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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용심씨 묘표(淑容沈氏 墓表)를 찾아서
진관사 일주문을 나서고 진관사 입구에 새겨진 <진관사 태극기>비를 감상하고 난 후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나고등학교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걸어가고 있는 데 길 우측에 동산 같은 것이 있고 거기에 무엇인가 있는 것 같아 우리 네 사람은 궁금증 이 발동하여 한마음으로 가 보자고 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진관사를 다니면서 한 번도 인 식하지 못했던 곳입니다. 허기사 이 일대가 천지개벽한 듯 환경이 바뀐 탓이 터입니다. 이 일대는 인가와 밭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완전 정리하여 택지를 조성하려는 듯 정 비해 놓았더군요.
저기에 뭔가 있는 것 같아서 가봅니다.
좀더 가까이 가니 근사한 나무와 곱게 단장된 모습입니다.
비각이 보입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이 씌워져 있어 무슨 어느 귀인의 묘가 있나 하고 가서 보니 묘 는 없었고, 비석 옆에 상석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내문이 서 있어 내용을 읽어 보 니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대왕의 후궁 숙용심씨묘표(淑容沈氏墓表)라고 써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기막힌 사연이 써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은 전쟁하는 중에도 남 의 묘비까지도 무도하게 절취해 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이지 무려 460여 년 만에 일본의 한 공원에서 발견되어 되찾았다니 이런 비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숙용심씨묘표(淑容沈氏墓表)와 상석
묘는 없는데 묘표만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는 상석이 놓여 있습니다.
숙용심씨 묘표(淑容沈氏 墓表)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 25호
여기에 안내문이 있어 전문을 옮겨 보았습니다.
숙용심씨 묘표(淑容沈氏 墓表)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 25호 / 시대 16세기 전반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26번지
『이 비는 조선 제9대 성종의 후궁인 숙용심씨(淑容沈氏: ?~1515)의 묘 앞에 있던 묘표 (墓表)다. 숙용심씨는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오른 심말동(沈末同) 의 딸이다. 숙용심씨는 1493년(성종 24) 이전에 성종의 후궁이 되어, 2남(利城君ㆍ寧山君) 2녀(慶順翁主ㆍ淑惠翁主)를 낳았다. 숙용심씨는 1515년(중종 10)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 록되어 있다.
묘표는 이수(螭首)ㆍ비신(碑身)ㆍ비좌(碑座)로 되어 있다. 이수와 비신은 백대리석 하나로 만들어 화강암으로 만든 비좌에 꽂아 놓았다. 이수에는 뿔이 없는 이무기가 보통인데 여 기서는 뿔이 있는 용(龍)을 구름무늬 속에 표현하였다. 비좌는 2단으로 구성되었다. 이 모표는 일본인의 수상(首相)ㆍ대장상(大藏相) 등을 지내다가 1936년 암살된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의 기념공원(日本 東京都 港區 소재) 안에 있다가 2001년 후손들의 노 력으로 우리나라로 반환되었다. 이 묘표는 성종대왕 후궁 숙용심씨의 묘가 실재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왕실의 유물이다. 400여 년 동안 일본에 있다가 돌아온 것으로 가치가 높 다.』
숙용심씨 묘표(淑容沈氏 墓表) 후면 모습
숙용심씨의 묘비(墓碑)를 묘표(墓表)라 했는데, 묘표(墓表)란 죽은 이의 이름ㆍ생몰 연월일 ㆍ행적 따위를 새기어 무덤 앞에 세우는 푯말이나 푯돌(表石)을 말합니다.
숙용 심씨의 묘표에는 ‘淑容沈氏之墓’ 이렇게 6자만 기록되어 있기에 묘표라 한다 합니 다. 무덤 앞에 서 있는 ‘OO公 OO之墓’라고 되어 있는 것을 묘표라 한다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분들의 묘역에는 묘 옆이나 길 입구에 그의 행장을 기록한 것이 비가 있는데 이를 신도비(神道碑)라 합니다. 그런데 신도비는 종이품 이상이나 되어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관세위(盥洗位)
관세위(盥洗位)는 제사를 모실 때 제관이 손을 씻는 대야가 놓여 있는 자리입니다.
망료위(望燎位)
망료위(望燎位)는 축문을 불사르는 것을 바라보는 자리입니다.
요소(燎所)
요소(燎所)는 축문을 불사르는 곳입니다. 아마도 숙용심씨(淑容沈氏) 후손들이 받드는 제 사는 각별할 듯합니다.
