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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2024년 8월 26일에 가진 루터칼빈신학회 제2회 공개신학세미나에서 '십자가 신학과 신앙'이란 주제로 발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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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신학과 신앙
목 차
Ⅰ. 서 론 : 들어가는 말
Ⅱ. 루터의 십자가 신학
1. 십자가 신학이 등장하게 된 시대의 배경
1-1. 십자가 신학이 형성된 사상적 배경
1-2. 십자가 신학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
Ⅲ. 십자가 신학에서 말하는 십자가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고하신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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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도들이 전한 십자가의 도
예수께서 예고하시고 또한 예고하신대로 지신 십자가는 사도에 의해서 ‘십자가의 도’로 증거되어 전파되었다. ‘십자가의 도’는 ‘부활의 도’와 함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세상에 전파에 있게 하는 ‘하나님의 복음’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도와 부활의 도는 하나님이 전하시는 복음이며, 그 복음의 내용에 중심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제삼일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땅에 계신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신 후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에 계시며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심으로 십자가의 도와 함께 부활의 도를 증거하는 일을 사도의 사명으로 맡기셨다(참조. 행 1:22; 고전 1:17-18, 23). 그에 따라서 사도들은 하나님의 복음인 십자가의 도와 부활의 도를 증거하여 전파함에 있었는데 십자가란 말을 사용한 곳이 모두 스물 세(23) 곳 구절1)이다. 그중에서 바울의 서신에서만도 대부분인 스물 두(22) 곳2)을 보게 된다. 따라서 십자가란 말이 사용됨은 바울의 서신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신학적 개념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강조한 ‘교회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바울이 사용한 십자가 개념은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는 역사적 과정을 가리키는 역사적 설명을 위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나타내는 신학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바울신학을 결정짓는 핵심 주제로서 바울 선포의 다양한 내용과 직결되어 있다. 예컨대 바울의 칭의론과 율법 이해 또는 죄론 등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의 십자가 신학은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그의 서신 곳곳에서 십자가를 언급함으로써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데 십자가를 이야기해 주어야만 하는 필요를 갖고 있는 교회가 처한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는 것에서 말하고 있는 까닭에 그 내용이 다양하다. 이를 종합적으로 분류하여 내용이 서로 연관성을 가진 구절을 묶음으로써 구분되는 몇 가지로 제시할 수 있으나, 이는 분석과 이해에 따라 각각일 수 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보았다.
2-1. 로마서에서의 십자가 : 옛 사람을 지배하던 죄의 세력을 멸함에 있는 십자가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첫 번째로 언급한 곳이 로마서이다. 사도 바울은 이 곳 한 곳인 로마서 6: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십자가를 언급한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여기서 보는 십자가는 바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는 성도임을 세례에 의해서 설명하는 것에서 한 말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이 베푸시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몸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베푸는 세례를 받아 자신과 함께 연합하여 한 몸이 되었을 때 이미 그들을 지배하던 죄의 세력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이는 죄의 지배에 있던 자들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죽음과 함께 장사됨에 있게 함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들에게는 옛 사람의 욕망을 사로잡고 있던 악한 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다시는 죄가 구속력(拘束力)을 행사하지 못한다. 따라서 죽음이 왕 노릇 하지 못한다.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세례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스런 능력으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생명이 새 생명으로 함께 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있다. 이상에서 보는 대로 로마서에서의 십자가는 옛 사람에 지배하던 죄의 몸으로 있게 하는 죄의 세력을 없애 버려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게 해 주심으로 다시는 죄의 종으로 살지 않게 해 주신 것이 십자가를 통한 구원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에서 말한 것이다.
2-2. 고린도서신에서의 십자가 :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신 십자가의 복음에 의해 하나님의 권능이 하시는 일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십자가를 두 번째로 언급한 곳은 고린도전후서이다. 사도 바울은 이곳 고린도전서에서 여섯 차례, 그리고 고린도후서에서 한 차례,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십자가를 언급하였다.
