몰라 라고 하자 소녀의 얼굴이 창백해 졌다. 내 안구와 신장을 너에게 이식하려 한다. 조직 적합과 성공 확률은 겨우1%일 정도며. 기적을 바랄뿐이다. 신의 손과 계획한 일들을 이해하기 충분하게 설명을 했다.
“그건 안되요. 그럼 아저씨 죽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살자고 아저씨를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어요.”
‘ 그렇게 단순하게 판단하지 마라. 이 일은 이미 오래전에 작정했던 일이다. 내 장기로 아홉 명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다.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나는 곧 이 일을 결행할 참이었다. 만일 기적이라도 일어나 내 장기로 너의 생명이 구원된다면 나로서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하며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내 비망록을 읽어서 알겠지만 난 절망적인 순간에 희망과 욕망을 버렸었다. 그때 그 체념을 난 지금 후회하고 있다. 넌 아직 젊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희망과 욕망의 끈을 놓지 않길 바란다.’ 소녀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듯 말 했다. ‘내일 오전 10시에 오늘 내렸던 그 선착장에서 비약도로 돌아간다. 선착장에 오고 오지 않고는 너의 선택이다.’선언하듯 하고는 소녀를 호텔에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그 사이에 소나기라도 내린 모양이었다. 젖은 도로 위에 비친 네온싸인 현란했다. 소녀는 쉽지 않은 선택을 놓고 밤새 고뇌할 것이다. 소녀의 선택은 결정론의 차원에서 자신의 운명일지도 몰랐다.
오두막으로 돌아올 동안 소녀는 실어증 환자처럼 말이 없었다. 깊은 설움에 빠져 시선마저 피했다. 체념이 오감마저 마비 시켜버린 것 같이 소녀는 무감각해 졌다. 이튿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함께 산길을 산책했다. 호젓한 숲속 길은 여전히 신선 헸다. 기암절벽의 정수리에 걸터앉았다. 먼 수평선이 아련해 보였고, 갈 곳이 그곳이 아닌가 싶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흠뻑 젖도록 비를 맞았지만 작은 석굴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비에 젖은 소녀는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안기며 얼굴을 가슴에 묻고 흐느꼈다.
“무서워요.”
‘나도 무섭단다. 누군가가 그랬다 사람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죽어간다고. 언젠가 죽을 목숨이다. 단지 조금 빨리 가는 것뿐이라 생각한다.’ 이정도로는 소녀를 위로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수술이 잘못되어 아저씨와 함께 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인가도 싶었어요.”
한기 때문인지 파르르 떨었다. ‘기적이 일어날 거라는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 믿음도 함께.’가만히 소녀의 젖은 머리칼에 물기를 닦아 주었다.
약속한 날짜에 신의 손은 두 명의 사내와 한 명의 간호사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오두막의 좁은 방은 조립식 철제 침대와 의료기들로 가득 채워졌다.
“다행입니다. 조직은 적합 판정이 나왔습니다. 반은 기적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수술 전날 신의 손은 안도의 숨을 내 쉬며 말했다. 수술 직전 철제 침대에 나란히 누운 소녀는 마취 직전 슬픈 미소를 지으며 손을 꼭 쥐어 주었다.
“아저씨는 가장 숭고한 삶을 사셨어요. 이타적인 희생을 세상 사람들이 알면 다 존경할거예요.”
그게 소녀와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비약도로 한 척의 소형 동력선이 천천히 다가와 정선하고 닿을 내렸다. 건강해 보이는 소녀가 조화다발을 들고 하선했다. 일 년 사이에 길은 무성해진 잡목과 풀로 덮여 있었다. 선녀탕과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오두막 앞에서 잠시 발길을 멈췄다. 아저씨와 그의 선친 묘소는 잡목과 억새가 무성하게 뒤덮고 있었다. 소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한동안 일어날 줄 몰랐다. <끝>
* 월간문학 (2012. 11월호) 게재분
□ 작가 : 최헌식
□ 출생년도 : 1949년 1월 5일(부산)
□ 최종학력 : 관동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철학과 졸
□ 등단년도 : 2006년(한국생활문학)
□ 작품 : 「목각인형은 고통을 노래하지 않는다.」, 「화음리 리포터」
□ 저서 : 『목각인형은 고통을 노래하지 않는다.』
□ 수상 : 2005년 제8차 한국생활문학 신인상 수상(시 부문)
2006년 제11회 한국생활문학상 작품상 수상(소설)
□ 계좌번호 : 농협 333052-56-083816
□ e-mail : chs4915@hanmail.net
□ 전화번호 : 011-373-8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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