숙용심씨묘비환원기념비(淑容沈氏墓碑還元記念碑) -앞면-
숙용심씨묘비환원기념비(淑容沈氏墓碑還元記念碑) -뒷면-
숙용심씨묘비환원기념비문(淑容沈氏墓碑還元記念碑文)
숙용심씨묘비환원기념비문(淑容沈氏墓碑還元記念碑文) 전문
『숙용심씨(淑容沈氏)의 관(貫)은 청송(靑松)이시며 청성백(靑城伯) 정안공(定安公) 덕부(德 符)의 후예(後裔)이시다. 조선왕조(朝鮮王朝) 제9대(第九代) 성종대왕(成宗大王)의 후궁(後 宮)으로서 이성군(利城君), 영산군(寧山君)의 두 왕자(王子)와 경순(慶順), 숙혜(淑惠) 두 옹 주(翁主)를 두셨으니 경순옹주(慶順翁主)는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에게, 숙혜옹주 (淑惠翁主)는 한천위(漢川尉) 조무강(趙无疆)에게 하가(下嫁)하셨다.
1465년(世祖11년, 乙酉)에 출생(出生)하시어 1515년(中宗10년, 乙亥) 11월 16일에 졸(卒) 하시다. 향년(享年)이 51세이셨다. 이어 서울 근교(近郊)에 예장(禮葬)하였으나, 어느덧 묘소(墓所)와 묘비(墓碑)를 실전(失傳)하기에 이르렀다. 조상(祖上) 묘소(墓所)의 보전(保 傳), 수호(守護)는 후손(後孫)되는 자(者)의 바른 도리(道理)이거늘 이를 소홀히 하여 실전 (失傳)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큰 불효(不孝)를 어찌 감내(堪耐)할 것인가. 그 오랜 세월을 두고 찾았으나 모두 수포(水泡)로 돌아갔다. 추측(推測)컨대, 임진왜란(壬辰倭亂) 시(時)에 절발지변(竊發之變)을 당한 듯하다.
그러던 차 천만(千萬) 의외(意外)로 이국(異國)땅인 일본국(日本國) 동경도(東京都) 항구(港 區) 적판(赤坂)에 있는 아주 작은 공원(公園)에서 부산일보(釜山日報) 동경지사장(東京支事 長) 최성규선생(崔性圭先生)에 의해 묘비(墓碑)와 이에 부수(附隨)되는 듯한 석물(石物) 등 이 발견(發見)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천우신조(天祐神助)의 지극한 현현(顯現)이니, 심씨 (沈氏) 할머니의 깊으신 음덕(蔭德)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그 긴 세월(歲月)을 낯설은 이 국(異國) 땅에서 망향(望鄕)의 한(恨)을 되씹었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후손(後孫)으로서 범 (犯)한 큰 불효(不孝)에 대한 비통(悲痛)과, 회한(悔恨)의 눈물을 금(禁)할 길이 없다.
묘비(墓碑) 발견(發見)이라는 희소식(喜消息)에 접한 이성군파(利城君派)와 영산군파(寧山 君派)의 두 종친회(宗親會)는 [숙용심씨묘비환원추진위원회(淑容沈氏墓碑還元推進委員 會]를 구성(構成)하였다. 우선(于先) 묘비(墓碑) 환원(還元)을 요청(要請)코자 이에 근거(根 據)가 될 옛 문헌(文獻)과 고증자료(考證資料)를 정비(整備)하는 한편, 환원사업(還元事業) 을 추진(推進)하는데 소요(所要)되는 자금(資金)을 종중(宗中)에 알려 모금(募金)키로 하였 다.
2000년 4월 18일, 채원(采元)과 명구(明九)는 도일(渡日), 동경(東京) 항구(港區) 구역소(區 役所)를 방문(訪問), 일체(一切)의 증빙자료(證憑資料)을 제출(提出)하고 묘비(墓碑)의 환원 (還元)을 청원(請願)했다. 460여년(餘年)이 지난 지금(只今)에 와서 일본정부(日本政府)인 구역소(區役所)를 상대(相對)로 해 반환(返還)을 요청(要請)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 니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 확실(確實)한 입증자료(立證資料)와 묘비(墓碑)가 있어야 할 정당(正當)한 장소(場所), 그리고 후손(後孫)들의 간절(懇切)한 소망(所望)을 알리 고, 주일(駐日) 한국대사관(韓國大使館)의 협조(協助) 등(等)으로서 항구(港區)로부터 반환 (返還)의 확약(確約)을 받았다.
6월 16일, 다시 채원(采元), 명구(明九), 한구(漢九), 채웅(采雄) 네 사람이 도일(渡日), 일본 (日本) 구역소(區役所) 구장(區長)과 관련(關聯) 공무원(公務員), 구(區) 의원(議員), 주일(駐 日) 한국문화원장(韓國文化院長), 내ㆍ외신기자(內外信記者)가 참석(參席)한 자리에서 묘비 반환(墓碑返還)에 따른 '목록(目錄)'을 수령(收領)하고, 오후(午後)에는 공원(公園)에 가서 고유(告由)의 의식(儀式)을 정중(鄭重)히 올리고, 묘비(墓碑)를 해체(解體), 포장(包裝)하여 수송절차(輸送節次)를 완료(完了)하였다.