2-2-1. 고린도전서에서의 십자가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한 교회의 통일성
고전 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사도 바울이 이곳 고린도전서에서 십자가를 언급함은 고린도서신에서 모두 일곱 차례 있은 중에서 거의 대부분인 여섯 번 있었다. 바울이 이처럼 여러 차례 ‘십자가’를 말함에 있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고린도교회의 파당에 의한 분열 소식을 들으면서 성도를 위해서 죽으신 분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것에서였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세례를 베푼 사도와 따르는 사역자에 따라 파당을 이루는 분열에 있었다. 아볼로파, 게바파, 바울파, 그리고 이러한 파당을 못마땅하게 여겨 오직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에서 또 다른 파당을 이루는 그리스도파를 주장하기도 있었다.3) 이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를 위해서 죽으신 분은 바울이 아닌, 그처럼 아볼로도 아니고 게바도 아닌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께서 언제 자신의 몸이 나뉜 적이 있었는지를 말하며 책망한다. 파당에 의한 분열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으로 있는 통일성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됨에 있는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11-22)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3-6)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처럼 십자가를 통한 성령의 사역에 의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이 허물어져 온 세상의 인류에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하나 됨에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잇돌이 되신 건물로 세워짐에 있다. 그러한데, 그리스도의 교회가 분열되어 나뉘고 있는 것은 한 분 주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해 있는 것이요 한 분 주님을 섬겨 따름에 있는 믿음으로부터 떨어져나가 있어 교회의 붕괴에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십자가를 거듭 언급하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도로 보내신 것은 세례를 베풀어 자신에게 속한 사람으로 따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전하게 하는데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그분의 죽음을 말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일체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교회의 분열에 있는 파당 짓는 행위에 있는 것은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모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알지 못함으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그와 같이 무지에 있음으로 십자가에 의해 세상에 세워나가시는 교회로 있지 않고 아볼로, 게바, 바울 등의 사역자 – 지도자 - 를 중심으로 한 세력의 인본주의적 교회로 뭉쳐나감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에서의 십자가는 고린도교회의 파당에 의한 분열 상태에 대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그리스도이시며 그들 모두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구원을 행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말함으로써 이것에 의해 한 교회에 있는 교회의 통일성 – 일체성 – 을 깨뜨림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을 강조하여 주의를 주는데 있다.
2-2-2. 고린도후서에서의 십자가 : 그리스도의 약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의 강함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이어 고린도후서에서 13:4에 한 차례 십자가를 언급하였다.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이 구절에서의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라고 한 언급을 사본은 대체로 “비록 그가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라고 분명하게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며, 그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놓으셨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는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약한 육체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으나 지금 그분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살아 계시다는 것을 들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와 같이 육체적으로는 약한 자들이었지만 지금은 살아계신 그분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다시 사는 것과 같은 능력으로 강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칼빈(John Calvin)은 바울이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서 이야기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며, 그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기 까지 자기를 낮추신 것을 멸시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인 동시에 십자가상의 굴욕이 비교할 수 없는 부활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에게서 그 굴욕을 멸시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공동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한 능력과 함께 묶여 있다고 보았다.
이상에서 보는 고린도후서 13:4에서의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에서 보는 크신 하나님의 권능에 있으신 강하신 분이시나 약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약해지셨다 – 비하 : 낮아지심 – 는 것을 말함에 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했던 복음의 핵심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보는 그리스도께서 약해지심으로 겪으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크신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 부활의 영광에 이르렀던 것과 같이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죽으심과 장례가 뜻하는 약함에 동참하여 부활이 뜻하는 강함 속으로 진입할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약하나 참으로 강하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그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운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후 4:16; 엡 3:16). 그럼으로써 십자가의 도를 멸시하는 자들의 무지와 그에 의한 어리석음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2-2-3. 갈라디아서에서의 십자가 :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참생명으로 살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에는 십자가란 용어를 모두 여섯 차례 언급하고 있어 고린도전후서 다음으로 많다. 그중에 첫 번째인 갈라디아서 2:20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베드로라 불리는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중에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 신자 몇 사람이 찾아오자 그들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인 까닭에 할례 받은 유대인으로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과 자리를 같이하여 식사하며 율법을 범함에 있느냐는 말을 들을 것이 두려워 식사 도중에 슬쩍 자리를 떠 피함으로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유대인 신자들도 베드로를 따라서 위선적인 행동을 하고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그 행동에 휘말려들어 같은 행동을 하는 광경을 보게 된 데 따라 하게 된 언급이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그들이 보인 행동은 그리스도이신 주께 가진 믿음이 진실하지 못하였으니 복음의 진리 위에 서 있지 않은 것이었기에 바울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하였다. 유대인 태생에 의해 유대교의 율법을 준수함에 있어 의롭게 된 것에 있었는가 하면 그렇게 해서 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 것인데도 여전히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고자 한다면 그 자신은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죄인으로 남아 있는 까닭에 그 죄로 인해 망할 것이라면서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죄를 없애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비로소 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그리스도를 믿는 자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한 참생명으로 살 것을 권면하였다. 하여, 바울은 믿음에 의한 의를 입혀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럼으로써 유대인 신자이든 이방인 신자이든 모두 다 죄에서 구원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참생명을 받았으니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된다고 알고서 율법주의자로 사는 유대주의적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을 주의시켰다.
따라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를 언급함은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으나 구원과 의롭다 함을 율법 준수에 두고 율법주의에 있는 유대주의적 신앙관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함에 있은 유대인 신자들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에 있는 신앙에 흔들림에 있음을 잡아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에서였다. 인간을 지배하는 죄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율법은 구원의 길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전통적인 유대 사고를 극복하고 있으며, 또한 자신의 삶을 포함하여 의롭다 함을 얻은 죄인의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에 근거한다는 점을 말하였다. 구원과 의롭다 함의 원리는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에서 이다(참조. 요 3:14-18). 그러한 것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도 베드로를 위시해서 바나바,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갈라디아인들 모두에게 믿음의 근본으로 그리스도께 뿌리를 내린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복음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떠나 그릇된 유대주의적 신앙으로 살게 하는 미혹하는 자의 꾀임에 빠지지 말 것이며(3:1), 십자가의 걸림돌이 되지 말고 제거할 것을(5:11),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임으로(5:24) 사람들의 눈치를 받지 않고 그들 무리 속에 섞여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살고자 하는 것에 마음과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6:12),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함에 있을 것(6:14, 참조. 롬 1:16; 고전 1:31)을 권면하면서, 박해 받은 상처에 의해 지닌 예수의 흔적을 지닌 것(6:17)을 통해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온 자신을 들어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자기 몸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는 자임을 인식하게 해 주었다. 그에 따라 이를 아는 그리스도인인 성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첫 번째 언급한 것에서 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는 고백에 있으며, 그 고백에 있는 믿음으로 산다. 이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9)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게 되는 바인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을 뜻하며,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실존을 얻게 된 데 따른 것이다.
2-2-4. 바울서신의 옥중서신에서의 십자가 :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을 허문 그리스도의 십자가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2: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가 쓴 서신중에서 옥중서신으로 불리는 에베소서에서 한 곳, 빌립보서에서 두 곳, 골로새서에서 세 곳에서 각각 십자가를 언급하였다. 이곳에서 바울은 십자가를 결례를 위한 제물을 의미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그것은 죄가 하나님과 우리를 이간하는 적대적인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 죄가 말소되기까지는 결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써 성결의 재물이 되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셨고 그로 말미암아 죄는 도말되었다. 그리고 바울이 십자가를 언급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모든 의식의 폐함이 십자가를 통해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에서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라고 십자가를 거듭하여 말한 것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에서 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으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노를 풀어드리고 아버지와 우리를 화해시켰다’, 흑은 ‘유대인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구속하여 그들을 한 무리가 되게 하셨다’로 해석된다. 이는 그동안 유대인에게서만 한정이 되고 있었던 하나님에게로 나아감을 없애시고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도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있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후자의 해석을 옳게 여겼다. 이는 현대어성경의 번역에서 보게 된다.
우리는 이제 한 몸이 되었습니다. 서로간의 분노는 사라져 버리고 양쪽이 다 하나님과 화해하였습니다. 불화는 십자가에서 드디어 끝이 난 것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은 유월절 양의 죽음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에 의해 새언약의 체결(마 26:28; 막 14:24; 눅 22:20; 고전 11:25)에 있게 하는 것이기에 종말론적인 속죄소가 된다는 이해를 가졌다. 그에 따라서 세상 끝 날까지 사방의 모든 나라 모든 민족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자들이 십자가의 피를 힘입어 ‘죄 사함’을 얻게 하시는 새언약의 체결에 있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당하심에 있는데 빌립보서에서 그 모습을 종처럼 낮아지심 – 그리스도의 비하 - 에 있는 가장 깊은 단계가 되고 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극치이며 완성이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십자가상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에 있는 낮아지심으로써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것이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되어 죽임을 당함에 있은 피 흘리심을 통해서 이루신 구속을 통해서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만물4)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시고 전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가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이가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셨다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유대인이나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힘으로 있었던 벽 또한 허물어졌으니 이방인도 유대인과 같이 조금도 비난이나 책망을 받을 일이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죄목이 낱낱이 열거된 법조문 – 율법의 계명 – 을 못 박아 없애 버려 영원히 지우셨으므로 죄와 사단으로부터 승리하셨음을 온 세상에 보이신 것이기에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은 비난과 책망 받는 대상이 아니라, 한 성령을 통해 한 믿음으로 한 주님을 섬김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 된 한 지체, 곧 ‘형제’이다(참조. 엡 4:4-6).