이어 묘비(墓碑)는 7월 3일 그렇게도 그리시던 고국(故國)에 돌아왔다. 큰아들이신 이성군 (利城君) 묘역(墓域)에 묘비(墓碑)를 건립(建立)하려고 했으나 설치허가(設置許可) 등(等) 문 제(問題)가 있어 부득이(不得已) 작은아들이신 영산군(寧山君) 묘역(墓域)에 예(禮)와 정성 (情誠)을 다하여 묘비(墓碑)를 건립(建立)하고 이를 계기(契機)로 제단(祭壇)도 함께 마련하 였다. 할머니의 영혼(靈魂)이신들 얼마나 기쁘고 편하시며, 우리 후손(後孫)된 자(者) 또한 얼마나 반가우며 감격(感激)스런 일이겠는가. 맹서(盟誓)코 실전(失傳)의 우(愚)를 다시는 범(犯)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후손(後孫)들은 삼가고 또 삼가야 할 것이며, 앞으로 더욱 숭 조(崇祖), 돈종(惇宗)코자 할 따름이다. 복유(伏惟) 존령(尊靈)은 영세시녕(永世是寧)하시옵 소서.』
2001年 (辛巳) 4月 18日
숙용심씨묘비환원위원회(淑容沈氏墓碑還元委員會)
비문을 한자한자 옮겨 적어 보노라니 숙용심씨의 후손이나 왕실에서도 황당했을 것 같습 니다. 왜란 난리 통에 묘비를 도난 당하고 보니 묘도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니...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난리 직후에 그 후손들이 묘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는 것인가? 늘 제 사를 모시고 성묘를 했다면 묘비가 없더라도 묘가 어디에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곡절인지...
이 묘표를 담는 염화님.
성금비(誠金碑) -앞면-
성금비(誠金碑) -뒷면-
묘비(墓碑) 환원사업을 위해 성금을 내 주신 종친회(宗親會)와 종현(宗賢)들의 공을 기리기 위해 비를 세운 것 같습니다.
이것도 인연이라서 역사의 슬픈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힘이 약할 때는 저와 같은 수모를 당하게 되는 것임을 새삼 느꼈습니다. 임진왜란 때의 왜와 일제강점기 의 왜는 같습니다. 이 외에도 얼마나 많은 약탈문화재가 있을까요? 지난 번 보화님이 일 본에 가서 보았다는 관월당 건물도 생각나네요. 관월당은 경복궁의 한 건물이었지요. 집 도 업어가는 저들이 무엇인들 약탈해 가지 않은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숙용 심씨'라는 인물을 새롭게 알았지만 그를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묘비를 바라보며 <진관사 태극기>도 교차되어 생각이 났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약탈문화재 환수를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께 경의를 표합 니다.
지금까지 지난 3월 4일 일요일에 있었던 산행을 겸한 사찰참배 후기를 보시는라 수고 많 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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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맨 아래 사진만 보이고 나머지는 사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어찌하여 올리는 것마다아나는지 모르겠네요. 잡아와야죠. 현재 제 컴에는 잘 보이는데 도망갈 우려가 있어 _()_
미리 다시 작업을 해야겠네요.
함께한 사찰순례및 산행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많은것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잘 보이시는가 봅니다. 다음에 또 기회를 만들어 산행 및 사찰순례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
400년전 약탈 당한 것이 2년전에 돌아왔내요. 자꾸 찿아와야지요....나무묘법연화경()()()
약탈해간 것을 도로 가져오기도 무척 힘든 일입니다. 이 묘비는 그래도 천만다행한 일입니다. _()_
그럼 묘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혹시 묘까지 파 헤친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잔악무도한 행태에 화가 치밀어 옵니다. 묘표를 찾았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_()_
숙용심씨가 졸한 것이 1515년이요, 임진왜란은 1592년이니, 임진왜란 때 묘비를 도난 당하여 묘를 잃었다면 그간 약 80년간 묘에 대해서 소홀한 면도 있었겠네요. 왜의 만행을 끝없이 당해온 우리 조상들 그 한이 얼마나 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_()_
새로운 사실을 접한 소중한 산행 및 순례였습니다. 감사합니다. _()_
나무관세음보살()
출장 잘 다녀오셨군요. 감사합니다. ^-^ _()_
임진왜란 도둑놈 들이구요 , 찿아온 묘비 훼손이 없으니 다행 입니다. 제례를 위한 진귀한 내용 잘 보았 습니다.
찿아주신 분(최성규님)들 수고 하셨고, 백우님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