2-2-5. 히브리서에서의 십자가 :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것에서가 아닌 그리스도의 죽음 너머의 영원한 세계를 바라봄에 있게 해주시는 십자가
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도 바울 – 히브리서 기자 - 은 그의 서신에서 마지막으로 히브리서5) 두 곳에서 십자가를 언급하였다. 이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인 성도들이 성령을 통해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기쁨에 있었을지라도 그들이 고백하는 믿음에 성숙되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에 있어서 정체되고 초보 단계에 머물지 않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큰 관심은 불신앙에 되돌아가지 않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경주에서 확신과 용기를 상실한 독자들에게 그 경주를 잘 해나가며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10:35, 36; 12:3, 12). 불택자인 경우에는 (1) 비록 복음을 깨닫게 하는 성령의 조명을 반짝 보듯 한 순간 겪기도 하고 (2) 하늘의 은사인 구원을 맛보고 (3)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함에 있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 행함에 참여하기도 하고 (4) 하나님의 말씀이 선함을 알고 (5)내세를 힘을 느끼기도 할지라도, 그 모두는 그야말로 마트에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고객에게 제시하는 갖가지의 맛보기를 두루 먹어보고 맛있어 하기는 하나 구입은 하지 않고 지나침과 같다. 그런 까닭에 칼빈은 그렇게 영적 은혜를 받은 자라도 본래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지 못한 이상엔 타락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라도 영적 은혜에 참예할 수는 있다고 하였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는 진정한 중생의 은혜를 받은 후 아주 타락하는 법은 없으니, 이는 성경이 확언하는 바이다(눅 22:3; 요 6:39, 40; 10:28, 29; 17:2, 6, 11, 12; 롬 8:30; 11:29; 빌 1:6; 살전 5:23; 살후 3:3; 벧전 1:4, 5; 요일 3:9). 그러나 불택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까닭에 자신이 맛 본 것을 지속해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며,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모욕하거나 뭇사람들 앞에서 욕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음에 있다. 그러한 자는 결코 주께 돌아섬이 없으니 새사람 됨의 회개에 있지 않다. 결국 그는 아주 타락한 상태에 있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택함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비록 그리스도의 진리에 자라감에 있는 믿음에 장애를 겪고 이로 인해 진보가 답보 상태에 있기도 하지만 결코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모욕하거나 뭇사람들 앞에서 욕되게 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힘에 있게 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는 진정한 중생의 은혜를 받은 후 아주 타락하는 법은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주 타락한 상태에 두지 않으시고 구원 얻는 회개에 있게 하여 새사람 됨에 있는 생명으로 살게 하신다. 따라서 히브리서에서의 십자가 언급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지 말고 더욱 진보하여 장성함에 있어야 할 것을 권면하는 것에서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 권면을 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인 성도를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봄에 있게 하고자 하였다. 그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올 기쁨을 아시고 그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셨으며,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의 영예로운 자리에 앉아계신 분으로, 장차 자신과 함께 하는 성도 모두를 자신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하여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2-2-6. 요한계시록에서의 십자가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과 같은 곳에 있는 그리스도의 증인인 교회
계 11: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바울서신 외의 성경에서 십자가가 언급되고 있는 곳은 요한계시록이며, 11:8 단 한 곳에서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십자가가 언급되고 있는 것은 교회를 가리키는 ‘두 감람나무’요 ‘두 촛대’인 ‘두 증인’으로 상징되고 있는 성전 안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3년 반’으로 상징되고 있는 마지막 남은 때인 종말적 환난 때에 그들에게 맡겨진 예언하는 증거로 겪게 되는 죽음을 말씀해 주시는 것에서인데,6) 불과 유황으로 멸망을 겪은 소돔 땅과 같은 곳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재앙이 온 땅을 덮은 애굽과 같은 곳에서 주님도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셨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당함에 있음을 알려주어 위로를 주시는 것에서 이다.
2-2-7. 사도들이 전한 십자가의 도 정리
이제까지 ‘십자가’가 언급된 스물 세 곳의 구절에서 어떤 의미에서 십자가가 언급된 것인지를 전후 문맥을 통해 알아보았다. 히브리서를 포함한 바울서신에서 스물 두 곳,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한 곳에서 십자가란 말이 사용된 것에서 보듯 바울의 서신에 집중되어 있는 십자가는 (1) 옛 사람을 지배하던 죄의 세력을 멸함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서, (2)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신 십자가의 복음에 의해 하나님의 권능이 하시는 일을 설명하는 것에서, (3)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한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약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의 강함을 알려주는 것에서, (4)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참 생명으로 살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임을 알게 해 주는 것에서, (5)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을 허문 십자가인 것을 말해 주는 것에서, (6)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것에서가 아닌 그리스도의 죽음 너머의 영원한 세계를 바라봄에 있게 해주시는 십자가인 것을 말해 주는 것에서, (7)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과 같은 곳에 있는 그리스도의 증인인 교회인 것을 각각 말하여 주는 것에서 언급되었다. 이를 종합하면, 바울서신에서의 십자가는 예수란 이름에서 알려주시고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하신 능력을 나타내시고 있는 것이며, 이 능력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차별이 없으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의 통일을 이룸에 있어, 한 믿음으로 함께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세계로 나아감에 있게 하니,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에 같이 달려 있어 그리스도와 함께 살며 또한 죽는 것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 곧 그리스도의 교회가 서 있는 곳이다. 그럼으로써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라고 하셨으며, 또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고 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대위임명령을 성취함에 있는 곳이 십자가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서 십자가는 이러한 것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듣는 것이 어리석게만 여겨졌으며, 이방인들은 미련한 짓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고전 1: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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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롬 6:6; 고전 1:13; 1:17; 1:18; 1:23; 2:2; 2:8; 고후 13:4; 갈 2:20; 3:1; 5:11, 24; 6:12, 14; 엡 2:16; 빌 2:8; 3:18; 골 1:20; 2:14, 2:15; 히 6:6; 12:2; 계 11:8.
2) 로마서 한 곳(6:6), 고린도서 일곱 곳(고전 1:13; 1:17; 1:18; 1:23; 2:2; 2:8; 고후 13:4), 갈라디아서 여섯 곳(2:20; 3:1; 5:11, 24; 6:12, 14), 에베소서 한 곳(2:16), 빌립보서 두 곳(2:8; 3:18), 골로새서 세 곳(1:20; 2:14, 2:15), 히브리서 두 곳(6:6; 12:2).
3) 박윤선은 튀빙켄 학파의 바우어(B. C. Baur)는 바울파와 아볼로파가 합하여 이방인 기독교요, 게바파와 그리스도파는 합하여 유대인 기독교라 하고, 양자의 각기 대표인 바울과 베드로 사이에 서로 투쟁이 있었다고 하나 이 학설은 참되지 않다고 하였다. 그는 이 둘 사이에 실상은 투쟁이 없었다며, 다만 그때에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 바울이나 베드로 같은 지도자를 과히 따르며 각각 파당을 이룬 것이었다면서, “…그리스도에 속하였다”라고 함은 또 하나의 당파를 이루는 의미에서 한 말이니 다른 신자들을 전연 무시하면서 자기들만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또한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파당에 대해 박익수는 고린도교회가 파당을 이룸에 있는 분쟁의 요인을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베푼 특정 사도나 사역자들에게 충성하는 데 있었다고 보았다.
4) 사도 바울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언급함에서 표현한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지칭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속죄의 은혜를 입은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에서 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고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 그에 따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곧, 만물을 만드시고 그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이다(참조. 엡 1:22-23).
5) 히브리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바울이라는 견해와 바울 외의 다른 사람이라는 이견으로 나누어진다. 필자는 히브리서의 저자는 바울이라는 견해에 의해서 히브리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십자가를 다룬다.
6) 11:7에서의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는 “ ‘Kai; o{tan televswsin th;n marturivan aujtw'n’)라는 어구로 ‘호탄(o{tan)+가정법’ 구조이다. 이는 ‘…하는 때에’, ‘…할 때마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는 그 시점이 3년 반이 끝났을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3년 반 시점에 두 증인의 사역이 행해진 것에 있은 “그리고 그들이 증거를 하는 때에” 또는 “그들이 증거를 할 때마다”, “그들이 증거를 마칠 때마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3년 반 동안에 있게 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고난’이 따름에 있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두 증인의 사역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발제자 : 이 천 우(개혁성경신학교)